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를 공친다
한 여자 때문에.
하루를 공친다
술 때문에.
(마음이여 몸이여 무거운 건 얼마나 나쁜가)
정신이라는 과일이 있다.
몸이라는 과일이 있다.
그 둘은 서로가 서로에게
두엄이고 햇빛이고
바람이거니와
바람 없는 날은
자기의 무거움에서 벗어날 길이 없는
대지여
여자는 바람인가
술은 햇빛인가
그러나 언제나
마음은 하늘이다
바람이 시작하는 그곳이여.
- 정 현종 시 ’바람이 시작하는 곳‘
[광휘의 속삭임], 문학과지성사, 2008.
나는 가끔 후회한다
그때 그일이
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
그때 그 사람이
그때 그 물건이
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
더 열심히 파고들고
더 열심히 말을 걸고
더 열심히 귀 기울이고
더 열심히 사랑할 걸......
반벙어리처럼
귀머거리처럼
보내지는 않았는가
우두커니처럼......
더 열심히 그 순간을
사랑할 것을......
모든 순간이 다아
꽃봉오리인 것을,
내 열심에 따라 피어날
꽃봉오리인 것을!
- 정 현종 시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
_《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세계사, 1989)
너무 좋아서
나는 너를 번역하기 시작한다
네 눈을 '눈' 이라고 번역하고
네 얼굴을 '얼굴' 이라고 번역하고
네 손을 '손'
네 가슴을 '가슴'
네 그림자를 '그림자'
그리고 네 기쁨을 '기쁨' 이라 번역하고
네 슬픔을 '슬픔'
네가 있으면 '있다' 고 하고
네가 없으면 '없다' 고 하고
흘러흘러
피는 '피'로
네가 문장의 처음을 열면
나는 끝없는 그 속으로 들어가
인제는 날개의 하늘이 된 거기서
자유형 헤엄을 치는데,
알코올 함유량이
부드러운 40도쯤 되는
가령 '술집' 은 문맥을 부드럽게 하느니
그리하여 단어들을 섞어서
수수께끼를 만들기도 하는데
열쇠는 사랑(사량?)
오 추억이 삶보다 앞서가는
신명의 묘약!
너무 좋아서
나는 너를 번역하기 시작한다
메아리와도 같은 숨쉬는 문장이여
내 죽음도 아직
마침표를 찍지 않으리.
- 정 현종 시 ‘너무 좋아서‘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정현종 전집 1 시], 문학과지성사, 1999.
수선화가 활짝 피엇다.
두 색 한 송이.
(괴로울 때 몽우리를 보았다)
괴로움이 혹은 꽃피듯이
꽃은 만개하였다.
너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내가 꽃피었다면?
나의 괴로움에도 불구하고
네가 꽃피었다면?
아, 자연의 길은 그렇다.
바라건대 우리가 바라는 바이다.
모든 건 꽃핀다.
바보도 꽃피고
괴로움도 꽃핀다.
이나 닦아야겠다.
- 정 현종 시 ‘모든 건 꽃핀다‘
[견딜 수 없네], 문학과지성사, 2013.
마음먹기에 달렸어요.
마음을 안 먹어서 그렇지
마음만 먹으면
안 되는 일이 없어요.
마음에 저절로 물드는
저 살아 있는 것들의 그림자
있는 그대로 물드는
그 그림자들도
마음먹은 뒤에 그래요.
마음을 먹는다는 말
기막힌 말이에요.
마음을 어쩐다구요?
마음을 먹어요!
그래서
안 되는 일이 없다는 거예요.
마음먹으니
노래예요.
춤이에요.
마음먹으니
만물의 귀로 듣고
만물의 눈으로 봐요.
마음먹으니
태곳적 마음
돌아보고
캄캄한데
동터요.
- 정 현종 시 ’마음먹기에 달렸어요‘
[광휘의 속삭임],문학과지성사, 2008.
나폴레옹과 조세핀 전시회에 가서
조세핀이 신었던 스타킹을 보았지.
뱀이 허물 벗어놓은 것 같더군.
섹시했겠네.
스타킹이 그런 게 아니라
시간이 섹시하게 느껴지더군.
시간이 그렇게 에로틱한 건지는 처음 알았어.
[모든 무상(無常)한 게 그러하거니와!]
- 정 현종 시 ‘시간에 대하여‘
[견딜 수 없네],문학과지성사, 2013.
녹아들지 않으면
그럴듯하지 않고
즐겁지도 않다.
마음은 특히 그렇다.
(지금의 세계는
마음이 만드는 세계가 아니거니와)
녹아들지 않으면
마음은 필경
삶의 전부인 저
진실의순간을 만나지 못한다.
그런 순간이 없으면
삶은 깡그리 허탕이다.
녹는 일에는
물과 기름과 바람이 있고
살과 피와 무슨 그런 게 있지만
그러나
마음이 녹지 않으면
(지금의 세계는
마음이 만드는 세계가 아니거니와)
세계는 잿더미요
삶은 쓰레기 더미이다.
- 정 현종 시 ‘녹아들다‘
[어디선가 눈물은 발원하여],문학과지성사, 2022.
―강진 백운동 별서정원
누가 숨겨놓았는지
백운동 별서정원.
필경 월출산이 숨겨놓았고
오래전부터
우리 마음이 숨겨놓았으며
하늘도 합심해서
비밀을 지키고 계시니
쉬 발설하기 어렵네.
저 불멸 숲의 요정들을
여기서 만나니
숲이야 계곡이야
꿈의 도가니.
내 마음 오래전부터
여기 있었네.
우리 꿈 세상 이래
여기 깊이 있었네.
