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붉은수염

슬퍼도, 봄 나는 나를 늘 싸게 팔았다 아예 마이너스로 치부해 버렸다 내세울 게 없는 집안이라고 어머니는 말씀하셨고 나는 그 말에 육십년이나 절었다 그래서 나의 액면가는 낮을 수밖에 없고 때로 누가 나에게 제 값을 쳐주면 정색을 하며 다시 깎아내리곤 했다 자신의 액면가를 곧잘 높여 부르는 이들도 있는데 겉으로는 끄덕끄덕하면서도 속으로는 씁쓸하다 그들의 액면가는 부르는 만큼 상종가를 치기도 하는데 나는 늘 나의 값을 바닥에서 치르며 흘끔흘끔 앞뒤를 곁눈질 한다 깎이고 깎인 액면가가 내가 되었다 이제라도 제값을 받아보자고 큰소리 한번 치고 싶은데 유통기한이 끝나간다 무릎이 저리다 - 윤 준경 시 ‘ 액면 가’ 모두 *슬퍼도, 봄 (시선사, 2021) * ‘액면 가’.... 말 그대로 어떤 사물에 유형, 무형의 가치로 계.. 더보기
모란이 필 때 까지...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으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 김영랑 시 '모란이 피기까지는' 모두 * 해마다 계절이 바뀌고 봄이 가까우면 영랑을 읽는다. 입춘이 지나면 봄이 제일먼저 피어나는 제주로 길을 떠나지만,,, 올해는 제주는 커녕, 동백도 수선화도 보지 못하고, 봄을 시샘하는 세찬 바람만 흠뻑 맞고 말았다. 꽃소식이 들려오면.. 더보기
겨울, 메마른 길 위에서,, 그때는 뾰족 구두로 똑, 똑 소리 나게 걸었는데 나이가 들수록 신발 굽이 낮아진다 그저 높낮이 없이 바닥이 평평하고 언제 끌고 나가도 군말 없이 따라 오는 편안한 신발이 좋다. 내가 콕,콕 땅을 후비며 걸었을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헤지게 했는지 또닥거리며 걸었을 때, 또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가슴 저리게 울렸을지 굽을 낮추면서 알겠다. 신발이 닳아 저절로 익숙해진 낮은 굽은 굽 높은 신발이 얼마나 끄덕 거리면서 흔들흔들 살아가는지 말해준다. 이제 나는 온들 간들 소리 없고 발자국도 남기지 않는 햐얀 고무신이고 싶다. 어쩌다 작은 발이 잠깐 다녀올 때 쏘옥 신을 수 있고 큰 발이 꺾어 신어도 이내 제자리로 돌아오는, 나는 굽이 없는 신발이다. - 문차숙 시 '나는 굽 없는 신발이다' 모두 201.. 더보기
잠 못 이루는 이 밤에, 내가 잠 못 이루는 밤에, 라고 쓰면 딴엔 화사한 것이 적지 않던 너는 별이 빛나는 밤에, 라고 번역하던 창가였다. 창문을 열면 이제 별 한 톨 없이 고속도로의 굉음만 쏟아져 들어오는 밤, 통증 때문에 침대 끝에 나앉았는데 호랑이띠인 너는 무슨 으르렁거릴 게 많아서 이빨을 득득 갈며 잘도 잔다. 무게라면 등이 휠 것 같은 삶의 무게라도 네 것까지 한껏 도맡아 안고 별빛으로 길의 지도를 읽어대던 시절의 빛이 사라진 후, 쾌락이라면 마지막 한 방울의 것까지 핥고 핥던 서로가 아픔은 한 점이라도 서로 나눌 수 없는 슬픔에 목이 멜 필요는 없으리라. 우리가 살고 사랑하고 상처 입은 날들의 적재(積載)와 같은 마주 보이는 어둠의 아파트, 하기야 생계 하나만으로도 서둘러 일어나 저렇게 몇몇 창에 불을 밝히는 사람들.. 더보기
