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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그 쓸쓸한 영혼

보고, 듣고, 말하는 모든 것 - 박 정대 시.

뭔가,, 그리고 싶다.








쉽게 쓰여진 시는 없다
아우슈비츠가 사라졌어도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에
모두 다 제 속에 거대한 감옥을 세우고 사느니
서정이 사라진 시대에 서정시를 쓴다는 것은 너무나 어
렵다
지성이 감성을 데불고 어디로 가느냐
묻지 마라, 지성도 감성도 명왕성도 사라진 시대에
또 다른 행성에서는 샘물 같은 지성이 솟고
불꽃같은 감성이 피어나느니
그대 눈에는 그대 가슴팍에는
그저 쉽게 쓰여진 시만 펄럭이며 나부끼고 있구나
인류여, 나의 이름을 묻지 마라
나는 그대에게 다가간 적 없고
그대 입술에 사랑을 고백한 적 없나니
적이 없어서 사랑을 사랑할 수 없는 나에게
사랑이라 불리는 그대여
더 이상 인간의 사랑을 발설하지 말아 다오
고독에 메마른 나무들과 손잡고 걸어가는 오후의 거리
에서
나는 나의 고독과도 여전히 화해하지 못하나니
그대의 사랑이 끝이 없어서 나는 하냥 외로웠을 뿐
하냥내 외로워 나는 그대 사랑을 모독했을 뿐
  인간의 말이여, 인간의 말로 뒤덮인 한 장의 발판이여
세계여
나는 아무도 모르는 슬픔이어서
인간 이전의 시간이어서
나는 여전히 시 빡의 아쿠스메트르*
그대가 나를 모르듯 나는 여전히 그대를 모른다
바람이 불어오고 그칠 때마다 아무리 고개를 저어 봐도
시여, 그대는 언제 나에게로 오는가
나에겐 아직 단 한 편의 시도 없는데



* 미셸 시옹에 의하면, '아쿠스메트르 Acousm^etre'는 영화의 화면 밖에 음향적으로만 존재하면서 전지적 힘을 발휘하는 존재
폴 발레리는 「해변의 묘지」에서 바람이 분다, 살아 봐야겠다고 말한다. 그 구절을 제목 삼아 두루두루, 두루마리처럼 풀어서 다시 변주해 봤다.


- 박 정대 시 ‘바람이 분다, 살아 봐야겠다 ‘
[라흐 뒤 프루콩 드 네주 말하자면 눈송이의 예술], 민음사, 2021.






貞陵에는 별이 많다, 아직
재기 발랄한 그대 바람 부는 날에는 정릉으로 오지 말라
산비탈에 달라붙어 있는 아픈 세월의 부스럼 같은 월세방들
바람 부는 날이면 위험스럽게 허공에 둥둥 떠다니고
아카시아 숲에서 자란 별빛들이 밤하늘의 가시로 돋쳐 있다
아무리 빠른 劍도 자신의 슬픔은 베지 못하는 법, 정릉의
개들이 발로 차버린 찌그러진 양재기 같은 밤하늘에선
무더기로 슬픔이 쏟아진다, 슬픔에 면역성이 없는 그대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는 날에는 정릉으로 오지 말라
슬픔은, 아주 전염성이 강한 인생이라는 질병을 몰고 오는 거
각성은 가끔 투명한 소주잔 속에 서 일어나는 거, 거리에서
마신 막소주가 그대의 食道를 거쳐 內臟의 진실에 닿을 때까지
푸르게 펼쳐져 있는 밤의 페이지마다 슬픔의 脚註를 달며
默秘권을 연마하라, 이곳은
쓸쓸하고도 향기로운 사랑의 바이러스들이 날아다니는
희망의 고산지대, 이곳은 나뭇잎마저 엽서가 되는
바람의 우체국, 별들의 펜 끝이 밤새도록 그대를 찌를까 두렵다
발랄하고 경쾌한 行步의 그대여, 맨발의
폭설이 떨어지는 날에는 정릉으로 오지 말라
정릉의 눈발 속에서 적수공권의 그대 속수무책으로 하얗게 얻어맞나니
非命과 橫死는 가끔 낯익은 언덕을 오르지 못하여 일어나는 거
그대의 아무리 빠른 발도 정릉의 가파른 언덕에선 미끄러지기 십상
오호, 진실로 바라노니 그대여
바람 부는 날에는 정릉으로 오지 말라
가슴 아픈 사람들 기침으로 바람 부는 날이면
은하수들 스스로 베틀을 돌려
貞操를 무덤처럼 가리나니, 성의 북쪽
貞陵에는 별이 많다


- 박 정대 시 ‘ 貞陵에는 별이 많다 ‘
* [단편들], 세계사, 1997.






한때 모든 노래는 사랑이었다
한때 모든 노래는 혁명이었다

모든 노래는 사랑에서 발원하여 혁명으로 가는 급행열
차였다

반짝이는 차창의 불빛조차도 일종의 혁명을 닮아 있었다

나는 그리움의 힘으로 마시고
설움의 목울대로 노래하였으나

그 어떤 것도 세상을 위한 복무는 아니었다

내가 떠나온 그 무엇을 위해서도 복무하지 않았다

나는 오로지 나를 위해 복무했으니
오 미천하고 비루했던 사랑이여

나는 이제 이 별에서의 혁명을 꿈꾸지  않는다
나의 이제 이 별에서의 이별을 생각하지 않는다

삶은 다른 곳에 있고
나는 여전히 이 행성의 삶에 속하지 않으니

나는 이제 내 작은 숲으로 가야겠다
그곳에서 빛의 음악을 들으며
햇살의 은빛 파도를 서핑하려니

이것은 눈 속을 여행하는 오랑캐의 말
그것은 어떤 저항의 멜랑콜리
저것은 끊임없이 이 거리로 착륙해 오는 차갑고도 뜨거
운 불멸의 반가사유


- 박 정대 시 ‘안녕, 낭만적으로 인사하고 우리는 고전적으로 헤어진다 ‘
* [눈 속을 여행하는 오랑캐의 말], 달아실, 2023.




처음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마 없었을 것이다, 없음을 전제로 하여 별빛들이 천천히 돋아났을 것이다

별빛 사이로 시간의 말이 지나가면서 발자국이 생겨났을 것이다, 그 발자국을 우리는 행성이라고 불렀다

까마귀들이 밤하늘에서 별빛들을 물고 지상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우리는 그것을 음악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그대가 처음부터 음악이라고 불린 것은 아니었다, 그대는 처음에는 빛의 한 부분이었고 소리 없는 풍경이었을 것이다

소리 없는 풍경이 그림자를 이루는 세계에는 나는 오래도록 그대를 꿈꾸었을 것이다, 꿈속의 그대가 새파란 나뭇잎으로 돋아난 것은 수백만 년 후의 일일 것이다

시간들이 섞이면 하나의 단단한 물체가 된다, 그대는 내가 꾼 꿈들이 만들어낸 단단한 결정체였다

시간들이 흩어지면 하늘에서는 새들이 날고 새들은 영혼의 시뮬라크르였다

영혼은 그렇게 복제되어 영원의 하늘을 난다, 고독으로 충만한 세계에서 나의 그림자를 먹고 자라는 별빛들이여

오늘 나는 그대를 나의 시뮬라르크라 부른다, 사막의 긴 언덕을 지나온 나는 시간의 모래밭을 통과해 나의 시뮬라르크, 나의 오아시스에 닿는다

그것이 설령 하나의 환각일지라도 내 영혼의 복제품일지라도 나는 그 꿈에 취해 평생의 사막을 대상처럼 횡단하노니

그대여 내 꿈의 시뮬라르크여, 오늘은 내게로 와서 고단한 나의 발에 입 맞추지 않으련



- 박 정대 시 ‘나의 시뮬라크르 ‘






미스터 선샤인의 말투로 말하겠소

햇살 좋은 아침이면 앞마당으로 나가 빨래를 너오

그곳에 돌배나무, 목련, 배롱나무, 자두나무, 살구나무, 사과나무, 생강나무, 이팝나무, 자작나무들을 심었소

자작나무에는 따로 이름을 붙여주었소

가난하고 아름다운 사냥꾼의 딸, 꽃 피는 봄이 오면, 자작나무 우체국, 레아 세이두, 장만옥, 톰 웨이츠, 김광석, 빅토르 최, 칼 마르크스, 체 게바라, 아무르, 아르디 백작, 상처 입은 용, 짐 자무시, 짐 모리슨, 닉 케이브, 탕웨이, 아르튀르

눈 속을 여행하는 오랑캐의 말들, 이들은 가난하고 아름다운 나의 열혈동지들이오

돌배나무는 대낮에도 주먹만 한 별들을 허공에 띄우오

그 여름 폭풍은 내 마음속에 있었소

폭풍우 치는 낮과 밤을 동무들과 함께 어깨동무하고 견디오

폭풍우 치는 한 계절이 지나면 장난처럼 고요하고 맑은 저녁이 내 작은 창가로 오오

그리고 기적처럼, 등잔불 피어오르는 고요한 밤의 생이 시작되오

나는 늘 등외에 있는 삶이었고 세상의 통계에 잡히지 않는 삶을 꿈꾸었소

심지어 때때로 나는 태어나지 않았을 때도 많았소

오랑캐의 말을 듣는 누군가의 귀처럼 푸른 이파리들 돋아나는 아침이오

침묵의 함성이 하나의 행성이 되는 시간이 오고 있소

지나가는 바람이 배롱낭구의 매끄럽고 단단한 살결에 입 맞추는 아침이오

미스터 선샤인이 빨래를 널고 있는 무한의 아침이오


- 박 정대 시 ‘ 자작나무 ’
* ‘눈 속을 여행하는 오랑캐의 말’ 달아실, 2023.





