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 썸네일형 리스트형 ‘지성 이라는 향기‘ - 오규원 시. 1 가을. 하고도가을어느날. 길을가다가자리를잘못잡아지상(地上)에서반짝이는별,그런별몇개로반짝이는황국(黃菊)이나야국(野菊)을만나면가을동안가을이게두었다가그다음국(菊)을다시별로불러별이되게하고몇개는내주머니에늘넣고다니리라. 내주머니가작기는하지만그곳도우주이니별이뜰자리야있습지요.딴은주머니가낡아서몇군데구멍이있는데혹지나다니는길에무슨모양을하고떨어져있거든눈꼽이며그곳이나비누로좀닦아서어디든두고안부나그렇게만전해주시기를. 2 오해하고싶더라도제발오해말아요 시인도시(詩)먹지않고밥먹고살아요 시인도시(詩)입지않고옷입고살아요 시인도돈벌기위해일도하고출근도하고돈없으면라면먹어요 오해하고싶더라도제발오해말아요 오해하고싶으면제발오해해줘요 시인도밥만먹고는못살아요 시인도마누라만으로는못살아요 구경만하고는만족못해요 그러니까시인도무슨짓을해야지요 무슨짓을하긴하는.. 더보기 해바라기 / 둘, 어느 한 사람의 산책길 [천양희] 숲이 잠 깨는지 나뭇잎들이 찰랑거립니다 아침햇살이 부신 듯 어린 새들 두 눈이 붉어집니다 바람이 몰래 빠져나가느라 오솔길이 더 좁아지는 아침 들쭉나무 아래 철 늦은 산꽃이 순하고 작년의 낙엽들 썩어 거름 된 지 오랩니다 한 사람의 산책길이 그냥 지나가고 마는 길이 아니었습니다 떠들썩하던 사람들 이곳에 와서야 해 지는 서편을 잠시 돌아봅니다 되돌아볼 것은 노을이 아니라 자신입니다 지기 때문에 노을이 아름답다 하였으나 지기 때문에 무서운 건 누구이겠습니까 눈시울이 노을보다 더 붉어집니다 누구에게나 울면서도 가야 할 길이 있는 것입니다 가오리연 하나 기우뚱거리며 언덕을 오르고 있습니다 얼레를 더 당겨, 그래야 더 높이 오를 수 있는 거여 연 연구에 평생을 바친 박노인이 힘주어.. 더보기 해바라기. 비움과 틈새의 시간 [곽효환] 푸르게 일렁이던 청보리 거둔 빈 들에 하얀 소금 덩이 같은 메밀꽃을 기다리는 비움과 틈새의 시간 배꽃과 복사꽃 만발했던 자리에 코스모스와 키 큰 해바라기 몸 흔들고 배롱나무 더 붉게 물드는 세상의 풀과 나무와 산과 강이 제각각의 빛깔을 머금고 뒤섞이는 시간 징검다리 여남은 개면 눈에 띄게 수척해진 물살을 건너 다음 계절에 닿을 듯하다 크게 물굽이를 이루며 사행하는 물살에 수없이 부딪히며 어질고 순해진 돌들에게서 거친 시대를 쓿는 소리가 들린다 흐르는 것이 어디 강뿐이겠냐마는 초록이 다 지기 전에 물길 따라 난 길이 문득 끊어진 강변 마을 어느 허술한 찻집에 들어 아직 고여 있는 것들 미처 보내지 못한 것들 함께 흘려보내야겠다 빠르게 질러가느라 놓친 것들 그래서 잃어버린 것들.. 더보기 집보다는 길에서, 집에서보다는 길에서 가고 싶다. 톨스토이처럼 한겨울 오후 여든두 살 몸에 배낭 메고 양편에 침엽수들 눈을 쓰고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눈 혼자 터벅터벅 걸어 기차역에 나가겠다가 아니라 마지막 쑥부쟁이 얼굴 몇 남은 길섶, 아치형으로 허리 휘어 흐르는 강물 가을이 아무리 깊어도 흘러가지 않고 남아 있는 뼈대 그 앞에 멎어 있는 어슬어슬 세상. 어슬어슬, 아 이게 시간의 속마음! 예수도 미륵도 매운탕집도 없는 시간 속을 캄캄해질 때까지 마냥 걸어. - 황동규 시 ‘집보다는 길에서‘ * 우연에 기댈 때도 있었다, 문학과지성사, 2003 - 젊은시절 부터, 산을 좋아 했다. 집에서 가까운 도봉산, 북한산, 관악산을 주말마다 오르곤 했다. 군대에 가서 3보 이상은 탑승 이라는 포병 이었는데 ‘시범부대’로 뽑혀서 .. 더보기 ‘동화와 시’ - 안도현 시. 우리가 눈발이라면 허공에서 쭈빗쭈빗 흩날리는 진눈깨비는 되지 말자 세상이 바람 불고 춥고 어둡다 해도 사람이 사는 마을 가장 낮은 곳으로 따뜻한 함박눈이 되어 내리자 우리가 눈발이라면 잠 못 든 이의 창문 가에서는 편지가 되고 그이의 깊고 붉은 상처 위에 돋는 새 살이 되자 - 안도현 시‘우리가 눈발이라면‘ 바람이 분다 부는 바람에 쓸리우며 우리 연을 띄우자. 