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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그 쓸쓸한 영혼

삶의 찰나에 대한 ‘크로키’ - 장 석주 시.

내 삶의 조각들..,








*
땅거미 내리니 컹컹대며 보채는 개들에게
먼저 사료 주고 들어와
푸른 형광등 아래서
서운산에서 뜯은 취나물과 막된장 놓고
저녁밥을 먹는다.

오월이다, 밤마다
풋감들 후두두 떨어지고
들고양이는 호랑이 울음소리를
흉내내며 운다.

저 홀로
시름 깊은 사람 있겠다

*
풀먹인 모시옷 입고
둔덕 죽은 나뭇가지에 와서 우는
뻐꾹새 울음에나 귀를 내놓고
소일한다.

밤에는 덤불 위로 개똥벌레가 떠다닌다.
남은 세월은
한량으로 지내도 상관없겠다는
생각을
붉은 모란촉처럼 씩씩하게 내밀어 보는 것이다.

*
사는 동안 슬픈 일만 많았다.
무서리 내리고
된서리 내렸다.
고사리 새 순 나오려면 아직 멀었다.

살모사 놀다가는 날도 있다고,
물안개 자욱하고
나무들에 새 잎 돋는 날도 있다고,

초승달 떴다.

*
종일 뱁새가 노래한다.

나를 용도폐기하고 버린 게
세상이었는지
변심한 애인이었는지를
혼자 따져본다.
어느 쪽이든 중요하지 않다.

뱁새의 연주회에 가기 위하여
콧수염을 기르고
가끔은 나비넥타이를 맨다.

나는 뱁새의 섭생이나
오솔길의 발목에 대해서만 염려한다.

*
오리나무에 와서 우는 것은
뱁새다
숲이 낸 곡비(哭婢)다.
당신의 이마에서 숲냄새 나고
당신의 어깨 위에는 산 그림자가 앉는다.

누가 당신이 가는 귀 먹었다고
일러준다.

*
살다 더욱 힘들어지면
저기, 내설악에라도 들어가자.
고랭지 배추로 담은 김치 항아리는 땅에 묻은 뒤
한 겨울 쌓인 눈 헤치고
살얼음 배긴 김치를 꺼내다 먹으리라.

고산기후에 잘 적응하는 아들 딸
여럿 낳아
애국하게 하리라.

*
흰색 보라색 도라지꽃이 피면
엉덩이에 몽고반점 가진 새끼나 기르며
한 삼백년쯤 살고 싶었다.

도라지꽃 백 번 피었다 지면
비 갠 뒤 무지개 너머로 가리.

술숲너머로 달뜨는 이 세상에
누구 아들로 다시 와
숨결 받을까, ......

*
밤새껏 교접하고도 할딱이는
계집의 붉게 타는 맨드라미 소음순.
발볌발볌 물안개 오는 어스름 새벽녘에 나와
샛노란 오줌을 누며,
아, 짐승이 따로 없구나, 탄식한다.

한 걸음 떨어진 데
작약꽃 붉은보지 쩍, 벌어진 걸 보고,
에그머니나!

*
개간지에 돋은 여뀌들아,
토라지는 애인들아

나, 찾지 말아라.

희미한 애인 눈썹
그려주고 싶다고,
슬쩍 세상에 얼굴 디미는 일은 없을 터.

차마 그짓은 못하겠다.

*
탕약 까맣게 졸은 뒤
탕기마저 삼킬 듯
불길 기세등등하다.

봄비 다녀가신 뒤
붉은 모란 촉
두어 개 고개 내밀다.

*
살강 위 뚝배기 작살내는 듯
저녁 이내 속에서
개구리떼가 왁작왁작 운다.
  
붉은 영산홍 다 진다고!

*
정에 맞아 깨져도 모나게 살겠으니
간섭하지 말라고
사납게 푸른 눈썹 세우던 소년은
어느덧 장년이다.

아버지 가고
어머니는 늙었다.

좋은 시절 다 갔다!

*
술 깬 장남 속풀이 하라고
머위국 한솥 끓이고
흰고무신 샘물로 닦아 별에 내놓는
늙은 어머니들 살아 있으니,

봄마다 오리나무 우듬지에
잎눈이 터도
크게 외롭지는 않겠다.

*
청계산 기슭 서울구치소 잡범방 저녁 끼니 때,
염분 가라앚은 식은 고깃국에서 건진
비계 잘못 삼킨 듯
목구멍이 간지럽다.

그건 웃고 있는 당신 탓
한 뿌리에 얽혀 있으면서 웃고 있는
당신 탓이다.
불은 얼음 속에 가만히 엎드려 있고
얼음은 불에 기대어 있다.

*
평택 역전 자정 너머,
바람 차다.
막차 손님 태우려고
줄 선 택시들,

택시 안에 당신을 피안으로 데려갈
부처가 앉아 있다

*
텃밭 구멍에선
뱀이 나오고,
장끼들은 암컷 부르며
숲에서 운다.

한 살 더 먹고
불혹(不惑)을 벗어난다.

다림질 잘하는 여자 하나를
가슴에 품고
잘 늙어갈 것이다.

*
물 아래에서
얼마나 물갈퀴를 휘젓는지
물오리는 제 뒤로
포말 하얗게 일군다.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것,
장엄하다.

고모도 저랬을
것이다.

*
아, 쉰이다!

참을성 많은 영장류라도
지루해 할만한
세월이다.

*
점심 때 하지감자 삶아
천일염 찍어
두어 개 먹다.

오후엔 늦게도착한
소포 하나를 받다

*
한번으로 열반에 들지 못하는 것은
고양이와
반신반의半信半疑하는 인간과
방관자들.

*
외할머니가 금생에서 누린
마지막 풍경은
벽에 금빛 똥칠하며 짓뭉갠
치매의 풍경이다.

끔찍하다, 나를 욕되게 만드는 건
타자가 아니라
나 자신이다.

*
오월의 밤을 소란스럽게 하는 것은
무논 개구리떼
밤낚시 온 취객들.

네발 달린 고요 거사居士들.
밤새도록 짖는다.

*
지금도 해질녘이면
어디론가 숨고 싶어져.

시골 다방 같은데,
지평선이 보이는 딸기밭 같은 데,

그런 덴 없겠지?
이젠 없겠지?

*
좋은 시절은 다 갔다.

좋은 시절은

지나간 시절이었으니까!

*
만추 양광 사라지자
눈 시리게 푸른 대기 속,
맞은편 산을 바라본다.

일년생 초본식물들
닳아서 해진 무릎으로
날 어두워진다.

곧 골짜기에 진눈깨비
내리치고
앞강 물고기들
찬물 돌 밑에 숨으리라.

*
새끼들이 힘차게 머리 박으며
젖을 파는데,
어미개는 그러거나 말거나
눈 감은 채 좌선에 빠져 있다.

서쪽으로 해가 지고 있었다.

*
돌이끼 짙은 백년 늙은 와불臥佛
앞에 서니
누군가를 사랑한 후회보다
누군가를 사랑하지 못한 후회가
더 깊다.

잘못 살았다!

*
농협 묵은 빚 못 갚고
해를 넘긴다.

진눈깨비 내리는데,
안성 시내에  나가
로또 복권 두 장 사 갖고 들어오다.

*
봉숭아빛 물든 봉창을
어둠이 우왁스럽게 끌어안는다.
능소화가 옷 벗고
무릎 사이 샅을 연다.

밤 도와 씹질 하는 혼전 남녀들
꿈속도 혼곤하겠다.

*
종일 놀았는데,
해질녘 숯불에 익힌 고깃점에
소주 한 잔,
삼킬 생각하니
군침이 돈다.

엣끼, 날도둑놈아!



- 장 석주 시 ‘가협시편‘
* 붉디 붉은 호랑이/애지




한겨울 대파가 땅에 뿌리를 묻고 자란다.
대파의 슬픔을 이해할 수가 없으니,
오늘 아침 가슴팍에 주홍 무늬가 있는 새는
공중을 날고, 대파 앞에 서서 고해성사를
하는 사람이 있다. 내 얘기를 들어봐요.
일생 동안 밥만 축냈어요. 아무도 내게 길을
가르쳐주지 않았으니까요, 사람을 죽인 적은 없어요.
아시겠어요? 진흙길은 피의 홍수로
넘쳐나는데, 나는 그저 스쳐지나왔어요.
분류와 명명은 활발했지만 고요한 시대는
쉽게 오지 않아요. 대파밭에는 대파가 새파랗고
바보가 죽고 새로운 바보가 와서 시끄럽다.
서리 내린 겨울 아침 대파밭에서 대파가
새파랗게 자라는 일은 기적이다.
저 새파란 대파 앞에서 우는 자가
성자가 아니라면 도대체 무어란 말인가?


- 장 석주 시 ‘겨울 대파밭에서‘
* 헤어진 사람의 품에 얼굴을 묻고 울었다, 문학동네, 2019




가나 못 가나.
해남은
있나 없나.
가면 있고 못 가면 없다.
이속에 너는 없고
저곳엔 내가 산다.
사막에는 은여우
은여우가 사는 사막,
마음에 꼬리를 달고 막 달아나는
이 놀라운 사태를
나는 견디나 못 견디나.
해남은 먼 곳,
아침에 이빨을 닦고
어제 읽은 주역과 용비어천가 해제본,
질 들뢰즈를 다시 읽고
오후에는 이마트에서 시금치와 저지방 우유를 사고
지성치과에서 치석을 제거했는데
정원장은 돈을 받지 않았다.
그와는 나중에 밥 한 끼를 약속하고 돌아온다.
황사가 오고
황사가 오지 않는다.
오지 않는 것들은
해남에 있나.
저녁 여덟시에 온 것은 고라니,
고라니는 골짜기가 되어 뛰고
골짜기는 다시 어둠이 되어 뛰고
새벽 세시에는 잠이 깨고
새벽 세시에는 새벽 세시를 가리키는 시계가 되어
세 점을 친다.
노모들이 침상에서 잠꼬대를 하는 시각,
태아처럼 몸을 동글게 만 노모는
무릉도원 속으로 걸어간다.
해남은 먼데,
나는 가나 못 가나.
알 수 없는 내일들이
내 앞에 엎질러져 있다.
해남에는 무궁화 피고
해남에는 무화과가 익고
가나 못 가나
해남에는 비 내리고
비는 비가 되어 내리나 못 내리나
해남에는 눈 내리고
눈은 눈이 되어 내리나 못 내리나.
해남에는 언제 가나.
해남에는
가나 못 가나.


- 장 석주 시 ‘달의 사막 - 주역시편 199‘
* 오랫동안, 문예중앙, 2012






불행을 질투할 권리를 네게 준 적 없으니
  불행의 터럭 하나 건드리지 마라!


  불행 앞에서 비굴하지 말 것. 허리를 곧추세울 것.
헤프게 울지 말 것. 울음으로 타인의 연민을 구하지
말 것. 꼭 울어야만 한다면 흩날리는 진눈깨비 앞에
서 울 것. 외양간이나 마른 우물로 휘몰려가는 진눈
깨비를 바라보며 울 것. 비겁하게 피하지 말 것. 저녁
마다 술집을 순례하지 말 것. 서양 모자를 쓰지 말 것.
콧수염을 기르지 말 것. 딱딱한 씨앗이나 마른 과일
을 천천히 씹을 것. 다만 쐐기풀을 견디듯 외로움을
혼자 견딜 것.