꿈도 마음도
여기 참 많이도 붐벼
이 과잉을 어쩔 줄 모르겠네.
- 정 햔종 시 ‘마음의 과잉을 어쩔 줄 모르겠네‘
[어디선가 눈물은 발원하여], 문학과지성사, 2022.
아침이 오고,
신문이 오고,
강세 '어휴'가 오고,
강세 '에이'가 오고
이 나라 이 행성,
우리가 사는 이 터전
말도 안 되는 일이 하도 많아
강세 '어휴'가 오고,
아침이 오고,
강세 '에이'가 오고,
지상의 어떤 나라
폭격으로 무너진 건물 밑에서
피범벅이 된
다섯 살 아이 옴란 다크니시가 오고,
구역질이 오고,
한숨이 이 행성을 덮고,
눈물이 어디선가 발워하여
강을 이루고,
아침이 오고,
피범벅이 된 아이가 또 오고,
마음이 마비된 이들이
세상을 주무르겠다고
시끄럽고,
소음을 만드는 게 최고의 전략이었던
보나파르트가 왔었는데, 그 뒤
프티 보나파르트들이 넘쳐나고,
돈키호테가 창을 들고 달려든 건
자기의 무력감이었으나
그걸 무찌르기는 어려워
오늘날에도 그건 지구를 감싸고 있는 듯,
강세 '어휴'가 오고,
하루가 멀다 하고 눈물은
어디선가 발원하여
강을 이루고……
- 정 현종 시 ‘어디선가 눈물은 발원하여‘
[어디선가 눈물은 발원하여], 문학과지성사, 2022.
말하지 않은 슬픔이 얼마나 많으냐
말하지 않은 분노는 얼마나 많으냐
들리지 않는 한숨은 또 얼마나 많으냐
그런 걸 자세히 헤아릴 수 있다면
지껄이는 모든 말들
지껄이는 입들은
한결 견딜 만하리.
- 정 현종 시 ‘말하지 않은 슬픔이‘
_《견딜 수 없네》(문지, 2013)
키도 후리후리한
돌배나무 위
그 높은 가지에
하이얀 돌배꽃이 피어,
피어도 귀신처럼 피어,
바람도 햇빛도 내 마음도
모두 제 보금자리 삼았습니다.
삼아도 찬탄을 다해
보금자리 삼았습니다
- 정 현종 시 ‘돌배꽃’
[그림자에 불타다],문학과지성사, 2015.
―다시 술타령
술이 들어가니
얼굴들이 불그레,
아침놀이든 저녁놀이든
노을빛으로 물들어
안면우주설을 완성하고,
모든 시작을 시작하고
모든 끝을 끝내면서
시간이 사라지는
그런 일면(一面)을 완성하고,
무엇보다도
세상의 모든 색깔로 물들어······
- 정 현종 시 ‘세상의 모든 색깔로‘
[그림자에 불타다], 문학과지성사, 2015.
자꾸자꾸 물을 줘야 해요
나무도 사람도 죽지 않게
죽음이 공기처럼 떠도는 시절에
그게 우리가 숨쉬는 이유
그게 우리가 꿈꾸는 이유
당신의 마음, 당신의 몸은
얼마나 깊은 샘입니까
사람의 기쁨과 슬픔의 가락으로
그 寶石보석의 가락으로 솟는 샘
가슴도 손도 꽃피고
나무와 풀
집과 굴뚝들도 꽃피게
초록초록 자라게
땅의, 보석의,
온몸의 가락을 다해 솟는 샘~
하룻밤 자고 나면
한 뼘씩 자라는 굴뚝의 어린 시절
던지는 돌에 날개 돋는 어린 시절
돛 단 지평선의 어린 시절
오, 경이의 어린 시절,
늙고 병든 이 세상에게
그 시절을 되찾아주게!
- 장 현종 시 ‘늙고 병든 이 세상에게‘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문학과지성사, 1984.
1
저녁 어스름을 내다보며
나는 한숨짓는다
또 하루가 가는구나……
오늘도 멀리 가지 못했다 ……
2
그나마 어린 시절까지는 간 모양이다
끄적거려놓은 바 이러하니―
"누구의 어린 시절이든지
어린 시절은 전설이며
우리한테 각자의 어린 시절이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모두 전설적인 존재들이다"
그러나 지나가버렸다구?
벌써 끝난 얘기라구?
어린 시절 얘기를 하면 모두 상기(上氣)되는데두?
시라는 이름의 그 전설의 고고학이 있는데두?
하여간 다른 전설은 만들지 말어.
군살로 생살을 누르지 말어.
봐, 오해하지 말라며 꽃이 피잖어?
잘못 생각했다고 새가 울잖어?
3
방안에 꽃다발이 환하다.
세상을 바꾸는 꽃 한 송이.
짐짓 혁명적이랄 수 있는
한 송이 모험, 한 송이 변화는 없느냐.
허구헌 날 골만 어지러운 꿈―
한 송이 그런 꽃이여.
두개골 속의 폭풍이여.
4
술판으로 달려간다.
요새 정신주의란 말이 유행이란다.
지금은 맥주주의다.
항상 이상한 건
맥주를 마시면 마신 것보다 오줌이 더 나오고
소주를 마시면 마신 것보다 오줌이 덜 나온다는
그 점이다.
기우이기를 바라지만
행여나 정신주의란 말 뒤로
몸을 숨길까봐 걱정이고,
정작 시의 살과 피가
그 구멍으로 새버릴까봐 걱정이다.
(또 무슨 '주의'로는 물론
시를 만나볼 수 없고)
나로서는 실은
제정신주의를 제창한다.
