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걸어온 길 되돌아보며
나로 하여 슬퍼진 사람에게 사죄합니다
내 밟고 온 길,
발에 밟힌 풀벌레에게 사죄합니다
내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에 상처받은 이
내 길 건너며 무표정했던
이웃들에 사죄합니다
내 작은 앎 크게 전하지 못한 교실에
내 짧은 지식, 신념 없는 말로 강요한
학생들에 사죄합니다
또 내일을 맞기 위해선
초원의 소와 순한 닭을 먹어야 하고
들판의 배추와 상추를 먹어야 합니다
내 한 포기 꽃나무도 심지 않고
풀꽃의 향기로움만 탐한 일
사죄합니다
저 많은 햇빛 공으로 쏘이면서도
그 햇빛에 고마워하지 않은 일
사죄합니다
살면서, 사죄하면서, 사랑하겠습니다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
- 이기철 시 '그렇게 하겠습니다' 모두
풀통이 넘어져 모자란 만큼 물을 채웠다
넘어져 흐른 자리는
굳어 엉기고 점성은 강해져
만지는 손마다 쩍쩍 들러붙는다
풀이라는, 찐득찐득해야 하는 성질
물을 탄 풀은 점성이 떨어지고
느슨해지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대낮을 설명해야 하는 날이 길어졌다
아이들도 말수가 줄었고
아내도 외면하는 날이 많아졌다
넘어진 풀통을 성급하게 일으켜
가슴 깊이 희석해버린, 쉽사리
증발하지 않을 것 같은 수분이지만
그래도 넘어지지는 않겠지
무게의 중심이 어디에 있는지를
일찍 깨우치지 못했어도
서로를 적셔야만 붙는 거라고
조금은 얼룩져도 함께 마르며
딱지가 앉는 거라고, 흡착력은 비록 떨어졌으나
가슴 맞대고 기다리는 사람살이
그래도 아직은 사탕처럼 달기만 하다
- 김광선 시 ‘풀통’
ㅡ<<창작과비평>>(2004. 여름)
쌍ㅅ이 영 쳐지지 않는 무딘 나의 손가락
아직도 이유와 때를 모르는 나의 경련
그리고 경련을 잠재워주는 내 평생의 연인들-딜란틴과 바리움, 테그레톨, 라미탈, 그 동그란 흰 속살들
어느 아픈 시인이 선물한 상앗빛 만년필
무수히 버림받은 나의 수첩들, 다이어리들, 책들
오후 네 시 반에 방문하는 우체국 창, 부치지 않은 초록빛 엽서들, 사인을 요청하는 레이건 닮은 소포계 우람한 청년
어느 날 무사히 지나온 모퉁이들, 신호등도 없는 건널목들
이 거리 저 거리에서 만난 입이 뾰족이 나온 화살표들
살아남은 슬픔을 깨무는 듯, 2년이나 남은 할부 개월을 깨물고 있는 나의 스마트폰 메모장
숫처녀 같은, 서러운 음악들
은빛 사진틀의 폐쇄회로
은밀한 성소, 학교로 가는 지하철
아무에게나 열리는 자동문들
아름다운 창녀, 자유, 민주
잔등에 업혀 칭얼대는 미래
잠재적 감기
네가 둘러쓴 빛나는 모자들, 또는 그 후광, 또는 그 추상적 지연
멜로드라마들의 진정성, 브로치들의 영원성
아이섀도 짙은 나의 추억, 희망
그리고, 그리고
이 세상에서 만난, 아아아 그
- 강은교 시 ‘ 아아아, 오늘도 나에게 시를 쓰게 하는 것들’
* [바리연가집] ,실천문학사, 2014
요즘 그녀의 시 쓰는 화두는 오르지 젖이란다
화두까지는 아니더라도
한동안 시 속에 젖을 풀어 놓을 생각이란다
그래 그런지 함평 찾아가는 문학버스 안에서
꽃무릇이 다 졌을 것이라는 동행 시인의 말에
"뭐라고요? 젖이 다 젖어버렸다고요?"
