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Barbara

프리다 칼로 - 불꽃의 영혼 !




프리다 칼로 [Kahlo, Frida, 1907~1954]
 
멕시코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라난
이 여자의 심장 속에서 타고 있던 정열의 불꽃은
그녀의 인생과 예술을 아는 모든 사람들의 가슴을 태운다.
 
 
사진작가이며 연인이던 니콜라이 머레이가1939년
촬영한 그녀의 모습
미술사에 이름을 남기는 여성 미술가는 많지 않습니다. 그 중에서 프리다 칼로처럼 고통과 절망 그리고 그만큼의 정열을 가졌던 여자도 드물지요. 멕시코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라난 한 여자의 심장 속에서 타고 있던 정열의 불꽃은 그녀의 인생과 예술을 아는 모든 사람들의 가슴을 태웠습니다.

여섯 살 때 소아마비를 앓게 되어 한쪽 다리가 불편하게 된 프리다에게 사고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지요. 그 후 10 대 초반의 프리다는 남자친구와 함께 집으로 가던 중 버스가 전차와 부딪히는 사고가 났습니다.

승객용 손잡이들이 달려 있던 쇠파이프가 조그맣고 여린 프리다의 몸 한복판을 관통했습니다. 파이프는 옆가슴을 뚫고 들어와 질을 뚫고 허벅지로 나왔고, 세 군데의 요추 골절과 쇄골 골절, 제 3,4 늑골 골절, 세 군데의 골반 골절, 어깨뼈의 탈구, 그리고 오른쪽 다리의 열 두 군데 골절과 오른 발이 짓이겨지는 부상을 당한 것입니다. 한 달 동안 석고 틀 속에 갇혀서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거울을 바라보고 그나마 성한 손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습니다.

힘들게 자기 자신을 지켜가던 프리다에게 운명처럼 다가온 사랑은 그녀보다 스물한 살이나 더 많은 화가 디에고 리베라였습니다. 열일곱 살의 프리다 는 어느 강당의 벽화 작업을 하고 있던 디에고를 처음 보고 그 때부터 흠모하기 시작했지요. 어쩌면 그녀는 이미 유명한 화가였던 디에고 앞에 당당하게 나서기 위해 그림에 매진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로부터 5년 후 자신의 그림을 들고 나타난 프리다와 디에고는 곧 사랑에 빠졌습니다. 이미 많은 여자들을 경험하고 두 번이나 결혼한 적이 있는 디에고 였지만 프리다는 그가 만난 여느 여자들과는 다르게 느꼈다고 합니다. 마치 우주에서 온 사람처럼 느꼈다고 해요. 스물 두 살의 프리다는 마흔 세 살의 디에고를 어린 아이 다루듯이 자연스럽게 다루었습니다.

“코끼리와 비둘기의 만남” 으로 불리는 그들의 결혼에 대해 가족들조차 축복하지 않았지요. 하지만 그들은 자기들의 인생에 있어서 서로의 의미를 직감하였습니다. 살아가면서 다른 연인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심지어 디에고는 프리다의 여동생과 불륜을 저지르기도 했으니까요), 그들의 사랑은 끝까지 갈 것이라는 것을 심장으로 느꼈습니다.

그런 뜨거운 심장을 가지고 있던 사람만이 그릴 수 있는 그림이 프리다에 의해 그려졌습니다. 내용만을 보면 오랫동안 보기에 민망하기도 하고, 다소 충격적이기도 한 작품들이었지요. 하지만, 페미니즘이 유행하였던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를 타고 프리다는 단번에 유명한 화가의 대열에 올라섰습니다.

프리다의 그림은 눈으로 보면 쉽게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의 그림은 귀로 들어야 하고, 몸으로 느껴야 합니다. 침대에 누워 아무 말로도 표현할 수 없었던 그녀의 절박한 비명을 들어야 하고, 절대로 꺼지지 않는 불에 타고 있는 그녀의 심장을 느껴야 합니다. 그녀의 그림은 어떤 연민이나 동정도 거부합니다. 오히려 그녀의 강한 눈빛처럼 더욱 당당합니다.