간밤의 비에 앞마당 풀들이 자라 아침나절 김매기 하다 보니 우체부 아저씨 반갑게 인사를 하며 작은 소포 하나를 건네네

내용품명을 보니 기타 담배라고 적혀 있고 보낸 분은 강원도 춘천시 춘천로 257, 2층 달아실출판사

아, 제영이가 보낸 거로구나

순간, 옛날 문인들이 모여들던 서울 명동거리의 다방 같았던, 달맞이꽃 피어나는 다락방 같았던 제영의 문장수선소가 떠올랐던 게야

그런데 도대체 기타 담배는 뭘까

기타로 만든 담배일까, 담배로 만든 기타일까

나는 마냥 궁금해하며 여전히 소포를 뜯지 않네

끝내 뜯어보지 않을 거야, 내가 기타도 음악도 담배도 없는 절망에 다다르기 전까진 절대 뜯어보지 않을 거야

저 소포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이미 나는 알고 있지

그곳엔 비바람 몰아치던 무수한 날들의 사랑과 번민과 연기처럼 날아간 푸른 욕망들

기타 담배로 만들어진 시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불꽃의 시


- 박 정대 시 ‘ 기타 담배로 만든 단 한 편의 시 ‘





난 눈 내리는 아프리카에 가고 싶어, 죽을 거니까 떠나야만 해, 난 영원히 쓰레기통을 뒤지고 싶어, 더 이상 단어들이란 없어, 더 이상 할 말도 없어, 말을 가르치는 걸 중단해버려야 해, 학교를 없애버리고 묘지를 늘려야 해, 어쨌든 일 년이나 백 년이나 마찬가지야, 그런 게 새들을 노래하게 하지, 그런 게 새들을 지저귀게 해, 로베르토 주코는 고장 난 공중전화기를 들고 이렇게 말하면서 떠나지,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자살한 주코의 이야기를 유작으로 남긴 작가가 있었지, 나도 눈 내리는 아프리카에 가고 싶어, 죽을 거니까 아무튼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 난 영원히 대자연의 품속을 헤맬 테니까, 더 이상 이런 시는 필요 없어, 더 이상 할 말도 없어, 말을 가르치고 시를 가르치는 걸 중단해버려야 해, 학교를 없애고 교회와 국가를 없애고 인간이란 종족 자체를 없애야 해, 세상은 묘지로 뒤덮이겠지, 그 묘지 위를 나는 새들은 새로운 종족을 퍼트릴 거야, 그런 게 이. 세상에 유일한 유작으로 남아야 해, 우주로 날아가 영영 되돌아오지 않는 우주선의 고독도 언젠가는 이곳에 당도할 거야, 우리는 그것을 우리 모두의 슬프고도 아름다운 유작이라고 하자, 슬프고도 아름다운 그대여, 나는 이제 그대의 이름을 잊었고, 눈 내리는 아프리카에 가고 싶어


- 박 정대 시 ’ 아주 멀리 도시 속으로 말을 타고 달아나기‘
  * 체 게바라 만세, 달아실, 2023





  거리에는 부드러운 바람이 불었다

  나는 볼보 트럭을 타고 아주 먼 곳에서 달려와 또 다른 먼 곳으로 가고 있었다

  우주로 통하는 공중전화 부스 앞에 잠시 그대는 멈추어 서 있었다

  오른손엔 필터 없는 골루아즈 담뱃갑이 들려 있었고 왼손 엄지와 검지는 열린 담뱃갑 사이로 보이는 담배에 닿아 있었다

  와이셔츠 왼쪽 가슴께에 달린 주머니엔 고독이 가득하였다

  그 주머니 안쪽에서는 아마 그대 심장이 뛰고 있었을 것이다

  얇은 티셔츠 위로 보이던 목선과 턱선, 다문 입의 침묵이 얼굴의 배후로 자리 잡고 있었다

  그때 정면을 응시하던 눈동자는 무엇을 보고 있었는가

  풍성한 머리카락보다 더 많이 돋아나 있던 상념들 나는 볼보 트럭의 내면에 앉아 먼 곳으로 가다가 목화밭의 고독 속에 앉아 있는 그대를 보았다

  공중전화 부스의 소화기 너머론 무한을 향해 고독의 목화밭이 펼쳐 저 있었다

  그때 나는 어딘지도 모를 아주 먼 곳을 향해 가고 있었는데 그대의 이름을 중얼거렸는지도 모른다

  녹색의 우주에 고요히 수 놓인 그대 이름을 그렇게 나직이 중얼거렸는지도 모른다

  그때 거리에는 부드러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

  그대의 등 뒤에는 우주로 통하는 공중전화 부스가 있었고 수화기 너머론 목화밭의 고독이 무한을 향해 펼쳐져 있었다

  담배를 피워 물기 직전의 그대

  목화밭의 고독 속에서

  목화밭의 고독 속에서




-박 정대 시 ‘ 감정의 고독 ‘
   * 체 게바라 만세, 달아실, 2023






레게 머리를 출렁이며 공을 차요
아마도 그게 밥 말리 인생의 정점이었을 거예요
문득 떠오르는 얼굴이 있어요
그 사람과 함께 평생을 보냈다면
내 인생은 어땠을까
가끔은 그런 상상을 해요
아직 내가 지구에 살고 있다는 게 신기해요
내가 알던 많은 사람들은 이미 다른 행성으로 이주했지요
그 이후엔 소식들이 없네요
가끔 혼자 술을 마시는 밤이면
문득문득 그리운 사람들이 떠올라요
그립다 말을 할까
하니 그리워지는 그런 사람들 말이에요
나의 음악은 울음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밥 말리는 말했던가요
나의 음악은 아직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나의 울음은 이미 끝나버렸네요, 율리아나
아부데바의 피아노 연주곡을 들어요
다른 삶을 살고 싶어요
이곳이 아닌 다른 행성으로 이주하고 싶어요
아무도 아는 이 없는 낯선 곳에서의 삶
그림자가 끝난 곳에서의 새로운 삶
레게 머리를 출렁이며 공을 차고 싶어요
스프링으로 묶인 누런 갱지 노트에 시를 쓰며
이동 천막에서 매일매일 다른 삶을 살고 싶어요
바람이 불 때마다 출렁이며 새로 시작되는 삶
바람이 불지 않아도 여전히 펄럭이는
중력과 무관한 삶
나를 따라다니던 그림자를
이젠 조용히 여기에 두고 떠나요
내가 좋아하는
고독의 돌멩이 하나만 가방에 넣고
다른 삶으로 가요, 그래요
다시 날아오르진 못할 거예요
뭐 그래도
안녕

  
- 박 정대 시 ‘다른 삶을 살고 싶어요 ‘
* [체 게바라 만세], 달아실, 2023.




오슬로의 저녁거리를 어슬렁거리다 보면 만나게 되지 오슬로의 저녁 불빛들 뾰족한 지붕을 가진 집들을 지나면 바이킹의 배들과 마차가 나타나기도 하네 오슬로는 밤거리마다 술집들을 몰래 숨기고 있다네 두꺼운 옷들을 입고 사는 사람들의 깊숙한 심장 같은 술집을 비와 눈이 많이 내리는 이 도시의 지붕들은 그대의 아름다운 구두굽처럼 모두 뾰족하지 그 지붕 아랫사람들이 산다.. 다양한 피오르가 존재하는 곳 강원도의 탄광지대 같은 협곡을 지나면 나타나는 피오르 거친 자연은 인간 앞에 수줍게 그들의 모습을 보인다네 대자연은 결국 확장된 인간의 상상력 사람들은 배를 타고 피오르를 관광하고 풍경 속엔 갈매기들이 날고 하늘엔 구름이 지나지 물론 규모는 조금 다르지만 송네 피오르의 장관은 강원도 정선의 가수리 같다네 배는 여전히 앞으로 나아가고 배가 고파진 사람들은 인간의 저녁으로 모여들지 오슬로는 북유럽의 정선 송네 피 오르는 노르웨이의 가수리 오슬로에 저녁이 오면 깊숙이 숨겨진 술집을 찾아 술이나 마시러 가야겠네 노르웨이의 숲은 항상 청춘의 외곽에 있으므로 오래된 숲과 강물의 향기를 맡으러 나는 오슬로로 가야겠네 정선 가수리로 가야겠네