대뜸 젖으로 들이미는 그녀의 우문,
그녀의 시 속에 등장하는 젖은 아직은 비루해서
이제 겨우,
젖동냥 젖비 젖울음 정도
젖감질젖꼭지젖꽃판젖내젖당젖니젖동생젖멍울젖배저부들기젖비린내젖갬젖송이젖어미젖줄젖털젖퉁이
이 많은 젖의 재료를 섞어 어떤 시를 낳을지는
무릇 그녀의 몫,
발효된 시 가득 쟁여 놓았다가
가난한 시인들에게 詩젖 한 사발씩 푹푹 떠주는 일도
꽤 재미진 일이 아닐까
지상에 아직 집 한 채 마련치 못한
그녀, 이제 머잖아
보얀 젖들이 꽉꽉 들어찬
언어의 詩家 한 채 안을 수 있겠네
‘젖 시 한 채 -안현미 시인‘
김 자흔
그때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한 새 삶이
바다와 등대 사이에서 시작된다고 불빛이 켜졌다 꺼졌다 했다
불타는 나무들과 헤어지는 연습을 되풀이 한다
납작한 돌덩어리에 팔 다리를 우겨넣은 빌레못 동굴처럼
숲의 불분명한 꼭대기에서 들리는 노래 소리
낙엽에서 풍기는 썪은 냄새
아침부터 저녁까지 들판에 타오르는 연기 같은
그 모든 것들을
내게 돌아온 발목과 손목으로 치부하면서
나는 다만, 돌이어도 좋다는 생각으로
의심 많은 판석 (板石)위에 눕는다
차디차게 식어가는 순간을 응시하는 건
나의 유일한 진정성,
타오르는 하나의 형상을 건지기 위해
나는 마침내 침대가 되리라
익숙하게 바닥을 차지한 나는 서서히 살아나리라
화석이 된 나를 허공 아래 누이고
침대가 되는 연습을 한다
매몰된 동굴 입구에서 발갛게 타올랐던 숯불처럼
살아있는 연습을 한다
뻗쳐오르는 여름 한낮, 한 줄기에 핀 문장을 쓴다
꽃과 가시를 한 몸에 처박은 들장미처럼
여기까지 온 시간의 바닥에 붉게 핀
얼굴을 흩뿌리면서
- 강영은 시 ‘ 돌침대의 노래‘
* 격월간 <현대시학> 2019년 봄호
철물점 불이 꺼지면 거리는 커브를 돈다
어둠을 이끌고 찾아오는 소리는
너무 조용해
귀가 열 개 온 몸이 귀
뜨거운 문장을 마시는 소리 오래 오래 보이네
난 말야
시인이 되고 싶단 말이지
앙상해서 시인답네
말라서 시인답네
시집 속엔 다 들엇네
시인답게 살아보려 하루 한 끼로 사네
세 끼 다 챙겨먹고서는 시가 돨 것 같지 않네
교과서가 되고 싶은 시들
책꽃이에 꽃히고 싶은 시들
자반고등어 프라이팬에
라면 국물이 흐르는 양은 냄비에
시가 뭔지 몰라 시가 시드나?
늙은 시인은 말하네
아직도 시가 뭔지 몰라
이것도 시가 되는지 보라며 커피를 타네
뜨거움에 풀리는 것들 몇을 알고 있어 다행이네
덩어리지고 아픈 것들 몇은 볼 수 있어 다행이네
불 꺼진 창고에 앉아
커피 한 잔 값도 안 되는 시집 속에 사는
당신을 오래오래 바라보네
보이지 않는 것을 쌓고 또 쌓네
- 홍정순 시 ‘ 시인의 커피’
한 숟갈의 밥, 한 방울의 눈물로
무엇을 채울 것인가,
밥을 눈물에 말아먹는다 한들,
그대가 아무리 나를 사랑한다 해도
혹은 내가 아무리 그대를 사랑한다 해도
나는 오늘의 닭고기를 씹어야 하고
나는 오늘의 눈물을 삼켜야 한다.
그러므로 이젠 비유로써 말하지 말자.
모든 것은 콘크리트처럼 구체적이고
모든 것은 콘크리트 벽이다.
비유가 아니라 주먹이며,
주먹의 바스라짐이 있을 뿐,
이제 이룰 수 없는 것을 또한 이루려 하지 말며
헛되고 헛됨을 다 이루었다고도 말하지 말며
가거라, 사랑인지 사람인지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죽는 게 아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살아,
기다리는 것이다,
다만 무참히 꺽여지기 위하여.
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
내 몸을 분질러다오.
