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와 사는 이야기

‘공감’의 확대 / 김 완화 시.

‘길’을 열어 나간다.




- 허공에 매달려보다



곶감 먹다가 허공을 생각한다

우리 일생의 한 자락도

이렇게 달콤한 육질로 남을 수 있을까

얼었다 풀리는 시간만큼 몸은 달고

기다려온 만큼 빛깔 이리 고운 것인가



맨몸으로 빈 가지에 낭창거리더니,

단단하고 떫은 시간의 비탈 벗어나

누군가의 손길에 이끌려

또다시 허공에 몸을 다는 시간



너를 향한 나의 기다림도

이와 같이 익어갈 수 없는 것일까

내가 너에게 건네는 말들도

이처럼 고운 빛깔일 수 없는 것일까



곶감 먹다가 허공을 바라본다

공중에 나를 매달아 본다

보이지 않는 힘으로 감싸는 빈 손

내 몸 말랑말랑 달콤해진다



- 서해 낙조



그대 그리운 날은 서해로 간다

오가는 길과 길 사이로

초록빛 그리움 안고 달리면

내 안으로 나무 하나 깊이 들어선다

계절마다 하늘 바꿔 이는 저 느티나무도

한 생을 이렇듯 푸르게 드리우지 않는가

참매미 쓰르라미 숨찬 울음소리에

산과 강 뜨겁게 열리고

불볕 속에서도 길은 서해로 달린다

십리포, 만리포에 이르러

제 가슴 한쪽을 여는 바다

짙은 쪽빛 껴안고 섬 하나 키운다

파도는 몇 번의 물때를 바꾸며

생의 바튼 숨길 씻어 내린다

파도소리에 귀먹은 모감주나무

수천 번 푸르름 길어 올리고서야

제 가슴에 능소화 몇 송이 붉게,

붉게 꽃잎 틔운다

서해, 하루는 붉게 달아올라

큰 바다 비로소 받아 안는 해의 몸

길에서 바다로, 다시 파도 속으로

너에게로 오롯이 이어져

가슴속에 등불 하나 살아 오른다



- 산길



뻐꾹새 소리 따라 걷는다

산속 들어도

뻐꾹새 보이지 않고

소리만 환하게 산을 울린다



뻐꾹새는 나무 위에서 우는 게 아니다

내 속에서 울고 있다

숲으로 한참 걸었는데도

소리만 울창하다



뻐꾹새 어디에 있는 걸까

산속 깊이 들어갈수록

소리만 더욱 울울창창하다

소리는 다만

산으로 나를 끌어당길 뿐,

뻐꾹새 좀체 보이지 않는다







- 기억 속의 길



네가 스쳐간 곳에는 상처가 남는다

이렇게 겉으로 차오른 푸른 멍

그 안에 짙은 물빛 일렁이는 바다



누구도 피할 수 없는

바위보다 단단한 침묵,

북극 나침반보다도 단호한

숨의 멈춤.



네가 스쳐간 풀잎 끝에는 향기가 흐른다

아직 채 이슬 걷히기 전

들녘의 가느다란 길 다라

그대 깨우고 간 새벽



들길은 더 넓게 트이고

바람 스쳐간 풀잎 끝에

아리고 저린 기억.



- 시작시인선 0087 [허공이 키우는 나무]




햇살 속 걷다가
큰 나무 그늘에 들었다
나무는 나를 품고 생기가 돈다
그대가 드리운 사랑의 심연
출렁이는 파도 속에
하늘 걸려 있다
숲은 적요하다
그늘 속 가지를 뻗고
이파리 묻으며 자란다
작은 풀잎까지
가까이 불러 그늘을 키운다
그늘이 내 몸속에 들어온다
내가 그늘 속에 뒤섞인다
나무는 햇살과 그늘을 두고
허공을 끌어안는다
비로소 서늘한 길이 열린다.


  -김완하 시 '내 몸에 그늘이 들다'모두



* 시 정신 이란 생명 있는 대상은 물론이거니와, 무생물에도 생명 이상의 가치와 정감을 지니고 대하는 자세이다. 모든 사물을 생명과 사랑으로 관계 맺으려는 마음을 말한다. 이러한 시정신을 가지고 살아갈 때 우리 사회는 무관심, 무관용, 자기애착 에서  벗어나 ‘나’와 ‘너’가 존재하는 사회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시인은 시를 쓰는 사람을 말 한다. 하지만 현대처럼 시가 빠르게 소비되는 시대에는 ‘공감’과 어떤 유 무형의 ‘어울림’이 더욱 필요하다. 세상엔 ‘멋 있는 시’도 ‘맛 있는 시’도 필요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우리의 생활에서 ‘공감’을 얻지 못하면 소멸되곤 한다. ‘시 정신’이란 단어가 시대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재 강조 되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