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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그 쓸쓸한 영혼

김 응교 시와 번역 시,






와세다대학 입구 헌책방에서
영어 원서를 품고 책을 찾고 있는 여학생
시원스레 파인 흰 가슴살
마른 할아버지가 느물느물 훔쳐보는 간음姦淫

광장에서 무언가 연극 대사를 종일 외우고 있는 아이,
먼 데 바라보며 쉰 우유를 마시는
지저분한 수염은 과거의 부스러기들 잔뜩 묻히고,
누가 정상인지 나는 구별하지 못한다

사쿠라는 죽음을 숭앙한다
일주일 전 국회의원 아라이가 자살했고
어제는 X-Japan의 과격한 기타리스트 히데가 자살했다
내일은 아쿠다가와상을 받은 누군가 동맥을에 칼을 댈까
이 섬나라는 죽음을 이어달리기한다

침묵하는 죽음의 낌새
재잘대는 살림의 낌새

병실 냄새 한 움큼, 이 도시는
생선이 모로 누워 잠든 어물전
살아 있는 죽은 사시미 떼를 찾아
상복喪服 입은 쓰나미가 몰려오고 있다
제국의 도시들아, 안녕安寧하신가

한 겹 한 겹 피부를 도려내는 쓰린 시간들,
내일은 누가 이쁜 세제 비눗방울 잠깐 반짝이며
한 접시 사시미로 떠질까


- 김 응교 시 ‘사시미’
[부러진 나무에 귀를 대면], 천년의시작, 2018.




날 때부터 독은 없었다
커가면서 분노가 자라
내 몸에 숨긴 독으로
스스로 의식을 잃으며
얼마나 많은 영혼을 마비시켰던가

궁지에 몰리면
죽기 살기 허풍으로
백옥처럼 흰 살을 서너 배 부풀려
터질 듯 팽팽하게 했다가
바람 빠지는 얄팡한 복어

살려고 칼을 품었고
더러운 세상에 센 척하려다 보니
이빨도 날카로워졌건만

허풍을 떨어 독이 있고,
독을 숨겨 허풍을 떨더니,
바다의 돼지, 하돈河豚,
치명적인 맛,
다 발려 뼈만 남고


- 김 응교 시 ‘남아 있는 맛에 대하여‘
[부러진 나무에 귀를 대면],천년의시작, 2018.




바위에 따닥
따닥 붙어 있는 비릿한
악착스레 운명에 매달린 미생未生
소금만 삼키며 허옇게 딱딱한 입술들

태양에 맞서
갯벌 직시하고
밀물이야 더디 와도
파도에 맞아 부서져도
말라붙어 굳도록
아직도 어깨 걸고 연좌하는 따개비들


- 김 응교 시 ‘밀물 기다리는 침묵‘
[부러진 나무에 귀를 대면],천년의시작,2018.




집 없이 산다는 것
애완견 대신 오줌 냄새 품고
쓰레기통 베갯머리 삼아
피부병과 동상凍傷을 가족 삼는 것

오줌 냄새랑 친해지려고 나도 무진 애썼다
홈리스 곁에 앉아 다꽝을 한 달쯤 삭히면 날 만한
시궁창 이빨 앞에서 내 욕망의 다비식도 해봤다
여물 달은 성聖 지린 증기蒸氣여!

앗싸, 코끝에
발효하는 오줌 냄새가
배스킨라빈스 아이스크림으로 풀리던 날
나도 나도
예수님에게도 아슴지린 오줌 냄새
석가님에게도 달콤지린 오줌 냄새


- 김 응교 시 ‘성聖 지린‘
[부러진 나무에 귀를 대면],천년의시작, 2018.