- 박 정대 시 ‘ 정선, 오슬로, 가수리 ‘
   * 체 게바라 만세, 달아실, 2023





  나는 걸어가면서 파리 대평원을 흡혈하였다, 파리의 하수구는 그때 생겨났다

  걸어가는 풍경들의 목덜미에 이빨을 박을 때마다 복사꽃 복사꽃이 피었다, 페르 라세즈, 몽파르나스, 몽마르트르

  생 라자르 역은 중국식당 옆에 있었다

  중국식당은 작은 타박 옆에 타박은 복숭아나무 옆에 있었다

  복사꽃이 피어날 때 설거지를 시작하여 복사꽃이 떨어질 때 설거지를 마쳤다

  지상에 놓인 수만 개의 혈관을 따라 나는 그대 속으로 잠열潛列하였다

  담배 연기는 내 영혼의 복사꽃

  혁명은 한 마리의 감정

  파리 대평원의 밤하늘엔 잠열潛列 같은 초저녁 별들이 총총

  밤하늘의 입장에서 보자면 파리는 별들이 흐르는 인간의 아름다운 하수구였다

  전직 천사의 입장에서 볼 때 파리라는 도시는 이렇게 발명되었다



- 박 정대 시 ‘ 혁명은 한 마리의 감정 ‘
  * 체 게바라 만세, 달아실, 2023





세상이 거대한 관공서 같다면 관공서 문을 열고 햇살 환한 거리로, 광장으로 담배 피우러 나가듯 키르기스스탄으로 가자

그곳은 고독이 눈발로 흩날리는 곳

관공서의 문을 열면 거기는 이식쿨 호수 뜨거운 가슴 들 시 모여 있는 물의 광장

창문을 열고 키르기스스탄의 골짜기로 떨어지는 눈발굽의 소리를 듣자

바람이 몰고 가는 세상의 음원들 물음표 같은 우리 귓바퀴에 한 짐 가득 모아두고 기나긴 겨울밤이면 시래기 된장국 끓이듯 조금씩 끓어오르는 내면의 음원을 듣자

세상에서 내가 발견한 음원의 원소주기율표를 그리다 보면 새들이 몰려와 마음 가득 폐곡선을 그리며 지나가리니 고독은 한 양푼의 비빔밥

고독을 비벼 먹으며 한겨울을 나자

이상 기후의 날들 속에서도 나의 담배 연기는 오롯이 검은 밤의 비파를 연주하리니 어둠이 무너지며 쌓이는 인간의 골짜기마다 음악은 함박눈의 증거로 남으리니

침묵이 쟁취하는 위대한 고독

고독이 앞장서는 위대한 사랑

침묵이 쟁취하고 고독이 앞장서는 사랑의 최전선에 삶을 두자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 냉혹과 멸시의 땅에 한 줄기 담배 연기를 깃발처럼 펄럭이며 한 나라를 세우면 그 나라의 밤을 온통 덮으며 달려오는 순결의 눈발굽 소리 들리리니

여기는 서푼짜리 고독의 땅

고독의 별 아래 날마다 새로운 음원이 탄생하는 땅



- 박 정대 시 ‘ 서푼짜리 시‘
《체 게바라 만세》(달아실, 2023)






긴 방파제를 따라 파도가 치지

파도에 밀려 저녁이 오면 나는 이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방송을 시작해

당신은 듣고 있을까, 오로지 당신을 위해, 긴긴 말레콘을 따라가며 부서지는 파도치는 말레콘 해적 방송

영화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을 보면 「찬찬」이라는 음악과 함께 파도치는 말레콘의 풍경이 나오지

그런 말레콘을 따라 오래도록 당신과 함께 걷고 싶었어

아바나의 밤하늘엔 노란색 별들이 떠 있고 우리는 가난한 건물들 사이를 아무 걱정도 없이 걸어가겠지

베로니카, 삶이 가난한 것은 건물들 때문이 아니야

우리는 지금 저녁의 한적한 카페에 들어가 한 잔의 술을 마실 수도 있고 말레콘에 부서지는 파도의 음악소리를 들을 수도 있잖아

거리에는 가난한 악사들이 그들의 영혼을 연주하지

선풍기가 없어도 밤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우리의 가슴을 식혀 줘, 겨울에도 우리는 춥지 않아, 베로니카, 당신의 따스한 가슴에 묻혀 잠들 수 있으니까

저녁이 오면 낡고 오래된 말레콘에 앉아서 지나간 혁명이 찬란했다고 말하지는 말자, 삶은 결국 지나갈 테니까, 지나간 삶은 그래서 찬란할 테니까

베로니카, 아직 따스한 내 손을 잡아 줘, 당신 안에서 찬란하게 빛나던 나를, 나의 혁명을 추억이라고 말하지 말아 줘

아직 내 마음 말레콘에는 파도가 치고 별빛이 빛나고, 당신과 나는 작은 손전등 하나를 들고도 우리의 낡은 침낭 속으로 스며들 수 있으니까

침낭 속에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것을 볼 수 있으니까

그러니까 베로니카, 우리는 세상을 버리고 그냥 우리에게 망명해 버리자

나는 지금부터 당신의 말레콘이야

카리브해의 파도를 음악으로 바꿔 밤새도록 당신을 위한 단 하나의 해적 방송을 할 테야

당신만 들어주면 돼, 그러면 돼, 나는 밤새도록 당신의 귓가에서 파도치며 출렁일 테니 당신만이 꿈의 주파수로 날 들어주면 돼

베로니카 그러니까 기억해야 해, 꿈속에서도 잊으면 안 돼

사랑해, 그래 여기는 파도치는 말레콘 해적 방송이야


- 박 정대 시 ‘해적 방송 ‘
* ‘구름과 집 사이를 걸었다’ (문학동네, 2012)
  




카페 아바나에 가면 붉은 휘장이 쳐진 무대엔 여섯 명의 악사들이 키사스, 키사스, 키사스를 연주하고 무대의 오른쪽 벽엔 체 게바라의 초상이 걸려 있지 마가목으로 만든 테이블엔 루머가 있고 비파나무 의자엔 장 드 파가 앉아 있지 피아노 앞 테이블엔 욜이 홀로 앉아 무대를 바라보지 늙은 가수는 사랑을 노래하지만 우리는 말하지 사랑 같은 건 옛날에 다 했지 아마도, 아마도, 아마도, 우리는 그저 술 한잔 마시기 위해 카페 아바나에 들렀지 늙은 가수 뒤에선 그로쏘랑 루이가 춤을 추네 춤을 추며 말하네 노래 같은 건 옛날에 다 불렀지 카페 아바나에 가면 무대의 왼쪽 벽엔 희미한 가스등이 걸려 있고 야외 테이블엔 항갈망제에 취한 시코쿠가 앉아 중얼거리지 술 같은 건 옛날에 다 마셨지 카페 아바나에 가면 체리 핑크 맘보가 있고 주인장 초이는 카운터에 앉아 가끔씩 존다네 7번 테이블에 앉은 옥은 한 잔의 술을 마시며 말하지 오늘은 내 인생 최고의 날 졸기엔 인생이 너무 짧아 잠 같은 건 천년 전에 이미 다 잤지 카페 아바나는 영혼의 동지들이 모이는 곳 아마도 우리는 그저 술 한잔을 마시기 위해 그곳에 들렀지만 거기엔 인생의 친구들이 다 모여 있었지 무대 위 늙은 가수는 여전히 사랑을 노래하지만 우리는 말하지 사랑 같은 건 옛날에 다 했지


- 박 정대 시 ‘ 카페 아바나‘
  * ‘체 게바라 만세 ’ (달아실, 2023)
  




생강이란 김칫소의 일부분이 아니라
하나의 상징이다
일시적으론 맵지만 오래 씹을수록 단맛이 나는
생강을 향한, 생강을 생각하는 이의 열정이다
청춘에서 생강맛이 난다면 그것은 청춘이 인생을 잘 통과하고 있다는 투박하고도 아름다운 증거

청춘이란 생강을 씻을 수 있는 용기
입안의 생강을 뱉어 내지 않고 끝까지 맛볼 수 있는 모험심
때로는 스무 살 청년이 일흔 노인보다 당연히 더 젊어야 한다
생강을 먹고 오래도록 생각을 해야 사람은 늙지 않는다
평생 생강을 먹는 이는 생각이 늙지 않는다
행과 앙(1)의 아름다운 시니피앙 사이를 걸어본 자는 안다
생과 강 사이를 건너  본 자는 안다
아름다운 상념 속으로의 산책이 사람을 얼마나 건강하게 만드는지』

생각의 산책이 사라질 때
불안은 끊임없이 영혼을 잠식하고』
영혼은 무게를 상실한 채 먼지가 되어 간다

일흔이든 스무 살이든 인간의 가슴속에는
생강에 끌리는 마음
생강을 씹었을 때 느끼는 고통과 환희에 대한 감각
그것을 탐구하려는 열정이 있다
우리 모두는 가슴속에 잇는 우체국에 들려
한 박스의 생강을 신에게 택배로 보내야 한다
신으로부터 조만간 답신이 오리라
아름다운 영혼이여, 생강은 맛있다
그대의 생각은 여전히 참 맛있다

생강차가 끓고 잇다
인적이 끊긴 산골의 다락방이 눈에 덮여 갈 때
참매는 두 눈을 부릅뜨고 겨울의 한복판을 날고 있다
고립은 고독이 아니라 생강차의 여유이며
생강의 청춘을 지나온 자가 마시는 한잔의 휴식이다
눈발은 여전히 날리는데 광활한 생각의 영토에서
여전히 생강차는 끓고 있다

                  *
(!) 천운영의 『생강』 작가의 말을 읽다가 '시'를 본다

앵에서 항으로 이어지는 둥글고 어진 촉감이
시옷과 기억의 음가를 가지면서
사가사각한 소리와 상큼한 향기를 갖게 된다

나도 시가 쓰고 싶어졌다
이것이 생강의 시다


- 박 정대 시 ‘ 생강 ‘
[라흐 뒤 프루콩 드 네 주 말하자면 눈송이의 예술], 민음사, 2021.





