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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숲에 들다

초록 세상.

Welcome, 초록세상 입구..,







초록을 말하다  
조 용 미


초록이 검은색과 본질적으로 같은 색이라는 걸 알게 된 것이 언제였을까
검은색의 유현함에 사로잡혀 이리저리 검은색 지명을 찾아 떠돌았던 한때 초록은
그저 내게 밝음 쪽으로 기울어진 어스름이거나 환희의 다른 이름일 뿐이었는데

한 그루 나무가 일구어내는 그림자와 빛의 동선과 보름 주기로 달라지는 나뭇잎의 섬세한 음영을 통해
초록에 천착하게 된 것은 검은색의 탐구 뒤에 온, 어쩌면 검은색을 통해 들어간 또 다른 방
그 방에서 초록 물이 들지 않고도 여러 초록을 분별할 수 있었던 건 통증이 조금씩 줄어들었기 때문

초록의 여러 층위를 발견하게 되면서 몸은 느리게 회복되었고 탐구가 게을러지면 다시 아팠다
러시아 인형 마트료시카처럼 꺼내어도 꺼내어도 새로운 다른 초록이 나오는,
결국은 더 갈데없는 미세한 초록과 조우하게 되었을 때의 기쁨이란

초록은 문이 너무 많아 그 사각의 틀 안으로 거듭 들어가기 위해선 때로
눈을 감고 색의 채도나 명도가 아닌 초록의 극세한 소리로 분별해야 한다는 것,
흑이 내게 초록을 보냈던 것이라면 초록은 또 어떤 색으로 들어가는 문을 살며시 열어줄 건지

늦은 사랑의 깨달음 같은, 폭우와 초록과 검은색의 뒤엉킴이 한꺼번에 찾아드는 우기의 이른 아침
몸의 어느 수장고에 보관해두어야 할까
내가 맛보았던 초록의 모든 화학적 침적을, 오랜 시간 통증과 함께 작성했던 초록의 층서표들을



_《기억의 행성》(문지, 2011)





초록 나무 속에 사는 여자
문 정 희



봄비 오는 들판을 가다 보면
저 흙 속에 한 여자가 살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초록 깃털로 눈뜨는 풀들과 새 떼들을
누가 저토록 간절히 키울 수 있을까요
봄비 오는 들판을 가다 보면
나도 저 흙 속의 여자가 키우는
초록 아이가 되고 싶습니다
혹은 풀들처럼 싱싱하게 새 떼처럼 가뿐하게
아이들을 키워내고 싶습니다
하나쯤은 곁에 두고
볼을 부비며 살고 싶지만
봄비 오는 들판을 가다 보면
문득 저 나무에도
한 여자가 살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끝없이 기도를 하는
푸른 손들이 살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_《양비비꽃 머리에 꽂고》(민음사, 2004)






초록 당신
최 창 균


먼지 바람 부는 빈들
빈들빈들 놀리기야 하시겠습니까

침묵의 소리로 걸어오는 당신,
당신은 젖은 눈으로

그 길을 걸어오십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이 세상처럼 오십니다
저 많은 초록을 다 어디다 쓰시려고요

빈들에
모를 심고 계신 아버지,
꼭 당신이 그리 한 줄 압니다
초록으로 번지는 당신입니다


_《백년 자작나무숲에 살자》창비, (2004)





초록빛 입맞춤
이 섬



반갑다는 건 덥석 손을 맞잡아 지는 것
얼굴을 비비고 싶은 것
기쁨이 찰랑찰랑 발목을 적시는 것
깊은 산 속에 드문드문 서 있는 토종 소나무
거기 매달린 단단하고 야무진 솔방울들
진하지 않은 향긋하고 포근한 냄새
계곡을 휘돌아 온 물소리가
어서 오라고 아는 척을 하면,
숫용추 치마바위 지나서
유난히 아담하고 청정한 적송 한 그루
내 가슴에 쏟아 붓는 향긋한
초록빛 입맞춤!