살아 있는 것은 아름답다. 살아 있는 것은 아름답다. 아무리 작은 것이라고 할지라도 살아 있는 것은 아름답다. 모든 들풀과 꽃잎들과 진흙 속에 숨어사는 것들이라고 할지라도, 그것들은 살아 있기 때문에 아름답고 신비하다. 바람도 없는 어느 한 여름날, 하늘을 가리우는 숲 그늘에 앉아보라. 누구든지 나무들의 깊은 숨소리와 함께 무수한 초록잎들이 쉬지 않고 소곤거리는 소리를 들을 것이다 이미 지나간 시간이 아니라 이 순간에,서 있거나 움직이거나 상관없이 살아 있는 것은 아름답다. 오직 하나, 살아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것들은 무엇이나 눈물겹게 아름답다 - 양성우 시 ‘살아 있는 것은 아름답다’ 모두 *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은 아름답다. 인간의 노, 소를 지나쳐 들꽃과 풀앞과 작은 벌레까지,, 살아있는 ‘그 자체’로 아름답고 눈물겨운 것이.. 더보기
희미해져 간다....! 엄마는 다시 빳빳하게 풀을 먹였다 몸에서 오 센티쯤 뜬 이불 속에는 손톱으로 양철 긁는 소리가 났다 가난에도 각을 세워라 엄마의 지론이었다 양잿물에 광목 자루 팍팍 삶으면서 무릎 기운 바지를 입었으나 고개 꼿꼿이 세우고 다녀라 빨갛게 파랗게 광목 물들이면서 아무리 추워도 주머니에 손 넣고 걷지 마라 종잇장처럼 구겨진 오기 서릿발을 세웠다 수제비로 너를 키웠으나 가난한 바탕은 드러내지 마라 이를 밑은 얼음장이었다 빳빳한 광목 호청에 목이 쓸려 칼잠을 잤다, 꿈도 가위에 눌렸다 끌어안을 것이라곤 나밖에 없던 그런 시절이 있었다 - 고 명자 시 ‘양철이불’ 모두 * ‘가난’이란 단어는 낯설지 않은 단어이다. 신문배달 하던 중, 고등학교 시절이나,, 시간이 허락 하는 한 늘려가던 과외 아르바이트, 작은 자취방에.. 더보기
내게 입맛을 돌릴 음식은?! 동인천 삼치구이 골목에 비가 내린다 말라가던 사람들이 지느러미를 움직거리며 모여든다 둥근 의자에 앉을 쯤이면 비린내를 풍긴다 젖은 얼굴들이 안주 삼아 비늘에 대해 이야기한다 우리 조상인 물고기에 대하여 지느러미에 대하여 하루 공친 일당에 대하여 아가미를 들썩이며 50년 전통이라는 삼치구이집에 와서 삼치는 비로소 구이가 되었다 아직 어디 닿지도 못하고 구워지지도 못한 자들이 비가 오면 물결이 그리워 여기 모인다 서로를 발견한 지느러미들은 물결을 만들고 생이 젖은 사람들 비 내리는 골목 안 물결을 거슬러 올라간다 우리는 그저 한 마리 물고기일 뿐이라고 눈을 껌뻑인다 방향도 없다 꼬리지느러미를 흔드는 지친 것들이 캄캄하게 온다 비에 젖은 막노동자였다가 막걸리였다가 물결이 되는 것들이 비 오는 날 삼치구이 골목.. 더보기
말 하는 것이 두려운 세상. 나는 말하기가 두려워졌다 말 한마디로 절교를 당한 뒤로는 겨울이 되나는어도 춥다고 말하지 않는다 결코 더워도 덥다고 말하지 않는다 친구를 만나서도 어떻게 말할까고 더듬거리고 잘못이나 있는 듯 풀이 죽는다 그러는 나를 친구들은 건방지다고 무슨 유세나 진 듯 하다고 하나 둘 나를 떠나가고 마침내 식구들에게도 따돌려 방 한칸을 따로 쓰게 되었다 이 나이에 아무에게나 내 이 고통을 말할 수 없고 자꾸 더듬거리기만 하는 입술 나는 이제 말하기가 두려워졌다. - 오 승강 시 ‘말 조심에 대하여’모두 * 선거철이 되었다. 선거때마다 피부로 느끼는 것이지만,, ‘말이 너무 많다’ 한마디로 ‘투마치’ 라는 것인데,, 현실성 있고 진심을 울리는 말이라면 잠시 귀 기울여 볼텐데,, 마구잡이로 공약을 나열한다. 남의 것이라도..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