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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그 쓸쓸한 영혼

가난의 눈물을 먹고 핀 꽃 - 함 민복 시

한 여름의 맛!






윗물을 맑은데
아랫물이 맑지 않다니
이건 아니지
이건 절대 아니라고
거꾸로 뒤집어 보기도 하며
마구 흔들어 마시는
서민의 술
막걸리


- 함 민복 시 ‘막걸리‘
[검은 시의 목록], 걷는 사람, 2017.




임산부와 함께 앉게 되었네
아직 세상에 태어나지 않은
아이와 동행하게 되었네

아이와의 인연으로
내 인생이 길어지자
나는 무상으로 어려지네

버스가 조금만 덜컹거려도
미안한 마음 일고
따갑게 창문 통과하는 햇살
밉다가
길가에 핀 환한 코스모스
고마워지네

아이가 나보다 선한 나를
내 맘에 낳아 주네
나는 염치도 없이 순산이라네


- 함 민복 시 ‘버스에서 ’
* 시와 함께, 창간호, 2019




―추석

지난 일 생각 좀 해보라고 덜컹덜컹 온몸 흔들어주누나
비포장도로, 흙먼지 날리며 고향에 갔었나니

아버지 묘보다 잔디 무성한 형의 묘에서 쑥부쟁이 뽑아낼 제 실핏줄 같은 가난의 뿌리 자꾸 끊어지더이다

왜가리 떼처럼 떠나고 싶어 떠난 것이 아닌 살붙이들 모여
버짐 피던 이야기, 검정 고무신 이야기로 술을 따라 마셨지요

여선생 호루라기 소리에 앞으로 나란히 피어난 코스모스 밤길, 밤엔 향기로운 아름다운 꽃들아, 너희들도 고향으로 돌아갈지니

바람 불 때마다 스스로의 가시에 찔리며 붉게 익은 대추, 나무에 아버지 얼굴로 걸린 달, 달그림자로 길게 다리 펴보았던 영혼아

그날 밤 내가 흘린 눈물에 흙 가슴 다 적셔주던 고향을 보았는감, 그날 밤 내가 눈물 추스를 때 굽은 등 품어주던 산 그림자 보았는감

쑥부쟁이야
쑥부쟁이야


- 함 민복 시 ‘쑥부쟁이’
[우울씨의 일일], 문학동네, 2020.





까칠한 지식 나부랭이 다 버리고
내 머릿속에 흙 한 삽
비가 오면 거짓 없이 젖는
풀 몇 포기 자라
바람 불면 바람소리 일게
내 머릿속에 흙 한 삽
일개미들 하얀 알 물고 이사 오렴
봄 햇살 타고 까치 울음소리 떨어질 때
손 부르튼 시골 아이들 손등
머릿속으로 쓰윽 들어오게
내 머릿속에 흙 한 삽
그러한 세월이 흘러
뼈란 뼈 다 버릴 수 있게 되는 날
물에 서서히 풀려
나의 관짝인 강산
흙으로 살아날 수 있도록
내 머릿속에 흙 한 삽


- 함 민복 시 ‘흙속으로 떠나는 전지훈련 ‘
[우울씨의 일일], 문학동네, 2020.





우산은 말라가는 가슴 접고 얼마나 비를 기다렸을까
비는, 또 오는 게 아니라 비를 기다리는 누군가를 위해
내린다는 생각을 위하여, 혼자 마신 술에 넘쳐
거리로 토해지면서 우산 속으로도 빗소리는 내린다

정작 술 취하고 싶은 건 내가 아닌 나의 생활인데
비가 와 더 선명해진 원고지 칸 같은 보도블록 위를
타인에 떠밀린 탓보단 스스로의 잘못된 보행으로
비틀비틀 내 잘못 써온 날들이

우산처럼 비가 오면 가슴 확 펼쳐
사랑 한번 못해본 쓴 기억을 끌며
나는 얼마나 더 가슴을 말려야 우산이 될 수 있나
어쩌면 틀렸을지도 모를 질문의 소낙비에 가슴을 적신다

우산처럼 가슴 한번 확 펼쳐보지 못한 날들이
우산처럼 가슴 한번 확 펼쳐보는 사랑을 꿈꾸며
비 내리는 날 낮술에 취해 젖어오는 생각의 발목으로
비가 싫어 우산을 쓴 것이 아닌 사람들 사이를
걷고 또 걸으면 우산 속으로도 빗소리는 내린다


- 함 민복 시 ‘ 우산 속으로도 빗소리가 내린다 ‘
[우울씨의 일일], 문학동네, 2020.





양철 지붕이 소리 내어 읽는다

씨앗은 약속
씨앗 같은 약속 참 많았구나

그리운 사람
내리는 봄비

물끄러미 바라보던 개가
가죽 비틀어 빗방울을 턴다

마른 풀잎 이제 마음 놓고 썩게
풀씨들은 단단해졌다

봄비야
택시! 하고 너를 먼저 부른 씨앗 누구냐

꽃 피는 것 보면 알지
그리운 얼굴 먼저 떠오르지


- 함 민복 시 ‘ 봄 비‘
[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 창비, 2013.





고추씨 흔들리는 소리
한참 만에
바싹 마른 고추가
바싹 마른 할머니를 움켜쥐는 소리
더는 못 참겠다는 듯
마당가 개도
취이!
마주 보는 주름살
다듬는
세월



- 함 민복 시 ‘ 가을 소묘‘
[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 창비, 2013.




햇살 아래서

눈물을
한두 번 찍었을

女人의 가녀린
반지 낀 손가락
끌어 입술에 대보고 싶은

그래
그림자도 빛반지를 저리 껴 보는구나



- 함민복 시 ‘ 일식‘
말랑말랑한 힘. 문학세계사. 2005




팥알만 한 속으로도
바다를 이해하고 사셨으니

자, 인사드려야지

이 분이
우리 선생님이셔 1


- 함 민복 ‘밴댕이’
[꽃봇대] , 대상, 2011.