적막한 새벽엔 연락할 사람도 함께 술잔을 기울일 사람도 없지

고독의 시간 침묵의 지대를 혼자 술을 마시며 횡단하지

아주 넓고 긴 여름밤, 혼자서 울어본 적 있는 사람은 타인의 눈물을 이해하지

우리 모두는 행복해질 권리, 음악을 들을 권리가 있지

삶에 의미가 없을 땐 삶에서 사라질 권리 또한 있는 거지

사람들은, 사람들의 욕망이란 참 웃기고도 위대하다

내가 타인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유일한 이유이기도 하지



- 박 정대 시 ‘ 삶의 권리 ‘
  * ‘모든 가능성의 거리 ’ (문예중앙시선, 2011)





취하지 않으면 돌아가지 못하리

돌아가기 위해 밤새 술을 마시지만
돌아가고 싶어도 이제는 돌아갈 곳이 없구나

돌아갈 곳은 이미 안갯속으로 사라져
그곳이 어디였는지 기억나지 않는 저녁

별빛 아래 모든 것이 이토록 황당했다니
구름 아래 모든 것이 이토록 고독했다니

별빛 아래 구름만이
더 깊은 어둠 속으로 흘러가리라

사월인데도 서늘한 바람이 불어
봉창문을 닫고 눈과 귀를 끄고 홀로 술을 마시는 저녁

술 한 잔이 밝혀주는 옛 행성의 모닥불



- 박 정대 시 ‘ 불취불귀(不醉不歸)‘
[라흐 뒤 프루콩 드 네 주 말하자면 눈송이의 예술], 민음사, 2021.





카자흐스탄에서는 말을 타고 검독수리로 사냥하는 사람을 자유라 부른다지

  카자흐스탄의 언어적 관점으로 보면 나는 자유

  나는 말을 타고 다니며 검독수리 타법으로 내가 원하는 모든 것들을 사냥하지 그러니까 나는 자유

  만인을 위해 내가 싸울 때 나는 자유라고 김남주는 시에 썼고 안치환은 그걸 노래로 불렀지 윤도현이 부르는 자유라는 노래도 있지

  그러니까 모든 사람의 자유는 다른 자유

  카자흐스탄의 자유는 카자흐스탄의 자유

  빅또르 쪼이의 자유는 빅또르 쪼이의 자유

  호치민의 자유는 호치민의 자유

  그게 누구든 그게 무엇이든 자유를 노래하는 건 그들의 자유

  스스로 꿈꾸고 스스로 노래하는 자유는 만인의 의무

  카자흐스탄에서는 말을 타고 검독수리로 사냥하는 사람을 자유라고 부른다지

  내가 꿈꾸는 시인의 나라에서는 말을 타고 다니며 검독수리 타법으로 글을 쓰는 사람을 자유라 하지

  그것이 나의 자유



- 박 정대 시 ‘ 자유 ‘
    * 그녀에서 영원까지, 문학동네, 2017






나전은 비단밭
햇살은 장렬
햇살 좋은 날에는 나전 장렬에나 가야지
그곳에 가서 낮은 언덕엔 뽕나무 심고
가파른 언덕에는 산머루나 길러야지
아침 늦게 눈뜨면 새소리에 귀를 씻고
툇마루에 걸터앉아 상추쌈에 된장국 늦은 아침을 먹어야지
풀꽃 향기 자욱하게 흐르는 앞 강물에
설거지를 하면 오전이 다 지나갈 거야
먼 곳에 대한 그리움 같은 건
마음속에 장뇌삼처럼 묻어두고
그곳에서 고독이나 장렬하게 피워 올리다 보면
새들은 햇살을 물고 석양으로 사라졌다가
다시 황혼 녘 어둠을 물고 자작나무 산그늘로 스며들겠지
나전은 비단밭
고독은 장렬
고요하게 바람 부는 날에는 나전 장렬에나 가야지
그곳에 가면 청춘이 피워 올린 장작불도 조금씩 사그라들어
잔설 위엔 빛나는 달빛의 밤이 찾아오리니
아궁이에 남아 있는 바알 간 숯불로 밤을 밝히면
숨죽였던 사랑도 고요히 피어오르겠지
때늦은 사랑의 밤은 봉창에 어리는 꽃그림자로 피어나리니
마음은 산머루처럼 깊어가고
강물은 음악 소리를 내며 밤새 흘러가겠지
빛나는 고독의 문턱으로 달빛 쏟아지는 밤이면
인생은 여전히 외로운 한 마리 짐승일 테니
꿈꾸듯 조금씩 그대를 사랑해야지
나전은 비단밭
그대는 생의 장렬이니
나 그대를 환하게 꿈꾸는 생의 낮과 밤에는
당나귀 타고 타박타박
비단밭 장렬에나 가야지


- 박 정대 시 ‘ 나전 장렬 ‘
[슬라브식 연애], 달아실, 2017.






나는 담배를 피워 물고 나의 내면을 생각한다.
그러니까 이건 실제적인 것이다


푸른 전등의 새벽. 이 푸른빛은 어디서 오는가.
고요한 침묵의 사다리를 타고 나의 다락방으로 스며드는 이 새벽의 전원은 어디서 오는가

그러니까 이건 실제적인 것이다.
아무리 봉쇄해도 봉쇄할 수 없는 내면의 푸른빛

나의 글은 그 푸른빛에서 와서 태양이 불을 밝히는 시각에 사라진다

목이 마르고 열어둔 창문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작은 화분의 푸른 잎들을 스치며 지나간다

나는 새벽마다 목이 마르고 목이 말라 냉장고로 가면
거기에는 아직 식지 않은 차가운 샘물들이 남아 있다. 그러니까 이건 실제적인 것이다

유령의 거울들. 내가 중얼거릴 때마다 나를 따라 하는 내 그림자의 유령들
그림자들. 지겨운 그림자들. 태양이 꺼진 시간에도 나를 졸졸 따라다니는 지긋지긋한 지구의 망령들
내가 그녀의 입속에 한 모금의 물을 건네줄 때도 악착같이 따라와 나를 흉내 내는 귀신들
물을 마시면 가슴에 가득 샘물이 고인다. 그러니까 이건 실제적인 것이다

물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며 나는 나의 내면을 생각한다.
아무도 들여다본 적 없는 내면의 밤은 깊다. 그러니까 이건 실제적인 것이다

태양이 사라진 지구의 한편에서 달의 전구를 밝혀 놓고 고요히 밤을 적어나간다.
밤은 태양이 남겨둔 기억의 그림자. 그림자를 밟으며 고독하게 유령이 걷고 있다

그러니까 이건 실제적인 것이다.
그대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세계의 미래를 읽어본다는 거

점치는 여인들도 낡은 천막으로 돌아간 저녁이면
그대 어깨에 걸쳐진 푸른 담요를 보며 눈 내리는 지구의 허약한 천막을 보수해야겠다는 생각

동쪽에서 떠올라 추억의 서쪽으로 가느라 밤마다 달은 분주할 테지만,
오늘은 또 서쪽으로부터 바람이 불어오고 내일은 부는 바람에 눈발 흩날리며
주전자 속 찻물은 그렇게 단 하나의 열망으로 끓어오를 테니까

그러니까 이건 실제적인 것이다
생선을 굽는 말라가의 선술집과 페드로갈레 호를 스쳐 지나가는 오후 여섯 시의 바람
내가 기르는 작은 스파트필름, 몇 방울의 물. 바람. 자갈, 꽃잎

담배 연기 속의 호랑이

체 게바라의 라이터. 휘발성의 영혼들. 공기들. 오래된 스웨터. 굽이 닳은 가죽 부츠. 검고 딱딱한 기타 케이스
기타 케이스 속 봉인된 음악들. 퍼덕이는 작은 새. 별빛. 두꺼운 책들. 아무도 읽지 않는 중독된 고독의 삶
갓산 카나파니. 말라가의 푸른 술집들. 그러니까 이건 실제적인 것이다

내가 리스본에 당도했을 때,
테주 강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나는 포르투나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나는 나의 내면에 대하여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건 실제적인 것이다

하나의 성냥불이 켜지고 세계가 잠시 밝아질 때.
그 희미한 밝음의 힘으로 지구가 조금 자전했을 때.
몇 마리의 새가 안간힘으로 지구의 자전을 거슬러 오르고 있을 때.
나는 잠시 내 영혼이 정박했던 그대라는 항구를 생각하고 있었다

페르난두 페소아. 알베르투 카에이루. 그러니까 이건 실제적인 것이다

가출 혹은 여행의 삶.
희미한 공기처럼 세계의 골목을 떠돌다 끝내 집으로 돌아가지 않은 채 죽으려 했던 나의 꿈이.
이렇게 상처 입은 짐승처럼 내면의 푸른 기억을 적어나가는 새벽이면
가장 먼 곳에서 반짝이며 나를 부르는 골수분자 같은 삶. 질기고도 비린 유전자의 집.
나는 유령이었고 사는 동안 나는 끝내 유령일 테지만

