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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침묵이, ‘나’의 침묵으로 ‘오롯이‘ 마주 설때 - 조 용미 시. #오롯이 1. 남고 처짐이 없이 고스란히, 2. 아주 조용하고 쓸쓸히. 이른 아침, 누군가 다른 사람이 먼저 와 있다 이곳에서 사람을 만난 건 처음 있는 일 누군가 나무를 찾아오는 이가 또 있었다 바로 지금 희귀한 이 시간에 딱 부딪히다니 불편하지 만 그렇다고 피할 데도 없다 먼저 온 이와 나는 서로를 보지 못한 척 아무 말도 하 지 않고 나무만 바라보았다 이 나무를 잘 아느냐고 먼저 그가 말을 붙였다 그와 나는 십수 년간 나무를 찾아왔다 멀리서, 내게 맞는 봄을 찾아, 해마다 이 늙은 매화나 무 아래 서 있다 가느라 나도 모르게 나이를 먹었다 손가락에 감은 붕대가 붉게 물들도록 아무렇지도 않은 듯 나무의 지문을 살핀다 그가 나의 영역을 침범한 것은 아니다 햇빛 드는 한낮까지 늙은 꽃나무는 다정하지도 무.. 더보기
“어머니이자, 어머니를 그리는 엄마“ ‘페미니즘’의 시 - 정 끝별 시. # 페미니즘 [feminism]: 성별에 의한 차별을 없애고 여성의 사회, 정치, 법률상의 지위와 역할의 신장을 주장하는 주의 모래는 어쩌다 얼굴을 잃었을까? 모래는 무얼 포기하고 모래가 되었을까? 모래는 몇천번의 실패로 모래를 완성했을까? 모래도 그러느라 색과 맛을 다 잊었을까? 모래는 산 걸까 죽은 걸까? 모래는 공간일까 시간일까? 그니까 모래는 뭘까? 쏟아지는 물음에 뿔뿔이 흩어지며 모래는 어디서 추락했을까? 모래는 무엇에 부서져 저리 닮았을까? 모래는 말보다 별보다 많을까? 모래도 제각각의 이름이 필요하지 않을까? 모래는 어떻게 투명한 유리가 될까? 모래는 우주의 인질일까? 설마 모래가 너일까? 허구한 날의 주인공들처럼 - 정 끝별 시 ‘모래는 뭐래?‘ [모래는 뭐래],창비, 2023. 귓속 고막.. 더보기
모과 나무. 언제나 며칠이 남아있다 [위선환] 멀리까지 걸어가거나 멀리서 걸어 돌아오는 일이 모두 혼 맑아지는 일인 것을 늦게 알았다 돌아와서 모과나무 아래를 오래 들여다본 이유다 그늘 밑바닥까지 빛 비치는 며칠이 남아 있었고 둥근 해와 둥근 달과 둥근 모과의 둥근 그림자들이 밟 히는 며칠이 또 남아 있었고 잎 지는 어느 날은 모과나무를 올려다보며 나의 사소한 걱정에 대하여 물었으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아직 남은 며칠이 지나가야 겨 우 모과나무는 내가 무엇을 물었는지 알아차릴 것이므로 그때는 모과나무 가지에 허옇게 서리꽃 피고 나는 길을 떠나 걷고 있을 것이므로 치운 바람이 쓸고 지나간 며칠 뒤에는 걱정 말끔히 잊 고 내가 혼 맑아져서 돌아온다 해도 모과꽃 피었다 지고 해와 달과 모과알들이 둥글어지는 며칠이 또 .. 더보기
배롱 나무. 비움과 틈새의 시간 [곽효환] 푸르게 일렁이던 청보리 거둔 빈 들에 하얀 소금 덩이 같은 메밀꽃을 기다리는 비움과 틈새의 시간 배꽃과 복사꽃 만발했던 자리에 코스모스와 키 큰 해바라기 몸 흔들고 배롱나무 더 붉게 물드는 세상의 풀과 나무와 산과 강이 제각각의 빛깔을 머금고 뒤섞이는 시간 징검다리 여남은 개면 눈에 띄게 수척해진 물살을 건너 다음 계절에 닿을 듯하다 크게 물굽이를 이루며 사행하는 물살에 수없이 부딪히며 어질고 순해진 돌들에게서 거친 시대를 쓿는 소리가 들린다 흐르는 것이 어디 강뿐이겠냐마는 초록이 다 지기 전에 물길 따라 난 길이 문득 끊어진 강변 마을 어느 허술한 찻집에 들어 아직 고여 있는 것들 미처 보내지 못한 것들 함께 흘려보내야겠다 빠르게 질러가느라 놓친 것들 그래서 잃어버린 것들.. 더보기