그리움이 나를 끌고 식당으로 들어갑니다
그대가 일하는 전부를 보려고 구석에 앉았을 때
어디론가 떠나가는 기적소리 들려오고
내가 들어온 것도 모르는 채 푸른 호수 끌어
정수기에 물 담는데 열중인 그대
그대 그림자가 지나간 땅마저 사랑한다고
술 취한 고백을 하던 그날 밤처럼
그냥 웃으면서 밥을 놓고 분주히 뒤돌아서는 그대
아침, 뒤주에서 쌀 한 바가지 퍼 나오시던
어머니처럼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마치 밥 먹으러 온 사람처럼 밥을 먹습니다
나는 마치 밥 먹으러 온 사람처럼 밥을 먹고 나옵니다.


- 함민복 시 '서울역 그 식당' 모두





부드러운 물
딱딱한 뼈

어찌
옆으로 누운 나무를
몸속에 키우느냐
뼈나무가 네 모양이구나
비늘 입새 참 가지런하다

물살에 흔들리는
네 몸 전체가
물속
또 하나의 잎새구나


- 함 민복 시 ’ 물고기 ‘
*말랑말랑한 힘/문학세계사





긴 상이 있다
한 아름에 잡히지 않아 같이 들어야 한다
좁은 문이 나타나면
한 사람은 등을 앞으로 하고 걸어야 한다
뒤로 걷는 사람은 앞으로 걷는 사람을 읽으며
걸음을 옮겨야 한다
잠시 허리를 펴거나 굽힐 때
서로 높이를 조절해야 한다
다 온 것 같다고
먼저 탕 하고 상을 내려놓아서는 안 된다
걸음의 속도를 맞추어야 한다
한 발
또 한 발


- 함 민복 시 ‘부부’
[꽃이 져도 너를 잊은 적 없다], 이레, 2007.




물이 별소리 다하며 흐릅니다
무릎 베고 누워 폭포수에 귀를 연 그대
눈동자에, 사랑에, 빠진, 눈부처, 나는

폭포는 분수, 더는 못 견디게 그리워
푸른 하늘로 솟아올랐던, 물방울,
산에, 내려, 모여, 저리 쏟아지는

내 마음, 언제 당신 마음 이리 많이 뿜어 올렸던가
뿜어 올렸던 당신 마음, 내 마음 되어
당신에게 쏟아지는 마음의 폭포,

사랑, 다시 쏟아지고 싶어
쏟아지다
되돌아 피어나는 물보라

내 눈동자 속의 당신, 당신 눈동자 속의 나
눈길 폭포에, 아카시아
가시나무도 부드럽고 환한 그림자를 드리운


- 함 민복 시 ‘ 폭포의 사랑‘
*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창비





당신 생각을 켜놓은 채 잠이 들었습니다.


- 함 민복 시 ’ 가을‘





아래층에서 물 틀면 단수가 되는
좁은 계단을 올라야 하는 전세방에서
만학을 하는 나의 등록금을 위해
사글셋방으로 이사를 떠나는 형님네
달그락 거리던 밥그릇들
베니어 판으로 된 농짝을 리어카로 나르고
집안 형편을 적나라하게 까 보이던 이삿짐
가슴이 한참 덜컹거리고 이사가 끝났다
형은 시장에서 자장면을 시켜주고
쉽게 정리될 살림살이를 정리하러 갔다
나는 전날 친구들과 깡소주를 마신 대가로
냉수 한 대접으로 조갈증을 풀면서
자장면을 앞에 놓고
이상한 중국집 젊은 부부를 보았다
바쁜 점심시간 맞춰 잠 자주는 아기를 고마워하며
젊은 부부는 밀가루, 그 연약한 반죽으로
튼튼한 미래를 꿈꾸듯 명랑하게 전화를 받고
서둘러 배달을 나아갔다
나는 그 모습이 눈물처럼 아름다워
물배가 부른데도 자장면을 남기기 미안하여
마지막 면발까지 다 먹고 나니
더부룩하게 배가 불렀다, 살아간다는 게

그날 나는 분명 슬픔도 배불렀다.


- 함 민복 시 ‘ 그날 나는 슬픔도 배불렀다 ‘





까마귀산에 그녀가 산다
비는 내리고 까마귀산자락에서 서성거렸다
백 번 그녀를 만나고 한 번도 그녀를 만나지 못하였다
예술의 전당에 개나리꽃이 활짝 피었다고
먼저 전화 걸던 사람이
그래도 당신
검은 빗방울이 머리통을 두드리고
내부로만 점층법처럼 커지는 소리
당신이 가지고 다니던 가죽가방 그 가죽의 주인
어느 동물과의 인연 같은 인연이라면
내 당신을 잊겠다는 말을 전하려고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고 독해지는 마음만
까마귀산자락 여인숙으로 들어가
빗소리보다 더 가늘고 슬프게 울었다
모기가 내 눈동자의 피를 빨게 될지라도
내 결코 당신을 잊지 않으리라
그래도 당신


- 함 민복 시 ‘흐린 날의 연서 ‘





금방 시드는 꽃 그림자만이라도 색깔 있었으면 좋겠다.
어머니 허리 휜 그림자 우두둑 펼쳐졌으면 좋겠다.
찬 육교에 엎드린 걸인의 그림자 따뜻했으면 좋겠다.
마음엔 평평한 세상이 와그림자 없었으면 좋겠다.


