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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스함

11월에 꺼내 읽는,, 정 호승의 시 몇편. 물을 붓고 누룽지를 끓인다 돌아가신 어머니 냄새가 난다 김장김치 한보시기 꺼내놓는다 그리운 어머니의 눈빛이 강가의 잔물결처럼 식탁 위에 퍼진다 햇살과 구름을 한데 섞어 된장에 시금치 무치듯 무쳐놓는다 젊은 날 내 청춘의 봄비가 잠깐 울면서 앉았다 간다 평생 아껴두었던 내 심장을 꺼내 초고추장을 조금 발라 올려놓는다 내가 사랑했으나 나를 사랑하지 않은 배고픈 나의 천사여 밤새도록 나를 노려보는 창가의 붉은 새가 쪼아 먹기 전에 드세요 누룽지와 함께 내 심장을 맛있게 드세요 - 천사를 위한 식탁 *나는 희망을 거절한다(창비, 2017) 그래도 나는 골목길이 좋다 서울 종로 피맛골 같은 골목길보다 도시 변두리 아직 재개발되지 않은 블록담이 이어져 있는 산동네 의정부 수락산 밑 천상병 시인의 집이 있던 그런 골.. 더보기
'산다'고 하는 것. 그 사람이 라디오를 켜는 시간이야 물 잔의 물까지 어는 추운 겨울밤 그 사람은 라디오를 켜지, 당신이 사는 도시보다 한 시간 삼십 분쯤 먼저 저녁이 일찍 찾아오는 산골마을 산 번지 저녁이 오기 전에 저녁밥 지어 먹고 저녁이 오면 이내 깜깜해지는 겨울밤에 불이 꺼져 무덤처럼 춥고 어두웠던 집에 라디오가 알불처럼 켜지는 거야, 빈방에 소리들이 두런두런하며 스스로 따뜻해졌어 여름 이후 그 사람은 입을 닫아버렸어 사람의 소리를 잃어버린 그 사람의 방은 무덤 속 같았지, 사람 소리를 들을 수 없는 방 적막이 먼지로 수북수북 쌓이는 방 그 사람이 다락방에서 작은 라디오 하나 챙겨왔어 라디오가 처음 켜지는 날, 그때 알았지 아, 소리라는 것이 알전구처럼 밝고 소리라는 것이 손난로처럼 따뜻하구나 그 사람은 어린 시절의..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