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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숲에 들다

시 속의 시인 - ‘서정주' 모래로부터 먼지로부터 [장석원] 천원 한 장을 구걸하는 남자 떠오른 돌멩이 같은 비둘기들 처음 와본 것 같다 어떤 명령에 의해 걸음을 멈추었을까 뒤를 돌아본다 움푹 패어 있다 한 움큼 뽑혀나간 듯하다 광장은 쪼개지는 곳 바람이 그러하듯 광장은 중심을 지나지 않는다 바람과 햇빛, 습도와 명암까지 똑같다 지루하고 무한한 한 번의 삶이었지만 걸인이기도 하고 한 그루 나무이기도 하고 첨탑에 걸린 구름이기도 하지만 지워진 얼굴로 여기까지 걸어왔지만 횡단하는 비둘기로 가득 찬 하늘 밑에서 잠을 생각한다, 사랑의 복습을 꿈꾼다 그때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었고 또한 아무것이기도 했다 서울역 광장의 남측면에 자리잡은 매점 앞 여섯시의 저무는 태양 아래 나는 가만히 서 있다 라디오에서 시보가 흘러나온다 라디오는 모든 것을 .. 더보기
시 속의 시인 - ‘김소월' 천변에서 [ 신해욱 ] 당신은 무슨 일로 그리합니까? 홀로이 개여울에 주저앉아서 - 김소월, 「개여울」 이쪽을 매정히 등지고 검은 머리가 천변에 쪼그려 앉아 있습니다 산발입니다 죽은 생각을 물에 개어 경단을 빚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동그랗고 작고 가자 없는 것들 차갑고 말랑말랑하고 당돌한 것들 나는 기다리고 있습니다 계핏가루 콩가루 빵가루 뇌하수체 가루 알록달록한 고물이 담긴 쟁반을 받쳐 들고 있습니다 -나눠 먹읍시다! 나눠 먹읍시다 메아리도 울리는데 검은 머리는 뒤를 돌아보지 못합니다 검은 머리만 어깨 너머로 흘러내립니다 이크, 몇 오라기가 경단에 섞였는지도 모릅니다 쟁반을 몰래 내려놓고 머리를 땋아주는 일이 먼저일 것 같습니다 검은 머리가 삼손의 백발이 될 때까지 백발마녀가 라푼젤로 환생할 때까지 .. 더보기
시 속의 시인 - ‘정지용' 시 읽어주는 시인 [이선영] 먼 훗날 당신이 찾으시면 그때에 내 말이, 김소월 새로운 세계 하나를 낳아야 할 줄 깨칠 그때라야 비로소 우주에게 없지 못할 너로 알려 질 것이다 시인아, 이상화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백석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윤동주 오, 삼림은 나의 영혼의 스위트홈, 임화 고운 폐혈관이 찢어진 채로 아아, 정지용 늬는 산새처럼 날어갔구나! 이런 것은 아니었다, 나는 불행하다, 나는 일생 몫의 경험을 다했다, 기형도 진눈깨비 아, 김민부, 육신 밖으로 나가고 싶어 육신 밖으로 나가고 싶어 시대와 세기를 넘나들며 시, 정현종, 부질없는 시를 읽어주고 겨우겨우 일하면서 사는, 원재훈 처연하게 썩어 .. 더보기
시 속의 시인 - ‘오탁번' 오, 마이 캡틴! 오, 마이 탁번 [박제영] 1. 탁번이라 쓰고 시라고 읽는다 시가 뭐냐고 물을 때면 선생을 불러댔다 오탁번의 시를 봐라 설명이 필요 없다 얼마나 재밌노? 시는 이런 맛이다 웃다가 배꼽잡고 웃다보면 슬그머니 마음 한 켠이 짠~해지는 것 괜히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 그게 시다 탁번이라 쓰고 시라고 읽어댔다 2. 탁본, 오탁번 오탁번 선생님 뵈러 장인수 시인과 애련리 원서문학관 갔던 건데 성과 속을 오가며 시와 문학과 우리말의 정수를 회 뜨시는 선생의 강의를 들으며 우리는 시종 울다 웃다 취했던 건데 햄릿의 그 유명한 독백 “투비 오어 낫 투비”를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요렇게 해석하는 놈들은 죄다 가짜여 웃기고 자빠질 일이지 “기여? 아녀? 좆도 모르겠네.” 요게 진짜여 이 대목.. 더보기