- 함 민복 시 ‘그림자 ‘





시 한 편에 삼만 원이면
너무 박하다 싶다가도
쌀이 두 말인데 생각하면
금방 마음이 따뜻한 밥이 되네

시집 한 권에 삼천 원이면
든 공에 비해 헐하다 싶다가도
국밥이 한 그릇인데
내 시집이 국밥 한 그릇만큼
사람들 가슴을 따뜻하게 덮여줄 수 있을까
생각하면 아직 멀기만 하네

시집이 한 권 팔리면
내게 삼백 원이 돌아온다
박리다 싶다가도
굵은소금이 한 됫박인데 생각하면
푸른 바다처럼 상할 마음 하나 없네


- 함 민복 시 ‘긍정적인 밥 ‘





아래층 산부인과 병동의 갓난아기 울음소리
척추 다친 어머니 화장실 가실 때
포도당 높이 쳐들고, 링거 줄 신경 쓰며.
뒤따른다. 소를 몰고 가듯.
지순한 소가 서툰 일꾼의 쟁기질을 이끌 듯.
이상한 고삐. 링거 줄은
나를 이끌고 가는 힘이 있다
죽은 아버지는 무엇인가
어떻게 죽어서도 고향으로 나를 부르고
명절. 고향가지 않은 나를 죄스럽게 만드는가
어릴 적 생각이 살던 곳. 고향.
문 안에서 소변 소리 안 들려주시려고
줄 당기고. 내 그 길 나선 지
삼십여 년. 그곳 어디 폐가처럼 아기집이.
어머니. 가는 귀먹어. 부엌문 여는 것도 모르고.
놋세숫대야. 내 커서야 안 뒷물.
얼마나 당혹스러우셨을까. 마음도 여린 분이.
어쩌다가 종합병원처럼
한쪽 귀먹고 한쪽 눈멀어 척추까지 다쳐
맹모(孟母)처럼 나를 깨우친다. 육체의 설법.
어머니 고통만큼 나는 어머니가 되고
당신 눈동자 파먹으며 살아온 세월
당신 귀 때려막으며 살아온 세월
당신 척추 시큰 매달려 살아온 세월
당신 더 뜯어먹고 싶어 당신 살리고 싶은 밤
당신 죽으면 당신 속의 내가 죽고
외롭게. 내 속의 당신만 살아.
물소리. 문이 열리고.


- 함 민복 시 ‘위험한 수업‘





내 살고 있는 곳에 공터가 있어
비가 오고, 토마토가 왔다 가고
서리가 오고, 고등어가 왔다 가고
눈이 오고, 번개탄이 왔다 가고
꽃소식이 오고, 물미역이 왔다 가고

당신이 살고 있는 내 마음에도 공터가 있어
당신 눈동자가 되어 바라보던 서해바다가 출렁이고
당신에게 이름 일러주던 명아주, 개여뀌, 가막사리, 들풀이 푸르고
수목원, 도봉산이 간간이 마음에 단풍 들어
아직은 만선 된 당신 그리움에 그래도 살 만하니

  세월아 지금 이 공터의 마음 헐지 말아 다오


- 함 민복 시 ‘ 공터의 마음‘





프로 가난자인 거지 앞에서
나의 가난을 자랑하기엔
나의 가난이 너무 가난하지만
신문지를 쫙 펼쳐놓고
더 많은 국물을 위해 소금을 풀어
라면을 먹는 아침
반찬이 노란 단무지 하나인 것 같지만
나의 식탁은 풍성하다
두루치기 일색인 정치면의 양념으로
팔팔 끓인 스포츠면 찌개에
밑반찬으로
씀바귀 맛 나는 상계동 철거 주민들의
눈물로 즉석 동치미를 담그면
매운 고추가 동동 뜬다 거기다가
똥 누고 나니까 날아갈 것 같다는
변비약 아락실 아침 광고하는 여자의
젓가락처럼 쫙 벌린 허벅지를
자린고비로 쳐다보기까지 하면
나의 반찬은 너무 풍성해
신문 지을 깔고 라면을 먹는 아침이면
매일 상다리가 부러진다.


- 함 민복 시 ‘ 라면을 먹는 아침‘




버드나무는 붉은 태양과 푸른 하늘 향해
한 生을, 가지를 뻗어 울리지 않는다
더 높은 곳에 희망을 두고
살아간다는 허망함에
反가지를 치렁치렁 당당히 내린다
버드나무는 향일성 세계의 이단이다

버드나무는 자신을 단단하게 만들어
세파를 이기려 하지 않는다
근육에 힘 빼고 목소리 낮춘 부드러운 힘으로
버드나무는 자신을 사랑한다
사색의 가지 늘어뜨려 자신의 몸을 더듬기도 한다
나는 정말 존재하는가

그러나 버드나무는
가시로 온몸을 무장하는 가시나무처럼
광신적으로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
어차피 흙으로 다시 돌아갈 육신
흙에서 멀리 도망쳐보았다 무엇하나
정말 나는 흙이 아닌 나로 존재하는가
버드나무는 삶의 회의주의자다

버드나무는 무엇이 그립는지
지난 세월 살았던 기억 속으로
가지를 차르르 늘어뜨려
살아온 공간을 반추하며
흙이었던 시절, 육신의 고향을 향해
이른 봄버들 가지를 피운다
버드나무는 지독한 향수병자다


- 함 민복 시 ‘ 버드나무 ‘




지난여름이었습니다.
가세가 기울어 갈 곳이 없어진 어머니를 고향 이모님 댁에 모셔다 드릴 때의 일입니다.
어머니는 차시간도 있고 하니까 요기를 하고 가자시며 고깃국을 먹으러 가자고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한평생 중이염을 앓아 고기만 드시면 귀에서 고름이 나오곤 했습니다.
그런 어머니가 나를 위해 고깃국을 먹으러 가자고 하시는 마음을 읽자 어머니 이마의 주름살이 더 깊게 보였습니다.
설렁탕집에 들어가 물수건으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습니다.