뒤틀린 다리를 롱스커트로 가린 채 살아간 여자였지만, 프리다는 대담무쌍한 사랑의 유희를 즐겼고, 프리섹스주의자, 양성애자, 공산주의자인 것도 당당하게 밝히고 살았습니다. 병들고 늙어 침대에 누워있어야 하는 순간에도 젊은 남자들을 곁에 잡아둘 수 있는 강력한 마력의 소유자였던 것이죠.

“그저 살아가기 위해 그림을 그려야 하는 여자”로 스스로를 칭하는 프리다는 어떤 고난에도 굴복하지 않고 오히려 한발 더 나아갈 줄 아는 용기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이었기에 멕시코를 벗어나 보기는커녕, 자신이 태어난 곳과 침대 위를 전전했던 그녀였음에도 불구하고 프리다는 위대한 예술가들의 전당에 자신의 이름과 작품을 올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프리다의 사랑
 
사랑은 과연 여자에게 어떤 의미인가?
한 남자를 사랑하기 위해서 화가가 되었다고 한다면
과연 그것이 프리다에게 잘 어울리는 말일 수 있을까?
 
여성주의가 없다면 프리다 칼로 역시 이름을 얻을 수 없었다.
그녀를 작가로 반열에 올려놓은 것은 바로 여성주의라는
시대적 흐름이었다.여성의 인권이 세워지면서 그녀의 작품들은
재평가되고 인정받기 시작했다.
 
살아생전 그녀는 단지 프리섹스주의자, 양성애자, 스탈린주의자
그리고 디에고 리베라의 세번째 부인 등등으로 불렸다.
여성주의는 그녀의 삶을 온전히 그녀의 것으로 만들어주었다.
 
그것은 프리다 칼로에게 드리워진 디에고의 거대한 그림자를
인정하는 일이며 동시에 디에고 리베라 없이도 얼마든지 훌륭한
화가로서, 인간으로서 홀로 설 수 있었던 프리다 칼로를 인정하는
일이기도 하다
 
프리다 칼로의 그림들은 여자로 말하기,
몸으로 그리는 그림의 전형과 같다.
 
그녀의 그림은 머리로 이해하기 전에 먼저
가슴에 불을 붙여야 한다.
 
우리는 그녀의 상처를 모르고는 그녀의 그림을 이해할 수가 없다.

 
 
 
머리카락을 자른 자화상,
1940, 캔버스에 유채, 40 x 27.9 cm,
The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
 
                                      
 
디에고의 잦은 외도로 인해 프리다는 여성성을 버리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프리다는 스스로를 남자처럼 표현하길 좋아하였다.
그건 아마도 자신속에 내재되어 있는 또다른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디에고의 바람에 힘들어진 프리다는 여러 여자들과 육체적 관계를
맺기도 하였다.남편의 배반으로 상처입은 프리다가 멕시코 시티로
귀국했을 때 그녀를 기다린 일은 애인이었던 니콜라스 머레이가
결혼하게 되어 그녀를 떠나야 한다는 것과,
 
디에고가 그녀에게 이혼을 요구했다는 것이다.이때의 심정을 그녀는
<머리카락을 자른 자화상>을 통해 표현하고 있다.
 
 이 작품 상단에 적힌 악보와 노랫말은 다음과 같다.
 "알겠니, 내가 날 사랑한 건 네 머리카락 때문이었는데,
이제 그 머리카락이 네게 없으니, 더 이상 널 사랑하지 않아."
 
 
내 치마가 저기 걸려 있다,
1933, 판자에 유채, 46 x 50 cm

                       
 
프리다의 옷은 마음은 없이 몸만 미국에 존재하는 프리다 자신을
표현한 것이다.그녀가 맞닥뜨렸던 여성으로서의 한계가
20세기 여성들이 맞닥뜨린 세계의 한계였다고 풀이할 수 있다.
 
여성은 과연 자신의 육신과 정신으로 홀로 설 수 있을까? 라는
질문에 대해서 프리다 칼로가 보여준 대답은 반드시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그녀의 삶은 오로지 남편 디에고만을 향했던 것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전에는 보잘것없는 평가에 그쳐야 했던 프리다 칼로를
되살려 낸 것은 여성주의였다.
 
여자가 독점할 수 없는 남자를 사랑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외롭고 고통스런 일인가를 프리다는 온몸으로 그린 그림으로
보여주고 있다.
 