매화 나무. 그늘을 캐다 [임혜주] 매화나무가 그늘을 드리워 줘서 네 상심을 조금 캘 수 있었다 수보리야 부처를 보았다 할 수 있느냐 후우 호로롱 새 울음 몇 마디 얹고 일렁이는 달맞이 분홍 바람도 함께 올려서 대야에 담는다 왼손 끝에 딸려 나오는 자잘한 꽃망울들 상심이 이런 꽃이었단 말이냐 호미를 풀밭에 버려두고 일어나니 아찔한 햇빛 속이다 - 어둠은 어떻게 새벽이 되는가, 천년의시작, 2023 매화, 흰빛들 [전동균] 뒤뜰 매화나무에 어린 하늘이 내려와 배냇질하며 잘 놀다 간 며칠 뒤 끝이 뾰족한 둥근 잎보다 먼저 꽃이 피어서, 몸과 마음이 어긋나는 세상의 길 위로 날아가는 흰빛들 아픈 생의 비밀을 안고 망명하는 망명하다가 끝내 되돌아와 제 자리를 지키는 저 흰빛의 저 간절한 향기 속에는 죄짓고 살아온 날들의 차.. 더보기
산수유 나무. 삼월의 속수무책 [심재휘] 초봄날 오전, 내게 오는 볕의 마음은 그 생김이 ㅁ 같기도 하고 ㅇ 같기도 해서 지루한 햇살을 입안에 넣고 미음 이응 우물거려보다가 ㅁ과 ㅇ의 안쪽을 기웃거려보다가 기어이 낮술 몇 잔으로 밑이 터진 사람의 마음을 걸치고 사광에 늘어진 그늘 가까이 이르러서야 빛으로 적막한 삼월의 마음에는 들어가는 문이 없다는 것을 안다 서둘러 활짝 핀 산수유 꽃나무가 제 속을 뱉어 어룽대는 그늘을 먼발치에도 오래 드리우는데 그 노란 꽃그늘을 머리에 이고 집으로 가는 사람이 있어 안팎으로 드나드는 ㅁ과 ㅇ이 저런 풍경이라면 누구를 위해 그늘을 만들어본 적 없는 두 발 단 것들은 속수무책이다 - 용서를 배울 만한 시간, 문학동네, 2018 은어 [함명춘] 햇볕의 길이 서면 온다 바다쪽으로 한쪽 어깨.. 더보기
‘무위(無爲)와 순리(順理)의 시’ - 오 탁번 시인. 입과 코를 숨긴 젊은이들 눈망울이 꽃샘에 피어나는 수선화 보듯 봄은 급하게 온다 오늘은 백신 맞으러 간다 다 산 다늙은이지만 추사가 수선화를 보듯 좀만 더 살아보자 그동안 너무 싸돌아다녔다 이젠 위리안치! 새싹 올라오는 마늘밭에서 어정버정하다 보면 다 궁금코 어여쁘다 - 오 탁번 시 ‘위리안치‘ 눈을 밟으면 귀가 맑게 트인다. 나뭇가지마다 순은純銀의 손끝으로 빛나는 눈 내린 숲길에 멈추어 선 겨울 아침의 행인들. 원시림原始林이 매몰될 때 땅이 꺼지는 소리, 천년동안 땅에 묻혀 딴딴한 석탄石炭으로 변모하는 소리, 캄캄한 시간 바깥에 숨어 있다가 발굴되어 건강한 탄부炭夫의 손으로 화차에 던져지는, 원시림 아아 원시림 그 아득한 세계의 운반 소리. 이층방 스토브 안에서 꽃불 일구며 타던 딴딴하고 강경한 석탄의.. 더보기
삶의 찰나에 대한 ‘크로키’ - 장 석주 시. * 땅거미 내리니 컹컹대며 보채는 개들에게 먼저 사료 주고 들어와 푸른 형광등 아래서 서운산에서 뜯은 취나물과 막된장 놓고 저녁밥을 먹는다. 오월이다, 밤마다 풋감들 후두두 떨어지고 들고양이는 호랑이 울음소리를 흉내내며 운다. 저 홀로 시름 깊은 사람 있겠다 * 풀먹인 모시옷 입고 둔덕 죽은 나뭇가지에 와서 우는 뻐꾹새 울음에나 귀를 내놓고 소일한다. 밤에는 덤불 위로 개똥벌레가 떠다닌다. 남은 세월은 한량으로 지내도 상관없겠다는 생각을 붉은 모란촉처럼 씩씩하게 내밀어 보는 것이다. * 사는 동안 슬픈 일만 많았다. 무서리 내리고 된서리 내렸다. 고사리 새 순 나오려면 아직 멀었다. 살모사 놀다가는 날도 있다고, 물안개 자욱하고 나무들에 새 잎 돋는 날도 있다고, 초승달 떴다. * 종일 뱁새가 노래한다...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