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붉은수염

그 여자네집. 가을이면 은행나무 은행잎이 노랗게 물드는 집 해가 저무는 날 먼데서도 내 눈에 가장 먼저 뜨이는 집 생각하면 그리웁고 바라보면 정다웠던 집 어디 갔다가 늦게 집에 가는 밤이면 불빛이, 따뜻한 불빛이 검은 산속에 깜박깜박 살아있는 집 그 불빛 아래 앉아 수를 놓으며 앉아 있을 그 여자의 까만 어릿결과 어깨를 생각만 해도 손길이 따뜻해져오는 집 살구꽃이 피는 집 봄이면 살구꽃이 하얗게 피었다가 꽃잎이 하얗게 담 너머까지 날리는 집 살구꽃 떨어지는 살구나무 아래로 물을 길어오는 그 여자 물동이 속에 꽃잎이 떨어지면 꽃잎이 일으킨 물결처럼 가 닿고 싶은 집 샛노란 은행잎이 지고 나면 그 여자 아버지와 그 여자 큰오빠가 지붕에 올라가 하루 종일 노랗게 지붕을 이는 집 노란 초가집 어쩌다가 열린 대문 사이로 그 여.. 더보기
다같이 돌자 동네 한바퀴! 평생 할 줄 아는 것이 뱀 구멍과 마누라 거시기 파는 것이었다는 뱀통 메고 산기슭 떠돌다가 벼락 맞아 죽은 땅꾼의 버려진 산소에도 잡목이 정수리까지 박혀 쓸쓸하다. 친구도 친구 자식도 다시는 돌아올 일이 없을 것 같아 울먹해지는 이민 간 친구 빈집 마루에 가득한 흙먼지 병을 얻은 친구의 홀아버지는 읍내 큰아들 집에 구들을 지고 누워 있단다. 어머니가 걸어서 시집왔다는 고개는 파헤쳐지고 개울 건너 경순네 빨간 함석지붕은 헐려 보이지 않는다. 지초실 종기네 민구네 옛집도 눈이 흐려 분간할 수가 없다. 교회당 사모는 도시로 떠나고 싶다는 소문이 돌고 젊은 여자의 팔 할이 다방아가씨란다. 겉늙은 내 시골 동창과 살던 다방아가씨는 도망쳤고 방앗간집 며느리 셋도 다방아가씨였는데 농자금을 털어 모두 집을 나갔다고 한.. 더보기
바다가, 파도가 그리운 날에는... 바다가 보이는 언덕 위에 우체국이 있다 나는 며칠 동안 그 마을에 머물면서 옛 사랑이 살던 집을 두근거리며 쳐다보듯이 오래오래 우체국을 바라보았다 키 작은 측백나무 울타리에 둘러싸인 우체국은 문 앞에 붉은 우체통을 세워 두고 하루 내내 흐린 눈을 비비거나 귓밥을 파기 일쑤였다 우체국이 한 마리 늙고 게으른 짐승처럼 보였으나 나는 곧 그 게으름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이 곳에 오기 아주 오래 전부터 우체국은 아마 두 눈이 짓무르도록 수평선을 바라보았을 것이고 그리하여 귓속에 파도 소리가 모래처럼 쌓였을 것이었다 나는 세월에 대하여 말하지만 결코 세월을 큰소리로 탓하지는 않으리라 한 번은 엽서를 부치러 우체국에 갔다가 줄지어 소풍 가는 유치원 아이들을 만난 적이 있다 내 어린 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우체통이.. 더보기
사라진 얼굴. 어디서 물 끓는 소리 들린다 저 불을 꺼야 하는데, 꺼야 하는데, 손을 내저어보지만 몸이 도무지 말을 듣지 않는다 물이 잦아든 주전자가 달아오른다 쇠 타는 냄새 플라스틱 손잡이 녹는 냄새 녹은 프라스틱이 다시 엉기는 냄새 급기야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한다 물은 한 방울도 남지 않았는데 물 끓는 소리 계속 들린다 어서 저 불을 꺼야 하는데, 꺼야 하는데..... 비등점 위의 날들, 비는 내리지 않고, 마른 웅덩이에 는 맹렬하게 끓어오르는 개구리 울음소리, 누구의 목이 이리도 말라 물기란 물기는 다 거두어 가는가. 일어나, 일어나, 불타는 혀가 너를 삼키기 전에. 소리쳐보아도 이내 되돌아와 불타는 소리. 물 끓는 소리. 아무것도 모 른 채 잠이 든 마음을 업고 연기나는 집을 뛰쳐나왔다. - 나희덕 시 .. 더보기
