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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루나무 미루나무 [최갑수] 나를 키운 건 다름 아닌 기다림이었습니다 나의 안부를 궁금해하지 마세요 당신이 떠나가던 길 나는 당신의 아름다운 배경이 되어 흔들려주었으니 당신이 떠나간 후 일말의 바람만으로도 나는 온몸을 당신쪽으로 기울여주었으니 그러면 된 것이지요, 그러니 부디 나의 안부를 궁금해하지 마세요 내 기다림은 그렇게 언제나 위태롭기만 한 것이었습니다 - 단 한 번의 사랑, 문학동네, 2021 욜랑거리다 [최서림] 말에 붙잡혀 사는 자, 꽃들에게 나무들에게 새 이름을 붙여주고 있다 그에게도 미루나무 담록색 이파리 같은 시절이 있었다 내일은 언제나 새로운 기차처럼 다가왔다 라스콜리니코프처럼 말에 붙들려 들떠 있는 자, 언제나 낡은 정거장에 홀로 중얼거리며 서 있는 기분이다 이 기차를 놓치면 다음 기차가 오겠.. 더보기
‘강렬한, 직관적인 자기응시’ - 김승희 시. 누가 이렇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가지를 효수해 걸었을까? 목을 매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는 이렇게 목을 매는구나 울먹이는 마음 나 돌아가는 길에 어느 어둠의 모서리에 부딪쳐 쓰러지지 말라고.... 그런데 어두운 골목 옆 환한 담벼락 안에선 동화 같은 이런 말이 소근소근 들려오는 것도 같다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니?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지? 전원에 줄만 꽂으면 꾸벅꾸벅 절하는 각시와 신랑 인형의 전기줄을 꽂아놓고 어여쁜 한국인형의 절을 받으며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니? 거울 앞에서 웃는 사람들의 담소의 목소리 요즘에는 묻는 사람들에게마다 네가 제일 예쁘다고 말해주는 요술거울이 나왔나 보다 백설공주의 기억을 잊어버린 그런 거울 하나씩 갖고 동그라미 -.. 더보기
‘부처와 보살’ 사이에서 - 공광규 시. 멀리 순항하던 비행기가 갑자기 비상착륙을 하려면 항공유를 모두 버리고 무게를 줄여 출발했던 곳으로 돌아와야 한다 안전한 착륙을 위하여 정상항로를 벗어나서 비싼 항공유를 모두 바다에 버리고 돌아와야 하는 것이다 사람도 그럴 때가 있다 갑자기 자신을 비우고 출발했던 곳으로 돌아와야 할 때가 있다. - 공광규 시 '아름다운 회항' 모두 바위와 바위가 기댄 암문을 거쳐야 암자에 오를 수 있다 암문은 좁고 좁아서 몸집이 크거나 짐이 많은 사람은 통과 할 수가 없다 꼿꼿한 허리도 굽혀야 하고 머리를 푹 수그려야 할 때도 있다 가끔은 무릎걸음도 해야 한다 이렇게 겸손하게 올라가도 바위가 막아서고 사철나무가 막아서서 갑자기 방향을 틀어야 한다 대웅전에서 해우소 가는 길도 그렇고 상관음전과 하관음전 가는 길도 그렇고 산.. 더보기
Who am I ?! 아버지는 누구인가? 아버지란 기분이 좋을 때 헛기침을 하고, 겁이 날 때 너털웃음을 웃는 사람이다. 아버지란 자기가 기대한 만큼 아들, 딸의 학교 성적이 좋지 않을 때 겉으로는, '괜찮아, 괜찮아' 하지만 속으로는 몹시 화가 나는 사람이다. 아버지의 마음은 먹칠을 한 유리로 되어 있다. 그래서 잘 깨지기도 하지만, 속은 잘 보이지 않는다. 아버지란 울 장소가 없기에 슬픈 사람이다. 아버지가 아침 식탁에서 성급하게 일어나서 나가는 장소(그곳을 직장이라고 한다)는, 즐거운 일만 기다리고 있는 곳은 아니다. 아버지는 머리가 셋 달린 龍과 싸우러 나간다. 그것은 피로와, 끝없는 일과, 직장 상사에게서 받는 스트레스다. 아버지란 '내가 아버지 노릇을 제대로 하고 있나? 내가 정말 아버지다운가?' 하는 자책을 날마.. 더보기