히메지의 추석, 모두 모여 삼겹살 먹는다
투가리에 설렁탕 끓여 아지노모토 대신
다대기 풀어 홀홀 저어 먹는 순간, 문 열렸다
클 났어, 임씨 잡혔어
쌈밥 입에 문 채 벽장이며 베란다로 튀는 사람들
IMF 빚더미에 일본 와서 술집 설거지하는 임 씨,
담배 한 대 피우겠다 나갔다, 덥석 잡혔다

얼굴에 뻘건 꼼장어 떼 꼬물작 타오르고,
살려달란 말인지 발끝으로 땅에 뭔가 써대는 임 씨를,
경찰의 혀는 뾰족한 일본어로 쿡쿡 찌른다
장 마담은 도와달라며 내 옆구리 연방 찌른다

한국에서 식모살이한다던 임 씨 아내,
시골집에 맡겼다는 임 씨 딸 얼굴 겹쳐질 때,
엉켜 있는 언어를 용켜 풀어내는 용감한 내 혀는
교직원 증명서 내어보이며 거짓을 자랑하는 나의 혀
저, 학교 선생인데, 임 씨랑 놀러 같이 왔는데요
경찰은 내 여권 갖고 어딘가 전화 건다.
정말 선생님이시네. 여권 꼭 갖고 다니라 하세요

불법체류자 많은 거 아시죠
한 번쯤 봐주겠다며 돌아가는 경찰 눈빛이
내 위장을 사납게 도려냈다

베란다로 튀었던 수정 씨
벽장에 숨었던 덕정네도 나왔다
이제 경찰 읎제? 갔제?
시들해진 상추에 삼겹살은 가죽처럼 뻣뻣
식겁했던 임 씨 사추리 긁으며
시답잖다며 풋고추 섬덕 씹어 뱉는 말

사우나 가자
글쎄 사우나 가자구


- 김 응교 시 ‘ 혀 ‘
[부러진 나무에 귀를 대면],천년의시작, 2018.




흥분이
장착된 문장은
건너편 마음속에 도달하기 훨씬 전에
밖에서 불발해버린다

저 사람 왜 폭발하지,
이해도 못 한다

건너편 마음 깊이 은밀하게 파고들어
붙어 있다가
바로 그
순간

폭발하는 속삭임
무섭다


- 김 응교 시 ‘ 봄 ’
[부러진 나무에 귀를 대면], 천년의시작, 2018.




씨앗은 몸을 갈라 떡잎을 만들고
떡잎은 비밀을 모아 나무로 자란다
통나무는 무수히 살을 갈라
한 장 종이쪽이 되고
종이는 몸을 벌려 역사를 받아들인다
무거운 역사, 그래서 책은 무겁다

그런데 진짜 역사는
폭풍우의 심장까지 직시하는 잎사귀에 적혀 있거나
잎새 사이를 나는 새의 반짝 숨결에 적혀 있지
진짜 책은 가볍다


- 김 응교 시 ‘책 ’
* 김응교 시집,『씨앗 / 통조림』(하늘연못, 1999)의 첫시




있다

              다니카와 슌타로 / 김응교 번역


나는 알고 있다
뭔가 알고 있다
하지만 그보다 앞서 나는 있다
여기에 있다

잠자고 있어도 나는 있다
멍하니 있어도 나는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더라도 나는 있다 어디엔가

나무는 서 있기만 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고기는 헤엄치기만 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아이는 놀기만 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모두 살아 ‘있다’

누군가 어디엔가 있다 하니 좋네
가령 멀리 떨어져 있다 해도
있는 거다 있어주는 거다
라고 생각하기만 해도 즐거워져




이십억 광년의 고독

          다니까와 슌타로

인류는 작은 공(球) 위에서
자고 일어나고 그리고 일하며
때로는 화성에 친구를 갖고 싶어 하기도 한다

화성인은 작은 공 위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혹은 네리리리 하고 키리리 하고 하라라 하고 있는지)
그러나 때때로 지구에 친구를 갖고 싶어 하기도 한다
그것은 확실한 것이다

만유인력이란
서로를 끌어당기는 고독의 힘이다

우주는 일그러져 있다
따라서 모두는 서로를 원한다



- 다니까와 슌타로(谷川俊太郞) 시선집,『이십억 광년의 고독』(김응교 옮김)




** 은하철도 타고 있다 돌아오니
많은 사람이 별이 되었어

영양실조에 걸려 있던 모국어 가까스로 숨을 쉰다


2018년 2월 21일
김응교

[부러진 나무에 귀를 대면],천년의시작,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