초록
고 명 재


이곳은 강물의 법칙이 흐르는 프랜차이즈
게처럼 걸으며 속을 들여다보는 곳
빵을 고르고 익숙한 어깨가 눈에 박힐 때
내 빵은 이미 가로로 열려 있었다

자칫하면 팔꿈치가 닿을 뻔했지
오븐을 데우고 매캐해져서 실눈을 뜨고
시간을 끌려고 베이컨을 두 장 쌓으며 그런데요
손님, 귀가 너무 빨게요
젖은 빵으로 눈과 얼굴을 가리고 싶은데

비가 올 땐 이렇게 나란히 선 채로
어깨가 젖는 줄도 모르고 걸었지
영화를 볼 때도 서로의 윤곽을 쓸어 담느라
같은 영화를 수십 번 봤지 빛만 닿았지
같은 강물에 발을 두 번 담글 것 같았지

그리고 이젠 야채 코너로 밀려나면서
생생하게 절여진 초록을 들여다보면서
내 생애 이렇게 피클에 골몰했던 적은 없었지
그러다 너도 피망만 보고 있었다는 걸
눈치채면 꼭 그렇다? 경적이 울리고
묵직한 열차가 심장 쪽으로 들이닥칠 때
얼굴을 멈추는 방법을 아냐고 물었다
나는 얽힌 노선을 풀면서
모른 척했다

네가 밥이라도 마음 편히 들 수 있도록
콧노래에 올라탄 척 문을 밀었다
그리 간편하지 않은 음식을 손에 쥔 채로


_《우리가 키스할 때 눈을 감는 건》(문학동네, 2022)




마흔 두 개의 초록
마 종 기


초여름 오전 호남선 열차를 타고
창밖으로 마흔두 개의 초록을 만난다.
둥근 초록, 단단한 초록, 퍼져 있는 초록 사이,
얼굴 작은 초록, 초록 아닌 것 같은 초록,
머리 헹구는 초록과 껴안은 초록이 두루 엉겨
왁자한 햇살의 장터가 축제로 이어지고
젊은 초록은 늙은 초록을 부축하며 나온다.
그리운 내 강산에서 온 힘을 모아 통정하는
햇살 아래 모든 몸이 전혀 부끄럽지 않다.
물 마시고도 다스려지지 않는 목마름까지
초록으로 색을 보인다. 흥청거리는 더위.

열차가 어느 역에서 잠시 머무는 사이
바깥이 궁금한 양파가 흙을 헤치고 나와
갈색 머리를 반 이상 지상에 올려놓고
다디단 초록의 색깔을 취하도록 마시고 있다.
정신나간 양파는 제가 꽃인 줄 아는 모양이지.
이번 주일을 골라 친척이 될 수밖에 없었던
마흔 두 개의 사연이 시끄러운 합창이 된다.
무겁기만 한 내 혼도 잠시 내려놓는다.
한참 부풀어오른 땅이 눈이 부셔 옷을 벗는다.
정읍까지는 몇 정거장이나 더 남은 것일까



_《마흔 두 개의 초록》(문지, 2015)




초록의 딜레마
최 춘 희


초록물감을 뒤집어썼지 벌컥벌컥 초록 생수를 마시고 초록 길을 따라 저토록 사무치는 초록 풍경을 담고 거대한 초록의 심장 부풀어 오르지 타오르는 초록의 불길 끓어오르는 초록의 기포들 눈을 감고 눈부신 초록의 그늘 아래 무작정 누워 봐 어디 먼 데라도 가고 싶은 거니? 폭염은 방호벽도 없이 쳐들어와 막다른 골목에 초록을 내몰고 전신 화상을 입혔지 초록은 햇빛 알레르기가 있어 신경이 예민한 초록은 중증 햇빛 알레르기 환자 대낮에도 칭칭 붕대를 감고 돌아다니지 초록은 햇빛에 쏘이면 살갗이 터져버리는 지뢰밭 초록은 일거수일투족 불안의 감시자 활짝 꽃 핀 망상의 뇌를 열고 현미경으로 들여다보지 종횡무진 질주하는 초록 열차가 여기 있어 피할 데 없는 적도의 끝으로 돌진하는

초록이 아프다고 말했다 독주를 마신 초록이 검게 썩어가는 밤 초록 잎사귀 흐드러지게 늘어뜨리고 소문은 무성하다


_《초록이 아프다고 말했다》(천년의시작, 2018)




초록의 감옥
송 수 권


초록은 두렵다
어린날 녹색 칠판보다도
그런데 자꾸만 저요,저요,저,저요 손 흔들고
사방 천지에서 쳐들어 온다
이 봄은 무엇을 나를 실토하라는 봄이다
물이 너무 맑아 또 하나의 나를 들여다보고
비명을 지르듯이
초록의 움트는 연두빛 눈들을 들여다보는 일은 무섭다
초록에도 감옥이 있고 고문(拷問)이 있다니!
이 감옥 속에 갇혀 그동안 너무 많은 말들을
숨기고 살아왔다.


