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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그 쓸쓸한 영혼

사색과 방랑의 시 - 이 병률.

길 찾아, 길을 따라서,,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
시들어 죽어가는 식물 앞에서 주책맞게도 배고파한 적
기차역에서 울어본 적
이 감정은 병이어서 조롱받는다 하더라도
그게 무슨 대수인가 싶었던 적
매일매일 햇살이 짧고 당신이 부족했던 적
이렇게 어디까지 좋아도 될까 싶어 자격을 떠올렸던 적
한 사람을 모방하고 열렬히 동의했던 적
나를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게 만들고
내가 달라질 수 있다는 믿음조차 상실한 적
마침내 당신과 떠나간 그곳에 먼저 도착해 있을
영원을 붙잡았던 적


- 이 병률 시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
[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 ], 문학과지성사, 2024.




감 하나 서리한 날이었다
고속버스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버스가 급정거하면서 덜컹하는 바람에
서리한 감이 앞으로 또르르 굴러갔다

어느 정도는 뒷자리여서
또 사람들이 많이 타기도 해서
나를 신경쓰지 않겠다 싶었지만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가방이 기울어지면서 바닥에 떨어진 감을 봤는지
빈 내 옆자리 건너편에 앉아 있던
한 어르신이 더 신경을 쓰는 듯 했다

감도 여행을 하는 중인 거야

나는 눈을 감고 그런 생각을 하다가 졸았다
버스가 도착하는 것 같아 눈을 뜨려는데
옆 옆 자리의 어르신이 손을 뻗어 나를 툭 치더니가리
키는 게 있었으니

  발밑에는 가만히 돌아와 멈춰 선
  감이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 이 병률 시 ‘낮달’




- 대륙에 사는 사람들은 긴 시간 동안 열차를 타야 한다
며칠 동안 열차를 타야 하는 대륙사람들은
만나고 싶은 사람이나 친척들을 아주 잠깐 동안이나마
열차가 쉬어 가는 역에서 만난다
그리고 그렇게 만나면서 사람들이 우는 모습을
나는 여러 번 목격했다

이번 어느 날,
저는 열차를 타고
당신이 사는 델 지나친다고
편지를 띄웠습니다

5시 59분에 도착했다가
6시 14분에 발차합니다

하지만 플랫폼에 나오지 않았더군요
당신을 찾느라 차창 밖으로 목을 뺀 십오분 사이
겨울이 왔고
가을은 저물 대로 저물어
지상의 바닥까지 어둑어둑했습니다


- 이 병률 시 ‘장도열차‘
* 시작, 2002 가을호




국을 끓어야겠다 싶을 때 국을 끓인다
국으로 삶을 조금 적셔놓아야겠다 싶을 때도
국 속에 첨벙하고 빠뜨릴 것이 있을 때도

살아야겠을 때 국을 끓인다
세상의 막내가 될 때까지 국을 끓인다

누군가에게 목을 졸리지 않은 사람은
그 국을 마실 수 없으리
누군가에게 미행당하지 않은 사람은
그 국에 밥을 말 수 없게

세상에 없는 맛으로 끓인다
뜨겁지 않은 것을 서늘히 옹호해야겠는 날에
뭐라도 끓여야겠다 싶을 때 물을 받는다


- 이 병률 시 ‘11월의 마지막에는‘
[바다는 잘 있습니다], 문학과지성사, 2023.




저녁에 숙소로 돌아와 누우려는데
무릎이 쓰리다

낯에 사진을 찍겠다고 무릎을 꿇었나보다

무릎 꿇는 법을 아는 사람이었던가
시에게 사람에게 세상의 내침에 무릎 꿇은 적 있던가
어떻게라도 한번 무릎을 꿇었다니
가뜩이나 서어한 마음 괜찮지 않은가

설산을 넘는 밤길
옆자리에 누가 있어 무릎이라도 닿을 수 있어서
무장 긴 길을 갈 수 있다면 낫지 않던가

낯선 곳에 들어섰는데 자리에 온기가 남아 있다면
그래도 밤을 생각하면 낫지 않던가


잊으면 낫지 않던가


- 이 병률 시 ‘마취의 기술‘
[찬란], 문학과지성사, 2010.




미술관 그림 앞에서
두 발자국 뒤로 물러나서 보라는 경고를 들었다

그 밤
낮에 본 사선의 빛 그림자가 자꾸 떠올라
잠을 못 이루다가
잠을 못 이룬 것이
그 빛 그림자에 겹쳐진 누구 때문인 듯하여
가까운 약속을 미루었다

밖에 나가지 말라는 말을 들었다

모두 다 사람 때문이겠지만
사람이 아니라 단지 과잉 때문이었다

나도 당신에게 과잉했었다

사람은 사람을 사랑하면 안 되는 것이구나
따위의 생각을 하게 된 요즘이라면
해가 뜨더라도 바깥에 나가
사람 그림자를 밟거나
사람의 그림자가 몸에 닿으면 안 된다는
말을 들었다

이 기분의 힘이라도 살아야겠다면
한없이 가벼워지라는 말을 들었다

자신을 만지라는 말이었다


- 이 병률 시 ’적당한 속도, 서행‘
[이별이 오늘 만나자고 한다], 문학동네, 2020.




양말에 구멍이 났다
그럴 수도 있는 일이라고 넘기려 했지만 신경이 많이 쓰였다

오래 있어야 하는 자리였고
많은 사람이 볼 수 있는 곳이었다
양말 구멍으로 내민 살이
꼭 그곳에 있기 싫은 내 얼굴 같았다

구멍이 나는 쪽은 항상 오를발이었다
신경쓰면서 살지 않았지만
신경쓰지 않아도 집요하게 한쪽에서만 구멍이 생겼다

하긴 사람만 없으면 그것도 별일은 아니겠지만
밖으로 나가 새 양말을 사서 얼른 신었다
신었던 양말을 벗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그 위에다 신었다

속옷을 두 장 입는 사람도 있다

가면과 가면은 겹쳐진다
쓰고 있는 가면 위에 다른 가면을 겹쳐 쓸 수도 있다

만두피가 생겨 만두를 빚을 일이 생겼는데
안에다 채울 것이 없어 냉동만두를 넣고 통째로 감쌌던 적 있다.


- 이 병률 시 ‘겹쳐서‘




문상 간 날 밤

문상 온 사람들이 엉거주춤 세워둔 차 한 대 때문에
늦도록 돌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상주들과 문상객 여럿이서
달빛이 내려앉아 더 무거워진 차를 들어 옮깁니다

누군가 구령을 앞세우면
한 뼘만큼 차를 옮기고

이영차 이영차 박자에 맞춰
한 뼘만큼 차를 옮기고

어떻게 신은 한 사람 안에다
한 사람을 들여놓게 만들었는지

상주들의 슬픔도 한 뼘씩 물러납니다
그럴 때마다 달의 바퀴도 한 뼘씩 옮겨집니다

이별합시다
이별합시다

예감을 받아들이는 일과
끊어지는 것을 잡지 않고도 몸이 기우는 것과

햇살도 기운도 없을 때에 헤어집시다
사무치게 치솟는 질량을 모른 척합시다

사설 없이 공명한 적막처럼
얇고 얇은 종잇장 둘이 겹쳤던 것뿐이니

잊읍시다
잊읍시다

이 별 위에
점 하나 찍읍시다


- 이 병률 시 ‘슬픔의 바퀴‘
[찬란], 문학과지성사, 2010.