"더울 때일수록 고기를 먹어야 더위를 안 먹는다. 고기를 먹어야 하는데...... 고깃국물이라도 되게 먹어둬라"

설렁탕에 다대기를 풀어 한 댓 숟가락 국물을 떠먹었을 때였습니다.
어머니가 주인아저씨를 불렀습니다.
주인아저씨는 뭐 잘못된 게 있나 싶었던지 고개를 앞으로 빼고 의아해하며 다가왔습니다.
어머니는 설렁탕에 소금을 너무 많이 풀어 짜서 그런다며 국물을 더 달라고 했습니다.
주인아저씨는 흔쾌히 국물을 더 갖다 주었습니다.
어머니는 주인아저씨가 안 보고 있다 싶어 지자
내 투가리에 국물을 부어주셨습니다.
나는 당황하여 주인아저씨를 흘금거리며 국물을 더 받았습니다.
주인아저씨는 넌지시 우리 모자의 행동을 보고 애써 시선을 외면해 주는 게 역력했습니다.
나는 그만 국물을 따르시라고 내 투가리로 어머니 투가리를 툭 부딪쳤습니다.
순간 투가리가 부딪치며 내는 소리가 왜 그렇게 서럽게 들리던지 나는 울컥 치받치는
감정을 억제하려고 설렁탕에 만 밥과 깍두기를 마구 씹어댔습니다.
그러자 주인아저씨는 우리 모자가 미안한 마음 안 느끼게 조심 다가와 성냥갑만 한 깍두기 한 접시를 놓고 돌아서는 거였습니다.
일순 나는 참고 있던 눈물을 찔금 흘리고 말았습니다.
나는 얼른 이마에 흐른 땀을 훔쳐내려 눈물을 땀인 양 만들어놓고 나서 아주 천천히 물수건으로 눈동자에서 난 땀을 씻어냈습니다.
그러면서 속으로 중얼거렸습니다.

"눈물은 왜 짠가"



- 함 민복 시 ‘눈물은 왜 짠가’





집채만 한 폭탄
폭탄에 어머니라 부르는
폭탄에도 어머니가 있다니
어머니란 말을 폭탄에도 붙이다니
충격과 공포스러운 그들

유크라테스 강 티크리스 강
문명의 발상지를 폭격하는
잔혹함 쪽으로만 진화한,
폭력의 극점인,
무기들을 신봉하는

악의, 페스티벌
저 섬광만 버린다면
우주는 평화로운 자궁
악동이 태어나 혼자 포식하려고
지어미 자궁 속에서 포크질만 하지 않는다면

물어뜯는다
입을 틀어막는
모래바람의 경고
질겅질겅 씹어
너덜거리는 자궁에 뱉으며

양팔 잘린, 두개골이 함몰된, 어린 생명들의
눈물, 성공적으로 빨고 있다고 자찬하는
경박하고 소갈딱지 없어 보이는 눈빛
주둥이에 묻은 핏방울 쓱쓱 닦는
부시시한 고양이 한 마리



- 함 민복 시 ‘같은 자궁 속에 살면서 ‘
*말랑말랑한 힘





사월 초파일
傳燈寺에서 淨水寺까지
공양드리러 가는 보살님 차를 얻어 탔다
토마토 가지 호박 늦은 모종을 안고

십 리를 더 걸어와
흙 파고 물 붓고
뿌리에 마지막 햇살 넣고 흙 덮고
해도 燈처럼 물(水)처럼 날이 맑아

개밥그릇을 말갛게 닦아주고 싶었다
부처님 오신 날인데 나도
수돗가에 앉아 도(陶)를 닦았다
고개 갸웃갸웃 쳐다보던 흰 개

없다니까!
그 그림자가 그릇의 맛이야
수백 번 혓바닥으로 핥아도 아직 지울 수
햇살이 담길수록 그릇이 가벼웠다


- 함 민복 시 ‘ 개밥그릇‘
시집 : 말랑말랑한 힘




눈이 내렸다
건물 옥상을 쓸었다
아파트 벼랑에 몸 던진 어느 실직 가장이 떠올랐다

결국
도시에서의 삶이란 벼랑을 쌓아 올리는 일
24평 벼랑의 집에 살기 위해
42층 벼랑의 직장으로 출근하고
좀 더 튼튼한 벼랑에 취직하기 위해
새벽부터 도서관에 가고 가다가
속도의 벼랑인 길 위에서 굴러 떨어져 죽기도 하며
입지적으로 벼랑을 일으켜 세운
몇몇 사람들이 희망이 되기도 하는

이 도시의 건물들은 지붕이 없다
사각 단면으로 잘려 나간 것 같은
머리가 없는
벼랑으로 완성된
옥상에서
招魂하듯
흔들리는 언 빨래소리
덜그럭 덜그럭
들린다


- 함 민복 시 ‘옥탑방‘




거대한 반죽 뻘은 큰 말씀이다
쉽게 만들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물컹물컹한 말씀이다
수천수만 년 밤낮으로
조금 무쉬 한물 두물 사리
소금물 다시 잡으며
반죽을 개고 또 개는
무엇을 만드는 법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함부로 만들지 않는 법을 펼쳐 보여주는
물컹물컹 깊은 말씀이다


- 함 민복 시 ’딱딱하게 발기만 하는 문명에게 ‘
*시집 <말랑말랑한 힘>. 문학세계사. 2005




아름다운 새소리가 들렸다
쓰름매미가 울음을 멈춘다
나비가 새소리 반대 방향으로 몸을 튼다
일순 배추꽃 노란색이 옅어진다
새소리가 아름답게 들리는
내 마음속에 존재하는 잔인함이여


- 함 민복 시 ‘여름의 가르침‘
*시집 <말랑말랑한 힘>. 문학세계사. 2005




한 시간 걸려 버스가 읍내에 도착하면
저것 내 것! 저것 내 것!!
보따리 들고 내리는 할머니들보다
좀 더 젊은 할머니들
보따리를 향해 버스문을 후벼 판다

