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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숲에 들다

래여애반다라( 來如哀反多羅1~9 ) 來如哀反多羅래여애반다라 1 이성복 추억의 생매장이 있었겠구나 저 나무가 저리도 푸르른 것은, 지금 저 나무의 푸른 잎이 게거품처럼 흘러내리는 것은 추억의 아가리도 울컥울컥 게워 올릴 때가 있다는 것! 아, 푸르게 살아 돌아왔구나, 허옇게 삭은 새끼줄 목에 감고 버팀대에 기대 선 저 나무는 제 뱃속이 온통 콘크리트 굳은 반죽 덩어리라는 것도 모르고 래여애반다라 2 바람의 어떤 딸들은 밤의 숯불 위에서 춤추고 오늘 밤 나의 숙제는 바람이 온 길을 돌아가는 것 돌아가면 어떤 딸들이 신음하는 어미와 자궁을 열고 피 묻은 나를 번쩍 드어 올릴 때 또 다른 딸들이 깔깔거리며 빛 바랜 수의를 마름질하는 것 보다가, 보다가 어미의 삭은 탯줄 끌고 돌아올 수 있을까. 언젠가 내가 죽고 없는 세상으로 래여애반다라 3 이 .. 더보기
바람꽃 너도바람꽃 [정진혁] 산기슭에서 만났다 오후가 느리게 떨어지는 동안 저녁이 모이고 모였다 너도바람꽃 불러 보다가 고 이쁜 이름을 담고 싶어서 손가락으로 뿌리째 너를 떠냈다 산길을 내려오다 생각하니 네가 있던 자리에 뭔가 두고 왔다 너도바람꽃은 아직 바람이었다 늦은 저녁을 먹다가 어둠 속에 저 혼자 꽂혀 있을 손길을 생각했다 내가 어딘가에 비스듬히 꽂아 두고 온 것들 빗소리가 비스듬히 내리는 밤이었다 -사랑이고 이름이고 저녁인, 파란, 2020 무갑사 바람꽃 [류병구] 무갑사 뒷골짝, 그늘볕을 쬐던 어린 꽃 가는 바람 지나가자 여린 목을 연신 꾸벅댄다 전등선원 동명스님은 깜빡 졸음도 수행이라 했다 꽃도 절밥을 하도 먹어 그 정도는 알아듣는다 요새 무갑산엔 허물 벗은 봄이 바람이고, 바람이 꽃이다 - 달빛 .. 더보기
국화꽃. 국화빵은 모른대 [이규옥] 국화빵은 모른대 알록달록한 국화꽃을 모른대 알큰달큼한 국화 냄새를 모른대 불 위에서 철틀 속에서 엎어지고 젖혀지는 국화빵은 모른대 누릇한 냄새밖에 모른대 살 익는 냄새밖엔 모른대 내장마저 훤히 비치도록 바싹 살을 지져 전신에 국화 문신 새기는 국화빵은 모른대 거뭇거뭇 살을 태워 구수한 국화 냄새 풍기는 국화빵은 모른대 저만치 비켜선 채 화분 속에서 방실거리는 국화꽃은 모른대 가을볕 받아 살랑살랑 풍기는 국화 냄새를 모른대 덥석, 내장째 물려 찢기고 씹혀 감감한 미로 속으로 삼켜질 제 살 익은 냄새밖에 국화빵은 모른대 -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세계사, 2008 귀가 서럽다 [이대흠] 강물은 이미 지나온 곳으로 가지 않나니 또 한 해가 갈 것 같은 시월쯤이면 문득 나는 눈시울이 .. 더보기
제라늄. 제라늄처럼 [황혜경] 그리 쉽게 병들지 않는다고 해서 받았다 그리 쉽게 상처받지 않는다고 해서 그런데 까맣게 타들어가고 아껴 써야 하는데 먹는 속도가 곰팡이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서 자주 버렸다 버리는 나를 버릴 수 없기도 해서 독서와 식사의 습관을 되찾아야 하는데 제라늄은 장식적이고 에둘러 말하곤 해왔는데 다시는 안 그러려고 두근거리지 않는다면 잠들 수 없어 무엇으로든 무르기 시작하는 줄기들 꽃의 이미지에 기대어 질이 필요한 것들이 있지 질이 비현실적으로 거쳐서 지나가면서 끝까지 도달하지도 못하면서 통과할 수도 없으면서 생식生殖을 대하는 방식이 본질적으로 그런 거라면 등을 돌리고 형편이 좀 나아지면 손잡아줄게 지금은 눈앞에서 잠시 사라져야 할 때 질문하는 자가 보이지 않고 대답도 들을 수 없고 원하는 .. 더보기