 
 
Self-portrait with Bed,
1937,I adminiser extreme unction to on lamina
40 x 30 cm, Collection J. and N. Gelman
 
                        
 
그녀는 자신이 선택한 사람의 인생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그림을 
선택했다. 그를 사로잡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와의 재화를 위해 서둘러 화가가
되어야만 했다.
 
어린시절 부터 자신이 황홀하게 바라보았던 남자, 그녀는 그의
부인이 되어 그의 아이들을 낳고 키우리라 마음먹었다.
 
그러나 그녀는 아이를 간절히 원했지만 아이를 가질 수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사고로 말미암은 후유증만이 아니라
 
선천적인 기형으로 인해 자궁이 너무 좁아 임신할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게다가 그녀는 매독에도 걸려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아이를 낳으려 했고,
다시 끔찍한 하혈 뒤에 유산하고 말았다.
 
 
 
 
 
유모와 나(My Nanny and I),
1937, 금속판에 유채, 30.5x 34.5cm,
 Museo Dolores Olmedo Patino
 
                           
 
그녀의 어린시절, 어머니는 남편이 사실상 거의 실직 상태에
있었던 데다가 잇따른 임신으로 지쳐 어린 프리다에겐 거의 신경을
써줄 수 없었다.
 
그래서 어머니와 보내는 시간보다는 유모와 보내는 시간이
더 길었다. 사람은 여러 고난이 닥치면 그 이전의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한다.
 
프리다는 아기였던 시절 유모에게 안겨 있던 시절속에 현재의
자신을 투영해냈다. 이 그림은 자신이 인디오 유모에 의해
양육되어 있음을 상징적으로 말해준다.
 
그리고 자신은 대지의 어머니 같은 식물로 형상화된 유모의
가슴에 안겨 양분을 제공받고 있는 것이다.
(그녀의 양분은 멕시코 전통의 인디오적 문화라는 것)
 
 
 
 

몇 개의 작은 상처들,
1935, 금속판에 유채, 29x39.5cm,
 Collection of Dolores Olmedo Foundation, Mexico City
 
        
 
"그냥 몇 번 칼로 살짝 찔렀을 뿐입니다. 스무 번도 안 된다구요."
디에고에 의해 찔린 자신에 대해 프리다는 이렇게 그림속에
 적어놓았다.
 
디에고가 자기 부인의 여동생이나 가장 친한 친구와 바람을
핀 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그러나 디에고는 프리다가 자신을 가장
잘 이해하고 사랑하는 여인이란 사실을 망각했다.
 
여동생과 남편과의 관계를 안 프리다는 크나큰 상처를 입어야 했다.
설령 디에고가 세상 모든 여인과 정분이 난다고 할지라도 피했어야
할 여인이었다. 
 
프리다는 자신이 만든 태양으로부터 버림받았고,
그 허무를 잊기 위해 많은 남자들을 만났게 되었다.
자신이 양성애자라는 소문이 퍼지는 것도 모르는 척했다.
 
1939년 말 프리다가 파리에서 돌아왔을 때, 디에고는 이혼을
요구했고 이들은 결별했다. 그러나 1941년 초 디에고는 더 이상
프리다가 없는 삶을 견딜 수가 없었고, 그것은 프리다도
마찬가지였다. 사랑은 언제나 그녀에게 상처였지만 사랑은
그녀에게 전부였다.
 
 
 
상처입은 사슴,
1946, 캔버스에 유채, 22.4x30cm,
Collection of Mrs. Carolyn Farb, Houston

             
 

프리다의 생일은 아즈텍 달력에서 사슴의 날이다.
사슴과 자신을 동일시하여 사슴의 몸을 하고
온몸에 화살을 맞은 프리다가 등장하는 그림을 그린다.
 
비록 여러 개의 화살 때문에 피를 흘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시선은 매우 투명하고 강한 빛을 발하고 있다.
이는 삶에 대한 강한 의지와 자신의 고통이 오히려 예술로
승화되었음을 나타낸다. 그녀에게 고난은 두려운 대상이 아니었고
매우 낯익은 존재였다.