  쓸쓸히 걷는 습관을 가진 자들은 안다.
  불행은 장엄 열반이다.
  너도 우니? 울어라, 울음이
  견딤의 한 형식인 것을,
  달의 뒤편에서 명자나무가 자란다는 것을
  잊지 마라.


- 장 석주 시 ‘명자나무‘
   * 절벽, 세계사, 2007




모란꽃 수명은 짧고
별들은 궁륭에서 벌 떼처럼 붕붕거린다.
방울새는 땅에서 알을 품고
뱀장어 치어들은 봄강을 거슬러 오른다.
늙은 어머니가 새벽에 깨서
빗자루로 마당을 쓰는 동안
밀실에서는 육해공군의 머릿수와
野砲와 장거리 미사일을 대폭 늘리려고
머리를 맞댄 채 긴 회의를 한다.
그들은 결심만 하면
서류마다 서명을 한다.
적란운과 별똥별과 오솔길은 모르고
단것과 뇌물과 회의에
빠진 사람들은
계속 늘고 있다.

지구는 큰일 났다!


- 장 석주 시 ‘절벽‘
*절벽, 세계사, 2007




1
시월이면 돌아가리 그리운 나라
젊은 날의 첫 아내가 사는 고향
지금은 모르는 언덕들이 생기고
말없이 해떨어지면 묘비 비스듬히 기울어
계곡의 가재들도 물그늘로 흉한 몸 숨기는 곳
이미 십년 전부터 임신 중인 나의 아내
만삭이 되었어도 그 자태는 요염하게 아름다우리
시월이면 돌아가리 그리운 나라
연기가 토해내는 굴뚝
속에서 꾸역꾸역 나타나는 굴뚝 아래
검은 공기 속에서 낙과처럼 추락하는
흰새들의 어두운 하늘 애꾸눈 개들이
희디흰 대낮의 거리에서 수은을 토한다

- 수은을 먹고 흘리는 수은의 눈물,
  눈물방울
  절벽 같은 천둥번개 같은


2
시월이면 돌아가리 그리운 나라
달의 엉덩이가 구릉에 걸리고
너도밤나무 숲속 위의 하늘에도 그리운
물고기들이 날아다니는 것이 자주 발견된다
아내의 지느러미는 여전히 매끄럽고 그동안
낳은 딸들은 낙엽 밑에 잠들어 있으리 내 아내는
여전히 낮엔 박쥐들을 재우고
밤엔 붉고 검은 땅에 엎드려 알을 낳으리
아내의 삶에 약간의 이끼가 낀 것이
변화의 전부이다 내 앞가슴의
거추장스러운 의문의 단추들이 툭툭 떨어진다


3
나는 밤에 도착한다 지난
여름의 장마로 끊긴 다리의 보수공사가 한창이다
눈치 빠른 새앙쥐들은 낯선 침입자를
힐끗거리고 무심한 아내는 자전거만 타고 있다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그녀의 흰 종아리가
자전거의 페달을 힘차게 밟을 때마다
스커트자락 밑으로 아름답게 드러나곤 한다 아아
너무 늦게 돌아왔구나 내 경솔함 때문에
빠르게 날이 어두워진다 그동안 아내의
입덧은 얼마나 심하였던가 유실수의
성한 열매들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내가
최후의 시장에서 인신매매업으로 치부를 할 때
아내는 날개 달린 다람쥐처럼 날아다녔으리라
너도밤나무 과의 북가시나무 숲속 위로 열린 하늘엔
죽은 사람의 장례가 나가고 바람을 방목하는
언덕의 숲속에서 누가 지느러미도 달리지 않은
사람의 아들을 낳는다 그림처럼 누운 아내의 입술에
내 입술이 닿기도 전 아내는 힘없이 부서져내린다
그리움은 그렇게 컸구나
머릿속의 우글거리는 딱정벌레들을 한 마리씩 풀어 주어
내 머릿속은 빈 병실 같다 피안교를 건너서
내일이 오는 것은 어쩔 수 없더라도
다시 최후의 시장으로 돌아가지 않으리라


- 장 석주 시 ‘그리운 나라‘
  * 그리운 나라, 평민사, 1986




얼어붙은 연못을 걷는다
이쯤은 수련이 있었다
이 아래는 메기가 숨던 까막돌이 있었다
어떤 데는 쩍쩍 짜개지는 소리
사랑이 깊어가듯

창포가 허리를 다 꺾었다
여름내 이 돌에 앉아 비춰보던 내
어깨 무릎 팔, 모두 창포와 같이 얼었다
그도 이 앞에서 뭔가를 비춰보던데 흔적 없다
열나흘 달이 다니러 와도 냉랭히
모두 말이 없다

연못에 꿍꿍 발 굴러가며
어찌하면 나에게도 이렇게
누군가 들어와 서성이려나
"이쯤은 내가 있던 자리"
"이쯤은 그 별이 오던 자리"
하며



- 장 석주 시 ‘겨울 연못‘
  *  [뺨에 서쪽을 빛내다], 창비, 2010.




첫사랑에게 버림받은 뒤 오래 실의에 젖어 있었지요 몸 안에
서 커가는 달을 관찰하며 세월을 보냈지요 달은 만삭이 되었다
가 줄어들고 다시 야위어갔어요 오래 달을 보고 있노라면 눈에
서는 눈물 대신에 달빛이 흘러나왔지요 내가 모포를 뒤집어쓰고
누워 있는 동안 애인들은 창 아래로 깔깔거리며 지나갔지요 나
는 애인들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감히 변심한 그녀들을 향한 복
수를 꿈꾸었지요 나는 사자의 명부冥府에서 천천히 걸어 나와 햇
빛을 유일한 나의 합법정부로 삼았어요

더 이상 몸속에서 커졌다가 줄어들기를 반복하는
달은 보지 않기로 했지요

햇빛으로 지은 검은 외투를 걸치고 나서면 사람들은 나쁜 풍
문의 주인공을 향해 손가락질하지요 그러나 나는 당당한 이교도
그런 것 따위는 조금도 두렵지 않아요

여름은 내 인생의 성시盛時
혈관에 스며드는 햇빛의 향기에 매혹되어
나는 더욱더 젊은 혁명가처럼 용감해지리
거짓과 위선으로 가득 찬 사교邪敎 같은 정부들을 전복하기 위해
날마다 햇빛에 투신하리

얼마나 많은 날들이 흘렀을까
지난 해의 남은 열매들과 죽은 곤충들의 날개들과 낙엽들

절인 생선을 훔쳐 바치고
더 이상 바칠 것이 없을 때
검은 외투 밑 갈비뼈 아래서 펄럭거리는 붉은 심장을 꺼내리

저 햇빛을 위해!


- 장 석주 시 ‘햇빛만이 내 유일한 정부‘
* [스무 살은 처음입니다], 지혜, 2018.




지느러미도 깃털도 없는 나를 위해
노모가 점심 식사를 내온다.
직립인의 고요한 식욕에 부응하는 이것,
뼈도 근육도 없는 이것,
비늘을 가졌거나 가시를 가진 것도 아닌 이것,
두드리고 때려 단련시켰건만
물과 만나 허수히 무너지는 이것,
여럿이되 하나고
단순하되 극적인 이것,

한 끼니의 편의,
미끈거리는 촉감의 허영심,
오랜 망명과 혁명의 동지들,
가느다란 양생(養生)의 꿈들!


- 장 석주 시 ‘ 국수’
[일요일의 나쁜 날씨], 민음사, 2015.




몇몇은 항상 늦는 법,
우리가 너무 늦게 도착한 건 아닐까?

식탁은 당신의 얼굴,
다리가 네 개인 사자,

식탁이 갈기를 날리며 포효할 때
당신은 식탁에서 운다.

식탁은 별들이 가득 뜬 밤하늘,
우리는 식탁에서 꽃과 물고기를 나누고
의자와 등불에 대해 이야기한다.

빵 부스러기가 떨어져 있는 저녁 식탁을
사막이라고 할 수가 있나?

식탁은 당신을 버린 엄마,
식탁은 슬픔의 식민지,

전갈이 우는 가을밤 사막을
저녁 식탁이라고 부를 수는 없나?

밤들이 깊은 한숨을 쉬며
외로움은 식탁에서 종말을 맞는다.

고용은 끝났다. 많은 이가 돌아간다.
당신의 인생이 빵 부스러기가 떨어져 있는
저녁 식탁에서 끝날 때,


- 장 석주 시 ‘빵 부스러기 떨어진 저녁 식탁‘
* [헤어진 사람의 품에 얼굴을 묻고 울었다], 문학동네, 2019.




손금이란 참 이상한 선물이야.

우리는 국수를 먹고 그다음에 커피를 마셨지. 거짓말이 생의 우연에 일관성을 만든다. 월요일은 다른 요일보다 더 빨리 왔다. 좋은 예감은 늘 빗나간다. 늦은 자는 늦고 실패한 자는 또 실패한다. 악은 너무 평범해. 그건 당신 상상력이 진부하거나 밋밋한 탓이야. 우리의 교양을 만드는 건 읽지 않은 책들이었지. 고향을 떠날 때 고향이 발명되듯이. 누군가는 마루 거실을 좋아했다. 나는 정의를 부르짖는 여자를 믿지 않았지. 방구석에서 칩거하는 자가 가장 먼 나라를 동경하는 법이니까. 온몸을 부르르 떨며 사납게  짖는 개는 자기 안의 두려움 때문일 거야.

늘 알 수 없는 패를 쥔 당신.
자, 손을 내밀어봐,
내가 패를 봐줄게.


- 장 석주 시 ‘손금 ‘
[헤어진 사람의 품에 얼굴을 묻고 울었다], 문학동네, 2019.




동지 지나자 우리는 가까워진다
민달팽이의 모듬살이에 대해 얘기를
나눌 때거나 낙엽의 현기증과 추락하는 것의
기쁨에 대해서는 모른 채 당신은
당신에게 최선을 다했는가, 라고 물을 때.
우리 낯빛은 어두워진다.
상심한 저녁이 문 앞에 오고

동지가 지나면 우리는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냉담해진다. 당신의 과오는
내 나쁜 습관의 결과다. 마른하늘에서
우레가 울 때 소년이 마루에서 방으로 돌아간다.
까르륵 웃는 어린 고모들이 돌아가고,
잘 웃는 소녀들이 온다.
당신은 선산과 소나무 세 그루를 상속받겠지.
달의 변화를 살피는 일에 흥미를 잃는다.
화투패로 운세를 보는 일도 그만이다.
물에서 묵은 슬픔의 맛이 났다.


