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도바람꽃 [정진혁]
산기슭에서 만났다
오후가 느리게 떨어지는 동안
저녁이 모이고 모였다
너도바람꽃 불러 보다가
고 이쁜 이름을 담고 싶어서
손가락으로 뿌리째 너를 떠냈다
산길을 내려오다 생각하니
네가 있던 자리에
뭔가 두고 왔다
너도바람꽃은
아직 바람이었다
늦은 저녁을 먹다가
어둠 속에 저 혼자 꽂혀 있을 손길을 생각했다
내가 어딘가에 비스듬히 꽂아 두고 온 것들
빗소리가 비스듬히 내리는 밤이었다
-사랑이고 이름이고 저녁인, 파란, 2020
무갑사 바람꽃 [류병구]
무갑사 뒷골짝,
그늘볕을 쬐던 어린 꽃
가는 바람 지나가자
여린 목을 연신 꾸벅댄다
전등선원 동명스님은
깜빡 졸음도 수행이라 했다
꽃도
절밥을 하도 먹어
그 정도는 알아듣는다
요새
무갑산엔
허물 벗은 봄이 바람이고,
바람이 꽃이다
- 달빛 한 줌, 시각과 언어, 2015
'이미'라는 말 [김승희]
이미라는 말,
그런 것이다
언제 찬란했냐는 듯
겨울의 눈송이가 다 녹아 스며들었다는 말이다
아마 그럴 것이다
이미라는 말은
그런 것이다,
공중에 뜬 리프트 상태에서 추락해 전신에 큰 부상을 입은 발레
리나,
노을이 가슴에 내려와
한 사발 가득 목울대부터 채우던 울음,
언제 찬란했냐는 듯
빈 사발에 쓸쓸한 물빛만 맴돌고
벌써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모기장처럼 뻥뻥 뚫린 가슴 안에 모기는 이미 들어와 있다,
움직일 때마다 모기소리가 식식거리는 흉곽,
어차피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얼어붙은 가슴팍 밑으로
이미, 터무니없이,
언제 찬란했냐는 듯
그런데
봄눈 녹아
복수초부터 수선화, 유채꽃, 노루귀, 한계령풀, 나도바람꽃, 너
도바람꽃,
개나리, 진달래…
줄을 이어 꽃잔치가 올라온다는 것이다,
덜어내고도 다시 고이는 힘!
이미란 말이다
- 흰 나무 아래의 즉흥,나남, 2014
변산 바람꽃 - 소월에게 [곽재구]
꽃향기
바람 부는 쪽으로 날아가고
마음은
바람이 잠든 곳으로 날아가네
꿈길 멀어
삼천리
개여울가 쭈그려앉은 동무여
찬물 위에 손가락으로 쓴 시
먼 서해에서
받아볼 수 없어라
지난밤 꿈에
짚신 열 컬레 메고
그대 머눈
약산 물 찾아갔네
- 푸른 용과 강과 착한 물고기들의 노래, 문학동네, 2019
은현리 홀아비바람꽃* [정일근]
산다는 것은 버리는 일이다
내 심장 꺼내고 그 자리에 채워 넣었던
첫사랑 했으나, 그해 가을
진해 바다로 추신하고 싶었던
여린 나이에 감당할 수 없었던 심장의 통증까지
추억에서 꺼내 내버린 지 오래다
詩에 목숨 걸었으나, 당선을 알려주던 노란 전보
첫 청탁서, 첫 지면, 첫 팬레터... 詩로 하여 내 전부를 뛰게 했던
무엇 하나 온전하게 남아 있지 않다
가슴 설레며 읽은 신간 서적 책장에 꽂아둔 채
표지가 낡기도 전에 잊히듯이
산다는 것은 또 그렇게 잊어버리는 일이다
만남보다 이별이 익숙한 나이가 되면
전화번호 잊어버리고 주소 잊어버리고
사람 잊어버리고, 나를 슬프게 하는 것 모두
주머니 뒤집어 탈탈 털어 잊어버린다
행여 당신이 남긴 사랑의 나머지를
내가 애틋하게 기억해주길 바란다면
그건 당신의 검산이 틀렸다
솥발산 깊은 산길에 홀아비바람꽃 피었다
잎 버리고 꽃잎 버리고 홀아비바람꽃 피었다
나도 홀로 피어 있을 뿐이다
그것이 내 인생이다
내가 나를 인정하고부터 편안하다
편안해서 혼자 우는 날이 많아 좋다
다시 바람 불지 않아도 좋다
혼자 왔으니 혼자 돌아갈 뿐이다
* 미나리아재빗과의 다년생 야생초. 이른 봄에 꽃이 핀다.