무제 / 아프리카 시인의 습작노트 중. 당신의 둥글고 빛나는 검은 공단의 가슴…. 얼굴의 그늘 속 이 하얀 미소가 오늘 저녁 내 맘속에 저 멀리 기니에 있는 귀가 멍멍해 지는 도취의 리듬을 일깨운다 검고 벌거벗은 우리의 누이들을 도취시키는 저 리듬 또한 이 저녁 내 맘속에 고대 가 잠들고 있는, 검은 나라의 영혼을 관능에 겨워 열망하는 검은 황혼을 일깨운다. 오늘저녁 불안한 힘속에, 당신의 좁은 등을 따라… - 무명 아프리카 시인의 습작노트 중 에서, * 1987 년의 Note에 쓰여있는 시 한편,, “시를 감상하는 것은 시를 짓는 것보다도 어렵다. 그러나 자꾸만 읽고 되뇌이는 속에서 감상의 깨우침도 얻게 되는 것이다.” 36년의 세월이 지나서도 여전히 ‘고개’만 끄덕거리고 있다. 크게 반성 할 일이다. 더보기
영혼의 꽃/진정성. 내 걸어온 길 되돌아보며 나로 하여 슬퍼진 사람에게 사죄합니다 내 밟고 온 길, 발에 밟힌 풀벌레에게 사죄합니다 내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에 상처받은 이 내 길 건너며 무표정했던 이웃들에 사죄합니다 내 작은 앎 크게 전하지 못한 교실에 내 짧은 지식, 신념 없는 말로 강요한 학생들에 사죄합니다 또 내일을 맞기 위해선 초원의 소와 순한 닭을 먹어야 하고 들판의 배추와 상추를 먹어야 합니다 내 한 포기 꽃나무도 심지 않고 풀꽃의 향기로움만 탐한 일 사죄합니다 저 많은 햇빛 공으로 쏘이면서도 그 햇빛에 고마워하지 않은 일 사죄합니다 살면서, 사죄하면서, 사랑하겠습니다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 - 이기철 시 '그렇게 하겠습니다' 모두 풀통이 넘어져 모자란 만큼 물을 채웠다 넘어져 흐른 자리는 굳어 엉기고 점성은 .. 더보기
시(詩). 젖 시 한 채 -안현미 시인 김자흔 요즘 그녀의 시 쓰는 화두는 오르지 젖이란다 화두까지는 아니더라도 한동안 시 속에 젖을 풀어 놓을 생각이란다 그래 그런지 함평 찾아가는 문학버스 안에서 꽃무릇이 다 졌을 것이라는 동행 시인의 말에 "뭐라고요? 젖이 다 젖어버렸다고요?" 대뜸 젖으로 들이미는 그녀의 우문, 그녀의 시 속에 등장하는 젖은 아직은 비루해서 이제 겨우, 젖동냥 젖비 젖울음 정도 젖감질젖꼭지젖꽃판젖내젖당젖니젖동생젖멍울젖배저부들기젖비린내젖갬젖송이젖어미젖줄젖털젖퉁이 이 많은 젖의 재료를 섞어 어떤 시를 낳을지는 무릇 그녀의 몫, 발효된 시 가득 쟁여 놓았다가 가난한 시인들에게 詩젖 한 사발씩 푹푹 떠주는 일도 꽤 재미진 일이 아닐까 지상에 아직 집 한 채 마련치 못한 그녀, 이제 머잖아 보얀 젖들이.. 더보기
고향의 누이 같은 꽃/메밀 꽃. 눈물을 깎는 법 [김점용] 수평선을 잡고 걷는다 똑바로 걸으려 애쓴다 안 보이던 섬들이 문득 일어나 절뚝절뚝 줄을 잘라 먹는다 눈을 감으면 안 되는데 바람이 불 때마다 저절로 감긴다 왼눈은 감기지 않아 눈물이 난다 바다 저 멀리 끝에서 하얗게 메밀꽃이 핀다 수평선을 놓칠세라 꽃을 깎는다 눈물을 깎는다 대패는 장대패가 좋다 어미날에 덧날을 끼우고 손은 머리를 감싸듯 가볍게 잡되 오른손은 대패 뒤꽁무니와 구멍 중간을 단단히 잡는다 발에 무게중심을 두고 허리 를 숙인 자세로 무게중심을 오른발로 옮기며 살짝 당긴 다 눈을 크게 뜨면 눈물이 떨어질 수 있으므로 망막에 꽃잎이 비칠 듯 말 듯 눈시울의 힘 조절에 각별히 주의 한다 물새 앉은 자리처럼 누군가 다녀간 자리는 엇결리기 쉽다 눈을 다친 숭어 새끼가 뛴다 날..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