- 장 석주 시 ‘내 오른 쪽은 너의 왼쪽 -진(震)‘




떡집에서 절편을 사 갖고 돌아와
이 하얀 것을 욕심 없이 베어 물 때
울컥 올라오는 슬픔의 시작이 어디인지
우리는 가늠조차 할 수 없다.
절편은 탱탱하고 아득하며 무미한 것,
절편에는 약육강식의 피비린내가 없고
물의 느림과 식물의 고요한 집중뿐!
절편에는 주검의 곡절이 배제되고
곡식 낟알을 키운 흙의 비애만 있을 뿐!
절편의 혈통은 달의 사촌,
절편을 먹는 민족은 평화주의자일 것이다.
절편을 먹으며 농본주의의 대의를 곱씹고
우리는 비바람 소리에 귀기울인다.
모란과 작약꽃이 피는 봄날을 견디며
절편이 없는 떡집은 떡집이 아니라고 확신한다.
절편과 함께 중국 여행에서 돌아오는 길,
우리는 절편을 사이좋게 나누며
거대한 들의 평평함과 트임을 삼킨다.
가을 저녁과 초록별의 소슬함을 들이켜며
우리는 작별 인사를 하루 더 늦추고
좋았던 옛 미래로 돌아가자 말할 것이다.

- 장 석주 시 ‘절편 예찬‘




여름이 끝나자 빵이 부패한다.

부패한 빵의 왕들 얼굴이 빨개질 때
부패한 빵을 먹고 미친 사람들이 웃어댄다.

빵이 부패하다니, 여긴 지옥이야!

파란 작업복을 입고 온 사람들이
부패한 빵을 트럭에 싣고 어디론가 간다.

이 많은 빵은 어디로 가나요?

부패한 빵이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빵의 행방을 알았다면
우리는 지금까지 웃고 있을지도 모른다.


- 장 석주 시 ‘부패한 빵‘




옛날이 간 세월이 아니라 오는 세월이면
아버지는 돌아올 사람, 지금 돌아오는 사람,
가는 것은 세월이고,
지금 문고리를 잡고 있는 나다.

아버지가 문밖에서 헛기침을 한다.
문 안 것들은 다 슬픔으로 뚱뚱해진다.
금생은 문을 여닫는 일로 바쁘다.
이쪽과 저쪽으로 갈라지는 금생,
이쪽은 저쪽을 망각하고 저쪽은 이쪽을 기억한다.
아버지와 나는 옛날 사람,
옛날은 마른 시간,

조금과 보름 사이로
바닷물이 육지를 밀며 들어오는 것은
우리가 나이를 먹는 탓이다.
모란꽃을 모른 채 모란꽃밭 위로 나는 나비 몇 점들,
옛날은 자꾸 돌아와서
또 옛날 속에서 저문다.

아버지는 젊은 옛날 사람,
아버지, 아버지, 나는 자꾸 늙어요,
저 거울로, 저 무릉으로 밀려 들어가요,
아버지는 무지개같이 젊어서 돌아오고
하늘의 거울로 떠서 늙어가는 우리를
낱낱이 비춰내는 것이다.


- 장 석주 시 ‘아버지는 옛날 사람‘
[굽은 길들이 반짝이며 흘러갔다], 나무옆의자, 2016.




주여, 가을이 왔습니다.
연인들은 헤어지게 하시고,
슬퍼하는 자들에겐 더 큰 슬픔을 얹어주시고,
부자들에게선 귀한 걸 빼앗아
재물이 하찮은 것임을 알게 하소서.
학자들에게는 치매나 뇌경색을 내려서
평생을 닳도록 써먹은 뇌를 쉬게 하시고,
운동선수들의 뼈는 분리해서
혹사당한 근육에 긴 휴식을 내리소서.
스님과 사제들은
조금만 더 냉정하게 하소서.
전쟁을 하거나 계획 중인 자들은
더 호전적이 되게 하소서.
폐허만이 평화의 가치를 알게 하니
더 많은 분쟁과 유혈혁명이 일어나게 하소서.
이 참담한 지구에서 뻔뻔스럽게 시를 써온 자들은
상상력을 탕진하게 해서
더는 아무것도 쓰지 못하게 하소서.
휴지로도 쓰지 못하는 시집을 내느라
더는 나무를 베는 일이 없게 하소서.
다만 사람들이 시들고 마르고 바스러지며
이루어지는 멸망과 죽음들이
왜 이 가을의 축복이고 아름다움인지를,
부디 깨닫게 하소서.


- 장 석주 시 ‘ 가을의 시‘




내 몸에 죽음의 입구와 출구가 함께 있다
최근 내 몸이 벼랑이다
어머니가 몸 속에 넣어주었던 노래들
이곳저곳 떠돌며 다 퍼내 써버리고
더 나올 노래가 없다
함부로 탕진해버린 그 노래들
혀는 낙엽처럼 말라버리고 말았으니
나는 내 유일한 악기를 잃어버린 것이다

시장 거리를 걷다가
수조 속에 몸을 반만 담그고 떠 있는 새끼 거북이를
날품팔이 노동자처럼 서서 바라본다
한 마리에 기백 원씩 팔려나갈
저 미천한 거북이에게 얇은 눈꺼풀이 있고
눈꺼풀 아래엔 작은 눈도 있다

그 눈이 우주를 보듯 나를 본다
그 눈이
빈 몸 속에 장롱처럼 달려 있는
몇 개의 절망마저 꿰뚫어본다

나는 아무것도 고의적으로 은폐한 적이 없다
그 거북이의 눈길 속에
나를 통째로 방임하고 돌아선다

죽음은
이 지상의 삶에 부치는 마지막 유일한 추신이다


- 장 석주 시 ‘음유시인 1 - 죽음은 삶의 마지막 추신이다‘




튀긴 두부 두 모를 기쁨으로 삼던 추분이나
북어 한 쾌를 끓이던 상강(霜降)의 때,
아니면 구운 고등어 한 손에 찬밥을 먹던
중양절(重陽節) 늦은 저녁이었겠지.

당신과 나는 문 앞에서
먼 곳을 돌아온 끝을 바라본다.
물이 흐르는데
물은 제 흐름을 미처 알지 못하고,
정말 가망이 없었을까?

작별의 날이 세 번씩이나
왔다 가고,
마음은 철없는 손님으로 와서
가난을 굶기니 호시절이다, 오늘은
어제의 내일이고
또 다시 내일의 어제일 것이니,

오늘은 당신과 나에게도
큰 찰나!

잿빛 달 표면 같은 마음으로
기쁨이 날개를 활짝,


- 장 석주 시 ‘좋은 시절‘




얼굴이 낡았어요.
피도 살도 다 말랐어요.

아무 야망도 없이
흐느끼는 사람아

쳐라, 더 세게
쳐라,
그대 생각하며 낮게 울리라.


- 장 석주 시 ‘ 북’




당신의 등에 얼굴을 묻고 울었다.
당신은 먼 곳이었으니까, 설사
우리가 연인이나 자매 사이였다 해도 괜찮다.
실컷 울고 났더니 얼굴이 사라졌다.
당신이 오지 않았으니
내 몸통에 비늘이 돋았다 할지라도
나는 괜찮다.

웃음과 행복이라면 별로 궁금하지 않아.
오래 웃지 않으니 가면으로 변한 얼굴,
나는 가정식 백반 집으로 밥을 먹으러 간다.
구백구십팔 번째 실패를 넘어 천 번째 맞는 실패를
기뻐하라, 실패가 다정해질 테니까.
깃털보다 무겁고 꽃잎보다 우울한 표류,
시를 붙잡기는 어려웠다.
가족들은 멀리 있었고
나는 물풀 아래 알을 낳고 새끼를 키웠다.

새처럼 지저귀는 당신은
비밀들을 누설하는 풍자가인가요?
아니면 독설가입니까?

시가 아주 멀리서 오는 저녁,
내가 일요일의 저녁 날씨에 따라 변할 것 같은가?
나쁜 날씨가 생의 대부분을 망쳤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얼굴로
푸른 이내와 기침 소리, 모호한 웃음소리
따위를 데리고 오는 저녁의 날씨,
물론 오늘 저녁이 불행의 처음은 아니었지.
만질 수는 없으나 느껴지는
수많은 일요일의 저녁들,
시가 온다.


- 장 석주 시 ‘일요일의 저녁 날씨‘
[일요일과 나쁜 날씨],민음사, 2015.




다치기 쉬운 마음을 가진 사람들과
술을 마시네
술 취해 목소리는 공허하게 부풀어오르고
그들은 과장되게
누군가를 향해 분노를 터뜨리거나
욕을 하네
욕은 마음 빈 곳에 고인 고름,
썩어가는 환부,
보이지 않는 상처 한 군데쯤 가졌을
그들 마음에 따뜻한 위안이었으면 좋겠네
취해서 누군가를 향해 맹렬히 욕을 하는 그대,
취해서 충분히 인간적인 그대,
그대는 날개 없는 天使인가?
그들 마음의 갈피에 숨어 있던 죄의 씨앗들
밖으로 터져나와
마음 한없이 가볍네
그 마음 눈 온 날 신새벽 아직 발자국 찍히지 않은 풍경이네
술 깬 아침이면
벌써 후회하기 시작하네
그렇다 할지라도
욕할 수 있었던
간밤의 자유는 얼마나 행복했던 것이냐


- 장 석주 시 ‘술 마시는 남자‘
[붕붕거리는 추억의 한때], 문학과지성사, 1991.





― 주역시편 。905



포달스런 늑대로 살라고 한다.
내게 굳센 턱과 날카로운 송곳니를 갈아
곡식 낱알이 아니라
산 짐승을 찢으라한다.

제비로 살라고 한다.
뼈를 비우고 공중 높이 활공하며
이빨이 아니라
부리로 풀씨를 쪼으라 한다.

늑대도 아니고 제비가 아니다.
나는 투미하니 무명(無名) 당나귀로 살고자 한다.
속뼈가 휘도록 당신을 태우고 가고자 한다.
저기 먼 곳으로,
여기가 아닌 먼 곳으로.

겨울과 눈과 별자리가 반짝이는 곳,
베란다마다 저녁들과 포도주가 익고
당신이 혼수로 마련한 한 꿰미의 웃음과
열두 켤레의 키스가 피어나는 곳으로,
옴니암니 북적임을 뚫고
당신과 함께 나는 가야지.


- 장 석주 시 ‘당나귀‘



감나무 가지에 멧새가 와서 운다.
가을 청보석(靑寶石)을 쪼는 듯하다.

앉은 자리에서 꼬리를 들썩이는데,
눈꺼풀인 듯
괄약근이 조여졌다 풀어진 찰나!

조류(鳥類)의 소화기관 크기를 가늠케 하는
배설물의 총량,

가을 만사(萬事) 중 갸륵하고 어여쁜
산 것의 일!


- 장 석주 시 ‘가을 만사(萬事) 중의 하나‘
* [일요일과 나쁜 날씨], 민음사, 2015.




당신의 등에 얼굴을 묻고 울었다.
당신은 먼 곳이었으니까, 설사
우리가 연인이나 자매 사이였다 해도 괜찮다.
실컷 울고 났더니 얼굴이 사라졌다.
당신이 오지 않았으니
내 몸통에 비늘이 돋았다 할지라도
나는 괜찮다.