막차를 기다리며 시간표를 올려다 본다

문적문적해진 시간들이
시간표에 적혀 있다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일까
시간을 되돌리려 몸을 비트는데
자신의 혈관에 스스로 부딪혀 금이 간
시각표 한 귀퉁이에 생긴 균열

그 틈에 나방이 앉아 있다

기차에 올라 사무치게 울었던 시간도
간간이 그 이유를 물었던 시간도
펜 뚜껑을 열자마자 질질 흐르는 잉크처럼
용케도 이유가 찾아지지 않았던 시간에도 금이 가 있다

누군가도 등짝 잃은 사람처럼 아무 멱살에 안겨
어디 뜨거운 굴속으로 폭풍 속으로 들어가자 했을까
그곳이 막다른 시간의 저곳이어서 틈은 벌어졌을까

시간 사용자들의 균열을 받아내고 있는
저 시간의 못들


- 이 병률 시 ‘열차 시간표‘
[ 찬란 ], 문학과지성사, 2010.




인류의 모든 비밀은 쓰레기가 안고 있지
입다 버린 것
먹고 소화하여 물로 내린 것
쓰다 헤어진 것

주인을 잃은 그 모든 것들은
한쪽에 치워진 채
말을 걸기만 하면
모든 비밀을 쏟아낼 듯 궁리가 많지

그러고 보면 비밀은 밤에 피어나지 않지
습하고 어둑하고 후미진 곳에서 입으로 숨을 쉬지

얼마나 스스로의 안으로 들어가겠다고
비밀로 걸어 잠그었을까

사람은 자신의 비밀을 상세하게 닮아간다지

그 씨 한 톨마저 없으면 우리는 쓰러지지
자신을 설명할 길이 없지

나의 비밀을 남의 비밀에 포함시키기라도 하면서
한 묶음 두었다가

세계가 다시 따뜻해지면
심어질 필요는 있지

그렇게 비밀이길 비밀이길 바라면서
갑자기 싹으로 치솟지 않기를 바라면서


- 이 병률 시 ‘비밀이 없으면 우리들은 쓰러진다지‘
[이별이 오늘만나자고 한다], 문학동네, 2020.




자면서 누구나
하루에 몇 번을 뒤척입니다

내가 뒤척일 적마다
누군가는 내 뒤척이는 소리를 듣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지구의 저 가장 안쪽 중심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자면서 여러 번 뒤척일 일이 생겻습니다
자다가도 가슴에서 자꾸 새가 푸드덕거리는 바람에
가슴팍이 벌어지는 것 같아
벌떡 일어나 앉아야 죽지를 않겠습니다

어제는 오늘은 맨밥을 먹는데 입이 썼습니다

흐르는 것에 이유 없고
스미는 것에 어쩔 수 없어서
이렇게 나는 생겨먹었습니다

신(神)에게도 신이 있다면 그 신에게 묻겠습니다

지구도 새로 하여금 뒤척입니까

자다가도 몇 번을
당신을 생각해야
이 마음에서 놓여날 수 있습니까


- 이 병률 시 ‘새’
[바다는 잘 있습니다], 문학과지성사, 2017.




언제 입었는지
한참 된 것 같은 셔츠 주머니 속에
몇 개 밥알이 뭉친 채로 마른 채로 들어 있다
칠칠맞게 밥을 먹다 흘린 건가

말라비틀어진 밥알을 꺼내
버리려다 말고 오래 만지작거리며 들여다본다

언제 한번은
셔츠 주머니에 단추 하나가 들어 있었다
늪지를 함께 걷던 당신이
내 셔츠에서 떨어진 단추를 주워 건넸다는 걸
더듬더듬하여 알게 되었다

넣어둘 것이 있어 주머니는 마음의 바깥이라던가
뒤집어 보일 수 있으니 주머니는 마음하고 다르다던가
있으면 아무 의미라도 되게
방 하나 심장 그쪽에 들여놓고 산다


- 이 병률 시 ‘셔츠 주머니’
[이별이 오늘 만나자고 한다], 문학동네, 2020.




사내 둘이서 힘차게 땅을 일구고 있었다
노동이 정성스러워 처음엔 그들의 땅일 거라 생각했다
알고보니 땅의 주인은 따로였고
그들이 사라지고 난 얼마 후
뿌려둔 씨앗과 구근들이 꽃을 피워 올리고 있었다
창문 너머 꽃밭을 소유한 사람은 따로 있었다
낯선 곳에 잠시 나를 묶어두었던 그 여름

그 여름 잊지 못한다
여름은 심부름을 하고 있었다

여름에는 여름을 묘사하려는 의지 따위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자주 섬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여름은 중요하다

서로의 창백한 안간힘을 알려주기 위해서라도
여름은 중요하다

그러나 사실은 여름이여
여름에는 저마다 슬픔의 목적도 다르겠다,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당신이여

다시 말하노니 여름은 풍만함과 그 내리막으로 중요하다
피가 없다면 서서히 몸은 없어지지 않겠는가
한여름의 단단한 땅에 힘을 다해 몸을 섞는 것은 중요하다


- 이 병률 시 ‘여름은 중요하다‘
[바다는 잘 있습니다],문학과지성사, 2017.




인연이 느슨해져서
꽉 물고 안 놓을 것만 같던 인연이 헐거워져서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뿐이라서
밤길을 걷고 걸었다

집으로 돌아오기보다는
집을 나서야 하는 게 마땅하지 않을까 싶어

밤길을 걷다 돌고 돌아서도 걷다가
머리를 밀어볼까도 생각하였다

우리는 단추 같은 존재들이기도 할 것이어서

같은 단추들과 나란히 배열을 이루다가도
떨어져 온데간데없이 잃어버리고 마는
단추 같기도 할 것이어서

도무지 헐렁해져서 어느 날 다시 입을 수 없는
벗어놓은 바지 같을 것이다

우리의 어떤 일 같은 것들은 단추가 되어
매달리기도 하고
우리의 아무 일 같은 것이 단추가 되어
느슨히 떨어지기도 하는

그 극명한 절정의
전과 후가 만들어낸 길을 걷다가

그만 실을 밟고 실에 감겨 넘어지면서
밤길을 걸었다


- 이 병률 시 ‘단추가 느슨해진다‘
[이별이 오늘 만나자고 한다], 문학동네, 2020.