_ 《초록의 감옥》(지식을만드는지식, 2012)




초록 도마뱀의 밤
김 참



초록 도마뱀이 붙어 있는 나무의자에 어둠이 내리고 있다.칠 벗겨진 건물들 늘어선 거리. 초록 도마뱀이 낙엽처럼 붙어 있는 의자에 앉아 달을 본다. 바람은 불지만 땀 줄줄 흘러내리는 여름 저녁. 무성한 은행나무에 웬 도마뱀들 저토록 따닥따닥 붙어 있나. 여름이면 초록 도마뱀들 떼 지어 출몰하는 변두리 골목 주황빛 가로등 아래로 오토바이가 지나가고 자전거가 지나간다. 반바지에 티셔츠 입은 사람들이
지나가고 뜨거운 바람이 지나간다. 모두 어딘가를
해 가고 있는데 나는 빈 의자에 유령처럼 앉아 무얼 하나. 모두 바쁘게 움직이는데 저 초록 도마뱀들은 왜 은행나무에 꼼짝없이 붙어 있나. 늘어선 에어컨 실외기들 뜨거운 바람 쏟아내는 어두운 거리 빈 의자에 앉아 후덥지근한 바람 맞으며 나는 무얼 하고 있나. 불 꺼진 빌딩 아래로 트럭이 지나가고 검은 구두들 지나가고 오토바이가 달리다 멈추고 빈 택시가 달리다 멈추고 행인들이 큰 소리로 떠들어대고 바람이 불다 멈추고 다시 부는데. 초록 도마뱀들 낙엽처럼 붙어 있는 나무의자에 앉아 뜨거운 바람 맞으며 은행나무에 붙어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초록 도마뱀들을 멍하니 바라보는 이토록 이상한 밤


_《그녀는 내 그림 속에서 그녀의 그림을 그려요》(문학동네, 2021)




늦가을, 초록
한 영 옥


곧장 쏟아지는 햇살 잘 구르는
목장 터 옆 밭고랑마다 웬,
초록이네 늦가을인데 초록이네
봄 냉이 꽃 씨앗 자분자분 떨어져
방석 던져놓은 듯 지천으로 번졌네
푸들한 냉이 방석 깔고 앉아
팔순 넘기신 어머니와 내기하듯
가을 냉이 뽑으며 햇살에 손 씻었네
늦가을 웬 초록을 타고 앉아
목화솜 같은 어머니 숨소리 포근하여
한나절 꿈결을 마냥 저어갔네
눈가장 뜨거워질 때마다
이 꿈결 펼쳐 눈 씻어야지 생각하며
몰래 눈물 감추고서 마냥 저어갔네.


_《슬픔이 오시겠다는 전갈》(문학동네, 2018)




초록 속에 초록 감은
강 영 란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초록 속에 초록 감은
그래 그래 알고 있다는 듯이

사랑이라는 거, 그리움이라는 거
내 속에 숨은 그런 것들도
이미 그 속에 들어 있다는 듯이
감이 익으면
그렇게 붉어진다는 듯이



-《염소가 반 뜯어먹고 내가 반 뜯어먹고》(문학의전당, 2017)





초록 거미에게 인사를
장 석 주



비가 온다, 궂은 날씨 때문에

인생을 망칠 거라는 나쁜 예감이 훅, 하고 스친다.

떡갈나무 숲 속의 비는 녹색,

금광호수의 비는 물빛,

영산홍 꽃밭의 비는 영산홍 꽃빛,

비마다 색깔이 다르다.



슬픔은 중첩되면서 슬픔이다.

초록 거미가 문설주 위에 거미줄을 치고 있다.

초록 거미는 초록 거미를 모르고

초록 거미의 눈높이는 문설주의 높이에 맞춰진다.