웃음과 행복이라면 별로 궁금하지 않아.
오래 웃지 않으니. 가면으로 변한 얼굴,

나는 가정식 백반 집으로. 밥을 먹으러 간다.
구백구십팔 번째 실패를 넘어 천 번째 맞는 실패
기뻐하라, 실패가 다정해질 테니까.
깃털보다 무겁고 꽃잎보다 우울한 표류,
시를. 붙잡기는 어려웠다.
가족들은 멀리 있었고
나는 물풀 아래 알을 낳고 새끼를 키웠다.

새처럼. 지저귀는 당신은
비밀을 누설하는 풍자가 인가요?
아니면 독설가입니까?

시가 아주 멀리서 오는 저녁,
내가 일요일의 저녁 날씨에 따라 변할것 같은가?
나쁜 날씨가 생의 대부분을 망쳤지.
한번도 본적이 없는 얼굴로

푸른 이내와 기침소리, 모호한 웃음소리
따위를 데리고 오는 저녁의 날씨,
물론 오늘. 저녁이 불행의 처음은 아니었지.
만질수는 없으나 느껴지는
수많은 일요일의 저녁들,
시가 온다.


- 장 석주 시 ’‘일요일의 저녁 날씨’
  * ‘일요일과 나쁜 날씨’ 민음사, 2015.




비애로 단단해진 너는
아직 발견되지 않은 것들의
목록 속에 있다
초록 줄기에 알알이 맺혀 있는 너는
별들의 계보에 속해 있다
그러나 붉은 것은 꽤 오래가지 않는가
섹스 후 동물은 왜 슬픈가
차마 꽉 깨물어 터뜨리지 못한 채
혀 위에 올리고 굴리는
이 정체불명의 비애가 날 울린다

- 장 석주 시 ‘딸기’





―주역시편ˇ22

정처없는 마음에 가하는
다정한 폭력이다.
춤추는 소녀들의 발목,
혀 없이 노래하는 빗방울,
날개 없이 날려는 습관이다.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이정표,
또다시 봄이 오면
누가 봄을 등 뒤에 달고
벙거지를 쓰고 허청허청 걸어간다.
그가 누구인지를
잘 안다. 오리나무에서 우는 가슴이
붉은 새여,
오리나무는 울지 않고
바보들이 머리를 어깨에 얹은 채 지나가고
4월 상순의 날들이 간다.
밥때에 밥알을 천천히 씹으며
끝끝내 슬프지 않다.
죽은 자들은 돌아오지 않고
오직 기일과 함께
돌아오는 5월의 뱀들.
풀숲마다 뱀은 고요의 형상을 하고
길게 엎드려 있다.
감상적으로 긴 생이다.
배를 미는 길쭉한 생 위로
얼마나 많은 우아한 구름들이 흘러갔는가.
개가 죽은 수요일 오후,
오늘이 습기를 부르는 바람이 분다.
날은 벌써 더워지고
봉우리마다 커다란 적막이 깃든다.
하루가 일목요연하지는 않다.
나를 찾고자 한다면
부디 빨리 찾기 바란다.
숨은 자는 발각되기 마련이다.
김종삼 전집이 서가에서 보이지 않는다.
나는 흙냄새를 맡는다.
죽은 아버지와 죽은 개와 죽은 새는
카론의 나룻배를 타고
황천을 향해 천천히 나아간다.
6월이 오고,
6월이 끝날 때까지
입술을 깨물며
음악을 견딘다.


- 장 석주 시 ‘김종삼 전집‘
* [오랫동안], 문예중앙, 2012.




금치산자 같은 사월이 왔다간다
사는 게 왜 이렇게 시시하지?
하는 얼굴을 하고
방부 처리되지 않은 추억들이
질척거리는 침출수를
삶의 빈틈으로 조금씩 흘려보낸다
개척자는 아니지만 무능이
뼈에 사무치는 것은
일품요리 같은 여자와의 연애가
곧 끝나고 말리라는 예감 때문이다
무능과 게으름은
내 삶에 붙은 이면옵션이다
나쁜 패를 잡고 전전긍긍하는 노름꾼에게도
사월이 오고 내게도
사지를 절단한 편지가 도착하고
끔찍한 날들이 이어진다
머리 없는 남자가
낚시터로 가는 길을 묻는다

- 장 석주 시 ‘사월 ’



선량한 사람들의 소규모 살림살이,
목청 좋은 시냇물과 종달새의 소리 없는 노래,
한 줄로 서서 오는 저녁을 바라보는
벙어리들,

꽃 지는 밤에 꽃 지는 걸 보는
모자(母子)의 미약한 슬픔,
쥐려고 해도 쥐어지지 않는
한 줄 수평선

이건 노래,
노래라도 지천인 노래는 아니고
뻘에 묻힌 천년 침향 같이
깊고 슬픈 노래,

오직 한 사람을 위해 부르는 노래,
속눈썹 파르르 떨며 맞는 노래!



* 파울 첼란의 시구에서 제목을 따왔다.

- 장 석주 시 ‘노래가 스미지 못하는 속눈썹*‘
* [일요일과 나쁜 날씨], 민음사, 2015.




똑같은 날들이라고 지루하기만
할까요, 당신을 잊었어요.
잘했죠? 죽은 자들이 돌아와 머리맡에 앉는
아침도 있지만
여전히 똑같은 날들이 지나갔어요.
딸들이 집을 떠나고.
제 바깥을 방랑하는 취미를 키우는
늑대거미들은 문설주 아래에 거미줄을 치고
몸통에 초록 줄이 선명한 새끼들을 길렸지요.
고관절들이 뒤틀린 집은 밤마다 신음을 뱉어 냈어요.
똑같은 날들이라고 즐겁기만
할까요, 내 기다림 속에 당신이 없고
당신과 나는 뒤늦게 알았어요.
내가 문을 닫을 때
당신의 귀는 문의 뒤편에서 자랐지요.
똑같은 날들이 지나가고
함부로 산 것은
오로지 똑같은 날들의 지루함 때문이라고,
생각하겠지요.


- 장 석주 시 ‘함부로‘
[일요일과 나쁜 날씨], 민음사, 2015.





―주역시편, 263


주말 경마에서 돈을 다 털렸으니
월요일은 늘 빈털터리야.
반바지나 입고 일하러 가야지.
슬픔에는 휴무가 없어.
남은 날들은 금요일로 바꿔놓겠어.
지구에 불시착하는 아이들과
황금빛 생맥주 첫 잔이 오는
금요일 저녁이면 좋겠지.
나뭇가지들은 서리로 반짝이고
모든 가르릉대는 고양이들은 다 예쁘지.
금요일 저녁마다
당신 볼은 발갛게 타올랐지.

내 사치는 국수를 먹고
당신의 물방울들을 바라보는 것,
신기하기도 하지,
물방울들은 다시 올 수 없는 것들의
계보에 속하지.
다시 돌아온다면
그토록 달콤했겠어?

지구는 19그램의 키스를 감당하지 못하고
137억 년의 늙은 우주는
당신의 물방울들을 감당하지 못하지.
당신이 검은 니트 한 벌을 주었을 때
생쥐 열 마리가 자라는 검은 니트는
내 여생이야,
네가 입어야 해, 라고 당신은 말했지.
헤어지자는 말인 걸 알아들었지.
혹시라도 거리에서 마주치면
외면하지 마.
천진한 미소를 보여줘.
당신의 물방울들과
돌들이 눈을 뜨는 금요일 정오의 정사를
꼭 기억할게.


- 장 석주 시 ‘ 연애’
[오랫동안],문예중앙, 2012.




아무하고도 약속 없는 점심
혼자 짜장면 한 그릇 비우고 들어오면서도
어떻게 살아야 하나,
내 막막함과 무관하게 가로수의 잎들이 쓸데없이 날린다.
금방 도착한 夕刊석간의 행간들마다 웅크리고 있는 어둠에서
'총체적 난국' 의 한 징후를 냄새 맡는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입 속에는 짜장면과 함께 씹은 양파 냄새가 진동한다.
스산하여라, 근심 속에서
한 세상이 꽃 피고 진다.

보라, 낮은 짧고,
어둠은 쉽게 내린다.

철문은 녹이 슬고,
문 위에 일렁이던 햇빛은 감쪽같이 사라진다.
물 빠진 뒤 뻘 속에서 물고기 한 미라가 아가미를 한껏 벌렁거린다.
내가 지고 가는 짐, 짐승같은 세월이 너무 무겁다.
세상을 알 만큼 알고 난 뒤
몸이 먼저 아는 늙음에 대한 예감이여.

내 死後사후의 바람 속을 거슬러올라가는 한떼의 새들을 본다.
새들이 꼭 성냥개비 끝에 쬐끔 묻은 硫黃유황 같다.
새들은 어둠 속을 發火性발화성 씨앗을 물고 난다.


- 장 석주 시 ‘총체적 난국의 세월 속에서‘
[붕붕거리는 추억의 한때], 문학과지성사, 1995.




어둠은 깊다. 목이 마르다.
별들의 공전(公轉)이나 높새바람의 사생활을 들여다보는
내가 자꾸 목이 마른 것은
나무들의 생태(生態)와 닮은 몸―사람이기 때문이다.
지표면의 물들 태반은 지하로 숨고
겨우 몸 안으로 들어온 물들이 순환하는 동안
나무들의 잎눈에서는 잔근심과 후회들이
연초록으로 돋아난다.
비바람 따라 마실 나온 어린 천둥들이 우는 밤에는
잎들도 처절했다.
강제로 뜯겨 내동댕이쳐지는
그런 밤의 참혹에 증오의 미학도 깨치지 못한
어린 것들이 굳게 대처하곤 했다.
조경선이 내려와 늦가을 무렵 연못은 완성되고
나는 위로를 받는다.
연못을 얕은 물로 단풍잎들을 받고
서리가 내렸다. 서리에 시드는 풀들,
노모의 잠꼬대 소리가 높아지는
동지 새벽에 깨어난 나는 겨우
은버들 한 쌍 같은 네 관자놀이와 쇄골을 더듬는다.
목이 마르고
목이 마른 밤들이 가고
네 마음 언저리에도 닿지 않는
네 푸른 정맥과 손목의 가냘픔을 사랑했음을 깨닫는다.
고요가 깊으면 그 고요 속에 숨결을 묻고
죽어도 좋다고 생각한다.
태어나지 마라, 태중의 아이들아.
겨우, 라는 부사로써만 발설될 수 있는
사랑이 있다면 그 사랑으로 무구한 개와 고양이들만
태어나라, 겨우, 살아 있으니까,
겨우, 사랑을 견딜 수 있을 뿐이니까.


- 장 석주 시 ‘ 겨우‘
[몽해항로], 민음사, 2010.




벚꽃이 먼 곳에서 피었기에
당신은 다정했죠.
바람이 벚꽃 꽃잎을 털어 갔기에
당신은 팔다리가 멀쩡했죠.

먼 곳에서 우레가 울고 벼락이 치고
다용도실 화분에 묻은 대파는
어둠을 삼키고 새파랗게 자라고 있었기에
토마토 같은 허파로 풀무질하듯
우리는 숨을 쉬었죠.

올 여름엔 가난할까요, 푸른 잎사귀 같이
우리는 사 먹을까요, 토마토 백한 개를
우리는 손 없는 날 잡아 이사를 하고
처마도 없는 사랑에 빠지겠죠.