고개를 든 것뿐인데
보면 안 되는 거울을 본 것일까

고통스레 관계를 맺은 기억들,
기억의 매혹들이
마지막인 것처럼 몰려오고 있다
이제 쓰거운 것이 돼버린 파문들을
단숨에 먹어치우고 끝내버리자는 것일까

하나의 지구를 녹이고
또 하나의 지구를 바꾸게 되었다
기억하고 있다면 기억하지 말라는 듯
우주는 새들을 풀어놓았다
무엇으로 다시 천지를 물들일 것인가를
곰곰이 생각한 듯

소멸하지 않는 기억의 우주를
쌓이고 쌓이는 외부의 내부를
어쩌자고 여기까지 몰고 와서는
안정하지 못하는 것일까

해를 보면 어두워지는
달을 보면 환해지는 기억들은
왜 적막하게 떠돌지 못하고
우주에 스미는 것일까


- 이 병률 시 ‘기억의 우주‘
* 시집 《찬란》




서로 가까이도 말며
말하지도 말라며
신은 인간에게 채찍 대신 마스크를 나눠주었다
사랑하지 말라는 의미였을까
입을 가만히 두라는 뜻이었을까

소리를 들리게 하지도 말며
소리를 내지도 말라며
사람들을 향해 사람들은 두번째 손가락을 세웠다

서로 얼굴을 비벼도 안 되고
국경은 넘으면 안 되고
잔재미들을 치워놓으라 했다

나눠 먹을 수 없으니 혼자 먹을 쌀을 씻었다
서로 떨어져 있으라는 신호에 재조립해야 하는 건 사랑이었다

마스크 안에서는 동물의 냄새가 났다
어떤 신호 같은 것으로 체한 사람들이
집 바깥으로 나가기를 참아야 했던 시절

몇백 년에 한 번
사랑에 대하여 생각하라고
신이 인간의 입을 막아왔다

계절이 사라진 그해에는 일제히 칠흑 속에 꽃이 피었다
공기에 공기를 섞어봤자 시절은 시들어갔다
사람들은 자신이 쓴 마스크를 태우면서 혀를 씻었다

마음의 손님들을 생각하다 손님들을 다 돌려보내고
창밖으로 펼쳐진
텅 빈 세기(世紀)의 뒷모습을 기록하려 애썼다
친구에게 부쳐도 도착할 수 있을지 모르는 국제엽서는 처음이었다


- 이병률 시 ‘숨’모두



당신이 물었습니다

내가 그곳에 도착하면 뭔가 필요한 것이 없겠냐구요

네팔에서 만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다시 만나기로 했습니다

그럼, 이파리를 모아주세요
하루에 한 장씩
아니면 며칠에 한 장씩도 좋습니다
그렇게만 해준다면 돌아올 때
그걸 가져다 문에 바르거나 창가에 놓아두게요

내가 도착하게 되면
그 나라의 나뭇잎들을 흔들어서
내가 알아볼 수 있게 해주겠어요?
그럼 나도 갈 때 한 장씩 모아서 가겠습니다
비행기에서 내리면서 그 이파리들을 어떻게든 흔들어볼게요
아마도 내가 가져가는 나뭇잎은 납작해져 있을 겁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주운 이파리들을
시집 속에 넣어둔답니다
사실 마음에 포개두기도 한답니다

그럼, 십이월에 찾아뵙겠습니다


- 이 병률 시 ‘그럼’
* 이별이 오늘 만나자고 한다, 문학동네, 2020




한 사내가 실을 들고 지나갔다
한 손에 든 실뭉치에서 실을 살살 풀면서
어딘가로 어딘가로 걸어가고 있었다

어느 끝에다 실을 묶어둔 것인지
어디부터 걸어온 것인지
실은 한 방향으로 길게 길게 풀려나가고 있었다

길을 가던 사람들은
실을 밟기도
실에 감기기도 했다

어느 길 중간에서 실에 걸린 사람들은
그 실을 끊으려고도 했지만
절대 그렇게는 끊어지지 않았다

얼마쯤이나 지났을까
실이 공중으로 들어올려지는가 싶어
눈으로 실을 따라가보는데
저멀리로 커다란 연이 떠오르는 게 보였다

인생에 실 하나를 묶어둔다면
인생 어느 귀퉁이에다 실을 묶어두고
어딘가로 어딘가로 마냥 길을 잃어도 되는 거라면


- 이 병률 시 ‘실’
- 이별이 오늘 만나자고 한다, 문학동네, 2020




좋은 풍경이라는 것이 풍경 안에다 어울리지 않는 것을 두
지 않는 것이라면

  어울릴 수 없는 나 같은 사람 따위는 얼른 물러나야지 싶
은 차에 내게 사진을 찍어달라 했다

  둘은 연인으로 보였으며 장대한 폭포 앞이었다

  이 풍경에 두 사람도 어울리지 않는다, 라는 생각을 잠
시 하고는

  사진을 찍어주고 가던 길을 가는 참이었다

  한 사람이 따라오더니 왜 둘이었는데 한 사람을 잘라놓고 찍었냐고 따지듯 물었다

  내 맘이 그래서요, 라고 사실대로 말할 걸 그랬다

  좋은 풍경 앞이었다


- 이 병률 시 ‘풍경을 앓다‘
  




오늘 저녁은 지갑 하나를 진행
집시 여자 세 명이 소매치기한 장지갑으로
성당 앞 무리 속에 머물다 사라진 한 동양인 남성의 것

신분증은 없고 두 장의 신용카드
LEE BYUNG RYUL, 서너 장의 명함 이름과 일치

전화를 연속해서 두 번 걸었으나 받지 않음

지갑 안에 든 내용물을 토대로 서류 작성 시작
라오스 화폐 삼만 키프
러시아 화폐 사백이십 루블
한국 화폐 삼만칠천원

접힌 메모지 두 장
그리고 얇은 흰 종이에 싸인 또다른 흰색 종이에는
활자 혹은 그림 같은 것이 붉은색으로 그려져 있음

지갑 통째로 투명 봉투에 넣고 밀봉

한번 더 전화를 걸고 받지 않아 퇴근
다음날 출근 후에 다시 전화, 역시 받지 않음

오전 열한시 십분 LEE로부터 전화가 걸려옴
여기가 어디냐 물어서 바르셀로나 13구역 경찰서라고 말함
여권을 가지고 방문하겠다 해서 경찰서 위치를 알려줌

오후 한시 삼십분경 그의 방문
지갑 안에 모든 것이 들어 있는 게 맞냐고 LEE에게 묻자
어떻게 있는 그대로 지갑이 여기로 와 있느냐고 물음

그가 번화가를 걷고 있을 때 여러 명의 집시가 접근했고
집시들의 행동이 이상해 수색을 하니 지갑이 나왔고
잠시 주위를 둘러보니 홀연 그가 사라졌다고 알려줌
이렇게 지갑을 그대로 찾는 건 나도 처음 본다고 알려줌

그 지갑에 든 빨간 글씨는 뭐냐고 LEE에게 물어봄
좋은 일을 가져다주는 종이라면서
사실 그는 그것 때문에 지갑을 찾으러 온 거라고 밝힘

오후 두시경 서류에 그의 사인을 받고 지갑 인계
인사하고 나가던 가 집시 여자 세 명은 어찌 되었냐 물음
저녁 무렵 훈방 조치될 예정이라고 알려줌
그가 다행이라고 말하고 웃으며 떠남


- 이 병률 시 ‘좋은 일’




햇볕이 좋아 뭐라도 하자 싶어
신문지 넉 장을 펴놓고 쌀을 널어 말렸다
잘 마른 쌀을 다시 큰 유리병에 담는데
쌀 틈 사이로
작은 개미 한 마리가 들어가 있는 게 보였다