5
저녁 어스름을 내다보며
나는 한숨짓는다
또 하루가 가는구나……
- 정 현종 시 ‘또 하루가 가네‘
[세상의 나무들], 문학과지성사, 1995.
―맑은 날에
날이 하도 맑아서
병원 쪽에 하기로 한 전화를
그만 둔다.
이런 맑음 속에서는
몸도 이미 투명하여
병도 없고
죽음도 없다.
이렇게 투명으로 불타는
몸에는
병도 죽음도
깃들 데가 없다.
(병 걸릴 몸도 없고
죽을 몸도 없다)
이런 투명 속에서는
일체가 투명하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몸도 마음도
보이지 않아,
(그야말로)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아,
성스러워,
전무(全無)하여!
- 정 현종 시 ‘이런 투명 속에서는‘
[견딜 수 없네],시와시학사, 2003.
지난해는
참 많이도 줄어들고
많이도 잠들었습니다 하느님
심장은 줄어들고
머리는 잠들고
더 낮을 수 없는 난쟁이 되어
소리없이 말없이
행복도 줄었습니다
그러나 저 납작한 벌판의 찬 흙 속에
한마디 말을 묻게 해주세요
뜬구름도 흐르게 하는 푸른 하늘다운
희망 한 가락은
얼어붙지 않게 해주세요
겨울은 추울수록 화려하고
길은 멀어서 갈 만하니까요
당신도 아시지요만 , 하느님.
- 정 현종 시 ‘냉정하신 하느님께‘
[정현종 시전집 1], 문학과지성사, 2008.(1999)
금인 시간의 비밀을 알고 난 뒤의
즐거움을 그대는 알고 있을까
처음과 끝은 항상 아무것도 없고
그 사이에 흐르는
노래의 자연
울음의 자연을.
헛됨을 버리지 말고
흘러감을 버리지 말고
기억하렴
쓰레기는 가장 낮은 데서 취해 있고
별들은 天空에서 취해 있으며
그대는 중간의 다리 위에서
어쩔 줄을 모르고 있음을.
- 정 현종 시 ‘기억제 1‘
[고통의 축제], 민음사, 1975.
몸뚱아리 하나가 구만리요
몸뚱아리 하나가 寸尺이다
목욕을 하면 깨끗해지기도 하고
기운을 빼면 맑아지기도 하는데
기쁨의 샘이며
절망의 주머니다
눈부신 아홉 구멍
만물이 드나드는 길목이 많아서
만물교통의 중심이며
천지를 꿰고 있다
밝을 때는 거기 비취지 않는 게 없고
어두울 때는 제 속에 갇힌다
하루아침에 일어나고
하루아침에 쓰러진다
먼지 하나에 울지만
풀잎 하나에 웃는다
뛰어오를 때 이쁘지만
넘어질 때도 이쁘다
땅과 같아서
술과 같아서
물과 불이 더불어 있으니
물결에 취하고 불길에 취한다
(술 마신다는 건 물불을 안 가린다는 얘기다)
이 배는 그리하여
물길도 가고 불길로도 간다
더러 빠지고 더러 데지만
그 淨化의 미덕! 은 영원하다
만물이여 내 몸이여
허공이여 내 몸이여
- 정 현종 시 ‘몸뚱아리 하나‘
[사랑할 시간은 많지 않다], 세계사, 1989.
......시조차도, 나를 사로잡고 나를 헤매게 하며 나를 꿈꾸게 하는 것들의 저 생생하고 혼란스러우며 어처구니없어서 난처하고 그리하여 살아 있는 내 안팎의 신호들과 힘들의 소용돌이가 피워낸 한 꽃이요 전혀 새로운 움직임의 시작이며 따라서 또 하나의 세계의 열림인 시조차도, 저 날것, 저 날 소용돌이와 힘들에 비하면 아직도 덜 싱싱하고 덜 생생한 것이니, 나는 시를 쓰려고 한다기보다는 시라는 것을 태어나게 하는 그 힘들과 신호들의 소용돌이 속에 항상 있고 싶을 따름이며, 만일 내 속에서 시가 움튼다면 그 發芽는 마땅히 예의 그 소용돌이의 고요한 중심으로부터 피어나는 것이기를......
- 정 현종 시 ‘저 날 소용돌이‘
[세상의 나무들], 문학과지성사, 2005.
잡념 레퍼터리, 천당을 가까이
잡념 레퍼터리, 지옥을 가까이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건 나도 모르게
잡념인가봐
그건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생기고
저절로 꺼지고
출입이 自在하니
그다지 스스로 있는 걸 어찌
좋다 하지 않으리요,
잡념의 볼기짝이여
잡념의 귀싸대기여
- 정 현종 시 ‘잡념‘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문학과지성사, 1986
가을에 연중행사처럼 하는 일을 하러 가면서
작년 이맘때도 요만큼 쌀쌀했었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문득 즐거웠는지,
여전히 살아 있는 감각 때문에 즐거웠는지,
다시 찾아 입은 옷이 즐거웠는지,
모든 흐름의 적막한 내밀(內密)이 즐거웠는지......
다시 노래하자면
기온이 열어젖히는 무한이 즐거웠는지,
촉감의 그지없는 확실함이 즐거웠는지,
반복과 변화의 터치가 즐거웠는지......
- 정 현종 시 ’그래서 즐거웠지‘
[그림자에 불타다], 문학과지성사, 2015.
가을이구나! 빌어먹을 가을
우리의 정신을 拷問하는
우리를 無限 쓸쓸함으로 고문하는
가을, 원수같은.
나는 이를 깨물며
정신을 깨물며, 감각을 깨물며
너에게 殺意를 느낀다
가을이여, 원수같은.