멀지만,, 가까이 있는 당신. 한겨울 속에 여름, 한여름 속에 겨울 한 뿌리 속에 꽃과 잎 그것이 꽃이건 말거나 피거나 말거나 너느 아주 멀리멀리서 허물어졌다가 솟아나는 왕국에서 눈보라 치다가 갑자기 고요해지는구나 활짝핀 다음에야 나도 진다 지기 위해 만개했었다 목적도 없는 왕 네 안의 눈보라 속에서 쉬었다가 다시 피어나고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고 첩첩의 꽃이라 하는 순간 끝, 종을 치는구나. - 최정례 시 '첩첩의 꽃' 모두 - 기력이 쇠하면,, 충전을 해야한다. 살아가는게 무엇인지? 하고 스스로에게 묻고 싶어지는 순간,, 정신을 차리라고 얼음냉수를 한잔 마신다. 땀을 너무 흘리다보니,, 몸에서 쉰내가 난다. 일과를 마치고 샤워시설이 없으면 수건에 물을 적셔서 온몸의 땀기를 딱아낸다. 사무실에 있을때는 몰랐는데 밖에서 일을하다 들어오.. 더보기
물같이 흐르는 선(善). 퐁텐느블로의 에글르 느와르 호텔 앞에 로자 본뇌르 가 조각한 황소가 있다 조금 더 가면 사방에 숲이 있고 다시 조금 더 가면 아름다운 주검이 있다 또 숲이 있고 그리고 불행이 있고 그 바로 곁에 행복이 있다 퀭한 눈의 행복 등에 솔잎이 난 행복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는 행복 로자 본뇌르가 조각한 황소와 닮은 행복 그리고 또 불행 금장시계를 찬 불행 타야 할 기차가 있는 불행 모든 것을 생각하는 불행 모든 것 모든 것... 모든 것... 모든 것... 그 모든 것을 그리고 거의 '거의' 틀림 없이 게임에서 이기는 불행이 있고. -쟈끄 프로베르 '거의'모두 - 살아가면서 아주 드믈지만 힘겹게도,, 아내나 남편이,,, 상사나 동료가 위압적 자세로 고함을 치거나 날조된 거짓으로 험담을 퍼뜨릴 때,,, 사회적, .. 더보기
인생의 절반. 내 남편은 월급은 많지 않아도 너무 늦지않게 퇴근할수있는 직업을 가진 사람 이였으면 좋겠다. 퇴근길에 동네슈퍼 야채코너에서 우연히 마주쳐 '핫'하고 웃으며 저녁거리와 수박 한통을 사들고 집까지 같이 손잡고 걸어갈수 있었음 좋겠다. 집까지 걸어오는 동안 그날 있었던 열받는 사건이나 신나는 일들 부터 오늘 저녘엔 뭘 해 먹을지,,, 시시콜콜한 것까지 다 말하고 들을수 있는 사람 이였으면 좋겠다. 그렇게 들어가서 같이 후다닥 옷 갈아입고 손만씻고, 한 사람은 아침에 먹고 난 설겆이를 덜그덕 덜그덕하고 또 한사람은 쌀을 씻고 양파를 까고 "배고파~" 해가며 찌게 간도 보는 싱거운 사람이였으면 좋겠다. 다 먹고나선 둘 다 퍼져서 서로 설겆이를 미루며 왜 니가 오늘은 설겆이를 해야 하는지,,, 서로 따지다가 결판이.. 더보기
거칠고,, 부드러운 손. 아내는 76 이고 나는 80 입니다 지금은 아침 저녁으로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어가지만 속으로 다투기도 많이 다툰 사이입니다 요즘은 망각을 경쟁하듯 합니다 나는 창문을 열러 갔다가 창문 앞에 우두커니 서있고 아내는 냉장고 문을 열고서 우두커니 서 있습니다 누구 기억이 일찍 돌아오나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은 서서히 우리 둘을 떠나고 마지막에는 내가 그의 남편인 줄 모르고 그가 내 아내인 줄 모르는 나도 올것 입니다 서로 모르는 사이가 서로 알아가며 살아가다 다시 모르는 사이로 돌아가는 세월 그것을 무어라고 하겠습니까 인생? 철학? 종교? 우린 너무 먼 데서 살았습니다. - 이생진 시 '아내와 나 사이' 모두 요즈음,, 가끔 가다가 아내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때가 있습니다. 20여년을 살아 오면..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