본능적으로 공기가 많은 병의 위쪽으로
타고 올라올 거라 생각했던 개미는
한없이 아래로 내려갔다

다른 길로 멀리 펼쳐진 뜻밖의 길

개미를 살려내야겠다 싶어

살을 퍼내는 사이
그 얼마 안 되는 동안을 고투하지 못하고
개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숨을 놓은 것이다

몇 천 톨의 쌀에도 눌리지 않던 개미는
필사적으로 길을 잃었다
개미는 얼마 안 되는 공기의 밀도를
잘못 사용하기로 한 것이다

밥을 지으려 쌀을 씻을 때나
쌀뜨물 위로 떠오르는 개미를 지켜보게 될 것이며

개미의 최후를 지켜봤다는 사실 또한
수챗구멍으로 처리되겠지만

지금 내 이마에 닿는 공기가 아까의 공기보다
더워지고 있는 것은
한 마리의 개미 무게도 쌀 한 톨의 무게도
내가 모시고 사는 헛것의 무게보다 무거울 거라서다


- 이 병률 시 ‘정물‘



단 며칠을 살려고 빌린 이 집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기가 있는지도 몰랐던 나는
처음에는 그 소리가 어디서 나는지 몰랐다

누가 버스에서 주운 메모 한 장을 보고
중요한 메모인가 싶어 전화를 걸었단다
종이에 여기 전화가 적혀 있노라고 했다
내용이 뭐냐고 물으니
어느 나라 말로 쓴 것인지 몰라서 자기도 읽을 수 없노라고 했다
대체 이 사람은 왜 전화를 걸었을까
그냥 끊을까 하는데 이 종이를 버릴 수 없겠다고 말한다
너무 정성스럽게 손글씨로 썼기 때문이라고 했다

나도 이곳을 숙소로 잠시 쓰는 사람이라
어떻게 응대해야 하나 하다가
그것을 가까운 어디에 예를 들어 벽이나 나무 같은 곳에 붙여두라고 했다

알 수 없는 나라 말로 적은
아주 정성스러운 글씨라니
그래서 버릴 수가 없다니

내가 받으러 나갈 수도 있지만 받아서 뭘 하겠나 싶어
그냥 그 글씨를 사람들도 보게끔
정성스럽게 붙여두라고만 말했다

전화를 끊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전화벨이 울렸다
늦은 밤에도 몇 번이고 울렸는데

거두지 못한 마음이 쓰라렸는지
나도 모르게 목안에 끄응 하는 소리가 고였다


- 이 병률 시 ‘잘쓴 글씨’



어느 미용사가요
할머니 머리를 자른 다음 머리를 감겨드리려는데요
구부정한 허리가 영 뒤로 눕혀지질 않아
잠시 중단하고 커튼 뒤로 가서 엄청 울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미용사가요
한 소년의 머리를 자르는데
통 못 들어서 아예 말을 시키지 말아야지 했다가
오른쪽 귀에 아주 가까이 대고 말을 하니
그나마 알아듣더래요
그래서 왼쪽 머리를 자르다가도 할말이 있을 땐
돌아서 오른쪽으로 가야 했다는 이야기예요

그 미용사에게 머리를 자르는 중년의 사내도 있는데요
늘 개 한 마리를 데리고 오는데
머리 감길 때 작은 수건으로 사내의 눈을 가리면 개가 그렇게 울어요
얼굴을 가리고
혼자 우는 사내의 모습을 본 이후로 개가 그렇대요

사내는 개를 기르고 난 후에 단 한 번도 먼 여행을 못 갔어요
개가 죽자 사내는 텐트도 사고 코펠도 사뒀는데
지금껏 아무데도 못 간다는 이야기예요

미용사는 사람들의 아름다운 절정에 관여하면서 사는 줄 알았으나
의외로 애인들이나 만들고 있었대요

미용사는 미용실 문을 안으로 잠가 걸어놓을 거래요
그게 누가 됐건 한 사람 머리카락에 손을 대고 나면
그 사람에게 취하고 말았던 이유를
곰곰 생각하게 될 거란 이야기입니다

한 번도 제대로 그래본 적 없는
거울 안으로 성큼 들어가
벼랑 너머 바다를 내려다볼 거란 이야기입니다


- 이 병률 시 ‘미용사가 자른 것‘



봉투 하나가 배달되었고
나는 감염되었다

몇 번쯤 봉투가 배달되었을까

봉투를 여는 순간
한 세계가 끝이 나고
한 세계가 닫히는 걸 알았다

상상한 대로 봉투 안에는 열쇠가 들어 있었다
커피를 마실 수 있는 곳이라고 그 사람이 안내했고
그곳에서 지내며 내가 지녀야 할 태도에 대해 알려주었다
열쇠가 이것 하나냐고 내가 물었다

그 사람은 어디 갔을까
나와는 상관없던 사람
한철의 주인이었다

요란하게 한숨은 쉬지만 걸을 때 소리가 나지 않던 사람
길게 자란 머리를 잘라도 되냐고 물었던 사람은
인생의 어디쯤을 떠나고 있을까
어디쯤에서 맨발이 되어 발소리를 죽이고 있을까

올해의 일월 일일로 돌아가자고 했다
몇 달 전하고도 비슷한 계절이 지속되었건만
그래도 그 사람은 같이 돌아가자 했다

못 알아듣는 척했던 그 말과 거래할 때마다
나는 깊이 가라앉았다
차라리 그 말은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말이었을까

흘낏 보기만 했는데도
그 사람의 안주머니에 빈 봉투가 많았던 것이 자꾸 생각났다

그 사람에 관한 모든 것이 그렇듯
나와는 상관없는 사람
주인은 어디 갔을까


- 이 병률 시 ’애인‘



한 우주비행사는 달에 갈 때
휴대할 수 있는 개인물품 자격으로
〈신세계 교향곡〉이 담긴 음악테이프를 가져갔다

왜 〈신세계 교향곡〉이었을까
우주비행사는 자신이 한 행동이었음에도
그것이 두고두고 궁금하였다

왜 재생기도 없는데 테이프였으며
그 제목은 신세계였을까

단 한 번도 결투에서 진 적이 없던 한 무사는
하루종일 치러진 결투에서 최후의 칼을 휘두르다
나뭇가지 끝에 옷소매가 슬쩍 걸려 박자를 놓는 사이
상대의 칼에 찔렸다

무사가 줄곧 생각한 거라곤
자신을 흐트러뜨린 옷소매뿐이었다
왜 허리에 칼이 스쳐 큰 칼자국이 생겨났음에도
상대의 칼끝이 아닌 옷소매만을 생각했을까

생각해도 우리는 모른다

계속해서 끊임없이 전생까지 탈탈 털어
생각을 생물 대하듯 생각하면서 살아간다

나는 오후에 귤을 까면서
하염없이 귤껍질에 대해 생각하느라
귤의 맛이 어땠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하긴 아는 맛 따위를 뭐하러 생각하겠는가