내 팔과 다리를 꺽어
네
꽃
병
에
꽂
아
다
오
- 최 승자 시 ‘ 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
* 즐거운 일기, 문학과지성사, 1984,DEC
풀잎 하나에도 가을이 내려와 주고
비누방울에도 무지개가 걸려주는 이 땅에 태어나
병 되는 줄 알면서도 사랑을 하고
죽을 줄 알면서도 살아들 가는 중에 나도 끼여 있다
인생을 사느라 인생을 팔았고
시간을 아끼느라 시간을 낭비했던
열정은 수난의 맨발이었고
그리움은 눈먼 황홀이었다
여기를 보고 있어도 저기를 보는
뜬눈보다 멀리 보는 눈먼 큰 눈을
딱부리 사팔뜨기 사발눈이라고들 하지만
눈 속에 출렁이는 바다는 아무도 보지 못한다
밤마다 외눈등대에는 불이 켜지고
태풍이 불고 파도가 끓어 넘쳐 뒤집히기도 한다
나의 왕국은 여기 아닌 끓는 바다건너 저기니까
나의 시대는 훗날 언제이니까
눈동자 너머의 저기로 가는 희망봉
새 우주 새 행성의 신대륙으로 가는 길
물길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
뜨거운 내 눈물, 그 외길 밖에는.
- 유안진 시 ‘ 눈 속의 바다 건너’ 전문
시끄러워 잠이 깼다
창유리에 달라붙은 반투명의 아우성
떼 지어 엉키며 부풀리며 퍼져나가며
쉴 새 없이 휘돌며 되울리는 메아리조차 자욱하다
고요가 이렇게도 소리칠 수 있다니
고요의 목청이 이렇게도 깊고도 요란할 수 있다니
고요의 목소리가 내설악을 통째로 삼켜버릴 수 있다니
귀를 틀어막고 우왕좌왕하다보니
먼데 산봉우리 하나가 모가지만 내 놓은 채 허우적거린다
세상은 거대한 안개바다
깊이 모를 대해 밑바닥에서 울려오는 아우성만
끼리끼리 휘돌며 메아리치고 되받아친다
한나절을 기다려 나가보니
산자락 산자락마다 선혈이 낭자했다
단풍은 절정, 피비린내 진동하는 전쟁터였다.
- 유안진 시 ‘ 고요의 아우성’ 전문
살아가는 이들과 살아오는 이들은
어디서 마주칠까
외나무다리 건너다가, 엘리베이터에 갇혀서일까
살아가는 이들과 살아오는 이들 사이에
나는 살고 있다
마주칠까 겁나 오도가도 않고
다만, 그저 그냥 살고 있다
거짓말도 유전 된다
문 닫고 들어오고 문 닫고 나가라고 이르시던
어머니는 혹한 평생을 문 닫다가 가셨다
나는 한술 더 뜬다
문 잠그고 나가고 문 잠그고 들어오라고 꽥꽥거리며
늘 문 잠그고 드나든다
잠그어도 새나가는 울음 때문에
울지 않으면 울려야 직성 풀리는 종치기가 있다기로
죽은 소도 울려서 살려내는 고수(鼓手)가 있다기로
천 년 전 빙하(氷河)를 살리려고 내가 먼저 운다
나는 늘 거짓부렁 운다, 눈코 잠그고 운다
우는 나를 따라서 빙하도 운다
천 년 전이 녹느라고 천 년 후가 얼어붙는다
살아가는 이들과 살아오는 이들 사이에서.
- 유안진 시 ‘거짓말’ 전문
편두통이 생기더니
한 눈만 쌍꺼풀지고 시력도 달라져 짝눈이 되었다
이명도 가려움도 한 귀에만 생기고
음식도 한쪽 어금니로만 씹어서 입꼬리도 처졌다
오른쪽 팔다리가 더 길어서 왼쪽 신이 더 빨리 닳는다
모로 누워야 잠이 잘 오고 그쪽 어깨와 팔이 자주 저리다
옆가리마만 타서 그런지 목고개와 몸이 기울어졌다고 한다
기울어진다는 것
그리워진다는 것
안타까워진다는 것
사랑한다는 것
아프고 아픈 것
아픈 쪽만 내 몸이구나
아플 때만 내 마음이구나
남이 아픈 줄을 내가 어찌 알아
몸도 마음도 반쪽만 내 것이구나
그림자도 반쪽이구나
그런데 나머지 반쪽은 누구지?
- 유안진 시 ‘그림자도 반쪽이다’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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