- 정 현종 시 ‘가을, 원수 같은‘
[나는 별 아저씨], 文學과知性社 , 1978.
일은 손에 잡히지 않고
가을 저 맑은 날과
숨을 섞어
가없이 투명하여
퍼지고 퍼져
천리 만리 퍼져나가는
이 쓸쓸함은 무엇인가.
감자나 캐라
벼나 베라 하는 소리
들리지 않는 바 아니나
용서하라 이 가없는 虛鬼허귀,
감자를 캐도 근절은 안 되고
배불리 삶아 먹어도 천만에
채워지지 않을
이 쌩-한
머나먼 적막을.
- 정 현종 시 ‘가을날‘
[세상의 나무들], 문학과지성사, 1995.
-미당 서정주 선생을 추모하며 그의 시를 기리는 노래
향가 이후
이런 무의식의 즙이 오른 언어가 어디 있었느냐.
땅이 꽃을 피워내듯이
나무에 물오르고 뻐꾸기가 울듯이
시의 제일 높은 자리
노래의 자연을 만판 피워냈느니.
활자들이 모두 주천(酒泉)이기나 한 듯
거기서 술이 뽈록뽈록 용출(湧出)하여,
우리는 민족적으로 취하여,
정치 경제 군사 또 그 무엇도 하지 못한
신명을 풀무질하지 않았느냐.
(그러니 그의 정치적 백치
뒤에 오면서 늘어나는 과잉 능청 그런 것들은
`악덕의 영양분‘으로 섭취하는 게 좋으리.
용서를 빈 바도 있으시고
브레히트의 `쉰 목소리‘도 그럼직하며
관용은 정의를 비로소 정의롭게 하리니)
어떻든 잘 익은 술이나 김치의 맛과도 같이
그다지도 곰삭은 그의 노래의 맛은
느낌의 영매(靈媒)의 이 또한 곰삭은 몸과 마음에서
샘솟아 흘러나온 것이니
괴로우나 즐거우나
세상살이의 맛을 한결같게 하는
노래의 일미행(一味行)이 아니고 또 무엇이랴.
감정이거나 욕망이거나 꽃이거나 바람이거나
그 노래에서 새로 태어난 사물의 목록
그 탄생의 미묘한 파동의 목록을 우리는 아직
다 작성하지 아니했느니.
(한 나라 한 부족이 대접을 받으려면
문화적 보물이 있어야 한다는 건 뻔한 얘기)
나는 술잔을 앞에 놓고
한국어의 한 자존심 그 보물 중에서
내 십팔번 <푸르른 날>을 불러본다.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네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 정 현종 시 ‘노래의 자연‘
[견딜 수 없네], 문학과지성사, 2013.
누가 마시다 남은 술
마시다 남은 물
마시다 남은 피
그런 건 다 나한테 오거라
내 속의 저 밑 빠진 거지
시간도 비빔밥도 없는 저 거지가
그걸 다
바닥난 슬픔처럼 말려
바람불 듯 취하리니
- 정 현종 시 ‘시간도 비빔밥도 없는 거지‘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문학과지성사, 1986
재즈 가수 나윤선이
한없이 눈물을 흘린다.
자기의 우상이었고,
우상이며,
우상일 터인
포르투갈 가수 마리아 주앙과
한 무대에 섰다는 데 너무 감격해서.
그 한없이 흘리는 감격의 눈물에 나는
감격해서
왈칵 눈물이 나온다-아,
저렇게 구김살 없는 영혼이 있구나!
사람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마음인,
드물고 드문
구김살 없는 마음!
(알량한 유아(唯我)로
질투가 인생관이며
시기가 세계관이고
경쟁이 사회관인 듯한,
그리하여 사는 목적이 오로지
남을 이기기 위한 것이라는 듯
처신하는 사람이 있어서 괴로운
이녁의 저질 분위기 속에서)
자기도 이미 세계적인 재즈 가수인
나윤선이
자기가 흠모하는 재즈 가수와 한 무대에
섰다고 감격해서 눈물을 펑펑 쏟고 있는 걸 보는
감격이라니
저런 게 바로 천진(天眞)이니
구김살 같은 건 생길 틈이 전무해보이는
너무나 이쁜 나윤선!
- 정 현종 시 ‘찬미 나윤선‘
[그림자에 불타다], 문학과지성사, 2015.
내 속에 들어 있는 말을
즉시 발효시켜
술술 나오게 하는
촉매같은
사람이 있다.
누룩곰팡이와도 같이
인류의 전(全) 시간을 발효시키고
그 숨 쉬는 공기를 발효시키며
그리하여
말을 춤추게 하는 영혼-
다만 그런 영호은 아주 드문데
그건 우리의 사회생활에서
기쁨이 아주 드물다는 것과 일치한다.
- 정 현종 시 ‘촉매 ‘
[그림자에 불타다], 문학과지성사, 2015.
산에서 내려와서
아파트촌 벤치에 앉아
한 조각 남아 있는 육포 안주로
맥주 한 병을 마시고
지하철을 타러 가는데
아 행복하다!
나도 모르겠다
불행 중 다행일지
행복감은 늘 기습적으로
밑도 끝도 없이 와서
그 순간은
우주를 온통 한 깃털로 피어나게 하면서
그 순간은
시간의 궁핍을 치유하는 것이다.
시간의 기나긴 고통을
잡다한 욕망이 낳은 괴로움들을
완화하는 건 어떤 순간인데
그 순간 속에는 요컨대 시간이 없다.
- 정 현종 시 ‘행복 ‘
[견딜 수 없네], 문학과지성사, 2013.
환합니다.
