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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사는 이야기

11월에 꺼내 읽는,, 정 호승의 시 몇편.




물을 붓고 누룽지를 끓인다
돌아가신 어머니 냄새가 난다
김장김치 한보시기 꺼내놓는다
그리운 어머니의 눈빛이
강가의 잔물결처럼 식탁 위에 퍼진다
햇살과 구름을 한데 섞어
된장에 시금치 무치듯 무쳐놓는다
젊은 날 내 청춘의 봄비가 잠깐
울면서 앉았다 간다
평생 아껴두었던 내 심장을 꺼내
초고추장을 조금 발라 올려놓는다
내가 사랑했으나 나를 사랑하지 않은
배고픈 나의 천사여
밤새도록 나를 노려보는
창가의 붉은 새가 쪼아 먹기 전에
드세요 누룽지와 함께 내 심장을
맛있게 드세요


- 천사를 위한 식탁
*나는 희망을 거절한다(창비, 2017)




그래도 나는 골목길이 좋다
서울 종로 피맛골 같은 골목길보다
도시 변두리 아직 재개발되지 않은
블록담이 이어져 있는 산동네
의정부 수락산 밑
천상병 시인의 집이 있던 그런 골목길이 좋다
담 밑에 키 큰 해바라기가 서 있고
개똥이 하늘을 쳐다보다가
소나기에 온몸을 다 적시는 그런 골목길이 좋다
내 어릴 때 살던 신천동 좁은 골목길처럼
전봇대 하나 비스듬히 서 있고
길모퉁이에 낡은 구멍가게가 하나쯤 있으면 더 좋다
주인 할머니가 고양이처럼 졸다가 부채를 부치다가
어머니 병환은 좀 어떠시냐고
라면 몇개 건네주는
그 가난의 손끝은 얼마나 소중한가
늦겠다고 어서 다녀오라고
너무 늦었다고 어서 오라고 안아주던
어머니의 그리운 손은 이제 보이지 않지만
그래도 나는 어느 술꾼이 노상방뇨하고 지나가는
내 인생의 골목길이 좋다

- 골목길
* 나는 희망을 거절한다. 창비, 2017.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그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그루 나무의 그늘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햇빛도 그늘이 있어야 맑고 눈이 부시다
나무 그늘에 앉아
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는 햇살을 바라보면
세상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는 눈물이 없는 사랑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눈물을 사랑하지 않는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방울 눈물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기쁨도 눈물이 없으면 기쁨이 아니다
사랑도 눈물 없는 사랑이 어디 있는가
나무 그늘에 앉아
다른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의 모습은
그 얼마나 고요한 아름다움인가


- 내가 사랑하는 사람
*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창작과비평, 1998




언제나 가난한 사람들이 먼저 죽는다
혼자 있을 때마다 당신과 함께 있었으나
부석사 안양루 돌계단 옆에 핀
접시꽃 곁에도 당신은 보이지 않고
태백선 추전역 앞마당에 핀
코스모스 곁에도 당신은 보이지 않고
어둠의 눈물이 소금처럼 내린다
이제 당신도 웃을 때가 있기를 바란다
고요한 미소로써 우리를 바라보길 바란다
당신에게도 봄은 오는 대로 오고
꽃은 피는 대로 피고
눈은 내리는 대로 내리길 바란다


- 제비꽃을 보내며
* 여행, 창비, 2013.




- 비가 제법 세차게 내렸다. 이 비가 그치고 나면 겨울이 성큼 다가오리라,, 새벽 투석을 나서다가 소방서 전의 다리 위에서 세찬 돌풍에 그렇지 않아도 낡은 우산이 훌쩍 뒤집어지고 말았다. 제주 올레길에서 10 여년 전에 사서 용하게도 여태것 버텨 주었는데,, 병원에서 나와 귀가 길에 그동안 고마웠던 손에 익은 우산과 안녕을 고했다. 길이(정)든 물건들은 ‘사소함’이라 생각해도 버리기가 쉽지 않았다. 이렇게 하나, 하나씩 버리고, 떠나 보내는 것이렸다.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