계절이 자꾸 시들시들 죽지만
흘러가는 것들은 다시는 돌아올 수 없기에
작년 여름의 매미 소리는 꺼 버릴 수 없겠죠.
당신과 매미 소리가 먼 곳에 있기에
무럭무럭 자란 토마토를 먹겠죠.


- 장 석주 시 ‘토마토’
[일요일과 나쁜 날씨], 민음사, 2015.





-설산 너머


작약꽃 피었다 지고 네가 떠난 뒤
물 만 밥을 오이지에 한술 뜨고
종일 흰 빨래가 펄럭이는 걸 바라본다.
바람은 창가에 매단 편종을 흔들고
제 몸을 쇠로 쳐서 노래하는 추들,
나도 몸을 쳐서 노래했다면
지금보다 훨씬 덜 불행했으리라.
노래가 아니라면 구업을 짓는
입은 닫는 게 낫다.
어제는 문상을 다녀오고
오늘은 돌잔치에 다녀왔다.
내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더 이상 묻지 않기로 했다.
작약꽃과 눈[雪] 사이에 다림질 잘하는 여자가
잠시 살다 갔음을 기억할 일이다.
떠도는 몇 마디 적막한 말과
여래 같이 빛나는 네 허리를 생각하며
오체투지하는 일만 남았다.
땀 밴 옷이 마르면
마른 소금이 우수수 떨어진다.
해저보다 깊고 어두운 밤이 오면
매리설산(梅里雪山)을 넘는 야크 무리들과
양쯔강 너머 금닭이 우는 마을들을 떠올린다.
누런 해가 뜨고 흰 달이 뜨지만
왜 한번 흘러간 것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가.
바람 불면 바람과 함께 엎드리고
비가 오면 비와 함께 젖으며
곡밥 먹은 지가 쉰 해를 넘었으니,
동쪽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가는 일만
남았다. 저 설산 너머 고원에
금빛 절이 있다 하니
곧 바람이 와서 나를 데려가리라.

- 장 석주 시 ‘몽해항로 5‘
[몽해항로], 민음사, 2010.





- 낮에 보일러수리공이 다녀갔다

겨울이 들이닥치면
북풍 아래서 집들은 웅크리고
문들은 죄다 굳게 닫힌다.
그게 옳은 일이다.
낮은 밤보다 짧아지고
세상의 저울들이 한쪽으로 기운다.
밤공기는 식초보다 따갑다.
마당에 놀러왔던 유혈목들은
동면에 들었을 게다.
개똥지바퀴들은 떠나고
하천을 넘어와 부엌을 들여다보던 너구리들도
며칠째 보이지 않는다.

나는 누굴까, 네게 외롭다고 말하고
서리 위에 발자국을 남긴 어린 인류를 생각하는
나는 누굴까.
나는 누굴까.
낮에 보일러수리공이 다녀갔다.
산림욕장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아무도 만나지 못했다.
속옷의 솔기들 마냥 잠시 먼 곳을 생각했다.
어디에도 뿌리 내려 잎 피우지 마라!
씨앗으로 견뎌라!
폭풍에 숲은 한쪽으로 쏠리고
흑해는 거칠게 일렁인다.

구릉들 위로 구름이 지나가고
불들은 꺼지고 차디찬 재를 남긴다.
빙점의 밤들이 몰려오고
물이 언다고
물이 언다고
저 아래 가창오리들이 구륵구국 구륵구국 운다.
금광호수의 물이 응결하는 밤,
기름보일러가 식은 방바닥을 덥힐 때
나는 누굴까.
나는 누굴까.


   - 장석주 시 '몽해항로4' 모두




유월이면 우리들은 설레며 땅속에서 둥글게 익어가는 감자들을
기다렸다 꽃은 상처였다
상처 없는 자 꽃을 피울 수 없고
꽃 피울 수 없는 자 열매 맺을 수 없었다

유월이면 우리들은 설레며 땅속에서 둥글게 익어가는 감자들을
기다렸다 열매는 죽음이었다
죽음 두려워하는 자 열매 맺을 수 없고
열매 없는 자들 새로운 꽃 피울 수 없었다

단 한번뿐인 혼례로 둥글어지고
땅의 부(富)를 단번에 그러모아 더욱 영글어가는 감자들!
나날이 커가는 우주의 씨앗들!
알알이 너무 크지 않게 부풀어오르는 땅속의 태양들!

유월이면 우리들은 설레며 땅속의 감자들이
둥글게 익기만 기다렸다


- 장 석주 시 ‘감자를 기리는 시‘
[다시 첫사랑의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세계사, 1999.




바람 섞여 진눈깨비 치는 저녁,
흘러나온 불빛이
*꼬뚜레 뚫은 송아지처럼 길게길게 운다.

길 나서지 못한 사람 살고 있다고,
가는 저녁 다시 못 온다고,
다정한 몸 속으로
울음이 뭉툭하게 밀려든다.

저녁마다 밀려오고 밀려가는 것들 속에서
무릎 아래 그림자 키우는
누군가의 재개봉영화 같은 생이 밀려간다.

누군가 어둠 쪽으로 몸 돌려
꽃피는 머리를 수그린다.


- 장 석주 시 ‘수그리다‘
* [단순하고 느리게 고요히], 지식을만드는지식, 2012.
* [신현림의. 미술관에서 읽은 시.],서해문집,2016.




비가 온다, 궂은 날씨 때문에
인생을 망칠 거라는 나쁜 예감이 훅, 하고 스친다.
떡갈나무 숲 속의 비는 녹색,
금광호수의 비는 물빛,
영산홍 꽃밭의 비는 영산홍 꽃빛,
비마다 색깔이 다르다.

슬픔은 중첩되면서 슬픔이다.
초록 거미가 문설주 위에 거미줄을 치고 있다.
초록 거미는 초록 거미를 모르고
초록 거미의 눈높이는 문설주의 높이에 맞춰진다.

긴 밤들과 초록 거미와 나는
한통속이다.
슬픔은 도무지 모르는 슬픔의 백수들,
종일 내리는 빗줄기나 일삼아 내다본다.
도처에 흙냄새가 번진다.

빗방울들이 바다를 데려온다.
잘게 쪼개진 길쭉한 바다,
빗방울들이 바다의 조각들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빗방울들은 깊이를 잃어버린 채 상심한다.
빗방울들은 바다의 치매를 앓는
영상홍들이 데려온 벙어리들이다.

비가 오고 있었다, 춘분과 추분 사이에서
초록 거미에게 상냥한 인사를 하자.
저 초록 거미들이 야만인이 아니라면 누구란 말인가!
새로 온 아침은 즐비한데, 아직 도착하지 않은
야만인들에게 인사를 하자.


- 장 석주 시 ‘초록 거미에게 인사를‘
[일요일과 나쁜 날씨], 민음사, 2015.





1
저물면
먹이를 물고 꼬박꼬박 둥지로 돌아가는
건방진 새들을 위하여
하나님,
쓸모없이 떠 있는 해는
그만 끄시죠.

2
어젯밤
소주를 너무 많이 드시고
곯아떨어진
하나님,
해는 언제 밝히실 건가요.
날샌 지 언젠데
아직도 안개를 걷지 않으시고
게으름을 피우세요.

3
희랍정교회 마당엔
낙엽만 불온유인물처럼 널려 있는데
관절의 힘이 빠져서
더 이상 빗자루를 들지 못하는
불쌍한 하나님, 늙은 청소부처럼
구름떼로 지어 입으신 누더기는 벗으시고
누런 이빨도 깨끗이 닦으세요.
그렇게 술만 드시다간 알콜중독자가 되겠어요.
그나마 직장에서도 쫓겨나시겠어요.


- 장 석주 시 ‘하나님은 늙은 청소부처럼‘
[새들은 황혼 속에 집을 짓는다], 나남, 1987.




한자리에 서서
양팔을 벌려 허공을 안은 자두나무,
떠나면서 떠나지 않고
떠나지 않으면서 떠나는 것,
행려(行旅)라면, 저 핏줄 속에 우뚝한
자두나무는 표표하다 하겠네.

운명 따위는 믿지도 않았지.
11월이 와서 시든 풀밭에는
고라니나 족제비 따위가 배설물을 흘러 놓았네.

혼자 이과두주 마시는 밤에 첫눈이 오고
눈꺼풀이 없는 자두나무여,
쓸쓸함 따위 개에게 던져 주어라!
밤의 하중을 견디고 서 있는 자두나무
너의 뿌리들은 식는가?
돌 속에 갇힌 그림자는 돌 속에서 우는가?

고집 센 뿔로 허공을 들이받는 흑염소,
독 없는 뱀,
부리와 괄약근만으로도 충분한 종달새,
머리숱 없는 아버지의 백회와 정수리,
왜 이 모든 것들은 한통속인가?

실패의 쓰라림 따위는 모르는
어린 것들과 그 어린 것들의 어버이들,
혈연으로 얽히지 않는 밤눈과 자두나무들,
이 모든 것들은 왜 아직도 미생인가?


- 장 석주 시 ‘미생(未生)‘
[일요일과 나쁜 날씨],민음사, 2015.




물가에서 당신을 생각합니다.
웬일인지
내가 죽었으므로 물은 흐릅니다.
가지 마라고,
가지 마라고,

물이 물로 흐르는 동안
당신은 물가에 와서 울겠지요.
왜 모란 작약이 아니라 당신이겠어요?
물이 물로 흐르니까 당신이죠.

야윈 빛에 허리를 드러내는 물,
오래 흐느끼는 물,

가지 마라고,
가지 마라고,


- 장 석주 시 ‘당신이라는 야만인‘
[일요일과 나쁜 날씨], 민음사 ,2015.




비는 달콤하지 않고
맹물 맛이다.
비는 최소주의로 쪼개진 입술들,
파초, 돌, 모란, 연못, 댓잎들에
츱츱츱 소리를 내며 키스를 하는
빗방울,
빗방울,
빗방울,

강철의 비는 여전히 나를
단련시킨다.
벗들이 비를 핑계 삼아 술을 마실 때
술에 술맛을 더하고,
실연에 실연을 더하고,

달이 즙을 뿌린다.
여럿이 마시면 여럿이 취하고
혼자 마셔도 여럿이 취한다.
비와 세월에 취해
노래하는 비의 벗들.


- 장 석주 시 ‘비의 벗들‘




당신이 외롭든 그렇지 않든,
그건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것은 단 하나
당신과 내가
지금 살아 있다는 것,

가을 곰들이 겨울밤을 준비한다는 것,

천 개의 밤을 혼자 견딘다 해도
당신,  울지 마!
천 개의 밤이 벽일지라도
당신,  울지 마!

또 다른 일요일이 올 테니,
웃어!
춤추고 노래해!