휜 허리로 짐보따리를 내리는
몸집보다 큰 익모초 단을 내리는
할마니들의 쪼그락


저 작은 보자기
수만 번 꾸렸다 폈다 했을
저 작은 보따리

어느 겨울밤
눈물
한 줌
꾸렸을
저 보따리가


- 함 민복 시 ’ 보따리‘




파도가 없는 날
배는 닻의 존재를 잊기도 하지만

배가 흔들릴수록 깊이 박히는 닻
배가 흔들릴수록 꽉 잡아주는 닻밥

상처의 힘
상처의 사랑

물 위에서 사는
뱃사람의 닻

저 작은 마을
저 작은 집


- 함 민복 시 ‘닻 ‘
* 말랑말랑한 힘 / 문학세계사





새가 앉자
나뭇가지가 흔들린다

새도
흔들린다

새들에게
하늘로 날 꿈을 준

나무는
새들의 긴 다리다

새들은
나무의 그림자다



- 함 민복 시 ‘ 사십 세가 되어 새를 보다 ‘
*시집 <말랑말랑한 힘>. 문학세계사. 2005






오염시키지 말자
죄란 말
칼날처럼
섬뜩 빛나야 한다
건성으로 느껴
죄의 날 무뎌질 때
삶은 흔들린다
날을 세워
등이 아닌 날을 대면하며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
구분하며 살 수 있게
마음아
무뎌지지 말자
여림만으로 세울 수 있는
강함만으로 지킬 수 있는
죄의 날
빛나게
푸르게
말로만 죄를 느끼지 말자
법처럼 신성한
죄란 말
오염시키지 말자.

- 함 민복 시 ‘ 罪 ‘




당신 품에 안겼다가 떠나갑니다
진달래꽃 술렁술렁 배웅합니다
앞서 흐르는 물소리로 길을 열며
사람의 마을로 돌아갑니다
살아가면서
늙어가면서
삶에 지치면 먼발치로 당신을 바라다보고
그래도 그리우면 당신 찾아가 품에 안겨보지요
그렇게 살다가 영, 당신을 볼 수 없게 되는 날
당신 품에 안겨 당신이 될 수 있겠지요

- 함 민복 시 ‘ 산 ’





혼자 사는 게 안쓰럽다고

반찬이 강을 건너왔네
당신 마음이 그릇이 되어
햇살처럼 강을 건너왔네

김치보다 먼저 익은
당신 마음
한 상

마음이 마음을 먹는 저녁


- 함 민복 시 ‘ 만찬 (晩餐)‘




쥐가 꼬리로 계란을 끌고 갑니다 쥐가 꼬리로 병 속에 든 들기름을 빨아먹습니다 쥐가 꼬리로 유격 훈련처럼 전깃줄에 매달려 허공을 횡단합니다 쥐가 꼬리의 탄력으로 점프하여 선반에 뛰어오릅니다 쥐가 꼬리로 해안가 조개에 물려 아픔을 끌고 산에 올라가 조갯살을 먹습니다 쥐가 물동이에 빠져 수영할 힘이 떨어지면 꼬리로 바닥을 짚고 견딥니다 30분 60분 90분 --쥐독 합니다 그래서 쥐꼬리만 한 월급으로 살아가는 삶은 눈동자가 산초 열매처럼 까맣고 슬프게 빛납니다


- 함 민복 시 ’ 셀러리맨 예찬‘



망둥이를 낚으려고
노을 첨벙거리다가 돌아오는 길
어둠 속에서도 개는 내 수상함을 간파하고
나를 겁주며 짖는다
내가 여기 더 오래 살았어
네가 더 수상해
나는 최선을 다해 개를 무시하다
시끄러워
걸음 멈추고 개와 눈싸움을 한다
사십여 년 산 눈빛으로
초저녁 어둠도 못 뚫고
똥개 하나 제압 못 하니
짖어라
나도 내가 수상타
서녘 하늘에
낚싯바늘 같은 달 떠 있고
풀뀅기에 낀 망둥이 댓 마리
푸덕거린다

- 함 민복 시 ‘ 개 ‘




잠시 빛을 뽑고 다섯 손가락으로 어둠을 돌려
삼십 촉 전구를 육십 촉으로 갈면

십자가에 못 박혀 있는 예수는 더 밝게 못 박히고
십자가는 삼십 촉만큼 더 확실히 벽에 못 박힌다
시계는 더 잘 보이나 시간은 같은 속도로 흐르고
의자는 그대로 선 채 앉아 있으며
침대는 더 분명하게 누워 있다
방 안의 그림자는 더 색득해지고
창 밖 어둠은 삼십 촉만큼 뒤로 물러선다

도대체 삼십 촉만큼의 어둠은 어디로 갔는가
내 마음으로 스며 마음이 어두워져
풍경이 밝아져 보이는가
내 마음의 어둠도 삼십 촉 소멸되어 마음이 밝아져
풍경도 밝아져 보이는가

어둠이 빛에 쫓겨 어둠의 진영으로 도망쳤다면
빛의 어둠을 옮겨 주는 발이란 말인가
십자가에 못 박혀 벽에 못 박혀 있는 깡마른 예수여
연꽃에 앉아 법당에 앉아 있을 뚱뚱한 부처여
죽음을 돌려 삶을 밝힐 수밖에 없단 말인가

잠시 다섯 손가락으로 빛을 돌려 어둠을 켜고
삼십 촉 전구를 육십 촉으로 갈면


- 함 민복 시 ‘ 전구를 갈며 ‘





하늘에 신세 많이 지고 살았습니다
푸른 바다는 상한 눈동자 쾌히 담가주었습니다
산이 늘 정신을 기대주었습니다
태양은 낙타가 되어 몸을 옮겨주었습니다
흙은 갖은 음식을 차려주었습니다
바람은 귓속 산에 나무를 심어주었습니다
달은 늘 가슴에 어미 피를 순환시켜 주었습니다


- 함 민복 시 ‘ 몸이 많이 아픈 밤 ‘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달무리를 끌어내려 목을 맸다
둥글고 부드러운 밧줄