긴 밤들과 초록 거미와 나는

한통속이다.

슬픔은 도무지 모르는 슬픔의 백수들,

종일 내리는 빗줄기나 일삼아 내다본다.

도처에 흙냄새가 번진다.



빗방울들이 바다를 데려온다.

잘게 쪼개진 길쭉한 바다,

빗방울들이 바다의 조각들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빗방울들은 깊이를 잃어버린 채 상심한다.

빗방울들은 바다의 치매를 앓는

영상홍들이 데려온 벙어리들이다.



비가 오고 있었다, 춘분과 추분 사이에서

초록 거미에게 상냥한 인사를 하자.

저 초록 거미들이 야만인이 아니라면 누구란 말인가!

새로 온 아침은 즐비한데, 아직 도착하지 않은

야만인들에게 인사를 하자.


_《일요일과 나쁜 날씨]》( 민음사, 2015)






초록손바닥
권 자 미



상추밭에 앉아 풀 뽑는다

호미질한다
이곳에서 땄을 할머니의 할머니 할머니
할머니들의 부루

사그락 사락 흙 갈라지는 소리, 사방에 가득하다

내 할머니 발뒤꿈치에서 부서진 살 부스러기
땀방울 머리카락 눈곱 닿은 손톱조각 그 사소한 것까지 밭 갈다 빠진 소의 긴 속눈썹 하나와 새참 먹다 고수레 던진 찬방덩어리까지 하다못해 소 부리던 영감들 가래침과 잔소리까지도 흙이 되어

평온하다
보드라운 살결이다

상추가 손을 내민다, 덥석
손을 맞부벼 잡아본다

착한 손바닥
초록쪽으로 불끈 힘이 곧추서고
몸으론 흰 젖이 돈다


_《지독한 초록》(애지, 2012)





약속은 초록
이 기 철


약속이야 늘 초록이지요 비둘기 동네에 가고 싶습니다 비둘기 동네에 갈 때는 잿빛 옷을 입겠습니다 약속을 잘 어기는 고양이도 데려가야지요 봄에는 풀꽃 반지 만드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나비가 시샘하기 전에 꽃술 몇 장 따 갈피에 꽂는 것도 잊지 않겠습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강아지풀에 내리는 햇살 소릴 듣는 일 산새 알이 소록소록 잠드는 소릴 듣는 일 병아리가 캬득캬득 새싹 뜯어먹는 소릴 듣는 일

씨앗들을 좀 더 오래 자게 놔두는 일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요의 옷감을 끊어 석류나무에 옷 한 벌 해 입히는 일

아, 이러다가 내 생이 무너지겠네


_《나무, 나의 모국어》(민음사, 2012)





초록색 깃털
연 왕 모



구겨진 셔츠가 왜 그리 아파 보이는가

담배 연기 속에서 숨 쉬는 나의,

신발은 어디에 있는가

나는 왜 여기서 졸고 있는가

졸고 있으면서도 왜 떠돌기만 하는가


주전자의 물이 끓는다

하얗게 뿜어져 나오는 증기,

기관차

내 가슴을 뚫고 지나가

깃털로 뒤덮인 새들의 숲에 이른다

숲에는

초록 깃털을 가진 새들이

땅에 부리를 박은 채 자라나 있고,

몸통에 앉은 작은 새들은

깃털 나무의 깊이를 잰다



피 묻은 부리가

내 가슴을 파고든다



_《비탈의 사과》(문지, 2010)






초록 물고기
박 라 연



몸이 허깨비 같은 날

바다를 치는 다원(茶園)에 가면

초록 물고기  떼지어 운다  울어준다

누군가를 품을 수 있는 절정의 순간

잎잎이 제 목을 따는 40만 평의 보성다원

40만 수(繡)의 초록이 되었는지

바다를 이룬 심장이기에 죽음도 어질게 할 수 있는지

저 8구*의 무덤마저 올올이 잎을 문 듯

눈부신 다원

얼마나 많은 저를, 또 얼마나 아득하게 저를,

놓아주었기에 지느러미에  닿는 둥근 죽음의

감촉 이렇게 좋은가

잎의 바다에 누운 저 무덤들마저 여기서는

생사의 경계가 아니다 태아의 시절까지 무사히

헤엄쳐 첫 잎새 머금고 돌아올 수 있다면

내면의 반이 찻잎으로 가득 차서

절반의 몸마저 폭력을 포기할 즈음

초록 물고기가 내 잎으로 우는지

내 잎들이 초록 물고기로

우는지 모른다

모르게 된다



* 길을 잃은 사람처럼 차밭 속을 헤매다가 마주친 실제의 무덤들.