2023년 말미에 덧붙여, 나무는 자기 몸으로 나무이다 자기 온몸으로 나무는 나무가 된다 자기 온몸으로 헐벗고 零下 十三度 零下 二十度 地上에 온몸을 뿌리박고 대가리 쳐들고 무방비의 裸木으로 서서 두 손 올리고 벌 받는 자세로 서서 아 벌받은 몸으로, 벌 받는 목숨으로 起立하여, 그러나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온 魂으로 애타면서 속으로 몸속으로 불타면서 버티면서 거부하면서 零下에서 零上으로 零上 五度 零上 十三度 地上으로 밀고 간다, 막 밀고 올라간다 온몸이 으스러지도록 으스러지도록 부르터지면서 터지면서 자기의 뜨거운 혀로 싹을 내밀고 천천히, 서서히, 문득, 푸른 잎이 되고 푸르른 사월 하늘 들이받으면서 나무는 자기의 온몸으로 나무가 된다 아아, 마침내, 끝끝내 꽃피는 나무는 자기 몸으로 꽃피는 나무이다. - 황지우 시 '겨울.. 더보기
12월 24일, Beethoven Symphony 9, 합창 - 올해의 Christmas! - 인천 아트센타 Pm:17:00-19:00, 나이를 먹으니 연말에 ‘마눌님’과 무엇을 해야하나 고민이 생긴다. 모처럼 Kbs 오케스트라가 인천을 찾았다. 메인 레파토리도 ‘베토번 교향곡 9번 ’합장‘ 전악장. 즐거운 마음으로 집에서 1 시간을 달려 ’인천 아트센타 콘서트 홀‘을 찾았다. 2023 년의 마무리를 휼륭한 ’앙상블‘로 마무리 할 수 있어서 유쾌 했다. 2024년. 새해를 ’여유있는 마름‘으로 맞을 수 있다는 마음이 드니,, 고마운 일이다. 마눌님도 대 만족 !!! 더보기
돌아 앉자서 눈물 흘리는 나’ - 황 지우 시. 삶이란, 끊임없이 부스럭거리는 사고 그러니, 저지르지 않으면 당하게 되어 있지 그러니, 저지르든가 당하든가 서울에 도착하여 고속터미널을 빠져나올 때 택시 주차장으로 가면 국민학교 교사처럼 말쑥하게 양복을 차려입은 중년 신사가 핸드 마이크로, 종말이 가까웠으니 우리 주 예수를 믿고 구원받으라고 외쳐대지 않던가 사람들은 거지를 피해가듯 구원을 피해가고 그는 아마도 안수받고 암을 나은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혼자서 절박해져가지고 저렇게 나와서 왈왈대면 저렇게, 거지가 되지 - 황지우 시 '또 다른 소식' 모두 하루를 나갔다 오면 하루를 저질렀다는 생각이 든다 내심으로는 내키지 않는 그 자와도 흔쾌하게 악수를 했다 이 손으로 만져서는 안 될 것들을 스스럼없이 만졌다 의수를 외투속에 꽂고 사람들이 종종걸음으로.. 더보기
지식인의 삶과 사랑 - 황 동규 시. 가을이 너무 깊어 갈수록 철 지난 로봇처럼 되는 몸 길이나 잃지 말아야겠다. 길이라니? 버스와 전철 번갈아 타고 걸어 서촌보다 더 서쪽 동네 가게에 들러 맥주 한잔 시원하게 들이키고 인왕산 서편을 달관한 로봇처럼 천천히 걸으며 빈 나무에 단풍 몇 잎 떨어지지 않고 모여 가르랑대고 있다. '이제 말 같은 건 필요없다. 가르랑!' 로봇도 소리 물결 일으킨다. '평생 찾아다닌 거기가 결국 여기?' 그래, 내고 싶은 소리 다들 내보게나. 숨 고르려 걸음 늦추자 마침 해 지는 곳을 향해 명상하듯이 서 있는 사람 하나 있다. 나와 비슷한 수준의 로봇이군. 방해되지 않을 만큼 거리 두고 나란히 선다. 흰 구름장들 한참 떼 지어 흘러가고 붉은 해가 서편 하늘을 뜬금없이 물들이다 무엇엔가 빨리듯 하늘 뒤로 넘어간다. 옆..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