태양을 훔친 범인처럼 고개를 떨구고
둥글게 익어가는 과일들

갈림길에서 길을 물었다
지나온 길이 길을 열어주었다

자전거를 끌고 가는 사내
자전거에 끌려가는 사내

밤송이가 화두처럼 툭, 떨어졌다
자궁에 목을 매달다니


- 함 민복 시 ‘ 환 향‘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세속도시란 도시란 테이프를 탁, 뽑아내고
들뜬 공테이프로 기차가 출발하면
지나간다 푸른 들판 푸른 나무
푸른 산 푸른 강물
길게 연결된
녹색 헤드 크리어 테이프
아프지 않게 머리를 닦으며
눈 푸른 맑은 바람 지나간다
가끔 부스럼 같은 문명을 만나면
멈추었다가 다시 다시 투명한 필름,
스르르르
현란한 간판과 시멘트와
잡음으로 덧칠된
기억에 녹색물감 흩뿌리는
풍경 풍경
아, 전원이 일상이었던 한때의 추억
더 선명한 세속도시를 보기 위해
살기 위해 바람 작동버튼을 꺼도
돌아가는 선풍기를 타이머처럼
무의식에 헤드 크린어가 돌아갈 것을 믿으며
떠나보는 녹색여행 녹색여행
언젠가 완전히 소멸되고 말
하나뿐인 없는 헤드 크리어, 자연


- 함 민복 시 ‘ 여행에 대한 비관론 ‘





삼백 년 묵은 느티나무에서
하루가 맑았다고
까치가 운다

잡것


- 함 민복 시 ‘묵상‘





금호동 산동네의 밤이 깊다
고단한 하루를 마친 사람들이
노루들의 잠자리나 되었을 법한
산속으로 머리를 눕히려 찾아드는 곳
힘드려 올라왔던 길
누군가를 위해 자신의 몸 더럽히고
흘러내리는 하수도 물소리
숨찬 산 중턱에 살고 있는 나보다
더 위에 살고 있는 사람들 많아
아직 잠 못 이룬 사람들 많아
하수도 물소리
골목길 따라 흘러내린다
전봇대 굵기 만한 도랑을 덮은
쇠철망 틈새로 들려오는
하수도 물소리
누군가 때늦은 목욕을 했는지
제법 소리가 커지기도 하며
산동네의 삶처럼 경사가 저
썩은 내 풍길 새도 없이 흘러내리는
하수도 물소리
또 비린내가 좀 나면 어떠랴
그게 사람 살아가는 증표일진대
이곳 삶의 동맥처럼
새벽까지 끊기지 않고
흐르는
하수도 물소리
물소리 듣는 것은 즐겁다
쇠철망 앞에 쭈그려 앉아 담배를 물면
달의 눈물
하수도 물소리에 가슴이 젖는다


- 함 민복 시 ‘ 달의 눈물‘
《현대시, 4월호》




사람 그리워 당신을 품에 안았더니
당신의 심장은 나의 오른쪽 가슴에서 뛰고
끝내 심장을 포갤 수 없는
우리의 선천성 그리움이여
하늘과 땅 사이를
날아오르는 새떼여
내리치는 번개여


- 함 민복 시 ‘ 선천성 그리움‘




옷을 입고 있지 않을 때
내 몸을 매달아 본다
 
몸뚱이가 되어 허공을 입고
허공을 걷던 옷가지들
 
떨어지던 물방울의 시간
입아귀 근력이 떨어진
 
입다 무는 일이 일생인
나를 물고 있는 허공
 
물 수 없는
시간을 깨물다
 
철사 근육이 삭아 끊어지면
툭, 그 한마디 내지르고
 
훑어지고 말
온몸이 입인


- 함 민복 시 ‘ 빨래집게 ‘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울산 근처에서 일터에 다니고 있을 때였지

서울에 올라간 날, 그날은 운수 좋은 날이었어 창 밖엔 무드 있게 비가 내리고, 어느 여대 앞 정거장에서 그녀의 가방이 올라탄 거야 나는 빗방울의 애무에 축축이 젖은 그녀의 가방을 내 성기 위에 올려놓았어 그녀는 고맙다는 말 대신 씨익 웃었어 환장하게 예쁜 여자였지 차체가 흔들릴 때마다 그녀의 귓불에선 참외씨만 한 보석이 반짝이고, 그래 나는 그녀의 성감대는 책가방일 거라고 생각했어 생각해 봐 학생들의 성감대가 책가방이란 내 말이 틀렸는지, 몰라 내가 배우지 못한 열등감, 하여간 그녀의 가방을 상위 체위로 카섹스를 시작했어

성욕의 나무가 서서히, 은밀히, 힘 있게 자라 올랐어 나는 그 시간이 오래되길, 평생 기억될 수 있는 황홀한 섹스가 되길 바랐어 그런데 성욕의 나무가 그녀의 가방을 뚫고 여름을 지나 가을까지 가, 젊은 여자의 유 방처럼 탄력 있는 열매가 주 렁 주렁 맺고 있을 때 갑자기 공사 현장의 망치 소리가 들려왔어 그 망치 소리가 자꾸 성욕의 나무 밑둥지를 치는 거야 어느새 밤송이가 된 열매가 우수수, 올라가지 못할 나무 쳐다도 보지 말라고 내 성기 위에 떨어지는 거야

나는 마님을 겁탈하다 들킨 하인의 심정이 되고, 이상했어 망치 소리에 내 성기가 그렇게 힘없이 죽을 줄이야 망치소리, 책가방, 공돌이, 여대생, 그녀의 책가방이 점점 무겁게 느껴졌어 맷돌짝에라도 눌린 듯 빈대떡철 머 납작해진 성욕이 압사의 신음을 토했어 오르가슴까지 행각 했던 내 성욕은 더럭 겁을 먹었어 그녀의 가방이 작두날이 되어 숭덩숭덩 내 성기를 자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 견딜 수 없었어 다음 정거정에서 폭행하다 만 그녀의 가방을
내팽개치듯 의자에 내려놓고 버스에서 내리고 말았어 비가 내리고 있었어