감나무에 감이,
바알간 불꽃이,
수도 없이 불을 켜
천지가 환합니다.
이 햇빛 저 햇빛
다 합해도
저렇게 환하겠습니까.
서리가 내리고 겨울이 와도
따지 않고 놔둡니다.
풍부합니다.
천지가 배부릅니다.
까치도 까마귀도 배부릅니다.
내 마음도 저기
감나무로 달려가
환하게 환하게 열립니다.
- 정 현종 시 ‘환합니다‘
사람이
풍경으로 피어날 때가 있다
앉아 있거나
차를 마시거나
잡담으로 차에 이스트를 넣거나
그 어떤 때거나
사람이 풍경으로 피어날 때가 있다
그게 저 혼자 피는 풍경인지
내가 그리는 풍경인지
그건 잘 모르겠지만
사람이 풍경일 때처럼
행복한 때는 없다
- 정 현종 시 ‘사람이 풍경으로 태어나‘
사람이 바다로 가서
바닷바람이 되어 불고 있다든지
아주 추운데로 가서
눈으로 내리고 있다든지
사람이 따듯한 데로 가서
햇빛으로 비치고 있다든지
해 지는 쪽으로 가서
황혼에 녹아 붉은 빛을 내고 있다든지
그 모양이 다 갈데없이 아름답습니다.
- 정 현종 시 ‘갈데없이‘
사람이 온다는 건
사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
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 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 정 현종 시 ‘방문객’
밤이 자기의 심정心情처럼
켜고 있는 가등街燈
붉고 따뜻한 가등街燈의 정감情感을
흐르게 하는 안개
젖은 안개의 혀와
가등街燈의 하염없는 혀가
서로의 가장 작은 소리까지도
빨아들이고 있는
눈물겨운 욕정의 친화親和
- 정 현종 시 ‘교감交感‘
숨 쉬는 법을 가르치는
술잔 앞에서
비우면 취하는
뜻에 따라서
오늘도 나는 마시이느니
여러 세게를 동시에 넘나드는 몸
源泉원천 없는 메아리와도 같은 말
政治정치 빼놓으면 참 걸리는 데 없어
나는 마시느니 오오늘도
비우면 취하는
뜻에 따라서
- 정 현종 시 ‘술잔 앞에서‘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세계사,1989.
갈수록 일월(日月)이여,
내 마음 더 여리어져
가는 8월을 견딜 수 없네.
9월도 시월도
견딜 수 없네.
흘러가는 것들을
견딜 수 없네.
사람의 일들
변화와 아픔들을
견딜 수 없네.
있다가 없는 것
보이다 안 보이는 것
견딜 수 없네.
시간을 견딜 수 없네.
시간의 모든 흔적들
그림자들
견딜 수 없네.
모든 흔적은 상흔(傷痕)이니
흐르고 변하는 것들이여
아프고 아픈 것들이여.
- 정 현종 시 ‘견딜 수 없네‘
* 견딜 수 없네, 시와시학사|황금이삭.1(2003)
바람결 따라
풀잎은 공중에 글을 쓰지 않느냐.
어디로 가겠는가.
나는 손과 펜과 몸 전부로
항상 거기 귀의한다.
거기서 나는 왔고
거기서 살았으며
그리고 갈 것이니….
- 정 현종 시 ‘풀잎은’
* 풀잎은 공중에 글을 쓴다, 호미(2010. 9. 3.)
내 소리도 가끔은 쓸 만 하지만
그보다 더 좋은 건
피는 꽃이든 죽는 사람이든
살아 시퍼런 소리를 듣는거야
무슨 길들은 소리 듣는 거보다는
냅다 한번 뛰어 보는 게 나을 껄
뛰다가 넘어져 보고
넘어져서 피가 나 보는 게 훨씬 낫지
가령 <전망>이란 말, 언뜻
앞이 탁 트이는 거 같지만 그보다는
나무 위엘 올라가 보란 말야, 올라가서
세상을 바라보란 말이지
어디 냇물에 가서 산 고기 한 마리를
무엇보다도 살아 있는 걸
확실히 손에 쥐어 보란 말야
그나마 싱싱한 혼란이 나으니
야음을 틈타 참외서리를 하든지
자는 새를 잡아서 손에 쥐어
팔닥이는 심장 따뜻한 체온을
손바닥에 느껴 보란 말이지
그게 세계의 깊이이니
선생 얼굴보다는
애인과 입을 맞추며
푸른 하늘 한 번 쳐다보고
행동 속에 녹아 버리든지
그래 屈伸自在굴신자재의 공기가 되어 푸르름이 되어
교실 창문을 흔들거나 長天장천에
넓고 푸르게 펼쳐져 있든지,
하여간 사람의 몰골이되
쓸데없는 사람이 되어라
莊子장자에 莫知無用之用막지무용지용이라
쓸데없는 것의 쓸데있음
적어도 쓸데없는 投身투신과도 같은
걸음걸이로 나아가거라
너 자신이되
내가 모든 사람이니
불가피한 사랑의 시작
불가피한 슬픔의 시작
두루 곤두박질하는 웃음의 시작
그리하여 네가 만져 본
꽃과 피와 나무와 물고기와 참외와 새와 애인과 푸른 하늘이
네 살에서 피어나고 피에서 헤엄치며
몸은 멍들고 숨결은 날아올라
사랑하는 거와 한몸으로 낳은 푸른 하늘로
세상 위에 밤낮 퍼져 있거라.
