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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숲에 들다

시(詩).





젖 시 한 채 -안현미 시인
김자흔


요즘 그녀의 시 쓰는 화두는 오르지 젖이란다
화두까지는 아니더라도
한동안 시 속에 젖을 풀어 놓을 생각이란다
그래 그런지 함평 찾아가는 문학버스 안에서
꽃무릇이 다 졌을 것이라는 동행 시인의 말에
"뭐라고요? 젖이 다 젖어버렸다고요?"
대뜸 젖으로 들이미는 그녀의 우문,


그녀의 시 속에 등장하는 젖은 아직은 비루해서
이제 겨우,
젖동냥 젖비 젖울음 정도


젖감질젖꼭지젖꽃판젖내젖당젖니젖동생젖멍울젖배저부들기젖비린내젖갬젖송이젖어미젖줄젖털젖퉁이


이 많은 젖의 재료를 섞어 어떤 시를 낳을지는
무릇 그녀의 몫,
발효된 시 가득 쟁여 놓았다가
가난한 시인들에게 詩젖 한 사발씩 푹푹 떠주는 일도
꽤 재미진 일이 아닐까


지상에 아직 집 한 채 마련치 못한
그녀, 이제 머잖아
보얀 젖들이 꽉꽉 들어찬
언어의 詩家 한 채 안을 수 있겠네






시,  부질없는 시
정현종


시로써 뭘 하려는 생각은
오래전
들고양이의 밥으로 내던져 주었다.


그렇다면 나의 생존은 무엇을 증거하고 있단 말인가


침묵이 간다
항문이 입이고 입이 항문인 절지동물처럼
맨몸으로 전신을 땅바닥에 끌고
그냥
생긴 바 대로


침묵이 간다






지면 없는 시(詩)
정영주


제 정신이 아니니까 칼을 쓰지
숫돌에 무시로 갈아도 문자만 날이 서지
집도 없는 문장 서너 줄 용쓰고 광택내도
거리로 내쫓기지, 문전박대지
시답잖은 시 나부랭이들, 좌판 벌일 일 있냐고
가슴 쪼개 해부한 시, 쓰레기통에서만 빛이 나지
눈물과 땀 서너 방울의 낭만이나
피 한 방울 찍어 쓴 진정성은
저잣거리 농담만도 못하지
통박 굴려 막가파로 가는 문장만 간간
현수막에 걸려 펄럭이지
주제도 의미부여도 이미지뿐인
막무가내 호기심을 무어라 하는지
지면 없는 시가 창문을 뛰어나와
골목을 배회하는 노숙은 어디에 잡아둬야 하는지
모자까지 깊게 뒤집어쓰고 시니컬하게 야옹거리다가
주인 없는 댓글에 넘어지는 시는?


이름도 갖지 못한 시인들이여
이제 갓길 없는 곳으로 다니지 마시게
변방일수록 소통이 부재여서
중심 잡기가 여간 어렵다지 아마,
출장 나간 문고리 잡고 몇 번 흔들다 지치는 것
그것이 지랄 같은 시라네
부싯돌처럼 서로를 비비고 쳐도
불씨조차 일어나지 않는 것이







취조 ㅡ베를린 천사의 시*
김준현


너와 나 사이가 캄캄해서 사진을 말린다

어두워지면 빨랫줄에 널어놓은 창들이 열리고
먼 곳을 보며 희미해지는 눈이라는 곳
쉰 냄새가 나는 바깥이란,
바깥은 다 상상한다

나무의자에 가지런히 앉아
정면을 바라보는 것처럼
증명할 수 있다면
우리는 여러 장으로 나뉜다
식어가는 눈으로

붉어서**
반응하지 않는다
비 내리는 소리를 적으며 귀가 다 젖고
내가 그린 창에는 바람이 많아
떠내려가는 새들
구름이 빈 깡통처럼 요란한 밤마다
가장 많이 본 게 검정이다 아픈
사람들의 숨소리를 외운다

새들은 날아가지 울지 않는다
우리는 서로의 잠을 치며 몸을 비운다
뚜렷해지는
상이 맺힌다



*영화 제목
**인화지는 유일하게 붉은빛에 반응하지 않는다.







9시간 동안 읽어야 하는 시
김 승 일


교양 잡지를 읽고 있었다
거기서 어떤 시를 보았다 83쪽에 있었다
제목이 9시간 동안 읽어야 하는 시였다
시가 무척 길었기 때문에
나중에 읽기 위해 페이지를 넘겼다
그러자 9시간 동안 읽어야 하는
시를 읽지 않고 읽으면
이해할 수 없는 시라는 제목의 시가 있었다
그다음 장에는 9시간 동안 읽어야 하는 시를
읽지 않고 읽으면 이해할 수 없는 시를
읽지 않았다면 이해할 수 없는 시가 있었다
그는 그가 이러한 말장난을 왜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는 그가 이해하지 못한 것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그러나 나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도 우리는 9시간 동안 읽어야 하는 시를
타이핑해 보았다
그 시를 타이핑하는 데 5분 정도 걸렸다







등대의 시
이병일


나는 검은 물기를 등줄기에 지고 안개 젖은 수평선을 바라본다
저만치 어스름의 저녁이 오고
내항선이 뭍으로 오르는 파도에 몸을 맡기고 있을 때
가장 먼 곳에서부터 첫 별이 뜨듯 나는 천천히 빛줄기를 세운다
 

나는 등 푸른 저녁이 온다고 우는 흑염소 새끼와
길 붉은 언덕의 풀꽃들이
벼랑을 기어오르는 해풍으로 꽃대를 세우는 시간이 좋았다
그러나 바다가 종일 파랑파랑하게 빛나는지 묻지 못했다
 

나는 그 어떤 두려움도 없이 풍경을 읽기 시작한다
방어진 해녀가 물질하며 파도와 주고받는 이야기와
어둠이 삼켜 보이지 않는 것들마저 엿보게 되었다
그래도 모르는 척 지나가면서 폐선마저 사랑하게 되었다
 

나는 어둠 저편에서 깜박거림을 켜는 화암추 등대였으니
밤바다를 건너는 물길의 하루마저 뭍의 세계로 건너가게 했다
투명하지만 차갑고 단단한 물결들을 통해
나는 말향고래의 신화를 모래톱 위에 켜켜이 풀어놓기도 했다
 

나 자신이 희고 아름다운 바다의 얼굴이 될 때
사계절 내내 어제의 피로가 쌓여 있는 밤의 물결 사이로
이쁜 해파리들의 꿈이 떠오르기도 했다
그런데 이상하지 달빛이 내 뒤통수를 쓰다듬을 때
나는 우아하고 부리가 긴 바닷새의 잠에 꿈을 심는다
 

그때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한 새 삶이
바다와 등대 사이에서 시작된다고 불빛이 켜졌다 꺼졌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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