옷을 걸어두라고 벽에 쳐둔 못을 생각한다
우리는 알지 못하겠는 것들을 그 못에 걸기도 하겠지만

뭐라도 알겠다고 온갖 열기를 쓰다가도
못에 걸린 그것을 그대로 두고
보이지 않는 안간힘의 상태를 더이상은 궁금해하지 않기로 한다

이제 달로 떠나야 할 채비를 마쳤으므로


- 이 병률 시 ‘달에 갈 때는 인생을 데리고 가지 말자‘




유리창을 없애려면 어디에 쳐야 하나
무엇에 부딪쳐서 창을 깰까
기다리고 기다리다 당신이 저멀리 나타나면
손 흔들어야 하나
등 돌려야 하나

배웅과 마중 가운데 무엇을 할까
당신이 오는 일이라면
당신이 떠나는 이이라면
이 삶을 열고 닫는 일
무엇이 나을까


- 이 병률 시 ‘의문’



원하지 않는 일에도 윤율은 있다

색깔을 구분할 수 없는 병에 걸린다면
노란색을 아무 색으로도 알지 못하고
당신이 좋아하는 색이 파란색임을 구분하지 못한다면

아픔에도 아름다움은 있다

그리하여 그렇게 눈을 감아도
당신이 내 눈 속에 살지 못한다면

당신이 돌아다니지 못한다면

어느 낯선 골목 안쪽 햇빛 아래에
쌓인 눈이 녹고 있다면
그런데도 많은 부분이 더 녹아야 한다면

눈의 주인이 애타게 눈을 기다리던 당신이라면

삶의 구석구석까지를 돌보는 일도 고단할 터인데
당신이 눈까지 만들어야 한다면

눈을 편애하는 당신에게도 수고와 미안은 있다
구불구불한 길이 좋은 당신
감정과 열정이 희미해진 당신

너무 바싹 말라 있거나 독이 올라 있는 몸 상태를 돌보느라
당신 사정이 더 참담해진다면

당신이 누웠던 자리를 정리하다가 비늘을 보았다
잔잔히 당신이 떠날 수 있다는 가정에도 운율은 있다


- 이 병률 시 ‘어떤 나이에 대한 걱정‘



새는 집을 짓겠다고 결정한 다음
마른 가지 하나를 물고 와 나무 위를 돌고 돌면서
마지막까지 주저하고 확인한다
정말 여기 집을 지어도 되는 것인가를
자신의 나머지를 맡겨도 될 공중의 한 뼘인가를

하지만 왜 꼭 그래야만 하는지
가늠할 수 있다면 그 새를 아주 오래 지켜보던
나쯤 되는 사내일 것이다

척추동물 가운데 가장 오래 사는
그린란드상어의 눈에 붙어 터를 잡고 사는 수중벌레는
상어 눈동자의 조직을 빨아먹으면서 평생을 산다
그래서 그린란드상어들 거의가 시력을 잃게 되면서부터는
심해에서 춥고 어둡게 살아간다

벌레가 오백 년도 넘게 산다는
그린란드 상어의 눈을 빌린 것은
오백 년을 같이 살겠다고 그랬던 것은 아닐 텐데
상어는 벌레가 죽고 나서도 아무데도 가지 못한다


- 이 병률 시 ‘집 ’



칼가게에서 칼을 골랐는데 이름을 새겨줄 수도 있다고 한다

시(詩)라고 새겼다

시를 베겠다고 칼을 산 건 아니었는데
끊어버릴 게 있어서 산 것도 아니었는데
며칠 동안 자연스레 물리치는 것들이 있었다

이 칼날과도 같은 시 한 편 남기고 가리라며
손잡이에 힘을 꼭 쥐어 잡은 김에
나는 살짝 목에다 칼날을 대보았다

원래 시는 칼이었을까

이 칼을 품고 꽃도 꺾고 산에도 오르리라
눈이 멀게 되더라도
뼈만 남게 되더라도
이 칼에 매달려 힘을 분배해 야채와 고기를 자르고
모두를 자르리라

아주 시시한 어느 날에는 시에게 한 칼을 먹이고
나 대신 이 칼을 던져 착지하게 하리
내가 날린 이 칼이 꽂히는 곳에 광맥이라도 터지게 하리


- 이 병률 시 ‘ 시(詩)칼‘




당신은 나에게 아무것도 아니리라
그러므로 나는
아무것으로도 이름 부르지 않으리라는 약속을
당신에게 해야겠다

내가 당신을 불러야 할 호칭은
이제껏 무엇으로도 중요하지 않은 것 때문이겠지만

형이라 부르면 좋겠으나 형이라 부르지 않겠다
누나라 불러도 아버지라 불러도 무방하겠으나
어머니라 부르지도 않겠다
선생이라 불러 식음(食飮)하는 일의 준비를 한다 해도 좋고
당신 앞의 쓸 만한 꽃이 되어도 좋겠다 싶지만
그렇게도 않겠다

사막에 혼자 갔을 때 봤듯이
그곳의 사라진 돌 바위들과
그곳에서 사라진 거대한 무덤들과
그리고 이미 그전에 사라져버린 왕조까지도
모두 모래가 되었다

사랑을 앞세워
무엇도 이름하지 않으리라

지금들, 그리고 여러 많은 광채들
그뿐

무엇이더라도 필요치 않으니
당신은 그대로 가만있으라


- 리 병률 시 ’자유의 언덕 ‘




아침 일곱시 십사분을 가리키는 시계를 보는데, 라디오
진행자가 막 그 시간을 알려줄 때

  강가에서의 내 기억과 당신이 기억하는 장면이 일치할 때

  떠나고 싶은 날과 헤어지고 싶은 날이 같을 때

  오 분 동안 한 사람의 전부를 안다는 게 가능해, 라고 내
가 물었을 때

  아침에 일어나면서 머리로 떠올린 단어 하나를 막 펼쳐든 신문에서 마주칠 때

  담장의 꽃나무를 만져보려 손을 뻗는데 가로막으며 당신
이 나타날 때

  소나기 내리는 소리와 저 먼 곳에서 눈이 온다는 소식이
겹칠 때

  영 세상에 자신이 없을 때와 그래도 연필로 선을 그어서
라도 연결하고 싶을 때

  원고지에 조용히 손가락을 베는 순간과 눈을 감고 있던 당신이 눈 뜨는 순간이 같을 때


- 이 병률 시 ‘눈물이 핑 도는 아주 조용한 박자‘




산에 올랐다가 내려오는 길이었다

산사에 불공드리러 온 듯한 할머니
내려가는 길이 위태롭다
하여 나란히 보폭을 맞춘다

할머니가 쉬면 나도 쉬고
나무도 쉰다

할머니가 내리막길을 내려가면
나도 내리막길을 뒤따라 내려가고
계곡물도 내려간다

잠시 바위에 걸터앉아 쉬던 할머니가
갑자기 나에게 사진을 찍어달라고 한다
아무 말 없던 분이, 첫마디가 그랬다

나는 무엇으로 찍어드려야 하나 망설이다
휴대전화를 달라고 말하지만
그런 거 없다고 하신다
옷매무새를 만진 할머니는 자세를 정하고
나는 휴대전화로 사진을 찍는다

사진, 어떻게 전달해드릴까요
아드님 전화번호 알려주시면 그리로 보내드릴까요

찍었으면.

됐다.