시 속의 시인 - ‘백석' 정기구독 목록 [최갑수] 나의 정기구독 목록에는 늦은 밤 창가를 스치는 빗소리와 그 빗소리를 들으며 슬쩍슬쩍 읽어보는 윤동주 백석 박용래 같은 눈물을 닮은 이름 몇 자들 새벽녘 앞마당에 고여 있는 막 떠다놓은 찻물처럼 말갛기만 한 하늘 기다릴 필요 없어요, 바람난 애인이 또박또박 적어준 빛이 바랜 하늘색 편지 읍내에서 단 하나뿐인 중앙극장의 야릇하게 생긴 배우들 그 배우들이 슬픈 얼굴로 보여주는 화끈한 '오늘 푸로' 환절기마다 잊지 않고 찾아오는 사나흘간의 감기 그때마다 먹는 빨갛고 노란 알약들, 일요일 담에 널어 말리는 초록색 담요와 그 담요를 말고 자는 둥그스름한 낮잠 그 낮잠 위로 헬리콥터가 한 대 가끔 부르르르 저공 비행을 하다가 돌아가기도 하고 내 낮잠도 부르르르 따라 흔들리기도 하고 낮잠에서 .. 더보기
시 속의 시인 - ‘김종삼' 김종삼 전집 [장석주] ―주역시편ˇ22 정처없는 마음에 가하는 다정한 폭력이다. 춤추는 소녀들의 발목, 혀 없이 노래하는 빗방울, 날개 없이 날려는 습관이다.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이정표, 또다시 봄이 오면 누가 봄을 등 뒤에 달고 벙거지를 쓰고 허청허청 걸어간다. 그가 누구인지를 잘 안다. 오리나무에서 우는 가슴이 붉은 새여, 오리나무는 울지 않고 바보들이 머리를 어깨에 얹은 채 지나가고 4월 상순의 날들이 간다. 밥때에 밥알을 천천히 씹으며 끝끝내 슬프지 않다. 죽은 자들은 돌아오지 않고 오직 기일과 함께 돌아오는 5월의 뱀들. 풀숲마다 뱀은 고요의 형상을 하고 길게 엎드려 있다. 감상적으로 긴 생이다. 배를 미는 길쭉한 생 위로 얼마나 많은 우아한 구름들이 흘러갔는가. 개가 죽은 수요일 오후, 오늘.. 더보기
시 속의 시인 - ‘김수영' 뇌 [서동욱] ―또는 김수영의 마지막 날 대지여, 영예로운 손님을 맞으시라 ―오든 1 술 취한 시인은 이번에도 이길 것 같았다 " 너는 왜 이런, 신문 기사만큼도 못한 것을 시라고 쓰고 갔다지? " 인격에 싸가지라고는 조금도 없어서 그는 죽은 이에게도 뒤에서 욕을 한다 아니면 빈말 한마디 하는 데도 수전노 같다 "거짓말이라도 칭찬을 쓸 걸 그랬다" 시인은 이번엔 자기 자신을 이길 것 같았다 자신을 칭찬하고 싶지 않은 나머지 이제, 비틀거리며 차도 위로 내려오는구나 ( " 당신한테도 이겨야 하겠다 " ) 이 못된 성질 2 심야 버스가 멈춰 서고 계란찜을 만들려고 사기그릇에 탁 껍데기를 치는 충격 같은 것이 머리를 지나갔으며 남극에 떠 있는 얼음처럼 두 눈 뒤에 둥둥 떠 있던 뇌는 이제야 당황하며 자신이 견.. 더보기
시 속의 시인 - ‘김관식' 시인학교 [김종삼] 공고 오늘 강사진 음악 부문 모리스 라벨 미술 부문 폴 세잔느 시 부문 에즈라 파운드 모두 결강. 김관식, 쌍놈의 새끼들이라고 소리지름. 지참한 막걸리를 먹음. 교실 내에 쌓인 두꺼운 먼지가 다정스러움. 김소월 김수영 휴학계 전봉래 김종삼 한 귀퉁이에 서서 조심스럽게 소주를 나눔.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제 5번을 기다리고 있음. 교사. 아름다운 레바논 골짜기에 있음. - 김종삼을 생각하다, 예서, 2021 김관식 [김진경] 나는 그의 얼굴을 본 적도 없고 나는 그의 시를 변변히 읽은 것도 없어 하지만 그는 엄연히 내 시의 가장 큰 스승이야 내 젊은 시절 그와 강경상고 동창이라는 큰 형은 나를 만류해보려고 늘 그를 들먹거리곤 했지 보릿고개를 넘는 시골에 시를 씁네 하고 하얀 양복에 백구두..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