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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에 대한 예의

7월의 시/ 안철주 시 ‘불행에 대한 예의’ 경주 계림 앞에서 아내를 안고 있었을 때 나, 세상에서 잠깐 지워졌던 것 같다 아내는 계림을 등지고 나는 들판을 등지고 서로 안고 있었지만 어쩌면 그때 우리가 등지고 있었던 것은 세상이었을지 모른다 만만하게 생각한 세상이 결코 만만하지 않아서 헉헉거릴 때 나는 아내를 사랑하면서 아내는 나를 사랑하면서 이 세상을 간신히 견뎌냈는지 모른다 그러나 나와 아내가 안았던 것은 어쩌면 나도 아니고 아내도 아니었는지 모른다 아내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면 아내는 혀를 내밀며 아줌마가 되지만 오래전 나는 내가 아니었을 때가 있었고 아내도 아내가 아니었을 때가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기억에 남을 시련도 없는 생을 살았다 끝까지 차례를 지켜가며 누구나 만나게 되는 불행을 겪으며 살았을 뿐이다 순서를 기다리며 불행을 겪어야 하는.. 더보기
안 주철 시 / 불행에 대한 예의 경주 계림 앞에서 아내를 안고 있었을 때 나, 세상에서 잠깐 지워졌던 것 같다 아내는 계림을 등지고 나는 들판을 등지고 서로 안고 있었지만 어쩌면 그때 우리가 등지고 있었던 것은 세상이었을지 모른다 만만하게 생각한 세상이 결코 만만하지 않아서 헉헉거릴 때 나는 아내를 사랑하면서 아내는 나를 사랑하면서 이 세상을 간신히 견뎌냈는지 모른다 그러나 나와 아내가 안았던 것은 어쩌면 나도 아니고 아내도 아니었는지 모른다 아내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면 아내는 혀를 내밀며 아줌마가 되지만 오래전 나는 내가 아니었을 때가 있었고 아내도 아내가 아니었을 때가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기억에 남을 시련도 없는 생을 살았다 끝까지 차례를 지켜가며 누구나 만나게 되는 불행을 겪으며 살았을 뿐이다 순서를 기다리며 불행을 겪어야 하는..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