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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사는 이야기

시인의 말 / 이 현승

한잔의 독주.




참혹해할 필요 없다.
늦은 일요일 쇼펜하우어로부터의 연락,
결국 달라지는 것은 없을지 모른다.

밤사이에 늘어난 환자의 전문 지식이
주치의의 처방을 바꾸지는 못할 것이다.
진열대의 빈자리는 금세 메꾸어질 것이며
나는 통조림에도 고유번호가 있다는 사실에서
위안과 절망을 동시에 느낀다.
우리는 그 무엇을 위해 살고 있고
그 무언가가 텅 비어 있다는 사실로부터
조금 우울해질 수 있다.
괜찮다.

2007년 여름
이현승



단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일의 맛은 쓰다고 생각해서일까.
고된 일이 끝나면 몰려가 단 것을 마시는 사람들,
단것을 들고 만화방창 피어난 사람들 사이에서
아무도 모르게 선명해지는 느낌,
홀로 설탕으로 결정되어가는 그런 느낌.
화살보다 뾰족한 혓바닥들이 들이닥칠 것 같은 느낌까지는 아니지만
애써 끓인 찌개를 내놓으며 어때? 좀 짜지? 하는데
강한 짠맛보다 그 사이 엷은 단맛이 더 불편한,
그런 고집스러운 느낌으로 이 시집을 쓰고 건넜다.
나는 이걸 철학이라고 할까고집이라고 할까 망설이다가
그냥 까다로움이라고 하기로 했다.
괜찮다.


2021년 봄
이현승


[아이스크림과 늑대],문학동네,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