- 장 석주 시 ‘일요일이 지나간다‘





-주역시편, 199


가나 못 가나.
해남은
있나 없나.
가면 있고 못 가면 없다.
이곳에 너는 없고
저곳엔 내가 산다.
사막에는 은여우,
은여우가 사는 사막,
마음에 꼬리를 달고 막 달아나는
이 놀라운 사태를
나는 견디나 못 견디나.
해남은 먼 곳,
아침에 이빨을 닦고
어제 읽은 주역과 용비어천가 해제본,
질 들뢰즈를 다시 읽고
오후에는 이마트에서 시금치와 저지방 우유를 사고
지성치과에서 치석을 제거했는데
정 원장은 돈을 받지 않았다.
그와는 나중에 밥 한 끼를 약속하고 돌아온다.
황사가 오고
황사가 오지 않는다.
오지 않는 것들은
해남에 있나.
저녁 여덟시에 온 것은 고라니,
고라니는 골짜기가 되어 뛰고
골짜기는 다시 어둠이 되어 뛰고
새벽 세시에는 잠이 깨고
새벽 세시에는 새벽 세시를 가리키는 시계가 되어
세 점을 친다.
노모들이 침상에서 잠꼬대를 하는 시각,
태아처럼 몸을 동글게 만 노모는
무릉도원 속으로 걸어간다.
해남은 먼데,
나는 가나 못 가나.
알 수 없는 내일들이
내 앞에 엎질러져 있다.
해남에는 무궁화 피고
해남에는 무화과 익고
가나 못 가나.
해남에는 비 내리고
비는 비가 되어 내리나 못 내리나.
해남에는 눈 내리고
눈은 눈이 되어 내리나 못 내리나.
해남에는 언제 가나.
해남에는
가나 못 가나.


- 장 석주 시 ‘달의 사막‘
[오랫동안], 문예중앙, 2012.




말랑말랑한 오렌지 껍질을 벗기고
즙처럼 터지는 피와 살을 조금만 깨물어 줘.
따듯한 악몽 같은 내 인생
내 피를 조금만 깨물어 줘.
난 네게 따뜻하게 탕진되고 싶은거야.

늦저녁 시장에서 사 온 순대를 먹고 나서
그걸 쌌던 비닐은 미련 없이 버리듯이
아, 비닐 같은, 버려지는 비닐 같은 허무한 소모,
너는 이 소금 같은 슬픔을 맛보느냐?

푼돈마저 바닥을 내고
내겐 아무 것도 없다, 뼛속까지....

-故人의 흑백사진.

-생생히 뛰어다니는 아이들.

-땅 속의 감자들.


- 장 석주 시 ‘따뜻한 악몽 같은 내 인생‘
[단순하고 느리게 고요히], 지식을만드는지식, 2012.







-주역시편. 4003

부엌문 여는 소리가
크면
그 소리에 놀라
뜰에 내려온 뱀들이 달아난다.
늦가을에 만난 늦가을의 사태,
항아리에 살얼음이 끼고
오동나무 가지는 큰바람에 꺾인다.

토굴에 있던 무에서 싹이 나고,
근심은 붉어서 참되다.
빨랫줄에는 미처 걷지 못한 이불 홑 청,
뻣뻣하게 언다.
누가 죽으려다 만다.

그 여자와는
기어코 살아보고 싶었는데,
녹음과 그늘, 채송화와 여뀌를 거느리고
탈북자가 낸 평양냉면집에 가서 온반이나 랭면을 먹으며
잘 살고 싶었는데,

홑겹의 영혼에 스치는 저녁들!
오오, 지나간다.
비누들이 닳는 저녁들.
말갈의 여인들이 항아리에 물을 길어다 붓는
그런 저녁들.
가없는 벌판에 번지는 여러 저녁들.
북방 바람이 데운 붉은 뺨의
어린 사내애들.
옹기종기 나와 앉아 바라보는
저 수천의
저녁들!


- 장 석주 시 ‘저녁들 !‘
[오랫동안], 문예중앙, 2012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게 저 혼자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낱


- 장 석주 시 ‘대추 한 알’
* [단순하고 느리게 고요히], 지식을만드는지식, 2012.




- 주역시편. 515


너희는 유능하지,
조금만 무능해지자.
너희는 행복하지,
한 끼니쯤은 걸러 딱 그만큼만 불행해지자.

과거는 의붓아버지다.
의붓아버지가 유산을 남길 가능성은
없다, 현재가 생부(生父)다.
유산이 있다면 주겠다만,
달 뜬 가을저녁,
물들이 어떤 생각들로 골똘해진다.
하천을 건너온 너구리가 들여다보는
저 부엌 안쪽은 어떤 불공정 거래도 없었던
상냥한 제국이다.
제국은 불꽃과 그림자를 가로지르는
국경을 갖고 있다.
백 년에 한 번,
모죽(母竹)에 꽃이 핀다.


- 장 석주 시 ‘느리게 걷자’
[오랫동안], 문예중앙,  2012



- 주역시편 .295
  

스며라 작약꽃들아, 입맞춤속으로!
스며라 모란꽃들아, 여름으로!

늑대에게 곗돈과 밥이 스미면
개가 되고
고라니에게 눈먼 새끼가 스미면
안개가 되리.

눈썹 같은 환등(幻燈)을 달고
기차가 달릴 때
스며라 첫 번째 저녁은 두 번 째 저녁으로
스며라 당신과 내가 서로 스민다면
우리는 호밀밭이 되리.

3월에 폭설이 내리는데,
여름 성경학교가 스며 진눈깨비로 변하네.
당신에게 스미는 것은
오직 나의 할 일.

물옥잠화같이 웃으리,
나와 당신!

어깨 잇자국 때문에 당신은
웃을까, 안 웃을까?
당신이 웃지 않는다면
가없는 이 마음 차마 가여운 당신에게로
먼저 스밀 수밖에.


- 장 석주 시 ‘`스미다'라는 말‘
[오랫동안], 문예중앙,  2012.



저 앞에 걸어오는 젊은 여자,
만삭이다.
남의 애를 가진 저 여자,
발걸음이 당당하다.

한 몸 안에 두 생명이 동거하는
저 이쁜 둥근 몸,
저 무덤이 피안으로 가는
출구다!


- 장 석주 시 ‘저 여자’




늦게 빈 식당에서 초조한 마음으로
혼자 밥을 먹는다.
(누군가 종이를 씹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밥을 먹는 게 아니라
모든 나태와 초조를 지울 뿐이다.
습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증거다.
아직도 나는 행복해질 거라는 나쁜 믿음을 가졌다.

생활은 완성되지 않는다,
도처에서 발견되는 모든 초조와
욕망의 거품들을 지워야 할 때!
거창한 것들은 이제 그만
작은 것들에 대해 생각해볼 때!
거창함에 매달려
어떤 꽃을 피우리.
작고 시시한 것들을 더운 가슴으로 안고
꽃 피고 진 후
어떤 열매가 맺는가를 지켜보아야 하리.

실패와 성공의 꽃들,
사랑과 배반의 꽃들,
혐오와 연민의 꽃들,
껄끄러운 마음과 마음 사이 여백에 피는 꽃들,
속수무책 견고한 도덕의 꽃들,

오, 불우하게 불우하게 함부로 피어나는 행복의 꽃들,
손 한번 못 써보고 당한 희망의 꽃들,

오후 3시에는 나쁜 믿음이 피운 꽃들을 꺾는다,
나를 속이려 들었으므로.

마음의 사막에 외로움이 꽃핀다, 오후 3시엔
어디에나 행복이 없다.


- 장 석주 시 ‘오후 3시에는 어디에나 행복이 없다‘
시집 <붕붕거리는 추억의 한때> 문지. 1981



사랑이란
아주 멀리 되돌아오는 길이다
나 그대에 취해
그대의 캄캄한 감옥에서 울고 있는 것이다

아기 하나 태어나고
바람이 분다

바람 부는 길목에 그토록 오래 서 있었던 까닭은
돌아오는 길 내내
그대를 감쌌던 내 마음에서
그대 향기가 떠나지를 않았기 때문이다

사랑이란
그렇게
아주아주 멀리 되돌아오는 길이다


- 장석주 시 ‘마지막 사랑’




자정 무렵 서울발 진주행 무궁화로 열차가
서울역에서 남행하는 막차야.
평택역에는 새벽 1시경에 섰다가
진주에서 첫새벽을 맞을 누군가를 위해
바로 떠나지.
택시 승차장에서 막차 손님을 태우려고
줄지어 선 택시들.
때로는 금강경을 외는 보살이
운전석에 앉아 손님을 기다리지. 나도
한때 기다림으로 사무친 적이 있어.
인생의 3할은 기다림이야.
3할은 야구선수라면 탐낼 만한 타율이야.
내 안에 음지식물이 자란다네.
상가 입구의 일반쓰레기 종량제 비닐봉지들은
임산부처럼 불룩한 배를 내밀고 있네.
떠돌이 개들이 비닐봉지를 뜯고
주둥이를 들이미는 상가 거리를 걸어간다네.
나는 먼지바람 부는 이곳에
오, 불시착한 게 틀림없어.
여기가 벼랑이 아니라면
세상엔 어떤 벼랑도 없어!
이 순간, 청송 심씨 가문의 상속자가 수정란으로
새 생을 받겠지. 딱 십오 분간만
마태수난곡을 듣고 싶어. 지금 이 순간
마태수난곡 전곡을 들을 수 있다면
여생의 반을 뚝 잘라 당신에게 주겠어.
한 집에 꼭 문제아가 하나씩은 있어.
長子는 고달프다. 다음 생엔 막내로
태어나고 싶어. 나날이 새치가 느는데
여전히 젊은 여자에게 눈길이 가네.
아마도 주책이란 몸은 늙는데
마음은 안 늙는 상황을 말하는 것이리라.
외로운 건 스킨십과 오락이
부족했기 때문이야. 작년 혹한에
감나무 뿌리가 얼더니 올해는 열매가 없군.
감나무의 怠業이야.
믿었던 놈에게 배신을 당할 때 더 쓰라려.
내일은 태업하는 감나무를 베어내자.
나쁜 기억들이 삶을 옥죄고 있어.
평택역이 벼랑이라는 말은 엄살이야.
내 앞의 벼랑은 바로 나 자신이야!