- 기다린다는 것에 대하여, 문학과지성사, 2009
우리나라가 아름다운 것은 [정희성]
너도밤나무가 있는가 하면 나도밤나무가 있다
그런가 하면 바람꽃은 종류도 많아서 너도바람꽃 나도바
람꽃 변산바람꽃 남방바람꽃 태백바람꽃 만주바람꽃 바이
칼바람꽃뿐만 아니라 매화바람꽃 국화바람꽃 들바람꽃 숲
바람꽃 회리바람꽃 가래바람꽃 쌍둥이바람꽃 외대바람꽃
새바람꽃 꿩의바람꽃 홀아비바람꽃 등 종류도 많은데 이들
은 하나같이 꽃이 아름답다
어떤 이는 세상에 시인이 나무보담도 흔하다며 너도 시
를 쓰느냐고 묻는다 그러나 시인이 많은 게 무슨 죄인가 전
국민이 시인이면 어떻단 말인가 그들은 밥을 굶으면서도
아름다움을 찾아 나선 사람들이다 우리나라가 아름다운 것
은 시인이 정치꾼보다 많기 때문 아닌가
- 그리운 나무, 창비, 2013
홀아비바람꽃 [신미균]
울음을 입안에 넣고
딱, 딱 소리나게 씹다가
네가 있었던
들판에 붙였다
귀뚜라미도 몇 마리
갖다 붙이고
빗방울도 몇 개 갖다
붙였다
가물가물한 저 강과 둑과
강 위를 날아가는 새도
갖다 붙였다
그 뒤로
아무도 없는
캄캄한 밤이
또 찾아왔다
- 길다란 목을 가진 저녁, 파란, 2020
바람의 악수[이정록]
명아주는 한마디로 경로수敬老樹다.
혈액순환과 신경통과 중풍 예방에 그만이다.
고스란히 태풍을 맞아들이는 어린 명아주. 거센 바람이 똬리를
튼, 그 자리가 지팡이의 손잡이가 된다. 세상에는 태풍을 기다리
는 푸나무도 있는 것, 태초부터 지팡이를 꿈꿔온 명아주 이파리
들이 은갈치처럼 파닥인다.
길을 묻지 마라. 허공을 헤아리면 세상 다 아는 것이라고, 명아
주 지팡이가 하늘을 가리킨다. 먼 바다에서 바람꽃 봉오리 하나
소용돌이치는가? 그 태풍의 꽃보라 쪽으로 지팡이의 숨결이 거칠
어진다.
먼저 풍 맞아본 자가 건네는, 바람의 악수.
노인이 문득 걸음을 멈춘다. 오래된 바람 두어 줄기가 정수리
밖으로 빠져나간다. 바람의 길이 하늘 꼭대기까지 청려장靑藜杖으
로 내걸린다.
2008현대문학상 수상시집에서
바람꽃 [송기원]
단 하나 부족하여
너를 더듬게 하던 것이,
단 하나 부족하여
너를 등지게 하던 것이,
단 하나 부족하여
너를......
- 단 한번 보지 못한 내 꽃들, 랜덤하우스중앙, 2006
지구(地球) [박용하]
달 호텔에서 지구를 보면 우편엽서 한 장 같다. 나뭇잎 한 장 같다. 훅 불면 날아가 버릴 것 같은. 연약하기 짝이 없는 저 별이 아직은 은하계*의 오아시스*인 모양이다. 우주의 샘물인 모양이다. 지구 여관에 깃들어 잠을 청하는 사람들이 만원이다. 방이 없어 떠나는 새 · 나무 · 파도 · 두꺼비 · 호랑이 · 표범 · 돌고래 · 청개구리 · 콩새 · 사탕단풍나무 · 바람꽃 · 무지개 · 우렁이 · 가재 · 반딧불이…… 많기도 하다. 달 호텔 테라스에서 턱을 괴고 쳐다본 지구는 쓸 수 있는 말만 적을 수 있는 엽서 한 잎 같다.
- 영혼의 북쪽, 문학과지성사, 1999
** 어제(11/6)는 태풍처럼 비 바람이 불어 나무의 잎사귀가 길위에 융단처럼 깔렸다. 오후 5시를 넘겨서 부터 짙게 어둑해지는 하늘은 또 다시 비를 머금었다. 몇년 전에 어머니 요양원 문제로 경기도 일대를 헤메 다니다가 ‘크게 넘어져’ 허리를 삐긋 한 후에는 물에 젓은 길에서는 ‘걸음마’를 처음 배우는 아이처럼 ‘조심 조심’ 걷는다. 비에 젓은 낙엽이 깔린 길도 매우 미끄러워 얼핏 디뎠다가는 ‘꽈당’이다. 지하철애서 산책로를 돌아 병원으로 투석가는 길에 길이 온 전체가 떨어진 나뭇잎이 융단을 깔았다.
가을이 온 둣, 주변을 물들이던 ‘단풍’이 11월의 초에 변화무쌍한 기온의 비와 강풍 덕에 ‘초 겨울’의 스산함을 느끼게 해 준다. 어딘가 ‘첫눈’도 이미 내렸다는데,, 나이를 먹으니 ‘어른’들이 ‘겨울이 무섭다’ 하시던 말이 실감이 난다. 떨어지는 체력속에 2023년의 겨울을 잘 넘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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