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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운 거리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神의 길, 人間의 길,, -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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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love. | 2007/10/17 (수)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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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카의 검은 돌은
원래 흰색이었다고 해요
 
아담과 이브가 낙원에서 쫏겨나면서
손에 움켜쥐고 나왔다는 돌,
그 후로 수많은 순례자들이 찾아와
입을 맞추고 만지는 동안
그들의 고통을 빨아들여 캄캄한 돌이 되었다지요
 
내게도 검은 돌 하나 있어요
그 돌은 한때 물속에서아름다웠지요
 
오래전 해변을 떠나며
무심코 주머니에 넣고 온 돌,
그러나 그토록 빨리 빚바랠 줄은 몰랐어요
내가 고통을 견디는 동안
고통이 나를 견디는 동안
돌 또한 나를 말없이 견디어 주었지요
 
어느 날부터인가 돌을 만지는 게 두려워졌어요
돌을 열 수도, 닳게 할 수도 없으면서
돌의 본성이 너무 깊이 박힌 손,
내가 만지는 것마다 돌이 되어버릴 것 같아서요
 
빛바랜 돌을 바라보며 떠올려봐요
돌이 물속에서 빛나던 때를
검은 물기 위에 어룽거리던 무지개를
 
그 찰랑거리던 아침이 내게도 있었겠지요
메카의 검은 돌이
아주 오래전 흰색이었던 것처럼
 
 
  -나희덕 시 '캄캄한 돌'모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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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니체의 책을 처음으로 만난 것은 열일곱살 무렵... 의정부의 숭문당이란 책방에서 였다. 돈이 없던 학생이였던 그 시절,, 저렴한 핸드북 쪽에서 책을 잘고르던 내게 당시 '삼중당'이라는 작은 책을 만드는 곳에서 만든,,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이책이 니체와의 첫 만남 이였다. 그 이후에 잡은 책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 두권의 두툼한 깨알같은 글씨로 이어진,,  이후에 이책은 나와의 길고 긴 정독의 싸움이 이어졌으니,, 당시에 철학서로만 알고 있던 이책은 예상과는 다른 어려운 철학서는 아니였다. 시적인 영감을 불러 일으키는 소제목들이 나를 잡아 당겼다. 부분적으로 주어지던 시간은 알바이트 중간중간에 읽다가 이어지지 않는 문장의 맥속에 어딘가 던져 버리고,, 다시 대학 1학년때에 다시 읽게 되었고,, 이때도 80년대, 현실의 복잡다난함에서 읽다가 중도에 그만두기를 두어번, 철학적인 사색보다는 밥 한그릇의 따스한 포만감과 금전적인 압박감은 니체를 뒤로 또다시 밀어 버렸다. 이러기를 수차례, 이제야 정독을 두어번 하였다.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기독교적인 토대에서 자라나던 니체는 5살때에 아버지를 여위었다. 기독교를 접했던 사람들에게 니체는 두려워지는 존재임이 틀림없다. 내가 배운 대로라면 짜라투스트라의 설교는 악마의 속삭임이요, 오만하기 그지없는 인간의 절규로 보인다. 하지만, 이책을 읽는 것만으로 신에대한 배신행위처럼 여겨져 책을 덮는다면 "神은 죽었다!"고 외친 그의 말만 확인할 수 있을 뿐,,, 그 절규에 내포된 진정한 의미는 4부까지 다 읽고서야 이해가 되어진다. 목사관에서 태어난 니체가 기독교신앙을 "유아기부터 우리에게 부과된 관습과 편견"이라고 말했을 때 느꼈을 그 억압을 이해한다, 종교적 제도의 독단과 부패에 대한 실망은 오래전부터의 이야기이고,, 우리의 '틀',,  교육받아온 도덕적 관념들과 선악의 틀... 그러나 인간이 짐승과 초인 사이의 심연위에 매인 밧줄과 같은 존재라 할 때, 어찌 흔들림 없는 삶이 있을 수 있을까?!,,,, 우리의 삶속에서 순간순간에 오는 '위험한 선택의 순간들',,, 그 위험들은 위험 ㅡ자체만이 아니며 그것이 얼마나 창조적인가, 파괴적인가 하는 것이며, 그 위험들을 겪어내지 않고는 진실로 인생앞에 겸손해질 수 없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니체의 삶과 철학은 당대의 모든 체계와 질서를 끊임없이 새로운 삶과 더 나은 깨닳음을 창조해 나가라는 속삭임으로 가득차 있다. "부셔 버려라, 낡은 표(表)를!" "자, 보라 이 남아도는 사람들을! 그자들로 부터 떠나라!" 이 해머를 든 니체가 가장먼저 그리고 격렬하게 싸운것은 기독교적 윤리였다. 그는 과연 신을 부정한 것일까?!... 그의 책 곳곳에서 그리스도의 말과 행적을 의식한 동일시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음은 재미있다. 니체는 인간을 낮추게 만든 기독교적 윤리에 가차없는 비판을 하지만, 예수에 대해서는 상당한 긍정과 찬사를 보내고 있다. 물론 긍정과 부정이 공전하는,, 자기모순에 빠진것 처럼 보이는 진술속에서 그의 진의를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무신론자나 신앙인도, 보수주의, 파시스트, 혁명가도 그의 말을 따서 '폭력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것도 그런 성향 때문이라 보여진다. 그러나 이러한 자기모순은 사유의 혼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유의 치밀함에서 오는 것이라 믿는다. 모든 '인용'은 부분적임에랴... 니체의 부정정신은 부정을 위한 부정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긍정과 창조를 위한 부정이라 본다.
 
-니체는 왜,  "神은 죽었다!" 라고 반(反)그리스도를 표방했을까? 그가 만들어낸 '짜라투스트라'는 운명애, 영원회귀, 힘에의 의지 등의 개념은 기독교와 대립되는 듯 보이면서 일정한 상관관계를 보여준다. 예수가 천상의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산상으로 올랐다면, 짜라투스트라는 지상의 복음, 인간(초인)의 탄생을 알리기 위해 산에서 내려왔으리라. "나는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한 예수와 "길이란 현존하지 않는다"라고 말한 짜라투스트라, 이 상반된 개념의 말은,, 진리를 향해 스스로 자기의 짐,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는 동안에 변화되고 생성되는 길이라고 한다면 결국에는 같은 '길'이 아닐까. 짜라투스트라는 진리에 대해 "그것은 발견되기를 기다리는 어떤것이 아니고, 당신이 복종하거나 머뭇거리는 어떤것도 아니다. 그것은 당신이 의도하는 어떤 것이다"라고 말했다. 짜라투스트라는 제자들을 떠나며 말한다. "나는 이제 혼자 가겠다, 제자들이여! 그대들도 역시 멀리 혼자 떠나 혼자가 되어라!... 떠남으로 짜라투스트라로 부터 그대들을 보호하라!"  생각해 보면 인생은 홀로 떠나는 외로운 길이다. 세상의 모든 부정과 혼란과 위험 속에서 자기긍정이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우리는 모두 외롭지만 '행복한 길' 떠나는 나그네라 느낀다. 친구들이여, 모두를 가깝게 느낌은 감사함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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