- 장 석주 시 ‘ 마태수난곡‘
[절벽]2007년 세계사



뉘엿뉘엿 해졌다.
해 진 자리라 더 어두운 서쪽,
망막을 때리는 잔광의 여운 때문인지
해 막 진 뒤 서쪽은 늘 어둡다.
푸른 사마귀는 번개 치는 듯 날래다.
귀뚜라미를 잡아 침 꽂아 기절시킨 뒤
태산같이 제 먹잇감을 제압하는 저 풀숲의 맹수,
저것보다 빠르지도 못하고
나이만 들었다
남산에 집 두고 몸은 서쪽인 듯
마음이 황황해지는 나이,
자꾸 부끄러움만 자라난다.
물가의 나무들이 어슴푸레해질 무렵
함께 물을 보던 여자는 돌아갔다.
물 위에 뜬 가창오리 울음소리를 흉내 내며
여자는 까르륵 웃고
그 웃음소리가 비 젖은 석류처럼 화사해서
귓바퀴에 회소곡이 회오리친 듯 아득하다.
여든두 살의 노모가 노래방에서 옛노래를
열 곡이나 부르는데, 그 기력이 예사롭다.
돌아갈 길 아득해 힘을 비축하는 걸까.
왔던 것들은 반드시 돌아간다.
올해도 울안에서 암탉 두어 마리 거느린
수탉 울음소리를 듣지 못했다.
세상일은 계륵과 같아 수확도 없이
어느덧 赤壁 아래에도 섣달이다.
하늘에 뭇별은 뜨고 나는 허리를 펴지 못해
수삼 일 고생이 자심했다.
허리를 펴고 나니 이젠 마음이 크게 휜다.
자개장롱에 박힌 수탉이 우는데
이는 하늘빛은 흰데 마음이 휜 탓이리라.
이 저녁 아픈 아내라도 있었다면
살그머니 부엌에 들어가 밥 지으리라.
새끼를 낳은 어미개가 갑자기 쇠진한 듯
사지를 늘어뜨려 바닥에 붙인 채
사흘을 먹지 않고 엎드려 있다.
수의사는 저칼슘증이라고 진단한다.
개를 보일러실에 뉜 뒤
혈관을 찾아 주삿바늘 꽂고 링거액을 맞힌다.
젖 곯은 새끼들은 식욕이 푸르러서
사료를 사납게 먹어치운다.
산 것들은 살기 위해 제 몸 밖에 것을 취한다.
만물은 만물로 저를 부양하는 것이니
생업이 비루해지면
마침내 그쳐야 한다.
누군가, 그이는 평생 꼿꼿하였다, 고
쓰기를 바란다, 꿈이다
달이 발명한 그림자를 발밑에 쓰러뜨릴 때
세월은 서리 맞은 풀보다 짧고 덧없으나
겨울밤은 맹랑하게 길고 지루하다.
한밤중에 서걱대는 마른 풀 소리를 들으며
달빛 아래 그림자를 향해 오줌을 눈다.


- 장 석주 시 ‘赤壁‘
[절벽]   2007년 세계사




누가 지금
문밖에서 울고 있는가.
인적 뜸한 산 언덕 외로운 묘비처럼
누가 지금
쓸쓸히 돌아서서 울고 있는가

그대 꿈은
처음 만난 남자와
오누이처럼 늙어 한 세상을 동행하는 것
작고 소박한 꿈이었는데
왜 이렇게 힘들었을까.

세상의 길은 끝이 없어
한 번 엇갈리면 다시는 만날 수 없는 것
메마른 바위를 스쳐간
그대 고운 바람결
그대 울며 어디로 가고 있는가

내 빈 가슴에 한등 타오르는 추억만 걸어 놓고
슬픈 날과 기쁜 때를 지나서
어느 먼 산 언덕 보랏빛 저녁
외롭고 황홀한 불빛으로 켜지는가


- 장 석주 시 ‘ 愛人‘






-Vogue, 그 흑묘에게
  

1
취향은 재난과 기아보다 덜 쓰라리다.
순결한 사회주의나 좌파의 꿈보다
더 낮은 욕망이라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옷과 구두가 타인의 취향에 지나지 않는다고,
장식의 잉여라고 우기지 마라!
취향은 일요화가들처럼 들이닥친다.
태양의 화덕에서는 날마다 새로운
美, 투명함, 숭고한 본질들이 구워진다.
네 가슴에 고요히 앉은 쇄골을 봐.
공중으로 도약하기 직전의 새,
미처 감추지 못한 도저히 감출 수 없는
맨살이 드러내는
저 텅 빈 섬광을 봐.
너를 위해 인류가 피 흘린 적은 한 번도 없다.
분류와 명령에 익숙한 자들,
금욕주의의 강박증에 들린 자들은
오히려 너의 치명적 아름다움을
죄악이라고 규정한 적도 있었지.
그러나 지상에 내려앉은 새들의 몸무게보다
더 가벼운 너의 축복.
너의 즉흥성을 비웃는 건 덜 떨어진 짓이야.
너는 늑대의 흉골,
너는 독수리의 강철 깃털,
너는 분홍할미꽃의 솜털,
너는 목도리도마뱀의 비늘,
너는 식물들의 엽록소,
너는 인류의 다정한 현존이야.
모슬포에 비 오던 그해 여름,
야생 딸기 보다 조금 더 울적한 청춘이었던
나는 알았어, 바다에 오줌을 누며
비에 젖는 게 얼마나 숭고한가를.
그때 나는 모든 기쁨들을 불평 없이 받아들이며
아주 단순하게 살기로 결심했어.
우연들이 실어 나르는 단순함.
새들만 누리던 그걸 받아들이며
조금 더 진화한 인간이 되어버린 거야.

2
-J에게

붉은 것들은 기어코 삶으로
안착하지 않는다.
삶이 되지 않으니
그건 신기루,
꿈,
헛디딘 허방이야.
끝나서 눈시울이 붉어진 게 아니다.
나는 아직 시작하지도 않았어.
너와 나는 生面생면,
不知부지야.
사랑은 달, 잠자리, 덧창, 햇감자와
연륜이 같고
붉은 것들은 대개는 연륜이 짧고
제 속에 쟁인 사무침이 많지.
당신의 두 귀는 단풍잎이다.
귀가 예쁜 당신 머리를 내 무릎에 뉘고
이마를 가만히 짚어보거나
이불 홑청을 시치는 고적한 나날들이
순조롭게 지나간다.
놀라운 꽃들의 본심을 보았다.
새들이 내는 공중의 웃음소리를 들었다.
오, 이건 사랑이야,
만져지지 않는 것을, 만져보려는,


- 장 석주 시 ‘타인의 취향‘
* 시집: [절벽]




나는 너무 오래 일에
미쳐 있었어.
흰 손 흰 얼굴은
노동에 어울리지 않는데.
망상은 줄지 않고
미친 피는 잠들지 않아.
구름 구두를 신고
카페에 나가 에스프레소나 마셔볼까.
카페 통유리창 너머로
지나가는 사람들과 흘러가는 구름과
한가로운 거리를 내다보며
오후의 한때를 보낼까.

줄을 세운 바지를 입고
아가씨를 향해
휘익 휘이익 휘파람을 불면
아가씨가 뒤돌아보겠지.
그러면 눈웃음을 치며 아가씨에게
말을 걸어야지.

지금 시간이 있느냐고,
나와 함께
춤출 시간이 있느냐고.



- 장 석주 시 ‘난 건달이 되겠어‘
* 세계사 시인선141  장석주시집
* 절벽, 세계사, 2007





두개골 속에 꽃봉오리들이 툭, 툭, 터지는 소리가
벼락치고,
네 입술이 기르던 애벌레가
나방이 되어 날아간다.

네 입술,
네 둥근 젖,
네 흰 이마,
네 검은 머리칼,
네 젖은 어깨,
네 샅,
네 꽃피던 자궁,
네 모든 게 천천히 지워진다, 일찍이
내 이럴 줄 알았다,
벚꽃 폭설 아래 나 혼자 걸으면
벚꽃 흰 눈 몇 점 머리에 이고
네가 나와 마주치고도
저문 강 쳐다보듯 무심할 줄을.

에움길 돌아 돌아가면
우리가 미처 살아내지 못했던 시간들이
아직도 매캐한 슬픔이 피우는
연기 속에 자욱하다.

숯으로 네 눈썹을 그리던
푸른 밤들이 여전하다.
깨진 거울과 빈 밥그릇,
곰팡이 슨 산수화 한 점과 함께
언 호수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묵은 가지마다 햇빛이 팝콘처럼 부풀고
핏속에는 웃음과 한숨과 입김들이
한꺼번에 피어난다.
내 핏속에 잠자던 호랑이들이
미쳐 날뛴다.


- 장 석주 시 ‘활짝 핀 벚꽃 아래서‘
    * 시집 『절벽』, 세계사, 2007)




겨우내 주린 뱀에게 개구리가 제 몸을
통째로 바친다.
온몸으로 공양의 禮를 치르는
장엄 현장에
목련 한 그루 서 있다.
갑각의 묵은 가지마다 희고 뽀얀 젖들이
눈부시다.
주린 입들에게 젖을 물린다.

도처에 生佛이다.


- 장 석주 시 ‘목련부처’




우리는 술을 마신다 흐린 불빛
아래에서 가면을 쓰고
장갑을 끼고 술을 마신다
어제도 마시고 그저께도 마시고
오늘도 마신다 아마
내일도 마시게 될 것이다
끊임없는 환풍기의 소음을 들으며
한잔을 마시고 두잔을 마시고 세잔을
건너뛰어 네잔을 마신다
웃으면서 속으로 찡그리면서 비웃으면서
기침하면서 이를 갈면서 우리는
술을 마신다 흘러간 추억 속에서도 마시고
현재의 고통 속에서도 마시고 미래의
희망 속에서도 마시고 목요일에도
금요일에도 토요일에도 우리는 술을 마신다
어두운 벽에 허청대는 우리들의 말없는
그림자를 우울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앉아서도 마시고 서서도 마시고 어쩌면
누워서도 마실 것이다 타락하면서 마시고
회개하면서 마시고 쌍욕을 던지며
마시고 지순한 사랑의 말을 나누며
마시고 거래의 조건을 제시하며
마시고 파리 같은 파리채에 납작하게
형태가 짓이겨진 인간 같은
개들도 가장 잔인한 살해의
방법은 연구하지 않는다 공중 무덤에
누운 나의 형제여 나의 누이여
이제 알겠느냐 술 마시는 이유를
취하기 위하여 잊기 위하여
우리는 술을 마신다 1970년에 자살한
어느 외국 시인과 그의 절망에 닿지 못하는
우리의 슬픔을 위하여
슬픔을 독으로 키우기 위하여
살기 위하여
개라도 되기 위하여


- 장 석주 시 ’이곳에 살기 위하여‘
* 파울 첼란에게 바침,



초봄에 매화 꽃눈 돋다, 어제와 다른 하늘 밑
내닫는 호랑이다, 호랑이 눈동자다, 저 꽃들!
아버지 가고 맞은 늦봄 천지에 모란꽃 붉다
벚 꽃잎 분분하게 무너진다, 저 끊긴 인연들
자다 깨다 설친 밤 개구리 떼 서책 읽는 소리
물 빠진 개펄에 혼자 서 있는 민댕기물떼새
오동은 곧고 소나무 굽었다, 무릇 금생이다
풍란이 허공에 붓을 친다, 획이 굽은 듯 곧다
하마 당신 올까, 무서리에도 꿋꿋한 까치밥
아, 살아 움직인다, 맹월 아래 기러기 떼 서체書體
매화 국화 다 진 뒤 초겨울 앵두나무에 박새
가는 길에 꽃 없어 섭섭할까 가지마다 설화雪花!


- 장석주 시 ‘일획 (一劃)‘
* 2007 현장비평가가 뽑은 올해의 좋은 시, 현대문학




나는 꺼낸다, 당신 가슴속에서
내 이름 아닌 누군가의 이름,
열 마리의 죽은 비둘기,
태어나지 못한 두 명의 아기,
유효 기간이 지난 슬픔 다섯 개,
곰팡이가 핀 그리움 하나를,


나는 꺼낸다, 당신 가슴속에서
서른세 번 속절없이 지나간 여름,
취해 잠든 열다섯 번의 밤,
한 번 실패한 연애,
구두 뒤축에 묻어온 무수한 바닷가의 모래알들,
언젠가 잃어버린 한 개의 지갑,
빈 담뱃갑처럼 구겨서 버린 꿈,
인생의 텅 빔을 이기지 못했던 절망의 스물한 날들,
아니다, 아니다라고,
포기했던 순간들의 알약 같은 쓰디씀을.


