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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사는 이야기

김영원 시인의 詩 읽기.

부동심.





-끈 / 김영원


그렇게 수고하시던 여섯째 날
잠시 짬을 내신 하나님이
바둑의 신 알파고와 한 판 대국을 벌이셨다 반상의 우주에서 실수는 금물이다
어쩌다 자충수를 두고 발목을 잡힌 하나님
밑줄 치고, 복기하고
장고 끝에
그야말로 신의 한 수를 두었다
구사일생으로 꽁무니에 퇴로를 확보하고 끈을 하나 묶어놓은 것인데
질기고 영민하긴 괄약근만한 끈도 없다
기습적인 복병들이
허세인지 실세인지 재빨리 알아채고
때와 장소를 가려 절묘하게 열고 닫는다 생사를 책임지는 끈, 평생 써먹어야할 상책이다 우리 할머니,
어느 날 속곳에 핀 애기똥풀꽃
끈이 때를 안다는 뜻이다


- 의자가 많은 골목 / 김영원


한 번도 앉아보지 못한 의자는 있어도 한 번만 앉아본 의자는 없는 골목이다 불타는 파마머리로 정직한 거울을 감쪽같이 속여먹는 여왕벌미용실,
잔술도 마다 않고 빈속을 채워주는 배불뚝이네 순대 좌판,
그리고 급한 김에 주방바닥에 엉덩이 훌떡 까고 오줌을 싸다 빼꼼 열린 창문에게 들켜
에구머니나 어쩔 줄 모르던 조개구이집 여사장이 바로 저 의자들의 장본인이다 누구의 행복은 또 다른 누구의 불행이 될 수도 있다지만
사람 사는 게 다 그렇고 그렇다고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이 아무것도 지킬 것이 없어 대문이 필요 없는,
그 홀가분한 몸을 자유라고 믿고 싶은 사람들이
생기는 것도 없이 수고하는 오후의 햇볕에게 달콤한 피로회복제 한 병 뚝! 따주는 골목이다 골목 식구들보다 더 시장을 사랑한다는 사람들이 때가 되면 찾아와
국밥 한 그릇, 꼬치어묵 몇 개 먹어주고 사진 찍고 가는 골목,
혼자가 아니고 여럿일 때 가장 힘이 세고 비 오는 날에도 해가 뜨는 골목,

몰라도 되는 명함보다 의자가 많아서 좋다



- 곡선의 운필법 / 김영원


아침은 어디서 날아오고 저녁 또한 어디로 돌아가나 나날을 맞이하고 떠나보내던
귀 닳은 시간의 모퉁이에 사색이 깊다 바르게 서고자 허리를 굽히고 좌절하지 않으려고 돌아서 가는
강의 좌안과 우안에는 물푸레나무가 맨입을 적시고
수심 가득 은빛 지느러미들이 파닥거린다

계절이 계절을 뒤따르고 사람이 사람을 이어가듯
부드러우면서 저돌적으로 제 몸을 밀고 가는 저 곡선의 의지
하류로, 하류로
바람의 속주머니를 뒤져
변화무쌍하게 펼쳐내는 풍경이 절창이다 직선에도 어엿한 곡선이 있다
바이올린이 현을 깨워 청중을 위한 선율을 앓고
팽팽하던 빨랫줄이 분홍빤스 하나 널어놓고
는실난실 관음을 갖고 노는

- 고독한 중심 / 김영원
아직 길이 되지 못한 맹지,
맞은편까지
장대 같은 이목을 건네 놓고 조바심을 부추기는 기다림이란 본디
잘 안 지켜지는 약속을 기다리는 것인데
격절이 끼어들면
날씨 또한 덩달아 흐려진다 단지 개인적인 슬픔일까? 누가 그랬지 유추하지 말라고
진실은 사랑이고 허구는 실연이야 비는 구름의 작심, 지상을 향해 곤두박질하는 빗줄기 속에
우산도 없이 홀로 선
나목의 시간!
깃발이 젖었는지 아니면 내가 젖었는지 세상을 흔드는 바람소리 빗소리가 요란하다 그도 저도 하늘을 사랑한 증거
비를 맞는 그 자리가
우주의 중심이고

- 식탁의 도반들 / 김영원 경력

20년 배달의 달인
똬리 하나로 층층 밥을 머리에 이고 시장골목을 질주한다 균형감각을 잃는다는 건 생업을 포기하는 것
한 방울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다
꽃잎이 꽃술을 떠받들듯 음식을 받드는 자세가 반듯하다 허기들이 모여드는 식탁,
무릎을 굽히지 않으면 의자를 차지할 수 없다
한때 좌초된 연애 앞에 단식도 불사하던 그 불굴은 어디 갔을까
눈여겨 다시 보니
밥이 이르는 말을 예사로 듣지 않고
온전히 받아 적는 눈치다 누가 말했지, 밥 냄새를 맡고 각을 세우는 어깨는
식탁에 들지 못한 떠돌이 입이라고 집밥 또는 가정식백반이 오랫동안 챙겨주던 찰진 미각에
모서리를 내준 식탁,
가끔 만취한 의자가 속내를 엎지르는 좌불안석은 본의 밖의 일이지만
재빨리 얼룩진 표정을 수거하고 평정심을 복원하는
마른행주가 무골성인이다



