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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rbara

이중섭 - 사진모음


둘, 이중섭 화백의 사진모음
조회(886)
이미지..,love. | 2007/04/18 (수) 2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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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는 전생에,,,
                                      소였나 보다.
                                      어진 눈으로,,,
                                쓸모 없는 것까지 담아내던
                                       너는 전생에,,,
                                       소였나 보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이중섭 화백의 사진, 외로움이, 그리움이 묻어 있다.
 
 

" 제 아이 자식들 마저 제 손으로 먹여 살리지 못해 처가(日本)로 보내고
그저 그리움에 안타까워 하던 꼴이 밉살스러워서 인가?
중섭형, 자네같이 못난놈은 없을걸세
그 좋은 재간, 아름답고 따뜻한 마음보를 갖고
그래 사내자식이 더 살아 배길수가 없었단 말인가?

나같이 흉칙한 놈이 이렇듯 어지러운 세상일지라도 이리저리 나갈 수 있는
반성과 용기를 또 누구에게 의존해야 한단 말이냐
내가 듣고 보고 아는 한 가장 아름답고 깨끗한 사람으로
나는 형을 우러러 사모해 왔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좋은일(작품)을 한 화가를 치면
형을 엄지 손가락에 꼽는
우리의 심정 만이라도 알아주어야 하지 않겠나?

내나 또한 형을 아끼고 숭모하는 친구들을 젖혀 놓더라도
형 처나 아이 자식들의 안타까이 그리워 하는
숙원은 어떻게 되느냔 말이다
임종이 외롭다기 보다
자네는 자네만 아름답게 살았고
좋은 그림을 남기고 가면 그만이라는
그 배짱은
도대체 어디서 생긴 것인가?

너만이 착하고 아름답고 너만이
좋은 그림을 그린것이
우리에게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이냐?
너 같이 너 만이
깨끗하고 아름답게 살려는 놈은
죽어야 마땅 해."


    
-9월 11일, 화장터에서
(서울신문) 1956.9.16  박  고석.
 
 
 
 


  -노래하는 이중섭, 독일민요 소나무를 좋아해서 누가 시키거나 혼자일때 평생 즐겨 불렀다 한다.
 


  -평양 종로 공립 보통학교 졸업사진 - 아래에서 세번째 맨 오른쪽.
 


  -동경 유학시절, 24세 햇살처럼 말게 웃던 청년 이중섭.
 


  -1945.4 결혼사진.
 
-고향에서 이주해 살던 원산까지 신부가 찾아와 한국식 혼례를 치뤘다. 대학 2년 후배인 마사코와 열애끝에아내로 맞음, 아내의 이름도 '이 남덕'으로 바꿈. 고난한 불우한 결혼생활,,, 서귀포에서 피난생활 1년이 이들이 가장 행복한 시절이였으리라 추정, 6.25라는 동족상전이 이중섭의 가족을 헤어지게 한다. 두아들을 두었지만 가난한 예술가는 가족을 처가로 보낸다. 한번 밀항으로 만나지만 그 이후, 죽을 때 까지 다시 보지 못한다.
 
-부인과 두 아들은 현재 일본에 살고 있다.
 


  -해방기념 미술전 - 1945. 10. 덕수궁 석조전, 왼쪽에서 4번째.
 


  -작고하기 1년전 1955.05. 대구 미문화원 개인전에서 죽마고우 김이석과 함께.
 


    -부산 피난시절 - 고단한 생활속에도 그림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았다.
 
 

  -부산 피난시절 - 왼쪽이 친구 황영수와 김서봉.
 


  -1938년의 이중섭 - 동경 문화학원 시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