새벽 네 시 나는 드디어 나에게 갇힌다. 봉쇄 수도원. 그러니까 이건 실제적인 것이다


- 박 정대 시 ‘ 봉쇄 수도원 ‘





―김유정에게

간밤 너를 보고 싶은 마음이 실레 마을로 갔다

너에게로 가는 길 이미 봄이 왔다고 생강나무 노오란 꽃잎은 알싸한 향기를 흩날리는데 생강생강 생각나무엔 한줄기 구름처럼 생각이 피어났다

생각이 구름처럼 피어나면 저 밤의 구름들도 또 어디로 흘러가는가

실레 마을로 가는 산비탈엔 화안 하게 앵두꽃이 피어 너의 생각을 밝혀주고 있었다

쫄쫄 내솟는 샘물소리며 촐랑촐랑 흘러내리는 시냇물소리를 지나 마음은 간신히 실레 마을에 당도하는데

기생 녹주며 봉자 씨의 별이 네 사랑의 기억처럼 실레 마을을 밝히고 있었다

잎이 푸르러 가시던 님이 저렇듯 오롯이 빛나던 밤에는 너도 아마 느티나무라도 심고 싶었을 게다

네가 봄이런가

산골 나그네처럼 내 마음은 네가 심은 느티나무에 기대어 실레의 별을 보고 있다

사랑한다, 슬프다, 사랑한다 중얼거리며 봄 속의 또 다른 봄을 보고 있다

네가 봄이런가



* 네가 봄이런가 ― 네가 봄이런가,라는 제목은 김유정 사후에 발표된 수필의 제목에서 빌려 온 것이다, 네가 봄이런가 중얼거리다 보면 봄은 이미 우리가 꿈꾸던 곳에 당도해 있을 게다, 나는 지금 그대가 심은 느티나무에 기대어 하염없이 실레의 별을 보고 있다.


- 박 정대 시 ‘ 네가 봄이런가 ‘
[슬라브식 연애], 달아실, 2017.






구름이 밀려와

물방울 안으로

구름 속이 밀려와
저녁이 분다

나의 월간(月刊)에도
구름이 밀려 있어
새들이 팽창한다

구름의 수명을 닮은 문장
구름들이 두근거리게 하는 단어
단어의 수명을
세어보는 아침
태양의 고요한 돌가루들
내 수명을  닮은 눈물은
사람이라 부르고 싶었다

그런 물방울은
사슴처럼
숨어 지내야 한다

저녁은
물방울이 지상의
가장 쓸쓸한
부력이 되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슬픔도
이동시키는 구름

물방울이 밀려와



- 박 정대 시 ‘ 고적운(高積雲)‘
[고래와 수증기], 문학과 지성사, 2014.





마치 겨울을 외투처럼 걸친 채 그가 지나갔다

그림자에는 영혼이 없다 태양의 흑점을 밟으며 그가 언덕을 넘어갔다

담배 연기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햇살 밝은 창가에서 여자는 담배 연기의 말을 이해하려 애쓰지만 그 누구도 담배 연기의 말을 듣지 못한다

자정의 태양 아래를 그가 지나갔다

쓴 커피를 마셨는가 밤은 어둡고 쓰다 한때 가수였던 그는 술에 취한 채 소파에서 잠이 들었다

가수의 입장에서 보자면 밤은 그저 달콤한 한바탕의 꿈일 뿐 노래는 세상을 떠돌고 모든 꿈들은 노래를 잊었다

공기의 밀도를 온몸으로 조금씩 밀며 잠든 그가 잠의 겨울 속으로 가고 있다

사랑은 가끔 나뭇잎처럼 자라나 바람이 불 때마다 뭔가를 속삭여주기도 하지만 거센 바람이 불면 떨어질 낙엽에 적은 사랑의 말들

누군가 지상에 떨어진 낙엽의 책을 밤새 읽고 있다

밤새 가수는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밤새 여자는 환한 햇살의 창가를 떠나지 못한다

밤에도 밝은 태양이 빛나는 행성에서 담배 연기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쓰디쓴 커피가 무슨 사랑을 고백하겠는가

쓴 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아무런 말도 없이 그는 여자가 있는 계절을 통과해 갔다

겨울을 마치 외투처럼 걸친 채 그가 지나갔다


- 박 정대 시 ‘ 천사가 지나간다 ‘
[그녀에서 영원까지], 문학동네, 2016.





정선이 고향인 나 서울에서 국수를 삶아 먹으며 한 끼를 해결하네

창밖에서 들려오는 공사장 굴착기 소리를 말발굽 소리로 바꾸어보아도 마음엔 끊임없이 중국발 미세먼지들만 날아들어오네

당시지로(唐詩之路)라 했던가

아주 먼 옛날 당나라쯤에서 시의 길을 따라 천하를 주유하다 고요히 사라지고 싶은 오후

어디를 둘러보아도 사람은 보이지 않고 창밖으로는 뒤늦게 말발굽 소리 같은 눈발 하염없이 흩날리는데

정선은 멀어 베갯머리에 밀쳐두었던 이용악과 백석 시집을 자꾸만 펼쳐보는 오후

그 옛날 조양강을 건너던 거룻배, 거룻배에 실려가던 당나귀의 발자국처럼 함박눈 타박타박 떨어지는데

이제사 가까스로 돋아나 당나귀 맑은 눈동자처럼 피어나는 저녁 불빛이여

연민에 물들고 싶지 않아

더 이상 슬픔에 투항하고 싶지도 않아

그대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허공으로 띄워보네

어두운 조양강 위로는 또 밤새 함박눈 펑펑 내릴 텐데

꽝꽝 얼어붙은 강을 누군가 조심조심 건너가고 있을 텐데

정선 밤하늘에 초저녁 별처럼 돋아날 그대여

그대는 아직 무너지지 않은 농협 창고처럼 사랑하라

역전 제재소처럼 살아가라


- 박 정대 시 ‘ 정선 ’
[그녀에서 영원까지], 문학동네, 2016.





단언컨대 아름다움이란 자발적이다
아무르 아무르 아무리 속삭여도
사랑의 귀는 열리지 않는다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오롯이 살아남는다
전직 천사의 입장에서 볼 때
아무르 아무르 생각해 봐도
어떤 아름다움이 인류를 구원한다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그들이 술을 마시고 있는 밤이다


- 박 정대 시 ‘아모르 ‘
[그녀에서 영원까지], 문학동네, 2016.




그대는 내가 알지 못하는 세상의 비원
바람이 불 때마다 주합루에 앉아
일렁이는 취병(翠屛)을 바라보며 술을 마시지
흔들리는 신우대 울타리는 변덕스러운 세상 같아
그런 마음들, 흘러가는 구름의
어깨 위에나 걸어두고
부용지에 술잔을 띄우지
화답 없는 유상곡수연의 날들
내가 띄운 술잔을
스스로 거두어 마시는 비애를
쓸쓸하다고 말해 무엇하랴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바람이 불 때마다
쓸쓸해 쓸쓸해 소리치며
낙엽 지는 상강의 날들
미친 그리움의 비애로 생각하노니
그대는
내 사랑의 비참히 꽁꽁 숨겨놓은
나도 알지 못하는 이 세상의 비원


- 박 정대 시 ‘ 비원 ’
[그녀에서 영원까지], 문학동네, 2016.




잠들 수도 없고 잠들지 않을 수도 없는 아침에
나는 가까운 산으로 내려온 하늘의
푸른 맨발을 본다 그리고 처음 보는 아침의
가깝고도 먼 곳에 서 있는 한 그루의 나무여
너는 지난밤 무거운 공기들의 외투를 벗고
눈부신 알몸으로 빛나고 있구나 정년
아무런 걱정도 없이 너를 드러내 보이는
이 순결한 아침의 햇살 속에서
사월의 투명한 대기는 참혹한 기쁨에 옴몸을 떨고
나의 불면은 아무것도 노래할 수 없구나
그리고 내오랜 그리움으로도 다다를 수 없는 곳에서
흙들의 사랑은 함부로 꽃들을 피워 올리고 있다

보이는 곳의 사랑들은 모두 움직이고 있구나
태어난 자리에서 뿌리 깊은 사랑을 하는 온갖 나무들이여
저마다의 격렬한 희망을 표명하며 흘러가는 오 짐승이여 강물이여
너희들이 흘러가서는 마치 최초의 기쁨으로 스며드는
오, 그 알 수 없는 정밀한 욕망의 나무를 나에게
나에게만 가르쳐다오 나는 스무 해가 넘게 아무도 모르는
나 혼자만의 은밀한 나무를 꿈꾸어 왔나니
그 나무에서는 먹어도 먹어도 배부르지 않은
꿀과 같은 열매가 열리고 잎사귀들의 미풍만으로도
나는 늘 달콤하고 아늑한 꿈길에 드나니 오, 사월의 나무여
너의 수액으로 가는 길을 나에게 나에게만 가르쳐다오

너에게로 가기 위하여
나는 날아가는 새들의 날개 끝에도 머무르지 않았고
구름의 사소한 슬픔으로도 머무르지 않았었느니
정녕 바람의 온갖 예언들은 알고 있었으리
내가 왜 스스로 가장 작은 지상의 벌레가 되어 땅속의
땅속의 지하수로 가는 동굴을 파고 있었는지


- 박 정대 시 ‘ 사월의 나무 한 그루 ‘
* [단편들], 세계사, 1997.