-저절로 써지는 詩 / 김영원


느닷없이 뒤통수를 쾅 때리는
詩 한 수 그려내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라지만
온통 캄캄한 머리를 다 쥐어짜다 그만
베란다에 기대어 하늘을 바라보니
수상한 낚싯줄 몇 가닥이
구름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게 아니겠어요
어느 중년나이트클럽에서 던져 놓은 레이저낚시라는데
순간, 나도 한 번 콱 물고 뛰어들고 싶기도 한 밤이었는데요
아닌 게 아니라 벌써 뚜껑 열린 청춘들이
“나 잡아 봐라”하고 쭉쭉 빵빵 물 자랑을 하더니
어느새 개나리모텔인지 목련장여관인지는 몰라도
불장난 하는 소리가 씨근덕뻐근덕 그려오는데요
오늘따라 바람은 왜 이렇게 심란한지
그저 싱숭생숭 날밤을 까고 아침 출근하는 길가에
이런, 이런
아직도 여운에 겨워 자목련이 입을 다물지 못하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던 광란에
개나리 실밥이 터져 샛노란 조동아리를 왁자르르 까발리는데요
어젯밤 불장난이 정말 장난이 아니었나봅니다
이러니 저절로 詩가 안 써지고 배기겠어요
봄은 물론,
말할 것도 없고요



- 바람의 그라피티 / 김영원


뿌리 없이 떠도는 유목이다
미지의, 오직 하나의 후회를 찾아가는 하지만 집착이란 얼마나 무거운 형벌인가 결핍을 물고 태어나
사방팔방 치닫고 회오리쳐도 꼬이지 않는 너는,
가벼움을 견디는 바람 보이지 않는다고 뼈가 없으랴 산딸나무 포인트 벽지가
이따금씩 새소리를 끼워 넣고 가지를 흔들어 적막을 깨우는데
소심했던 나의 창문에
아침처럼
한 계절을 밀면 또 한 계절이 보인다 오늘이 지나도 여전히 오늘인 날들 바람 이전에는
침묵이었으므로 허무였으므로 습관처럼 너는
나를 지나가고

-가시거리 / 김영원
등산길에서 서로 보듬고 다정하게 걷는 저거들은 불륜이고
모르는 사이처럼 따로 떨어져 걷는 저거들은 부부인기라 산벚꽃나무 아래
귀를 당기는
아줌마들의 만개한 입방아에 평소 걸음이 늦은 아내보다 한 발 앞서 걷다
왠지 들키지 말아야할 속셈을 들킨 것만 같아
그저 민망스러운데

슬쩍 곁을 훔치고 지나가는 애완견 한 마리,
간간이 돌아서서 후방의 가시거리를 선명하게 복구하고
다시 척후에 나서기를 반복한다 “고놈 참 명견이네! 워리워리 이리와 봐“
누군가 손을 내민다 그러나 한 번도 가시거리를 포기한 적 없는 충복들 드러난 간격이 헐렁해보여도
외간의 잡념 하나 끼어들 틈이 없는
찰떡궁합이다

- 굴참나무,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 / 김영원

누군가 잃어버렸을 화살표를 지나
냉골 안개의 시간을 지나
호기심 많은 어린고라니가 몰래 사람구경하는 골짜기 정상으로 가는 길은 아직 먼데 저 대책 없는 굴참나무,
어쩌자고 길을 막고 자리를 잡았는지
근육질 다리들이 잠복중인 구름을 밟고 허우적거리다
실족을 떠넘기는 손질에
물기를 죄다 쏟고 고사 직전이다 마침내,
해거름에 귀가하는 새소리 하나 받아 걸지 못하고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작심한 뿌리들,
상처란 상처가 다 들고일어나
얼마나 저 단단한 돌 틈을 헤집었던지
하얗게 드러난 뼈마디에 핏자국이 선명하다 어느 생이 이토록 치열했을까
요지부동으로 자신을 견디느라 구멍 난 옷 한 벌 없는
언제부턴가 저 몸에 윤이 나고 있다
더 질기고 빤질빤질하게



# 김영원 프로필
계간 창작산맥 편집위원
제 9회 김우종 문학상 수상
움시 동인




** 쌀쌀하다는 것은 쓸쓸하다는 것인가? 올 겨울에 처음으로 -7도를 넘기며 모두가 어깨를 움추리고 두꺼운 겨울옷에도 불구하고 종종걸음을 걷던 날 문득,, 나에게 물었다. 하루하루 계획했던 일들을 진행하며 사소한 흘림들이 문득 숨을 조여 올 때,, 어느덧 12월의 초순을 넘기고 있다. 계획적인 절제된 식단과 하루의 운동량.., 만족감을 느끼지 못하는 뭔지모를 ‘불 충만’은 쫒기는 시간 탓인가?!… 정직하게 ‘관조함’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