운수 좋은 날처럼, 구질구질한


- 함 민복 시 ‘ 나는 여대생의 가방과 카섹스를 즐겨보려 한 적이 있다 ‘




의자에 앉는다
쪼그려 앉으신다
머리카락이 검다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하시다
가위를 고른다
칫솔을 손질하신다
머리카락을 자른다
머리카락을 염색하신다
잘려나가며 통증을 주지 않는 머리카락을 욕한다
염색되며 아픔을 주지 않는 머리카락에 아픔을 느끼시는 것 같다
머리카락 되어 살아온 날들을 반성한다
머리카락 되어 침묵하신다
밥상을 대한다
밥상을 대하신다
밥을 먹는다
밥을 드신다
밥 속에서 검은 머리카락을 하나 골라낸다
넌지시 바라보신다
앗, 염색
(네 흰밥 속에 내 흰 머리카락 들어가면 네 목구멍 멜까 봐)


- 함 민복 시 ‘ 어머니 1-묵시록 ‘



파리는 내가 덮고 자는 공간을 깔고 잔다
날개 휘젓던 공간밖에 믿을 게 없어
날개의 길밖에 믿을 게 없어
천장에 매달려 잠자는 파리는 슬프다
추락하다 잠이 깨면 곧 비행할 포즈
헬리콥터처럼 활주로 없이 이착륙하는 파리
구더기를 본 사람은 알리라
왜 파리가 높은 곳에서 잠드는가를

저 사내는 내가 덮고 자는 공간을 깔고 잔다
지구의 밑부분에 집이 매달리는 시간
나는 바닥에 엎드려 자는데
저 사내는 천장에 등을 붙이고 잔다
발 붙이고 사는 땅밖에 믿을 게 없다는 듯
중력밖에 믿을 게 없다는 듯
천장에 등을 붙이고 잠드는 저 사내는 슬프다
어떤 날은 저 사내가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늦게 거꾸로 쭈그려 앉아 전화를 걸기도 한다
저 사내처럼 외로운 사람이 어디 또 있나 보다


- 함 민복 시 ‘ 오래된 잠버릇‘




방 안에 부엌이 있다니

조개껍질 열듯
전기밥솥 뚜껑을 열고
밥을 짓는다

동거자 金은 남가좌동으로
책 만들러 가고
남가좌동에 사는 時人 함성호가
먹이 물러 양재동까지
지하 땅굴을 날으는 시각

김이 나고
쌀 익는 냄새가
방 안 가득하다

방 안에 있는 냉장고의
내장을 꺼내놓고
간장에 날김밥을 먹는 아침

서른넷
다니던 직장을 때려치우고
친구방에 머물러 있는 지방간

그래도 방 안에 있지만
부엌이 있고
그 부엌은 밤새도록
노란 불 켜고
보온이라는 따듯한 말
잊지 않으니


- 함 민복 시 ‘ 어떤 부엌 ‘




아아 기억난다 헛소리하던 그 그 술자리
필름 끊긴 후후...... 는 도저히, 책임,
아,
자잘못을 뉘우치기에도 부끄러운

이제 돌아가려나보다

하얀 해골에 붙어 있는 검은 머리카락 풀어놓고
병에 누렇게 찌든 살덩이 썩어 썩어 흙으로 살아날
아아 그 깨끗한 세상으로 돌아가려나보다
눈물로 해골이나 맑게 닦아두자, 햇살 아래 앉아


- 함 민복 시 ‘ 아침 햇살에 앉아 술을 깨며 ‘




아다지오(아주 천천히)->아모로소(사랑스럽게)->스모르짠도(천천히 약하고 느리게)

->비바체(생기 있게)->글리산도(미끄러지듯이)->그라 찌우(우아하게)->인템포(정확한 속도로)

->칸타빌레(노래하듯이)->아르리비툼(자유롭게)->알레그레토(정열적인)->콘아니마(기운차게)

->그라배(중후하게)->포르차포(세게)->카텐자(즉흥적으로)->내추럴(제자리로)->타카 포

(처음부터)->나란테(낭독하듯이)->데치소(결연히)->마르카토(강조하여)->세리오소(진지하게)

->아지타토(흥분된)->비브라토(떤다)->진양조->중모리->중중모리->자진모리->엇모리->휘 모리.......



- 함 민복 시 ‘ 당신도 고전적인 섹스를 즐길 수 있다 ‘
    * 詩集, 우울氏의 一日




1
부엌칼로 손가락을 내리쳤다
잘린 손가락을 집어 아버지 얼굴을 그렸다
붉은 핏물이 눈물에 씻겨 내리고
해골만 그려졌다
어머니가 내 손을 붙들었다
하얗게 눈이 내렸다

2
단지.
손에 손가락을 내리친 가난이 들려있었다
가난은 시련이 아니라 분위기다
어머니가 삐그덕 문을 열었다
핏방울이 부엌에 뚝뚝 차올랐다
애고고,
어머니가 수건을 벗어 떨어진 손가락을 붙여주며
이웃으로 소리를 질렀다
흰 머리카락 위로 철렁 검댕이 그물이 쏟아졌다

3
아버지가 죽었다
황토흙을 파고 나의 前生을 묻었다

4
트럭이 눈 위에서 자꾸 미끄러졌다
업혀 나온 내 발에 어머니의 작은 버선이 꼬여져 있고
트럭을 밀고 들어올 때마다 어머니 맨발이 붉었다
미친년처럼 눈이 내렸다

5
아버지 나를 낳고 출생신고하러 가시던 길
숨으로 우는 목관악기 되어
아버지 사망신고하러 가는 길
수리산 봉우리 툭 터져 붉게 번진 저녁노을

6
그래도 일단 붙여놓기로 했다
한 해를 살며 다친 세상의 모든 상처를 감싸는
흰 붕대로 눈은 내리고
나는 어머니의 깨물지 않아도 아픈 손가락이 되었다

7
매형들이 내려왔다
바깥마당 대추나무에 기르던 개를 목매달았다
가마 때기가 개를 감싸고 불이 댕겨졌다
매형들의 이빨 사이에 어머니와 내가 앞으로
살아가야 할 셋방살이가 끼였다
붉은 개 울음소리가 집안 가득 찼다