_《우주 돌아가셨다》(랜덤하우스코리아,2006)





초록들
장 석 원


내 눈 아래 그의 무덤
겨울 나무껍질 같은 이마 위
초록에 손을 내민다
초록 장례 행렬이 진주한다

나는 초록에게 몸을 할양했다
초록 번개가 도사견처럼 으르렁거렸다

초록의 절규 때문에 눈물이 흐른다
나는 상록의 악기가 아닌다

초록의 아가리에 갇힌 그를
사랑할 수 없다
그는 환원될 수 없다

초록들 숨쉰다
초록 박동이
초록을 펌프질하는 대지가
공포스럽다

무덤에 초록 불꽃 내 눈에 초록
나는 초록 식욕 사각거리는 입 안의 초록

저기 초록 절벽이
바람에 흔들리면서 금 가면서
소리 없이 서 있다


_《2006 현장비평가가 뽑은 올해의 좋은 시》




초록이 세상을 덮는다
김 기 택


잠깐 초록을 본 마음이 돌아가지 않는다.
초록에 붙잡힌 마음이
초록에 붙어 바람에 세차게 흔들리는 마음이
종일 떨어지지 않는다
여리고 연하지만 불길처럼 이글이글 휘어지는 초록
땅에 박힌 심지에서 끝없이 솟구치는 초록
나무들이 온몸의 진액을 다 쏟아내는 초록
지금 저 초록 아래에서는
얼마나 많은 잔뿌리들이 발끝에 힘주고 있을까
초록은 수많은 수직선 사이에 있다
수직선들을 조금씩 지우며 번져가고 있다
직선과 사각에 밀려 꺼졌다가는 다시 살아나고 있다
흙이란 흙은 도로와 건물로 모조리 딱딱하게 덮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많은 초록이 갑자기 일어날 줄은 몰랐다
아무렇게나 버려지고 잘리고 갇힌 것들이
자투리땅에서 이렇게 크게 세상을 덮을 줄은 몰랐다
콘크리드 갈라진 틈에서도 솟아나고 있는
저 저돌적인 고요
단단하고 건조한 것들에게 옮겨 붙고 있는
저 촉촉한 불길


_《소》 (문지, 2005)




초록 시인의 노래
최 동 호


푸른 산 속 깊고 하늘빛 첩첩해도 가로막은 산과 마주하고
커다란 바윗가에 홀로 앉아 있던 그 사람
푸른 하늘 그리운 눈동자 초록별 시인이 아니었을까.

산 건너 저쪽 바라보기만 했지 아무런 말이 없었네. 나 또한
가까이 다가서지 못하고 멀리서 보았던 그 사람
푸른 하늘 그리고 눈동자 초록별 시인이 아니었을까.

첩첩한 산 그림자 어린 검푸른 눈길 퍼져나가 저 아래
도시엔 부챗살 펼치듯 보석빛 반짝이게 하던 그 사람
푸른 하늘 그리운 눈동자 초록별 시인이 아니었을까.

아마도 그 사람 큰 바위 얼굴의 그윽한 눈동자 하늘을 비추어
초록별 노래하던 우리들의 가까운 친구였던 그 사람
푸른 하늘 그리운 눈동자 초록별 시인이 아니었을까.

지금은 가까이 가 말해 볼 수는 없지만, 초록별 떠난 자리에서
지구 저편의 산들발마도 함께 가려 했던 그 사람
푸른 하늘 그리운 눈동자 초록별 시인이 아니었을까.