무릎뼈를 저 위에 두고 왔던가
그 소리에 나는 그만 엉켜 있던 체기가
풀린다, 풀린다, 풀린다


- 이 병률 시 ‘풀리다‘



싸늘한 표정 없이 최대한 웃으려고 마음을 먹으며
나는 내 장례식장에 가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테이블보 위에 머리카락이 보여 쓰다듬듯 떼어내려는데
반투명의 비닐 테이블보 밑에 겹쳐서 깔아놓은
다른 테이블보에 들어 있는 머리카락,
차려진 음식 접시들을 이동시키고
테이블보를 살짝 들어 걷어내자니
하필 머리카락이 상 정중앙에 있다

음식이 담긴 접시들을 다 내린 다음
테이블보를 벗겨낼 수도 없고
접시로 그것을 가려놓자니
다음 자리를 생각하면 치워야 할 것 같고

돌에 돌이 박혀 있는 형국이다

내가 자리를 떠난 뒤 누군가는 아무렇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괜찮지 않은 그것

나는 나에게 문상 가서
남의 머리카락만 바라보고 앉아 있다

나는 살아 있을 때
검은색 위에 붙은 검은 머리카락을 잘 보는 사람이었던가
나는 살아서
흰색 옷 위에 튀어나온 흰 실만 잘 보는 사람이었던가

중요한 거였다면 영혼이 알아서 물고 가는 법일 텐데
나는 이 머리카락을 꺼내지 못하고 있다

나에게 문상 가서 나의 끝은 어떤 모습일지 보려 하였다

바람이 가벼이 불어올 무렵이었다


- 이 병률 시 ‘나의 장례식에 가서‘




손님 예약이 다 차지 않은 날에는
빈방을 돌며 잠을 잤다
내 관리 목록에는 다섯 채의 집과 여덟개의 오피스텔이 있다
깨끗한 침대를 어지럽히기 싫은 날은 침대 아래에서 잤고
청소가 다음날로 미뤄진 집에서는
침대 위에 그대로 누워 잤다

이래도 되는 삶은 있다
사람들이 남기거나 버려두고 간 음식들을 먹었고
잊고 간 옷들과 입고 버리고 간 수치들을 빨아 입었다

오 일에 한 번 집들을 돌며 나무 화분에 물을 주는 날에는
열매가 열리기를 바랐다
침대에 누워 다른 사람이 벗어둔 냄새들 때문에
잠들 수 없는 날도 있었다
잠을 자는 것이 아니라 삶에 갇혀 지냈다

그날도 누군가 주방에 남겨둔 달걀을 삶았다
비밀이 괜찮은 것인지 보려고
속으로부터 익어가는 것들을 갈라봤다

빈집 식물에 물 주러 갔다가
그곳에서 지내는 횟수를 늘릴 때마다 꿈을 꾸었다

빈집인 줄 알고 문을 벌컥 열 때마다
사람이 들어 있는 꿈이었다


- 이 병률 시 ‘빈집 식물에 물 주는 사람 ‘



1
아, 전철 타는 곳에서
한눈에 봐도 허술해 보이는
나이가 어느 정도인지 분간은 안 가지만
꼭 아이라고 불러야할 것 같은 아이

가방을 열어 물병을 꺼낸 것까진 좋은데
보통은 비닐을 벗겨낸 소시지를
사람들 앉는 의자에 올려놓지는 않는단다

물병을 딸 때는 보통 그 반대로 돌려야 하는 거지,
그쪽으로는 안 열려서 애써 이빨까지 동원하고 있구나

아, 전철이 도착하면 보통은 모두들 타건만
너는 어디를 가려고 문이 닫히도록 타지를 않는 거냐

전철을 타고서도 아이 생각을 하다가 한강을 넘는데
유리창에 비치는 내 얼굴

2
다시 태어난다면
어떤 사람으로 태어나고 싶으냐고 물었는데
청년은 대답했네

지금의 나로 태어나겠어요
나는 지금의 내가 꽤 좋거든요

여파가 흐트러졌네
거짓말 같아서 죽지 않겠다는 말로 들렸네

나도 그랬던 적이 없지는 않았으나
많이 써먹어서 너덜너덜해진 거짓말의 거짓말이나 늘어놓았으니
다시 나로 태어나겠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네

내 피의 색깔을 흑백의 것으로 고를 수 없을 것이기에
내 피를 썰물 빠지듯이 내보낼 수도 없을 것이기에


- 이 병률 시 ‘다시 태어나면 ‘
* 이별이 오늘 만나자고 한다, 문학동네, 2020



셋이 좋겠다
닭 한 마리를 삶아 세 등분해서 나눠 먹는 일
그러다 양 한 마리를 기르기로 결정하는 일

결혼이어도 좋고
결혼 따위가 아니어도 좋겠는 일
당근을 씻어 셋이서 갈라 먹는 일

그 어떤 성(性)의 조합도 중요하지 않은 세 사람이면서
식탁 위에 뜨거운 물과 차거운 불이 올려질 적마다
서로를 향하고 각자를 향한 각도를 의식하며

아기를 낳게 된다면
아이를 키우는 일을 마치 가슴에 귀를 대는 일처럼

정신의 군살이 늘어나는 계절에도
서로에게 삐그덕대지 않으며 섭섭하지 않게
셋이 살면 어떨까 싶다

너의 것과 너의 것이 아닌 것을
극명하게 나누는 일 따위도 그만두고

마주잡은 세 사람의 손으로 인해
동시에 세 사람에게 한 감정이 침투한 경우는
아직 세상에 없다는 가정으로 셋이서 살면 좋겠다

셋 중에 둘이 남겨지는 일은
좀더 안정적일 것이고
자전거를 타고 떠난 새벽의 뒷모습이
비극이 아닌 특별한 모습으로 자리할 것이며

각자 철저히 혼자가 되더라도
창틀과 벽 사이에서 흐느껴대는 깊은 밤의 복잡한 소리와
어느 날 그날에 서로의 내부로 잡아들던 빗소리를
나란히 따로 선명히 기억할 수 있는

셋이라면 좋겠다


- 이 병률 시 ‘셋이서 사는 게 좋겠다‘





하루 한 번 삶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당신 얼굴 때문입니다

당신 얼굴에는 당신의 아버지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지
나갑니다
어머니도 유전적으로 앉아 있지만 얼굴을 자세히 보면
누구나 그렇듯 얼굴만으로는 고아입니다

당신이 본 풍경과 당신이 지나온 일들이 얼굴 위에서 아
래로 차곡차곡 빛납니다
  눈 밑으로 유년의 빗금들이 차분하게 지나가고
  빗금을 타고 표정은 파도처럼 매번 다르게 흐릅니다

얼굴은 거북한 역할은 할 수 없습니다
안간힘 정도는 괜찮지만 계산된 얼굴은 안 됩니다
바다의 얼굴을 보여주세요

당신 얼굴에 나의 얼굴을 닿게 한 적 있습니다
무표정한 포기도 있는데다 누군가와 축축하게 헤어진 얼
굴이어서 그럴 수 있었습니다

당신 앞에서 이유 없이 웃는 사이
나는 당신 얼굴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얼굴에 얼굴을 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는 하루 한 번 당신과 겹쳐지는 삶을 생각하게 되었습
니다


- 이 병률 시 ‘ 얼굴’