8
다시 부엌에 들어가 보았다
바뀐 칼과 도마가 다른 구석에 처박혀 있었다

9
어머니가 나무를 해 날랐다
따뜻한 방보다 병원에 아버지를 입원시키고 싶었다
글을 썼다 지방신문에도 당선되지 못한
습작시를 태우며
불의 즙 기름 같은 붉은 눈물을 흘렸다

10
빚쟁이들이 트럭을 붙들어 늦고 지친 이사
비 온 다음날의 참깨꽃처럼 힘없이 떠나는
고향
붉은 슬레이트 지붕이 눈물에 잠겨
눈꺼풀처럼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 함 민복 시 ‘ 붉은 겨울, 1986‘





깔고 앉은 연꽃에
미안하단 말 대신
살가운 미소 이천오백 년

얼굴엔 누런 범벅
달빛만 잡수네

부처님
이빨 없죠
하하하 웃어보세요


- 함 민복 시 ‘ 동자승’
* 창비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달빛과 그림자의 경계로 서서
담장을 보았다
집 안과 밖의 경계인 담장에
화분이 있고
꽃의 전생과 내생 사이에 국화가 피었다

저 꽃은 왜 흙의 공중섬에 피어 있을까

해안가 철책에 초병의 귀로 매달린 돌처럼
도둑의 침입을 경보하기 위한 장치인가
내 것과 내 것 아님의 경계를 나눈 자가
행인들에게 시위하는 완곡한 깃발인가
집의 안과 밖의 꽃의 향기를 음향 하려
건배하는 순간인가

눈물이 메말라
달빛과 그림자의 경계로 서지 못하는 날
꽃철책이 시들고
나와 세계의 모든 경계가 무너지리라


- 함 민복 사 ‘ 꽃 ’
*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창작과 비평사




그는 음식의 영웅
세계적인 주방장
기름 닭 타고 한국을 상륙한 맥아더

열한 가지 특제 양념과
정성으로 여러분을 요리하겠다고
티브이 광고까지 하는
지팡이 들고, 안경 쓰고, 가늘고 검은 넥타이 MAN

그는 FBI요원일지도 모른다
지령: 한국 맛의 문화를 정복하라
조선닭- 토종이 별로 없고 외국 국적을 갖고 있는
닭이므로 별 죄의식 가질 필요 없음-의 목을 미국
식으로 비틀어라 그래야 미국 자본의 아침이 밝아
올 것이다 조선의 영계들, 영계들을 공략하라 외가
로 유전하던 맛을 끊어라 그리고 세계적인 차원에
서 외가에서 외국으로 맛이 유전하는 시대라는 달
착지 근한 양념을 처발라라 만국의 켄터키프라이
드 치킨 식도락가여 단결하라

그 누구의 전신상도 조선팔도에
저리 번식력 있게 세워지지는 않았다
저렇게 높은 빌딩을 횃대로, 밤마다,
네온사인으로 빛나는, 닭벼슬 쓴,
저 노인의 교묘한 웃음 띤 얼굴

쳐라
치지 못하면 우리가 닭대가리다


- 함 민복 시 ‘켄터키후라이드 치킨 할아버지‘




우울씨는 빛바랜 사진을 주시하고 있다
초가지붕과 호리병의 조화를 살린 전원적인 작품

우울씨는 한 작가를 떠올린다
이발소를 경영하던 --- 사진작가 --- 사람의 ---
죽어가는 --- 모습을 찍어보려고 --- 여자를
유인 --- 나체로 죽어가는 --- 찍고 --- 암매장한 ---

우울씨의 작품세계는 삶을 향한 강렬함의 포착
점점 더 다이나믹하고 강렬한 작품을 찍기 위해
전국을 누비는 우울씨. 금강촌 발파조의 눈동자,
쌀 점이 낀 채 고통을 호소하는 교통 현장 ---
그러나 좀 더 --- 강렬한 것 --- 좀 더 --- 강렬 ---
우울씨는 사진제에서 인정을 받고 사진제에서는
우울씨가 좀 더 --- 강렬한 --- 작품을 ---
기대 --- 점점 --- 더 --- 강렬한 --- 강렬 ---

모든 준비를 끝내고 나니 우울씨는 마음이 가벼웠다
뭉크의 그림 절규를 확대해 찍은 사진을 뒷배경으로 하고
사지를 자동으로 채워질 수 있게 만든 쇠사슬에 묶인 자물통
여러 각도, 필터를 끼운 자동 사진기와 무비카메라
전나의 우울씨 (작가, 기록병에 걸린)는
청산가리를 먹고 사지를 쇠사슬에 건다
카메라 작동되는 소리, 예술이란, 착각, 착각 ---

그러자, 앞에 놓인 그림이 공포스럽게 살아난다
우울씨는 항우울증제를 입 속에 털어 넣는다


- 함 민복 시 ‘ 우울씨의 一日‘
  * 詩集, 우울氏의 一日





집 안에 머물다 집 떠나니
집이 내 안에 와 머무네

집은 내 속에 담겨
나를 또 담고 있고

지상에서 가장 큰 그릇인 길은
길 밖에다 모든 것을 담고 있네


- 함 민복 ‘그릇’



불알이 멈춰 있어도 시간이 가는 괘종시계처럼
하체엔 봄이 오지 않고 지난한 세월로 출근하는 얼굴

장미꽃이 그 사내를 비웃었다
너는 만개하지 못할 거야

그 후, 시든 장미꽃이 다시 그 사내를 비웃었다
그래도 나는 만개했었어


- 함 민복 ‘ 구혼 ’



** 출생
1962년, 충북 충주시, 수도전기공업고등학교 졸업, 1989 서울예술전문대학 문예창작과
데뷔, 1988년 세계의 문학 '성선설' 등단


- 수상
2020. 제18회 유심작품상 시 부문
2011. 제비꽃 서민시인상
2011. 제6회 윤동주상 문학부문 대상
2005. 제2회 애지 문학상
2005. 제7회 박용래 문학상
2005. 제24회 김수영 문학상
1998.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