 
부서진 기둥
1944 캔퍼스에 유채
40 X 30.5cm 
 
                     
 
32번의 수술 육체의 고통은 평생 프리다를 따라 다니는데
자신의 고통을 화폭에 그대로 옮겨 놓았다. 그녀는 가끔씩
재발하는 상처와 싸워야 했으며 코르셋과 목발에 의지해 걸어야
했다.
 
그렇지만 고통 속에서 그녀만의 지혜를 터득하게 된다. 그리고
디에고, 두 사람을 따로 떼어놓고 이야기한다는 것은 사실 거의
불가능하다.
 
이 두 사람 사이의 가장 큰 문제는 서로의 인생에서 상대방이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컸다는 것이다. 거의 전부라고 할 수 있을
만큼, 그렇기에 디에고를 사랑하는 만큼 디에고에게 상처입어야
했다.

 
 
 
불쌍한 조부모님,
부모님 그리고 나,
1936, 금속판에 유채, 30.7x34.5cm

         
 

유산으로 갈갈이 찢어진 몸으로 미국에서 돌아온 프리다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어머니의 죽음이었다. 그리고 치매에 걸린
아버지의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일이었으며 어린 시절 서로에게
가장 애증의 관계로 엮였던 동생과 남편의 불륜도 알게된다.
 
프리다의 아버지 기예르모 칼로는 우울한 눈빛의 유태계 사진사로
예술적인 감수성이 강했고, 어머니 마틸드 칼데론은 스페인과 토착
원주민의 피를 이어 받아 강인했고 현실적이었다. 

프리다는 허약하고 몽상적이었던 데다가 간질마저 앓고 있던
아버지에 대해 지극히 헌신적이었고, 아버지 기예르모 역시 자식들
중에 프리다를 가장 예뻐했다. 그런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디에고라는 남자를 만나게 했는지도 모른다.
 
프리다는 1936에 이 그림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잘 얘기하고
있다.  유럽인이었던 아버지와 인디오의 피를 물려받은 어머니를
둔 프리다는 프리다는 가족의 뿌리와 멕시코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중요시했다. 이 작품에서도 태어나지 않은 생명에 대한 프리다의
애정이 묻어난다.
 
 
 
내 마음 속의 디에고,
1943, 캔버스에 유채,
76x61cm, Gelman Collection, Mexico City
 
                   
 

그녀는 자화상 프리다의 이마에 디에고를 새겨넣을 만큼 남편을
사랑했다. 프리다가 그를 최초로 만난 것은 학교의 프레스코 벽화
작업을 하고 있을 무렵의 일이었다.
 
벽화는 문맹율이 높았던 멕시코 국민들이 가장 쉽게 역사를 배울
수 있는 교육수단이 되었고 벽화운동의 거장이 디에고였다.당시
디에고는 이름난 화가였고, 이미 복잡한 여자관계를 맺고 있었다.
 
어린 여학생이던 프리다 칼로는 여인의 삶과 살을 탐닉하던
이 거인에게 자신의 인생과 영혼을 송두리째 들어다 바칠
각오를 한다.
 
프리다 칼로는 디에고 리베라에게 자신의 그림을 들고 성큼성큼
걸어들어 갔고, 디에고는 그녀의 재능과 그녀의 매력에 빨려
들어갔다.
 
마치 거대한 행성이 작은 블랙홀에 빠져 들 듯이….디에고는
이 연약한 여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신비로운 힘에 매료당한다.
 
자신의 침대를 벗어나 본적이 없으며 머리 맡에 붙은 거울을 보며
자신의 모습 이외에는 그려 본 적이 없는 소녀와 사랑에 빠진
것이다.
 
“코끼리와 비둘기의 만남” 으로 불리우는 그들의 결혼에 대해
가족들 조차 축복하지 않았다. 상처입기 쉬운 그녀와 무딜때로
무딜 수 있는 디에고의 만남.
 
프리다에게 디에고와의 만남은 일생의 두고 상처를 주었다.
두 사람은 애증의 연인이자 예술적 영감의 상호 교류되는
이념과 예술을 교감하는 투쟁의 동지였다.
 