마취 시킨 다음 통 말을 듣지 않게 될
나를 데리고 가서
사흘동안 눈 속에 갇힌 사람처럼
그렇게 있다가
가지 않았던 길에 대해 고민할 것이다

그리고 사라지자

이번 생의 등판번호가
45라 하더라도
이번 생의 번호가
11b라 하더라도
영원히 지휘자를 만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원래 손상되거나 훼손되기로 약속되어 있었으니
반드시 사라지자

아무리 이 삶이 틀렸다 하더라도
우리는 사라질 때 열쇠 하나를 숨기고
그 또한 의미가 될 거라는 순리를 기억할 것
그리고 내 열쇠는 누가 줍게 되는지 염두에 둘 것

압축되어 당당히 사라지자

당신도 원래 바다였다
당신이 어떤 세월에 휩쓸리다 살 곳을 정했다고
흐르지 않게 될 거라고는 생각지도 마라

모든 산은 바다였다
산의 정상에서 조개껍데기가 발견된다고
누군가 가져와 흘렸다고 생각하지 마라


- 이 병률 시 ‘사라지자 ‘



문상을 다녀오는 체감온도 영하 십육 도의 추운 밤
경사진 도로에서 차로 뛰어드는 여자를 보고 놀라 급히 차를 세우는데
뒷자리에 타자마자 '가양동 2단지'를 외치는
택시가 아니라 해도 슬프도록 코를 골며 잠을 청하는
화장품 냄새 반 술냄새 반에 전 난취의 여자
그래도 내리라 하지 않고 조심스레 차를 몰 수 있었던 건
당신처럼 갈기갈기 사지가 찢긴 채
누군가 나를 데려다 눕혔으면 했던 의식을 부탁해왔기 때문이다

가양동 2단지 앞에서 차를 세운 영하의 밤
잠든 여자를 깨운다 눈인사도 한마디 말도 없이
아무렇게나 벗어놓았던 목도리를 반듯하게 개어놓고
휘청휘청 아파트 단지 안으로 발걸음을 떼어놓는 여자
여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자리를 뜨지 못한 건
나도 벼랑 끝에 살며 당신처럼 핏발의 냄새 풍긴 적 있기 때문이다
이상하게도 춥지 않다 싶게 집으로 되돌아오는 밤
무언가 하얗게 시야를 덮쳐 급히 차를 세웠더니
도로에 떨어져 휘날리고 있는 두루마리 휴지
인사 대신 남겨둔 여자의 목도리처럼
매운 바람 속에서 하얗게 몸을 풀며 구르다
놀라 멈춰 선 차를 감싸며 흐느끼고 있다
가지런히 양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차 안에서 눈 감을 수 있었던 건
나도 당신처럼 머리를 풀고 누군가의 품에 안겨
마지막인 양 파닥이고 싶었던 적 있기 때문이다


- 이 병률 시 ‘벼랑을 달리네 ‘
[당신은 어디론가 가려한다], 문학동네, 2003.



햇살은 그런대로 칠월의 사고들을 비추고 있습니다

날개 없는 새가 그리 날아갈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동안
칠월은 가난했습니다
더군다나 한 번도 무언가에 쓸려갈 거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 생은 도처에 나를 너무 낳았습니다
어쩌면 나를 버릴 때도 올 것 같아서였습니다

차도 위 사람이 쓰러져 누운 형태로
그어진 흰 선 모양은
칠월을 지나는 길에 누워 있는 나입니다
언젠가 한번은 수박 더미가 깨져 뒹굴던 그 자리임이 분명합니다

그렇게 힘이 든다면 안녕,
햇살은 일부분을 지우는 나를 주위 깊게 비추고 있습니다

흰 줄 아래
날개를 퍼득이며 나는 뒤틀리고 있습니다
없어지고 있습니다

강이 보일 때까지 달리자던 약속은 끊고
안녕,
칠원은 가난했습니다


- 이 병률 시 ‘팔월‘
[찬란], 문학과지성사, 2010.



그대가 일하는 곳 멀리 자전거를 세우고
그대를 훔쳐보는 일처럼

반쪽의 반쪽밖에 안 되는 나는
비겁이라는 꽃 이파리 머리에 꽂고
시시덕시시덕 오늘도 얼마나 비겁했던가요

당신이 자전거 쪽으로 다가와
우산을 버리고 돌아설 때에도
나는 비겁을 뒤집어쓰고 몸을 돌려 서 있습니다
그 자리에 당신 그늘이 생깁니다

천 년에 한 번 사랑을 해서 그런 거라고
그게 아니라면 머릿속에 그토록 많은 꽃술이 매달릴 수가
천 년에 한 번 죽게 될 테니 그렇게 된 거라고
아니면 그토록 한 사람의 독으로 서서히 죽어갈 수야

혼자인 것은 비겁하지 않은데
당신을 훔쳐보는 일은
당신 하는 일 앞에서 비겁한 일이어서

십 년을 백 년처럼
당신을 보러 이곳에 오고
당신은 어느 바다로 흘러가지도 않으며
무슨 일이 있는지도 모릅니다

아무도 주차할 수 없는 구역에
단독 주차하는 나를 위해
마냥 봄처럼 십 년을 당신이 있습니다


- 이 병률 시 ‘낙화 ‘
* 눈사람 여관, 문학과지성사, 2013



어느 날 모든 비밀번호는 사라지고
모든 것들은 잠긴다

풀에 스치고 넘어지고
얼굴들에 밀리고 무너지고

감촉이 파이고
문고리가 떨어지기도 했다

그는 오래 빈집을 전전하였으나
빈창고 하나가 정해지면 무엇을 넣을지도
결심하지 못했다

돌아가자는 말은 흐릿하고
가야 할 길도 흐릿하다

오래 교실에 다닌 적이 있었다
파도를 느꼈으나 그가 허락할 만한 세기는 아니었다

서점 이웃으로도 산 적이 있었다
경우에 따라 두텁거나 가벼운 친밀감을 스칠 뿐이었다

오래 붙들고 산 풍경 같은 것은 남아 있었다

중생대의 뼈들이 들여다보이는 박물관 창문 앞을 지나는 길
늘 지나는 길인데
보내고 보내고 또 보냈을 법한 냄새가 따라 붙었다

'여기'라는 말에 홀렸으며
'그곳'이라는 말을 참으며 살았으니

여기를 떠나 이제 그곳에 도달한할 사람


- 이 병률 시 ‘노년 ‘
[바다는 잘 있습니다], 문학과지성사, 2017.