우연의 음악이 바람의 국경선을 넘나드는 곳에 무가당 담배 클럽이 있다, 식당 먹으러 가자, 이것은 무가당 담배 클럽의 그 흔한 농담들 중의 하나이지만 그런 농담만을 듣고도 무가당 담배 클럽의 회원을 색출해 내는 귀신같은 자들이 있다, 그 비밀 요원들은 바람의 국경선 저 너머에서 왔다, 그들은 무가당 담배 클럽 저편의 세계에 봉사하는 자들이다, 무가당 담배 클럽에는 이런 비밀 요원들과 회원들이 서로 뒤섞여 있기 때문에, 막상 무가당 담배 클럽에 하루 종일 있으면서 산책을 하고 농담을 하고 때때로 함께 어울려 술을 마시기도 하지만, 누가 진짜 무가당 담배 클럽 회원인지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곳의 남자와 여자들도 어느 날은 술에 취해 밤새도록 침대 위를 뒹굴며 서로의 육체를 탐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아무리 몸을 뒤섞어도 서로가 진짜 회원이라는 확신을 가지지는 못한다, 간혹 또 어느 날은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사람이 무가당 담배 클럽 회원으로 밝혀져 바람의 국경선 저 너머로 압송되기도 한다, 그의 죄는 너무 아름다운 노래를 불렀다는 것이다, 그래서 무가당 담배 클럽을 너무 낭만적인 분위기로 몰아갔다는 것이다, 지금 조용히 고백하건대(이 글을 읽는 그대들만 알고 있으라), 사실 나는 무가당 담배 클럽의 핵심 요원이다, 그런데 이런 나조차도 정확한 회원의 숫자와 그 규모를 알지 못한다, 나는 지금 무가당 담배 클럽 한구석 내 자리에 앉아 조용히 이 글을 쓰고 있다, 어젯밤 심하게 과음했더니 숙취 때문에 나는 지금 몹시 머리가 아프고 속이 쓰리다, 이 글을 쓰는 것도 몹시 힘든데 야, 식당 먹으러 가자, 누군가 또 저 건너편에서 외친다, 가자, 우연의 음악이 바람의 국경선을 넘나드는 곳에 무가당 담배 클럽은 있다, 식당 먹으러 가자


- 박 정대 시 ‘ 무가당 담배클럽과 바람의 국경선‘
  *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엔 아직도 음악 같은 눈이 내리지’ (민음사, 2001)





내 고독의 大地 위로 인플루엔자 같은 사랑이 왔네

사랑은 고통처럼 깊어 비 내리다 눈 내리다 봄밤은 좀처럼 마당가에 있는 꽃봉오리에게로 가지 못하네

나는 습관처럼 또 담배를 피워 물고 지금 다시 사랑은 치명적으로 덜컹거리네, 밤마다 그대에게로 가는 길을 묻기 위해 가수들은 밤새 파두를 부르지만 나는 밤의 부둣가에서 그대에게 밀항하기 위하여 내 상처를 두들겨 木船 한 척 만드네


나의 목선이 밤새 저 검푸른 파도를 헤쳐나가면 끝내 그대 눈동자의 새벽에 닿을 수 있을까
정박할 수 있을까

밤이 아파하는 곳으로부터 地上의 상처 같은 초저녁별들 떠오르고
그대가 아파하는 곳으로부터 나는 또 비 내리고 눈 내리네

파두 듣는 밤, 비에 젖고 눈에 묻힌 봄밤
백 년 동안의 고독이 비 내리다 눈 내리다 지쳐 이제는 파두, 파두, 파두, 소리치며 나에게로 쏟아져오는 고독의 흙밤


밤하늘엔 여전히 아물지 못한 별빛들 당나귀 여린 발자국처럼 빛나는데 강을 건너 사막을 지나 내 영혼의 天體와 심장의 천막을 펄럭이게 하며, 독감 같은 사랑이 왔네

내 사랑의 大地 위로 인플루엔자 같은 고독이 찾아왔네


- 박 정대 시 ‘ 당나귀 여린 발자국으로 걸어간 흙밤‘
[아무르 기타], 문학사상사, 2004.




아무리 마셔도 목마르고,
아무리 걸어도 끝이 없는
나는, 사막이다
사막의 무사히다
거기다 이제는 눈까지 멀어
음악만이 나를, 자꾸만, 어디론가, 끌고 간다
끌려가지 않으려고 발버둥 친 것이
지금까지의 내 삶이었다면
이제는 끌려가면서라도
맹글어지는 것이
내 삶이고
시 나부랭이고
의무 같은 사랑이라는 것을 아는
나는, 여전히 사막이다
사막의 음악이다

2001년 가을
移山房에서
박정대


- 박 정대 시 ‘ 自序 ‘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엔 아직도 음악 같은 눈이 내리지], 민음사, 2007.




긴 방파제를 따라 파도가 치지
파도에 밀려 저녁이 오면 나는 이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방송을 시작해
당신은 듣고 있을까, 오로지 당신을 위해, 긴긴 말레콘을 따라가며 부서지는 파도치는 말레콘 해적 방송
영화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을 보면 <찬찬>이라는 음악과 함께 파도치는 말레콘의 풍경이 나오지
그런 말레콘을 따라 오래도록 당신과 함께 걷고 싶었어
  아바나의 밤하늘엔 노란색 별들이 떠 있고 우리는 가난한 건물들 사이를 아무 걱정도 없이 걸어가겠지
  베로니카, 삶이 가난한 것은 건물들 때문이 아니야
  우리는 지금 저녁의 한적한 카페에 들어가 한 잔의 술을 마실 수도 있고 말레콘에 부서지는 파도의 음악 소리를 들을 수도 있잖아
  거리에는 가난한 악사들이 그들의 영혼을 연주하지
  선풍기가 없어도 밤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우리의 가슴을 식혀줘, 겨울에도 우리는 춥지 않아, 베로니카, 당신의 따스한 가슴에 묻혀 잠들 수 있으니까
   저녁이 오면 낡고 오래된 말레콘에 앉아서 지나간 혁명이 찬란했다고 말하지는 말자, 삶은 결국 지나갈테나까, 지나간 삶은 그래서 찬란할 테니까
  베로니카, 아직 따스한 내 손을 잡아줘, 당신 안에서 찬란하게 빛나던 나를, 나의 혁명을 추억이라고 말하지 말아 줘
  아직 내 마음의 말레콘에는 파도가 치고 별빛이 빛나고, 당신과 나는 작은 손전등 하나를 들고도 우리의 낡은 침낭 속으로 스며들 수 있으니까
   침낭 속에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것을 볼 수 있으니까
  그러니까 베로니카, 우리는 세상을 버리고 그냥 우리에게 망명해 버리자
  나는 지금부터 당신의 말레콘이야
  당신만 들어주면 돼, 그러면 돼, 나는 밤새도록 당신의 귓가에서 파도치며 출렁일 테니 당신만이 꿈의 주파수로 날 들어주면 돼
  베로니카 그러니까 기억해야 해, 꿈속에서도 잊으면 안 돼
사랑해, 그래 여기는 파도치는 말레콘 해적 방송이야


- 박 정대 시 ‘ 해적 방송 ‘
[삶이라는 직업], 문학과 지성사, 2011





겨울 내내 진부에서 뒹굴었네

낮에는 까마귀와 함께 텅 빈 밭고랑을 바라보고 밤에는 쏟아질 듯 빛나던 별들과 하늘의 거대한 구멍인 달을 보며 진부라는 밤의 초원을 뒹굴었네

간혹 눈발이 흩날리기도 했지만 내 가슴에 쌓일 정도는 아니었네

잠시 흩날리다 사라져 버리는 연애 같은 눈발들, 본질적인 고독이란 게 있다면 그것은 어쩌면 그렇게 사라지는 눈발 같은 게 아니었을까 생각하기도 했네

먼저 형식의 평화가 오고 그 후에 본질적인 고요가 왔네

어떤 날은 속초항에서 무작정 페리를 타고 32시간 동안 북방 항로를 항해해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 항에 도착하기도 했네

블라디보스토크의 낡은 영화관에서 '바늘'이라는 영화를 보기도 했네

카자흐스탄 출신 감독인 라시드 누그마노프의 영화였네

러시아의 밤, 텔레폰 성냥 하나로 무가당 담배 클럽 인터내셔널 동지들에게 불꽃의 지령을 타전하기도 했지만 그렇게 무심히 빅또르쪼이가 출연한 영화 한 편을 보고 몇 잔의 보드카를 마시다가 돌아오기도 했네

겨울 내내 진부를 뒹굴었네

심심하면 자전거를 타고 진부군립도서관에 나가 가스통 바슐라르와 에세닌의 시를 읽기도 했지만 본질적인 고독을 덮을 만큼 함박눈은 내리지 않았네

가끔은 어둠과 더불어 술을 마셨을 뿐, 여전히 내 마음의 캄캄한밤을 뒤덮을 폭설은 내리지 않았네

오검문자로 내 마음의 패엽경을 써나가고 싶었네

그러나 나는 오검문자를 모르므로 티베트어, 몽골어, 아랍어, 타갈로그어, 타밀어, 구자라트어, 굴묵키어, 벵골어 혹은 딩뱃 기호 및 여러 가지 기호로 나날의 고독을 기록했네

그러나 그것은 읽을 수도 없고 알아볼 수도 없는 고독과 침묵의 기록이었네

먼저 형식의 평화가 오고 그 후에 본질적 고요가 왔네

나 이제 백야를 꿈꾸네

한 계절을 진부에서 뒹굴었으니 내가 꿈꾸는 백야엔 눈발 같은 사랑이 내리고 사랑 같은 눈발이 내리고 있으리



- 박 정대 시 ’ 진부라는 곳 ‘
  * ‘삶이라는 직업'