- 정 현종 시 ‘詩創作시창작 교실‘
사람이
풍경으로 피어날 때가 있다
앉아 있거나
차를 마시거나
잡담으로 시간에 이스트를 넣거나
그 어떤 때거나
사람이 풍경으로 피어날 때가 있다
그게 저 혼자 피는 풍경인지
내가 그리는 풍경인지
그건 잘 모르겠지만
사람이 풍경일 때처럼
행복한 때는 없다
- 정 현종 시 ‘사람이 풍경으로 피어나‘
산에서 내려온다 가금 들르는
식당 배나무 아래서
오늘도 맥주 한 잔.
안주는 오이 몇 쪽(거저)
오이와 된장 사이
술잔과 술병 주위에 모기.
한 병을 비우고 나서
나는 쟁반을 들고 내려간다.
맥주 마시는 것도 좋지만
다 먹은 쟁반을 들고 가는 것도 즐겁다.
비탈진 배나무밭이 폭우로 깊이 패여
작은 계곡들이 여럿 생겼다.
쟁반을 들고
그 패인 계곡을 한걸음에 건너가는 것도 좋다.
거인이 따로 없다.
일하는 아가씨가 저녁 먹다 말고
쟁반을 받으러 부지런히 온다.
그가 미안해하는 것도 좋다.
- 정 현종 시 ‘여름저녁2‘
거기 좀 가 있다가
어디 들러서
애들 있는 데 좀가 있다가......
이런 말들은 당장 쓸쓸하다.
어디도 쓸쓸하고
좀도,
있다가와 갔다가도
많이 쓸쓸하다.
가고 오고가 다
하늘처럼 벌판처럼
가이없이......
- 정 현종 시 ‘어디 들러서‘
[세상의 나무들]
[정현종 시 전집 2]문학과지성사.1999.
젊은 시절에요
아무것도 없었는데
걱정도 없었고
두려움도 없었어요.
친구들도 그렇고
선생님들도 그렇고
무엇보다도
마음이 있었어요.
그걸 내놓고
먹으라고
먹으라고 했어요.
참 행운이었어요.
- 정 현종 시 ‘옛날의 행운‘
슬프구나
작년에 입었던 옷 호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손수건
- 정 현종 시 ‘어떤 손수건‘
[한 꽃송이 / 문학과지성사]
이 시간이면
올 사람이 왔겠다 생각하니
슬프다.
갈 사람이 갔겠다 생각해도
슬플 것이다.
(왜 그런지)
그 모오든 완결이
슬프다.
- 정 현종 시 ‘슬프다’
방 안에서 무슨
향내가 나는 듯도 하여
둘러보다가
며칠 전에 핀 다섯 송이
흰 난(蘭) 가까이 코를 가져간다.
거기서 나는 것이엇는데
모르고 있었으니...
향기는 외로운 것이다.
모든 향기는 외로운 것이다.
아무도 모르게 풍기고 있다가,
소리 없이 자취 없어
자극하여
화심(花心)도 세계도 웅숭깊다가
알려지니, 더 외롭다-모든
남모르는 향기에
꽃이든 마음이든
향기의 외로움이여
- 정 현종 시 ‘향기의 외로움‘
[견딜 수 없네 / 시와시학사]
새벽빛을 보고 싶어
불을 켜지 않고
지켜보고 있다
새벽빛에 젖어들고 싶어
한없이 젖어들고 싶어...
푸르른 몸이여
여명의 마음이여
- 정 현종 시 ‘새벽빛‘
* 제1회 미당문학상 수상작품집 / 중앙일보, 문예중앙
1
어떤 어조는
희망이고 기쁨이고
어떤 어조는
절망이다.
말의 내용보다 중요한
어조여
2
우쭐거리는 어떤
시인들도
그 어조를 보면 금방
진짠지 가짠지 알 수 있느니.
- 정 현종 시 ‘어조’
* 2004년 좋은 시, '삶과 꿈'간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 정 현종 시 ‘섬 ’
하루여, 그대 시간의 작은 그릇이
아무리 일들로 가득차 덜그럭거린다 해도
신성한 시간이여, 그대는 가혹하다
우리는 그대의 빈 그릇을
무엇으로든지 채워야 하느니,
우리가 죽음으로 그대를 배부르게 할 때까지
죽음이 혹은 그대를 더 배고프게 할 때까지
신성한 시간이여
간지럽고 육중한 그대의 손길.
나는 오늘 낮의 고비를 넘어가다가
낮술 마신 그 이쁜 녀석을 보았다
거울인 내 얼굴에 비친 그대 시간의 얼굴
시간이여, 취하지 않으면 흘러가지 못하는 그대,
낮의 꼭대기에 있는 태양처럼
비로소 낮의 꼭대기에 올라가 붉고 뜨겁게
취해서 나부끼는 그대의 얼굴은
오오 내 가슴을 메어지게 했고
내 골수의 모든 마디들을 시큰하게 했다
낮술에 붉어진
아, 새로 칠한 뼁기처럼 빛나는 얼굴,
밤에는 깊은 꿈을 꾸고
낮에는 빨리 취하는 낮술을 마시리라
그대, 취하지 않으면 흘러가지 못하는 시간이여.