- 장 석주 시 ‘한 여자에게서 꺼낸다‘
[붕붕거리는 추억의 한때], 문학과지성사, 1995




그대 아직 누군가 그리워하고 있다면
그대는 행복한 사람이다

그대 아직 누군가 죽도록 미워하고 있다면
그대 인생이 꼭 헛되지만은 않았음을
위안으로 삼아야 한다

그대 아직 누군가 잊지 못해
부치지 못한 편지 위에 눈물 떨구고 있다면
그대 인생엔 여전히 희망이 있다

이제 먼저 해야 할 일은
잊는 것이다

그리워하는 그 이름을
미워하는 그 얼굴을
잊지 못하는 그 사람을
모두 잊고 훌훌 털어버리는 것이다

잊음으로써 그대를
그리움의 감옥으로부터 해방시켜야 한다
잊음으로써 악연의 매듭을
끊고
잊음으로써 그대의 사랑을
완성해야 한다

그 다음엔 조용히 그러나 힘차게
다시 일어서는 것이다!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 장 석주 시 ‘잊자 ‘
[다시 첫사랑의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세계사,




1
나는
밥이다 누구에게 먹히기 위하여
있는 나는 밥이다 나는
밥인가 누구에게 먹히기 위하여
있는 나는 밥인가 작은 놈은 큰 놈에게
먹히고 작은 나라는 큰 나라에게 먹히듯
있는 나는 가여운 폴란드인가 가끔
파리도 내려앉아 빨고 먼지도
사뿐히 내려앉는 밥인가 나는
배고픔을 위하여 있는 나라인가 밥을
위하여 나는 사는가 살기
위하여 나는 밥을 먹는가 먹는 것은
나인가 입이
먹는가 입은
누구인가


2
밥을 위하여 나는
상투적으로 살았다 그것은
罪죄일까 후진국 젊은이답게 일찍 타협하고
일찍 출세하는 방법의 궁구에 머리를
쓴 것은 밥을 위하여
싫은 술을 마시고 억지로
마신 술 때문에 먹은 밥마저 토하고 괴로와
견디면 기쁜 날 오리니 광대처럼 웃고
소란스러움 사랑하리 밥을 위하여
어린 날의 내 식구들은 다 어딜 갔나
어린 나는 어둡도록 밥을 위하여
돌아오지 않는 식구들을 밥을
위하여 외롭게 기다리다가 깜빡
잠이 들기도 했지 밥을 위하여
가난한 집구석 버리고 스물 여덟 해를
어둡게 떠돌며 때로는
몸 상하지 않을 만큼 절망도 했지 밥을
위하여 밥을 먹고, 없는 아버지를 증오하고
밥을 위하여, 똥을 싸고
밥을 위하여, 오줌을 누고
밥때문에 불행이 왔다면 밥 때문에
행복이 오는 것일까 무릎을 꿇고
생각해 보면 밥은 불쌍하다
밥 때문에 절망하는 인간은 불쌍하다
오, 밥을 위하여
열두 제자중 가룟 유다는 예수를 팔았고
밥을 위하여 베드로는 닭이 울기 전까지
세번씩이나 제 스승을 모른다 부인하였고
밥을 위하여 나는 위성적으로 웃었다
오늘 낮에, 그것도 세번씩이나

일용할 양식을 위하여
그 낮은 사랑을 위하여



- 장 석주 시 ‘낮은 사랑을 위하여‘




당신이 내게 보인 뜻밖의 사적인 관심은 나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합니다. 사회적으로 널리 통용되는 관례적 방식을 빌기는 했지만, 당신의 '사랑한다'는 고백에 놀랐습니다. 그리고 기뻤습니다. 잎을 가득 피워낸 종려나무, 바다에 내리는 비, 그리고 당신. 그것은 나를 기쁘게 하는 것들의 목록입니다. 기름진 경작지와도 같은 당신의 황금빛 몸, 물방울처럼 눈부시게 튕겨오르는 당신의 젊은 사유, 그리고 서늘한 눈빛을 상상만 해도 나는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그런데 사랑이라니! 와디를 아시는지요. 사막의 강, 우기 때 물이 흐른 흔적만 남아있는 메마른 강. 난 그런 와디나 다름없어요. 누구도 받아들일 줄 모르는 인색하고 협량한 마음의 와디. 당신이 흐르는 강물이 되어 내 협량한 마음의 와디를 가득 채우고 흐르길 오랫동안 꿈꾸었지요. 나는 당신의 강물로 내 죽은 뿌리를 적시고, 마침내 잎과 꽃을 피워내고 열매 맺기를 꿈꾸었지요. 아아, 하지만 나는 그걸 흔쾌히 수납할 수 없음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랑이라는 과실을 깨물어 그 넘치는 과즙의 열락을 맛보고 싶은 욕망이 없는 건 아니예요. 몇 날 며칠의 괴로운 숙고 끝에 나는 당신의 사랑을 거절하기로 마음을 굳힙니다. 부디 내 거절의 말에 상처받지 않기를 바랍니다. 나는 이미 낡은 시대의 사람이고, 그러니 당신이 몰고오는 저 야생의 수목이 뿜어내는 신선한 산소를 듬뿍 머금은 공기에 놀라 내 폐가 형편없이 쪼그라들지도 모르죠.

그러니 나를 가만 놔두세요.

더 정직하게 말하죠. 나는 너무나 오랫동안 혼자 잠들고, 혼자 잠깨고, 혼자 술마시는 저 일인분의 고독에 내 피가 길들여졌다는 것이죠. 나는 오로지 어둠속에서 일인분의 비밀과 일인분의 침묵으로 내 사유를 살찌워 왔어요. 내게 고갈과 메마름은 이미 생의 충분조건이죠. 난 사막의 모래에 묻혀 일체의 수분을 빼앗긴 채 말라가는 죽은 전갈이죠. 내 물병자리의 생은 이제 일인분의 고독과 일인분의 평화, 그리고 일인분의 자유를 나의 자연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니 당신은 지금까지 그랬듯이 거기에 서 있으면 됩니다. 어느 해 여름 우리는 바닷가에서 밤하늘에 쏟아져내리는 유성우를 함께 바라봤지요. 그 때 당신과 나의 거리, 너무 멀지도 않고, 너무 가깝지도 않은 그 거리를 유지한 채 남은 생을 살아가고 싶습니다.



- 장 석우 ‘일인분의 고독‘




이 빵은 어디서 왔는가
당신이 절망했을 때 당신이 씹는 이 빵은
누군가 절망과 고통으로 빚은 빵이다

이 빵에서는 왜 아버지의 쉰 땀냄새가 나는가
이 빵에서는 왜 어머니가 남몰래 흘린 눈물의 짠맛이 나는가
내가 빵을 들고 쉽게 먹지 못하는 것은
아아 나는 한번도 이 빵을 얻기 위해
일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 빵은 어디서 왔는가
나는 씨앗을 뿌린 적도 없고
밀 수확을 거든 적도 없고
방앗간에 발을 들여놓아본 적이 없는데
이 빵은 누가 가져다 준 것인가

당신이 슬픔에 젖어 있을 때 당신이 씹는 이 빵은
누군가의 슬픔으로 빚은 빵이다
이 빵은 달콤하지 않고 모래처럼 서걱이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누군가 잠든 밤에 그는 혼자 일한다

이 밤 늦게까지 불켜진 창을 가진 두 집이 있다
빵을 구워내는 이가 있는 집
그리고 오래 앓아온 사람이 있는 집이다



- 장 석주 시 ‘아주 오래된 빵‘
* 간장 달이는 냄새가 진동하는 저녁, 장석주 시집 / 세계사



어렸을 때 내 꿈은 단순했다, 다만
내 몸에 꼭 맞는 바지를 입고 싶었다
이 꿈은 늘 배반당했다
난 아버지가 입던 큰 바지를 줄여 입거나
모처럼 시장에서 새로 사온 바지를 입을 때조차
내 몸에 맞는 바지를 입을 수가 없었다
한참 클 때는 몸집이 하루가 다르게 자라니
작은 옷은 곧 못 입게 되지, 하며
어머니는 늘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를 사오셨다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는 나를 짓누른다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를 입으면
바지가 내 몸을 입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곤 했다
충분히 자라지 못한 빈약한 몸은
큰 바지를 버거워했다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통 사이로
내 영혼과 인생은 빠져나가 버리고
난 염소처럼 어기적거렸다
매음녀처럼 껌을 소리나게 씹는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
나는 바지에 조롱당하고 바지에 끌려다녔다
이건 시대착오적이에요, 라고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를 향해 당당하게 항의하지 못했다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 오, 모멸스런 인생
바지는 내 꿈을 부서뜨리고 악마처럼 웃는다
바지는 인생을 이렇게 살아라, 저렇게 살아라, 라고 참견한다
원치 않는 삶에 질질 끌려다니지 않으려먼
진작 바지의 독재에 대항했어야 했다
진작 그 바지를 찢거나 벗어 버렸어야 했다
아니면 진작 바지에 길들여졌어야 했다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 오, 급진적인 바지
내 몸과 맞지 않는 바지통 속에서
내 다리는 불안하게 흔들린다
언제까지나 불사조처럼 군림하는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는
검은 그림자를 늘어뜨리고
끝끝내 길들여지지 않는 내 인생을 송두리째 뒤흔든다


- 장 석주 시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




희망은 절망이 깊어 더 이상 절망할 필요가 없을 때 온다.
연체료가 붙어서 날아드는 체납이자 독촉장처럼
절망은
물빠진 뻘밭 위에 드러누워
아무것도 보고 싶지 않아 감은 눈 앞에
환히 떠오르는 현실의 확실성으로 온다.
절망은 어둑한 방에서
무릎 사이에 머리를 묻고
서랍을 열어 서랍 속의 잡동사니를 뒤집어 털어내듯이
한없이 비운 머릿속으로
다시 잘 알 수 없는 아버지와 두 사람의 냉냉한 침묵과
옛날의 病에 대한 희미한 기억처럼
희미하고 불투명하게 와서
빈 머릿속에 불을 켠다.
실업의 아버지가 지키는 썰렁한 소매가게
빈약한 물건들을
건방지게 무심한 눈길로 내려다보는 백열전구처럼.
핏줄을 열어, 피를 쏟고
빈 핏줄에 도는 박하향처럼 환한
현기증으로,
환멸로,
굶은 저녁 밥냄새로,
뭉크 畵集의 움직임 없는 여자처럼
카프카의 K처럼

와서, 살고 싶지 않은 마음의 주인을
달래서, 살고 싶게 만드는
절망은,


- 장 석주 시 ‘희망은 카프카의 K처럼‘






** 장 석주: 시인, 소설가. 1955년, 충남 논산시. 데뷔 1975년 시 '심야' KBS 1TV TV 책을 말하다 자문위원,

2013. 제11회 영랑시문학상 본상
2010. 제1회 질마재문학상
1976. 해양문학상
1975. 월간문학 신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