이곳은 창문 너머로
야자수 같은 게 흔들거리는 슬픈 열대야
아니 자세히 보면 수족관의 물풀들이
하늘하늘 흔들리고 있어
지금은 오래된 유행가처럼
어디선가 한 소절 바람이 불어온다
슬픈 열대야,
나 지금 대야에 찬물을 받아 세수를 하고 있어
지금은 안 보이는,
너를 보기 위해 눈동자를 씻고 있어
그러나 내 발밑
깊은 땅속으로는
스무 량을 단 밤기차가
기적도 없이 흘러가지, 전갈처럼
제 몸을 물어뜯어서라도
사랑하고 싶을 때가 있어, 사막을
통과하는 바람처럼
뜨거운 목울대로 울고 싶을 때도 있는 거야
가끔은, 인간이 창문 너머로 보이기도 한다
이곳은 슬픈 열대야


- 박 정대 시 ‘ 슬픈 열대야 ’





이 세상의 애인은 모두가 옛 애인이지요
나의 가슴에 성호를 긋던 바람도
스치고 지나가면 그뿐
하늘의 구름을 나의 애인이라 부를 순 없어요
맥주를 마시며 고백한 사랑은
텅 빈 맥주잔 속에 갇혀 뒹굴고
깃발 속에 써놓은 사랑은
철럭이는 깃발 속에서만 유효할 뿐이지요
이 세상의 애인은 모두가 옛 애인이지요
복잡한 거리가 행인을 비우듯
그대는 내 가슴의 한복판을
스치고 지나간 무례한 길손이었을 뿐
기억의 통로에 버려진 이름들을
사랑이라고 부를 수는 없어요
이 세상의 애인은 모두가 옛 애인이지요
맥주를 마시고 잔디밭을 더럽히며
빨리 혹은 좀 더 늦게 떠나갈 뿐이지요
이 세상에 영원한 애인이란 없어요
이 세상의 애인은 모두가 옛 애인이지요


- 박 정대 시 ‘ 이 세상의 애인은 모두가 옛 애인이지요 ‘
  * [단편들], 세계사, 1997.




풍경들을 지나서 왔지
지나온 풍경들이 기억의 선반 위에
하나둘 얹힐 때
생은 풍경을 기억하지 못해도
풍경은 삶을 고스란히 기억하지
아주 머나먼 곳에 당도했어도
끝끝내 당도할 수 없었던 풍경은
무엇이었을까
그리운 풍경들은 우리를 배반하지 않네
풍경의 건반 위에
그대로 남아
풍경처럼 살아
풍경, 풍경
생을 노래하지


- 박 정대 시 ‘ 풍경 한계선 ‘






아침에 일어나 커피를 마신다, 담배를 피운다, 삶이라는 직업

커피나무가 자라고 담배 연기가 퍼지고 수염이 자란다, 흘러가는 구름 나는 그대의 숨결을 채집해 공책 갈피에 넣어둔다, 삶이라는 직업

이렇게 피가 순해진 날이면 바르셀로나로 가고 싶어, 바르셀로나의 공기 속에는 소량의 헤로인이 포함되어 있다는데, 그걸 마시면 나는 7분 6초의 다른 삶을 살 수 있을까, 삶이라는 직업

약속해 줘 부주키 연주자여, 내가 지중해의 푸른 물결로 출렁일 때까지, 약속해 줘 레베티카 가수여, 내가 커피를 마시고 담배 한 대를 맛있게 피우고 한 장의 구름으로 저 허공에 가볍게 흐를 때까지는 내 삶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내가 어떡하든 삶이라는 작업을 마무리할 때까지 내 삶의 유리창을 떼어가지 않겠다고

약속해 줘 구름아, 그대 심장에서 흘러나온 구름들 아, 밤새도록 태풍에 펄럭이는 하늘의 커튼아



- 박 정대 시 ‘ 약속해 줘, 구름아 ‘
* 삶이라는 직업 / 문학과 지성사, 2011. 5. 30.






어제는 네 편지가 오지 않아 슬펐다, 하루 종일 적막한 우편함을 쳐다보다가 이내 내 삶이 쓸쓸해져서, <복사꽃 비 오듯 흩날리는데, 그대에게 권하노니 종일 취하라, 劉伶도 죽으면 마실 수 없는 술이거니!>, 李賀의 <將進酒>를 중얼거리다가 끝내 술을 마셨다. 한때 아픈 몸이야 술기운으로 다스리겠지만, 오래 아플 것 같은 마음에는 끝내 비가 내린다

어제는 네 목소리가 들리지 않아 슬펐다, 하루 종일 환청에 시달리다 골방을 뛰쳐나가면 바람에 가랑잎 흩어지는 소리가, 자꾸만 부서지려는 내 마음의 한 자락 낙엽 같아 무척 쓸쓸했다, 빗자루를 들고 마당을 쓸면 메마른 가슴에선 자꾸만 먼지가 일고, 먼지 자욱한 세상에서 너를 향해 부르는 내 노래는 자꾸만 비틀거리며 넘어지려고 한다

어제는 네 모습이 보이지 않아 슬펐다, 네가 너무나 보고 싶어 언덕 끝에 오르면 가파른 생의 절벽 아래로는 파도들의 음악만이 푸르게 출렁거리고 있었다 , 그 푸른 음악의 한가운데로 별똥별들이 하얗게 떨어지고, 메마른 섬 같은 가을도 함께 뚝뚝 떨어지고 있었는데, 내가 정신을 가다듬고 내 낡은 기타를 매만질 때, 너는 서러운 악보처럼 내 앞에서 망연히 펄럭이고 있었다

.. 어제는 너무 심심해 오래된 항아리 위에 화분을 올려놓으며, 우리의 사랑도 이렇게 포개져서 오래도록 같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새우젓 장수가 지나가든 말든, 우리의 생이 마냥 게으르고 평화로울 수 있는, 일요일 같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 어제는 두툼한 외투를 껴입고 밤새도록 몇 편의 글을 썼다, 추운 바람이 몇 번씩 창문을 두드리다 갔지만 너를 생각하면, 그 생각만으로도 내 마음속 톱밥난로에 불이 지펴졌다. 톱밥이 불꽃이 되어 한 생애를 사르듯, 우리의 生도 언젠가 별들이 가져가겠지만

... 그때까지 사랑이여, 내가 불멸이 아니어서 미안하다
... 그때까지 사랑이여, 나는 불멸이 아니라 오래도록 너의 음악이다.  


- 박 정대 시 ‘어제 ’
[아무르 기타]. 문학사상사, 2004.






멀리 가는 길 위에 네가 있다
바람 불어 창문들 우연의 음악을 연주하는 그 골목길에
꽃잎 진 복숭아나무 푸른 잎처럼 너는 있다
어느 날은 잠에서 깨어나 오래도록 네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사랑은 나뭇잎에 적은 글처럼 바람 속에 오고 가는 것
때로 생의 서랍 속에 켜켜이 묻혀 있다가
구랍의 달처럼 참 많은 기억을 데리고 떠오르기도 하는 것
멀리 가려다 쉬고 싶은 길 위에 문득 너는 있다
꽃잎 진 복숭아나무들이 긴 목책을 이루어
푸른 잎들이 오래도록 너를 읽고 있는 곳에
꽃잎 진 내 청춘의 감옥,
복숭아나무 그 긴 목책 속에


- 박 정대 시 ‘ 장 만옥’



창포강에 싸락눈이 내리는 오후
그대는 물을 긷고 나는 듣고 있었네
그대 발길에 스치는 조약돌의 음악소리
아득한 산맥을 넘어온 시간들의 풍경소리
내 마음이 가고 싶어 하던 곳에서
오롯이 돋아나던 낮은 숨결의 불빛들
그 희미한 불빛의 계단을 살포시 밟으며 내려오던
싸락 눈, 싸락 눈, 싸락 눈의 화음和音
창포강에 싸락눈이 내리는 오후
그대 물동이에 담겨
나 여기 그대 집까지 왔네
그대는 검은 천막에 사는 여인
오늘 저녁 그대는
또 한 줌의 쌀을 끓이네
저물어가는 창포 강가엔 아직도 눈이 내리는데
눈발 속으로도 또 다른 눈이 내리는데
천막 속의 고요, 고요 속의 음악
나는 끓고 그대는 웃네
그대 집
희미한 호롱불 아래서
이제야 그대 입술 끝에 닿은
나, 고요한 한잔의 창포강


- 박 정대 시 ‘ 그대 집‘




그곳은 지중해의 눈동자,
그곳에는 해변과 작은 조각배와 스타킹이 있었네
하얀 침대의 해안에서는 가끔씩 갈매기가 울고
바람소리는 밤새 저희들만의 음악을 연주했네
카잔차키스의 책이 놓여 있는 선반 아래서,
고요히 술을 따라 마시는 밤이면
고양이의 눈동자에는 두 개의 달이 떴네
그리하여 시간은 소리도 없이 잔에 채워져
누군가의 영혼의 골짜기를 따라 흘러가고
그곳에선 누구라도 취할 수밖에 없었네
볼케이노 화산 같은 욕망의 분화구가
저희들끼리 낄낄거리며 터져
사랑의 형상으로 굳어져 갈 때면
고요히 타오르는 열두 개의 촛불이 밤새
종려나무처럼 해안을 지키고 있었네
그곳은 지중해의 눈동자,