아직은 설푸른 슬기로 웃음 함께 모두어 뉘우침이 자욱한 새벽 끝에 서면 참 눈살 시린 하늘이 겨울에도 가슴으로 고여들고 예감은 밤나무 얼레로 풀려 가는데 훠어이 훠이 밀물처럼 밀려 오르는데 한결같이 바람 소리 높은 곳 저 아름다운 꽃잎 흩날리는 햇살은 누구에게 보내는 영원의 노래인가. 四季가 피었다 이우는 왼쪽 하늘에는 방패연 조개연 오색치마연 아.. 더보기 ‘찔레꽃 향기‘ - 신석정 시.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깊은 삼림 지대를 끼고 돌면 고요한 호수에 흰 물새 날고 좁은 들길에 들장미 열매 붉어 멀리 노루새끼 마음놓고 뛰어다니는 아무도 살지 않는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그 나라에 가실 때에는 부디 잊지마세요. 나와 같이 그 나라에 가서 비둘기를 키웁시다.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산비탈 넌지시 타고 내려오면 양지밭에 흰 염소 한가히 풀 뜯고 길 솟는 옥수수밭에 해는 저물어 저물어 먼 바다 물 소리 구슬피 들려오는 아무도 살지 않는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어머니, 부디 잊지마세요. 그때 우리는 어린 양을 몰고 돌아옵시다.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오월 하늘에 비둘기 멀리 날고 오늘처럼 촐촐히 비가 내리면 꿩소리도 유난히 한가롭.. 더보기 존재와 ’본질‘ - 신동집 시. 오렌지에 아무도 손을 댈 순 없다. 오렌지는 여기 있는 이대로의 오렌지다. 더도 덜도 아닌 오렌지다. 내가 보는 오렌지가 나를 보고 있다. 마음만 낸다면 나도 오렌지의 포들한 껍질을 벗길 수 있다. 마땅히 그런 오렌지 만이 문제가 된다. 마음만 낸다면 나도 오렌지의 찹잘한 속살을 깔 수 있다. 마땅히 그런 오렌지 만이 문제가 된다. 그러나 오렌지에 아무도 손을 댈 순 없다. 대는 순간 오렌지는 이미 오렌지가 아니고 만다. 내가 보는 오렌지가 나를 보고 있다. 나는 지금 위험한 상태다. 오렌지도 마찬가지 위험한 상태다. 시간이 똘똘 배암의 또아리를 틀고 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오렌지의 포들한 껍질에 한없이 어진 그림자가 비치고 있다. 누구인지 잘은 아직 몰라도. - 신동집 시 ‘오렌지’모두 마지막으로 .. 더보기 8월의 시- ‘민지의 꽃’ 정희성. 강원도 평창군 미탄면 청옥산 기슭 덜렁 집 한 채 짓고 살러 들어간 제자를 찾아갔다. 거기서 만들고 거기서 키웠다는 다섯 살배기 딸 민지 민지가 아침 일찍 눈 비비고 일어나 저보다 큰 물뿌리개를 나한테 들리고 질경이 나싱개 토끼풀 억새…… 이런 풀들에게 물을 주며 잘 잤니,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그게 뭔데 거기다 물을 주니? 꽃이야, 하고 민지가 대답했다. 그건 잡초야, 라고 말하려던 내 입이 다물어졌다. 내 말은 때가 묻어 천지와 귀신을 감동시키지 못하는데 꽃이야, 하는 그 애의 말 한마디가 꽃잎의 풋풋한 잠을 흔들어 깨우는 것이었다. - 정 희성시 ‘민지의 꽃’모두 *시집 《시(詩)를 찾아서》(2001) 수록 - ‘열대야..,’ 도시는 대기의 온도를 품고 건물마다, 사이드 마다 ‘뜨거운 공기’를 밖.. 더보기 이전 1 ··· 20 21 22 23 24 25 26 ··· 178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