- 정 현종 시 ‘낮술’
싹이 나올 때는
보는 것마다 신기한 어린애의
눈빛으로도 모자라는
기쁨의 광채, 경이의 폭죽이다가,
연초록 잎사귀의 청춘이
물 불 안 가리듯 이 바람 저 바람에
나부껴
가지에 앉은 새들의
다리들도 간지르다가,
여름 해 아래 짙게 발라 보는
40대 후반의 여자이다가,
벌써 가을인가, 잎 지자
넘치던 여름잠에서 깨어
가을 바람과 함께 깨어
말없는 시간과 함께 깨어
제 속에서 눈 뜨는 나무들
눈 덮인 산의 겨울 겨울 나무여
환히 보이는 가난한 마음이여
- 정현종 시 ‘나무의 사계四季‘
* 시집: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세월은 가고
세상은 더 헐벗으니
나는 노래를 불러야지
새들이 아직 하늘을 날 때
아이들은 자라고
어른들은 늙어가니
나는 노래를 불러야지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동안
무슨 터질 듯한 立場입장이 있겠느냐
항상 빗나가는 구실
무슨 거창한 목표가 있겠느냐
나는 그냥 노래를 부를 뿐
사람들이 서로 미워하는 동안
나그네 흐를 길은
이런 거지 저런 거지 같이 가는 길
어느 길목이나 나무들은 서서
바람의 길잡이가 되고 있는데
나는 노래를 불러야지
사람들이 乞神걸신을 섬기는 동안
하늘의 눈동자도 늘 보이고
땅의 눈동자도 보이니
나는 내 노래를 불러야지
우리가 여기 살고 있는 동안
-정현종 시 ‘가객(歌客)‘
* 시집: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이땅 위를 걸어가는 건
물 위를 걸어가는 일
그러나 기적은 쉽지 않은 일
피 묻은 날개도
미소하는 날개도 없으니
기적은 쉽지 않은 일.
물 위를 걷는 건 어려운 일
공기空氣의 모습으로 걸어가는 건
쉽지 않은 일
게다가 물귀신들,
물 밑으로 발 끌어내리는,
쥐뿔로 발바닥을 받으며
정사情死를 타진하는
각계各界 물귀신들!
우리가 각자에 대하여
물귀신이라면?
(그런 건 생각하기도 싫으시다면
그건 좋은 징조)
위 아래가 다 무거울수록
그래도 물 위를 가기는 걸어가야지
기적이 쉽지 않지만
공기를 물 먹이는 일도 어려운 일!
- 정 현종 시 ‘정들면 지옥이지 2‘
나는 너희가 체현體現하고 있는 저 오묘한
뜻을 알지만 나는 짐짓 너희를 외면한다
왜냐하면 나는
안팎이 같은 너희보다
(너희의 이름은 안팎이 같다는 뜻이거니와)
안팎이 다른 나를 더 사랑하니까
너와 나는 그 동안
은유隱喩 속에서 한몸이었으나
실은 나는 비의秘意인 너희를 해독하는
기쁨에 취해
그런 주정뱅이의 자로 세상을 재어온지라
나는 아마 취중득도醉中得道했는지
인제는 전혀 구별이 안 가느니-
누가 거지고
누가 광인인지
(구걸이든 미친 짓이든
한산寒山이나 프란체스코
덤으로 그 팔촌八寸 그림자들쯤이면
필경 우주의 숨통이려니와)
- 정현종 시 ‘거지와 狂人‘
* 시집: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시로서 무엇을 사랑할 수 있고
시로서 무엇을 슬퍼할 수 있으랴
무엇을 얻을 수 있고 시로서
무엇을 버릴 수 있으며
혹은 세울 수 있고
허물어뜨릴 수 있으랴
죽음으로 죽음을 사랑할 수없고
삶으로 삶을 사랑할 수 없고
슬픔으로 슬픔을 슬퍼 못하고
시로 시를 사랑 못한다면
시로서 무엇을 사랑할 수 있으랴
보아라 깊은 밤에 내린 눈
아무도 본 사람이 없다
아무 발자국도 없다
아 저 혼자 고요하고 맑고
저 혼자 아름답다.
- 정현종 시 ‘詩, 부질없는 詩 ‘
* 시집:고통의 축제
물로 되어 있는 바다
물로 되어 있는 구름
물로 되어 있는 사랑
건너가는 젖은 목소리
건너오는 젖은 목소리
우리는 늘 안 보이는 것에 미쳐
病을 따라가고 있었고
밤의 살을 만지며
물에 젖어 물에 젖어
물을 따라가고 있었고
눈에 불을 달고 떠돌게 하는
물의 香氣
불을 달고 흐르는
원수인 물의 향기여
- 정현종 시 ‘술 노래‘
* 시집:고통의祝祭
무얼 건졌지?
건지긴 뭘,
인생이 한 그릇 국인가,
나는 시금치와 배추와
아욱과 근대 같은 걸 잘 건지는 바이지만,
술 만든 사람들한테 축복 있으라
(나쁜 술 만드는 사람들한테는 물론 저주 있으라)
세상의 물결에 떠 저도
물결이라며 흘러가는 술병을
건지고,
허공 허공 피어나는
술잔들을, 술잔을 낚는 어부처럼
잘 건지는 바이지만,
또 酒色은 가끔 神通이라,
제물에 빠져 연꽃 파는 여자도 건지고
내물에 빠져 물불 허덕이는 나도 건지는 바-
가만있자 브르통이란 사람은
끝없는 始作으로 시간을 건지려 하면서
초현실주의 삼십 년에 여자 셋 건지고
네루다는 여자 여럿, 시 여럿,
세상 모든 걸 건지고,
로르카는 同性 두엇, 피와 죽음
그리고 메아리를 건지고,
정현종은 제 눈 속의 仙女와
스친 여자
(놓친 기차는 모두 낙원으로 갔다)
삼천서른세 명의 빛과 그리고
그림자가 저 들꽃과 화장품과 먼지와 한몸으로
폭풍인 듯, 지평선인 듯
너울거리는 거길 헤매고 있는데,
실로 나무 몇 그루, 새 몇 마리
노래 몇 자락 건지긴 건졌는지-
도망가는 시늉으로 낯술 한잔 하고
끼적거려놓은 걸 다시 읽어보노니,
우리를 건지는 건 예술과 사랑이라,
꿈이여, 태어나기만 하는
만물의 길이여.