_《문학사상》( 2001. 1)




초록 머리
강 신 애


맞은편 소녀의 기인 머리에서
호루루-
끼쳐오는 솔나무 향
지하철 안이 문득 연둣빛으로 싱싱해진다

초록색 감도는 어떤 배후 거느리고
다소곳 머리숙인 채
초록 물든 생각에 빠져드는 그 애

어깨까지 찰랑이는
빛의 타래 드리운 연한 가르마 따라
풋보리 이랑이 언뜻언뜻,
갈대풀 휘인 호수에 빰을 적신
햇덩이도 만난다

나도 머리에 물들일까

거리에 쇠스랑 물결무늬 그리는 파랑이나
바람에 꽃가루 묻히는 암술의 분홍으로

소녀애가 일어나 몇 걸음 옮기자
여기저기
초록 향기가 수런거리며 인다


_《서랍이 있는 두 겹의 방》 (창비, 2002)





초록 엽서
이 양 우

벌써 오셨답니까,
기다림이 짙은 동구밖에
앙상한 손끝으로 눈꼽을 떼려던
계절의 촉촉한 새.
철길 맞은 켠 집 지나는 기적소리
그 정든 간이역두 초록빛 등성이로

냇갈 개오지 끝자락 잡고
펄럭이는 봄날 팔짱도 여미고
순(荀) 자란 참 두릅 향내음
앳띤 봄날에

언덕 바지 연지 찍은 꽃 환타지
산색(山色) 번지는 꿈물살에
지웠던 이름들 되살아나는
앳띤 봄날이 다가왔답니까,




초록 기쁨-봄 숲에서
정 현 종


해는 출렁거리는 빛으로
내려오며

제 빛에 겨워 흘러넘친다
모든 초록, 모든 꽃들의
왕관이 되어
자기의 왕관인 초록과 꽃들에게
웃는다, 비유의 아버지답게
초록의 샘답게
하늘의 푸른 넓이를 다해 웃는다
하늘 전체가 그냥
기쁨이며 神殿(신전)이다

해여, 푸른 하늘이여,
그 빛에, 그 공기에
취해 찰랑대는 자기의 즙에 겨운,
공중에 뜬 물인
나무가지들의 초록 기쁨이여

흙은 그리고 깊은 데서
큰 향기로운 눈동자를 굴리며
넌즈시 주고 받으며
싱글거린다

오 이 향기
싱글거리는 흙의 향기
내 코에 댄 깔때기와도 같은
하늘의, 향기
나무들의 향기!




초록을 노래하라
이 기 철


초록의 이름을 부르면 우리의 하루가 초록이 된다
친구여, 오늘만은 홍차(紅茶)를 마시고
오동나무 잎새로는 다 가릴 수 없는
저 눈부신 햇볕의 거리에 서라

얼마를 더 기다려야 저 돌들은 수정(水晶)이 되나
흰 새 날아간 곳에 손수건처럼 펄럭이는 하늘,
끓는 노래여, 누가 네 앞에서 침묵을 계율로 삼을 것 인가

수돗물 쏟아지는 부엌, 도마 위의 무, 뿌리 잘린 상추
그 위에 쏟아지는 형광등 불빛
우리의 저녁은 늘 낯익은 모습으로 다가온다
쟁반 부딪는 소리, 치마 끄는 소리, 거실(居室)마다 귀에 익은
녹차(綠茶) 마시는 소리

그 연한 과육에 비하면 너무 짧았던 청과(靑果)의 여름 햇빛





초록바람의 전언
고 재 종


뒷동산 청솔잎을 빗질해주던 바람이
무어라 무어라 하는 솔 나무의 속삭임을 듣고
푸른 햇살 요동치는 강변으로 달려갔다 하자.
달려가선, 거기 미루나무에게 전하니
알았다 알았다는 듯 나무는 잎새를 흔들어
강물 위에 짤랑짤랑 구슬알을 쏟아냈다 하자.
그 의중 알아챈 바람이 이젠 그 누구보단
앞들 보리밭에서 물결치듯 김을 매다
이마의 구슬땀 씻어올리는 여인에게 전하니,
여인이야 이윽고 아픈 허리를 곧게 펴곤
눈앞 가득 일어서는 마을의 정자나무를 향해
고개를 끄덕끄덕, 무언가 일별을 보냈다 하자.

아무려면 어떤가, 산과 강과 들과 마을이
한 초록으로 짙어가는 오월도 청청한 날에,
소쩍새는 또 바람결에 제 한 목청 다 싣는 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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