 
 

두 명의 프리다,
1939, Oil on canvas, 173.5 x 173 cm,
 Museo de Arte Moderno, Mexico City
 
 

소아마비로 다리를 절던 어린 프리다는 주변 아이들로부터 놀림을
받아야 했고, 프리다 칼로는 스스로 자신은 남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프리다 칼로의 유년 시절은 고독했다. 어머니는 늘 지쳐 있었고,
아버지는 그녀를 사랑했지만 현실에선 무능했다. 그녀의 가족 중
프리다와 가장 친했던 언니 마티타는 그녀의 나이 일곱 살 때 가출해 버렸다.
 
고독한 프리다는 늘 마음 속에 자신의 분신을 품게 되었고,
1939년 <두 명의 프리다>를 통해 그런 자신 내면의 분신을 드러냈다.
또 그녀는 자신의 일기장을 통해 또 하나의 프리다라 할 수 있는
자신의 내면과 대화를 나누었다.
 
또 하나의 프리다는 고독과 아픔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녀의 꿈이다. 웨딩 드리스를 입은 프리다의 심장은 비어 있고
동맥은 끊어져 있다. 프리다에게 이별은 자아가 두 개로 분열되는
고통을 감내하는 것이었다.
 
 
우주와 지구, 그리고 멕시코에서 나와 디에고,
솔로틀Xolotl이 벌이는 사랑의 포옹,
1949, 캔버스에 유채, 70x60cm,
Collection of Jorge Contreras Chacel, Mexico City

 
           
 

그녀는 의도적으로 디에고로부터 떨어져 나와 그녀의 푸른 집과
철제 코르셋에 스며들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그녀는 생명과 죽음,
사랑과 증오, 우주와 인간 사이를 이어주는 그림들을 그렸다.
 
벌거벗은 디에고를 안고 있는 자신과 그들을 안고 있는 여신(땅)은
조국 멕시코에 대한 애정의 표현이다. 프리다는 디에고에 대한
사랑을 모성애로 승화시키며 여성으로서의 자신과 작가로서의
자신을 성숙시켜 나간다.
 
"일생동안 나는 두 번의 심각한 사고를 당했습니다.
하나는 18살 때 나를 부스러뜨린 전차입니다.
부서진 척추는 20년 동안 움직일 수가 없었죠.
 두번째 사고는 바로 디에고와의 만남입니다."
 
디에고, 탄생/ 디에고, 건설가/ 디에고, 나의 아이/ 디에고,
나의 약혼자/ 디에고, 화가/ 디에고, 나의 연인
/ 디에고, 나의 남편/ 디에고, 나의 친구/ 디에고,
나의 어머니/ 디에고, 나의 아버지/ 디에고, 나의 아들/
 
디에고, 나/ 디에고, 우주/ 디에고, 통일 속의 다양함/
그런데 왜 나는 '나의 디에고'라고 말하는가?
그는 결코 내 것이 아닌데. 그는 오직 그 자신의 것일 뿐이다."
 
"디에고는 평생을 두고 살아가는 동안 결코 당신의 존재를
잊지 않으리라. 당신은 지친 나를 안아주었고 어루만져 주었지.
 
너무도 작은 이 세상에서 시선을 어디로 향해야 하나?
너무 넓고 깊어라! 이제 시간이 없다.
더 이상 아무 것도 없다. 아득함. 오직 현실만이 존재한다.
그랬다. 항상 그랬다."
 
- 프리다가 남긴 메모들 -
 
 
 
물이 내게 주는 것,
1938, 캔버스에 유채, 91x70.5cm,
Isadore Ducasse Fine Arts, New York
 
                   

 
그녀 스스로의 말대로 부서질대로 부서진 육신이었지만
그녀의 영혼은 강인했다. 그들의 서로의 만남이 운명임을 직감했고
평생을 같이했다. 하지만 디에고는 사랑해도 독점할 수 없는
남자였으며 디에고를 사랑할수록 프리다의 외로움은 더욱 깊어갔다.
 
세상의 모든 여자들은 그들의 몸 안에 삶과 죽음의 경계를 품고
있는지 모른다. 프리다는 물감대신 자신의 피를 짜내 그리는
여인이었다.
 
최후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미 살았고 죽었던 삶, 물은 인생이다.
 
... 이 외출이 행복하기를 ...
...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 않기를 ...
프리다는 마침내 생의 고통을 떨치고
삶과 죽음이 하나인 곳......
멕시코의 자연 속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