- 박 정대 시 ‘ 지중해의 눈동자‘




아무 데서나 나도 팍 쓰러지고 싶었다

화엄에 휩싸인 채 흘러가는 구름들, 들판 위의
집들 빠르게 하늘을 건너갈 때
누군가의 깊은 한숨이 마리화나의 새떼를 날릴 때
날아가는 새떼들 위로 쏟아지던, 화염방사기 속의 여름
나는 아무 데서나 어디로든 도피하고 싶었다 하늘에서
참새구이들이 툭툭 떨어져, 소주병 속으로 떨어져
푸른 정맥 속에서 하나의 길이 예감처럼 솟구쳐 오를 때

사랑을 잃고 나는 걸었네
자전거를 타고 가기도 했네
추억이 페달이었네 폐허와
폐허와 폐허와 또 다른 폐허
속에서 푸푸
푸른 현기증이 나도, 페달을 밟으면서
길 옆으로는 가기도 잘도 갔네 아 하면
아이다 아이다 호호호, 푸푸푸 하면서
세월이 갔네 아무 데서나

사랑을 했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쓴 것이 몸에는 좋다네

                    *기형도[빈집]중에서



- 박 정대 시 ‘ 아이다호‘




그런 건 없겠지만, 사랑이여 그대가 없어도 혼자 담배 피우는 밤은 오네

보르헤스의 책을 펼쳐놓고 <꿈의 호랑이들>을 읽는 밤은 오네

밤이 와서 뭘 어쩌겠다는 것도 아닌데 깊은 밤 속에서 촛불로 작은 동굴을 하나 파고 아무도 읽지 않을 시를 쓰는 밤은 오네

창 밖에는 바람이 불고 가끔 비가 내리기도 하겠지만

내 고독이 만드는 음악을 저 홀로 알뜰히 듣는 밤은 또 오네

한때 내가 사랑했던 그대, 통속소설처럼 떠나간 그대는

또 다른 사람 품에서 사랑을 구하고 있겠지만

이제는 아무리 그대를 생각해도 더 이상 아프지도 않아

나는 아프네, 때로는 그대와의 한 순간이 내게 영원으로 가는 길을 보여줬으니

미안해하지 말게, 사랑이여, 그런 건 없겠지만, 그래도 사랑이여

그대에 대한 짧은 사랑의 기억만으로도 나는 이미 불멸을 지녔네


- 박 정대 시 ‘ 그런 건 없겠지만, 사랑이여‘




새벽에는 *박하와 나란히 깨어 있다, 동정 없는 세상
나는 담배를 피우며 글을 쓰고
박하는 글을 쓰는 나를 쳐다보다
가끔 졸기도 한다, 졸면서 박하가 꾸는 꿈이
나는 몹시 궁금하다, 짐노페디라는 음악
참 멀리 가는 그 음악의 성분이 나는 그립다
매실들이 둥둥 떠 있는 매실주 술병을 쳐다보면
나는 자꾸만 음악이 고파져서 밤새도록 마시고 또 마신다
그러다 또 내 낡은 턴테이블을 보면 생각나는 것이다
오래된 레코드판에서 흘러나오던
맑디맑은 강물 같은 그 음악
어느 국경을 지나왔는지 몰라도
어떤 집시의 노래 같던 그 음악
나는 그 음악이 아마
포르투갈 어느 집시의 노래일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나는 금세 집시처럼
새벽의 별빛 아래에서
오랫동안 서성거리는 것이다
낮에,
에릭 로샹의 동정 없는 세상을 봤다
방학이라서 나는 몹시도 심심할 터,
그리고 또 하루가 가서
저녁을 지나 새벽이 되었다
새벽에는 나와 박하만이 깨어 있다, 동정 없는 세상
나는 지금 북반구의 열대야에 앉아
남반구의 한기를 온몸으로 느끼고 있다
내 몸속 깊이 파고드는
짐노페디라는 음악을 마시며
나는 이 밤도 취하려고 한다, 동정 없는 세상
나를 취하게 하는 성분이
결국 나를 꿈꾸게 하리



- 박 정대 시 ‘ 동정 없는 세상‘
  *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엔 아직도 음악 같은 눈이 내리지.  




그리움이 이빨처럼 자라난다
시간은 빨랫집게에 집혀 짐승처럼 울부짖고
바다 가까운 곳에,
묘지가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별들은 그것을 바라보는 자들의 상처,
눈물보다 더 깊게 빛난다, 聖所
별들의 운하가 끝나는 곳
그 고을 지나 이빨을 박을 수 있는 곳까지
가야 한다, 차갑고 딱딱한 공기가
나는 좋다, 어두운 밤이 오면
내 영혼은 자작나무의 육체로 환생한다
내 영혼의 살결을 비벼대는
싸늘한 겨울바람이 나는 좋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욕망이 고드름처럼 익어간다
눈에 덮인 깊은 산속, 밤새 눈길을 걸어서라도
뿌리째 너에게로 갈 테다
그러나 네 몸의 숲 속에는
아직 내가 대적할 수 없는
무서운 짐승이 산다


- 박 정대 시 ‘자작나무 뱀파이어‘
*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엔 아직도 음악 같은 눈이 내리지




세상의 밤은 모두 전등사 아래로 온다


대낮의 폭설과 폭설에 뒤덮인 세상의 지붕들을 이끌고 와서는
하루 동안 어깨 위에 쌓여 있던 눈발들을 툭툭, 팔만대장경처럼 전등 마당에 흩뿌려 놓는다


어둠과 함께 나의 生도 전등사 아래로 돌아온다


선수항 지나 반달 언덕쯤, 석모도 떠나가는 옛사랑의 뱃길 전송하던 눈발이며 허공의 유목민처럼 떠돌던 눈송이 몇 개도
어둠과 함께 전등사 아래로 와 깃든다


지상을 떠도는 눈발들은 지금 모두 전등사 아래로 온다


전등사에 밤이 찾아와, 누군가 오래 淑香傳숙향전을 읽는 밤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들도 다시 전등사 아래로 돌아오는데,


낮에 내리던 눈발 아직도 여전히 남아서 서성거리는 이 밤을
한 잔의 찻물 속에서 고요히 끓어오르는 이 겨울밤을, 잠들지 못한 내 마음이 끝내 불 밝히고 있는
이 地上지상의 전등寺 한 채


- 박 정대 시 ‘ 전등寺사‘
<파라 21>, 2004, 봄호





바람이 없으니 불꽃이 고요하네
살아서는 못 가는 곳을 불꽃들이 가려하고
있네, 나도 자꾸만 따라 가려하고 있네
꽃향기에 취한 밤, 꽃들의 음악이 비통하네
그대와 나 함께 부르려 했던 노래들이 모두
비통하네, 처음부터 음악은 없었던 것이었는데
꿈속에서 노래로 나 그대를 만나려 했네
어디에도 없는 그대, 어디에도 없는 생(生)
취해서 살아야 한다면 꿈속에서 죽으리


- 박 정대 시 ‘ 취생몽사 ‘




담배연기의 자정, 끓는 물에도 가능성은 없다
회전하는 환등기의 북회귀선 그리고 한 잔의 리스본
한 잔의 커피 한 잔의 겨울 한 잔의 당신
한 잔의 눈물을 마셔도 여기는 담배연기의 자정
끓어 넘치는 생각의 대양, 갈매기들의 주점, 괭이갈매기들의 북회귀선
한 통의 엽서 한 통의 유서 한 통의 국경 한 통의 노래
한 모금의 담배연기, 끓어오르는 물에도 가능성은 없다
밤의 북회귀선을 넘어가는 한 모금의 야간비행
편도선, 끓어오르는 열 점의 경계에서도 가능성은 없다
한 통의 구름, 한 병의 눈물, 한 잔의 리스본



- 박정대 시 '한 잔의 리스본' 모두




아네스 자우이의 영화, 우아하게 적셔주는 코미디 '레인'을 보면서 당신은 울었다

'히말라야, 바람이 머무는 곳'에 나오는 최민식을 보면서도 당신은 울었다

아네스 자우이, 아네스 자우이, 아주 이국적인 이름을 속으로 중얼거리며 나는 뭔가 울컥하는 마음을 명치끝 저편으로 자꾸만 삼켰다

영화관 밖으로 나오자 울컥울컥 우기의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나는 우산을 준비하지 않았으므로 그대의 우산 속으로 파고들었다

아네스 자우이, 아네스 자우이, 자욱이 물빛 안개가 깔리는 거리를 지나 우리는 코케인으로 걸었다

코케인에서는 밥 딜런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칠월엔 당신의 우산이 되어드릴게요

(그럼 팔월엔, 구월엔 누구의 우산이 될 건데?)

나는 묻고 싶었지만 묻지 않았다

영원은 모든 순간 속에 있었다

그래서 나는 진지하게 우기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타인의 취향에 대하여 생각하기 시작했다

타인의 삶에 대하여 생각하기 시작했다.




- 박정대 시 '타인의 취향' 모두






** 박 정대: 1965년, 강원특별자치도 정선군, 데뷔 1990년 문학사상 시 '촛불의 미학'

- 수상 2014.11.
제22회 대산문학상 시부문
제14회 김달진 문학상
제19회 소월시문학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