- 정현종 시 ‘무얼 건졌지? ‘
* 시집:1995년도 현대문학수상시집
-成鎭兄께
너도 알거라 만
참 변하지 않는 거 있지
그분의 가는 길의
有情한 바람
일종의 醉氣를.
어느 선술집에서거나
그댁 犬公도 웃으며 좋아하고
하나님도 싱긋 웃고 지나가시고
더 말할꺼 없는
너도 다 아는 일.
또 알거라 만,
너는 보았지
가장 즐거운 醉中의
그분의 쓸쓸한 웃음
내가 들어 본 일이 있는
氣笛소리 같은
그분의 상말씀을.
원수같은 그 情感은
한없이 어디서 오고 있을까
집도 흘러가고 빛도 흘허가게 하는
다 아는 情感은......
만나 보면 늘 旅路
때때로
떠도는 者들을 업어주며 가시는
센티멘탈 자아니
참 변하지 않는
원수같은 그 情感
일종의 醉氣
가장 즐거운 醉中의
그분의 쓸쓸한 웃음을
너도 다 알거라 만.
- 정현종 시 ‘센티멘탈 자아니‘
* 시집:고통의 祝祭
너를 보면 취한다
피와 기대에 취하고
性的 향기에 그 아지랭이에
취하고, 참 희한한 때도 있느니
세상 걱정이 없다
너는 누구일까
너는 바람을 넣는다
땅과 그 위의 길들에 바람을 넣고
심장과 발바닥에
그게 헤쳐 가는 시간에
바람을 넣는다
너는 넘치는 현재
너는 누구일까
(제도의 公認으로 무죄를 비는 거야말로 외설이지
관습에 기댄 자기기만이야말로 외설이지)
저 자연을 보렴
저 찰랑대는 防心을 보렴
INNOCENCE,
너는 넘치는 현재
너는 누구일까
- 정현종 시 ‘너는 누구일까‘
* 시집: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벚꽃잎 내려 덮인 길을
걸어간다-이건 걸어가는 게 아니다
이건 떠가는 것이다
나는 뜬다, 아득한 정신,
이런 , 나는 뜬다,
뜨고 또 뜬다.
꽃잎들,
땅 위에 깔린 하늘,
벌써 땅은 떠 있다
(땅을 띄우는, 오 꽃잎들!)
꿈결인가
꽃잎은 지고
땅은 떠오른다
지는 꽃잎마다
하늘거리며 떠오른 땅
꿈결인가
꽃잎들...
- 정현종 시 ‘꽃 잎 ‘
* 시집:`95 현대문학상 수상시집
이 세상 사람들 모두 잠들고
어둠 속에 갇혀서 꿈조차 잠이 들 때
홀로 일어난 새벽을 두려워 말고
별을 보고 걸어가는 사람이 되라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라.
겨울밤은 깊어서 눈만 내리어
돌아갈 길 없는 오늘 눈 오는 밤도
하루의 일을 끝낸 작업장 부근
촛불도 꺼져가는 어둔 방에서
슬픔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라.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라.
절망도 없는 이 절망의 세상
슬픔도 없는 이 슬픔의 세상
사랑하며 살아가면 봄눈이 온다.
눈 맞으며 기다리던 기다림 만나
눈 맞으며 그리웁던 그리움 만나
얼씨구나 부둥켜안고 웃어보아라.
절씨구나 뺨 부비며 울어보아라.
별을 보고 걸어가는 사람이 되어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어
봄눈 내리는 보리밭길 걷는 자들은
누구든지 달려와서 가슴 가득히
꿈을 받아라.
꿈을 받아라.
- 정현종 시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라‘
한없이 기다리고
만나지 못한다.
기다림조차 남의 것이 되고
비로소 그대의 것이 된다.
시간도 잠도 그대까지도
오직 뜨거운 병으로 흔들린 뒤
기나긴 상처의 밝은 눈을 뜨고
다시 길을 떠난다.
바람은 아주 약한 불의
심장에 기름을 부어 주지만
어떤 살아 있는 불꽃이 그러나
깊은 바람 소리를 들을까
그대 힘써 걸어가는 길이
한 어둠을 쓰러뜨리는 어둠이고
한 슬픔을 쓰러뜨리는 슬픔인들
찬란해라 살이 보이는 시간의 옷은
- 정 현종 시 ‘상처’
나는 본다
시집 간 여자들
어른 된 여자들 속에
숨어 있는 처녀
신출귀몰
남의 얼굴엔 듯 지나가는
그리움과도 같은 꽃
열 네 살의 소녀
열 일곱 살 처녀를
시집 간 열 두 살
어른 된 열 일곱
남의 얼굴엔 듯 지나가는
오 열린 향수
그리움과도 같은 꽃이여
- 정현종 ‘열린 향수’
* 시집: 가객
** 정현종(鄭玄宗) 1939년 서울 출생
1964년 연세대학교 철학과 졸업, 1965년 {현대문학}에 <화음(和音)>, <여름과 겨울의 노래> 등이 추천되어 등단
1965년 '60년대 사화집' 동인
1966년 '사계' 동인
1992년 제4회 이산문학상 수상
1995년 제40회 현대문학상 수상
현재 연세대학교 국문과 교수
- 오늘시집
사물(事物)의 꿈(1972),
고통의 축제(1974),
나는 별 아저씨(1978),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1984),
거지와 광인(1985),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1989),
꽃 한송이(1992),
세상의 나무들(1995) 등
시론집 : 숨과 꿈 (1982), 시의 이해 (1983), 관심과 시각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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