한 무리는 행복을 숭배하고
한 무리는 그렇지 않은 쪽으로 방향을 잡고 산다

이쪽 줄의 사람들은 아예 감정이 없으며
저쪽줄의 사람들은 감정을 숨긴다

이 엄청난 사람들의 파도에 휘말릴 준비가 되었다는 듯
산소통을 메고 서 있는 한 청춘

걸음을 내딛는 순간부터 회오리바람을 만날 것이니
피할 수 없을지라도
이내 끝나고 말지라도

이번 생에는 한 덩어리의 완전한 혼자가 되어라


- 이 병룰 시 ‘다시 태어나거든 ‘
* 바다는 잘 있습니다, 문학과지성사, 2017




서로 좋아하는 저이들 사이에는
눈알 속에 소금기가 끼어 있는가 보다
그래서 저리도 저릿저릿하다는 듯 뛰고 있나 보다

서로서로 좋아하는 저네들 사이에는
불 같은 것이 자라고 있어
그래서 저토록 부비며 깎고 있나 보다

어질고 착하게 꽃들을 쓰다듬고
앙큼하게 뒷산도 오르며
저리도 좋아라 어깨 부딪히며
조금씩 조금씩 산을 훓어내리나 보다

그리하여 모든 이야기를 0에서 시작하고
사랑의 모든 시제는 미지의 것을 사용하나 보다

손으로 자신을 핥아서 스스로를 당부하고
그 손을 뻗어 여름 잎이 돋게하는 그것은
애쓰는 일이 아니라
불빛이 닿아서 되는 일

시림이 사람을 저리도 좋아하는 것은
오장육부의 빈 골을 채우는 일 같다
손으로 닿아서 통하는 것도 아닌
연기와 연기가 서로 하는 일

혼자서는 헐렁해서
자꾸 미끄러지는 비탈
도저히 그 막막을 어쩌지 못해
호릿호릿 구겨진 그것을 자꾸 펴려고 하나 보다


- 이 병률 시 ‘눈치의 온도 ‘
『눈사람 여관』중에서



어느 긴 밤
좋아하는 편지지를 앞에 놓고 앉았던
그때는 좋은 시절이었습니다
좋은 시절이었다는 말은
그 오래된 시간을 부를 수도
다시금 사용할 수도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누구도 편지를 부치지 않는 동안
건물은 헐리고 꽃밭이 줄고
습관은 습관이 되고

아무도 읽어주지 않거나
어딘가에서 분실되고 말지도 모를 편지를 쓰는
그 새벽에 새들이 울면
두 눈 가득 침이 고이던 시절

감히 만나자는 말을 적어넣고 풀칠을 했습니다
많이 미워한다는 말을 읽었을 때는 말을 잃었습니다
편지지라는 말이 사라져버린 세계의 빈 봉투처럼
돌아볼 단편의 증거가 없다는 것은

접지 않았으니
펼쳐야 할 것도
봉하지 않았으니 열어야 할 세계가 없다는 말입니다


- 이 병률 시 ‘새벽의 단편 ‘
* 바다는 잘 있습니다, 문학과 지성사, 2017



딛고 있는 발 아래쪽을 생각하다가
문득 아래가 여전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움직이고 있다는 걸 알았다

커다란 덩어리를
아주 물컹한 육체를 밟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이 사실도 엄청난 소문이 될 것이지만

발 아래는 움직이면서도 가만히 있어보라는 듯
그러면 잠시라도 눈을 맞출 수 있을 거라는 듯

눈썹 끝으로 겨우 처마 끝을 디딘 듯
잎사귀를 밟은 듯
멈칫 발은 놀라지만

여러 가지 경우를 대신해서
우리는 밟고 디딜 곳이 있어 나아질 것이라고 믿어왔다

우리가 딛고 사는 것은 알고 보면
고래의 뒤편이거나 고래의 심장 쪽
우리가 마시고 사는 것은 알고 보면
고래가 사는 수족관의 물

세상 끝에 살고 싶은 섬 하나가 있을 거라 믿는
잘못된 저녁에는
저마다 고래에서 내려
신발을 털고 가방 안으로 들어가서는
무심히 밥냄새를 핧거나
철저히 눈을 감는다


- 이 병률 시 ‘ 가방‘
* 바다는 잘 있습니다, 문학과 지성사, 2017



그런 적 있을 것입니다
버스에서 누군가 귤 하나를 막 깠을 때
이내 사방이 가득 채워지고 마는

누군가에게라도 벅찬 아침은 있을 것입니다
열자마자 쏟아져서 마치 바닥에 부어놓은 것처럼
마음이라 부를 수 없는 것들이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어서 버릴 수 없습니다

무언가를 잃었다면
주머니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계산하는 밤은 고역이에요
인생의 심줄은 몇몇의 추운 새벽으로 단단해집니다

넘어야겠다는 마음은 있습니까
저절로 익어 떨어뜨려야겠다는 질문이 하나쯤은 있습니까

돌아볼 것이 있을 것입니다
자신을 부리로 쪼아서 거침없이 하늘에 내던진 새가
어쩌면 전생의 자신이었습니다

누구나 미래를 빌릴 수는 없지만
과거를 갚을 수는 있을 것입니다


- 이 병률 시 ‘청춘의 기습 ‘



비밀 하나를 이야기해야겠다

누군가 올 거라는 가정하에
가끔 버스를 타고 터미널에 간다는 비밀 하나를

어디서 누가 올 것인지
그것이 몇 시인지

남의 단추를 내 셔츠에
채울 수 없는 것처럼 모른다

녹는 시간을 붙잡자며
그때마다 억세게 터미널엘 나갔다

한 말의 소금을
한 잔의 물로 녹이자는 사람처럼
출발하고 도착하는 시간들을 기다렸다

떠난다는 말도 도착한다는 말도
결국은 헛된 말일 것이므로
터미널에 가서 봄처럼 아팠다

나직하게 비밀 하나를 이야기하자면
가끔 내가 사라지는 것은
차갑게 없어지기 위해서다

이렇게 말하는 것으로 그동안의 오해가 걷힐 것 같아
최선을 다해 당신에게 말하건대
내가 가끔씩 사라져서
한사코 터미널에 가는 것은
오지 않을 사람이 저녁을 앞세워 올 것 같아서다


- 이 병률 시 ‘이구아수 폭포 가는 방법 ‘




바람이 커튼을 밀어서 커튼이 집 안쪽을 차지할 때나
많은 비를 맞은 버드나무가 늘어져
길 한가운데로 쏠리듯 들어와 있을 때
사람이 있다고 느끼면서 잠시 놀라는 건
거기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낯선 곳에서 잠을 자다가
갑자기 들리는 흐르는 물소리
등짝을 훑고 지나가는 지진의 진동

밤길에서 마주치는 눈이 멀 것 같은 빛은 또 어떤가
마치 그 빛이 사람한테서 뿜어나오는 광채 같다면
때마침 사람이 왔기 때문이다

잠시 자리를 비운 탁자 위에 이파리 하나가 떨어져 있거나
멀정한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져서 하늘을 올려다볼 때도
누가 왔나 하고 느끼는 건
누군가가 왔기 때문이다

팔목에 실을 묶는 사람들은
팔목에 중요한 운명의 길목이
지나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겠다

인생이라는 잎들을 매단 큰 나무 한 그루를
오래 바라보는 이 저녁
내 손에 굵은 실을 매어줄 사람 하나
저 나무 뒤에서 오고 있다

실이 끊어질 듯 손목이 끊어질 듯
단단히 실을 묶어줄 사람 위해
이 저녁을 퍼다가 밥을 차려야 한다

우리는 저마다
자기 힘으로 단지 못하는 문이 하나씩 있는데
마침내 그 문을 닫아줄 사람이 오고 있는 것이다


- 이 병률 시 ‘사람이 온다 ‘



산에서 사랑을 파낸다
새 떼처럼 마음이 운다

사랑에게 손을 뻗어 손을 달라고 했다
눈에 파묻힌 사랑은 손에 뿌리를 꼭 쥐고 있었다

사랑은 손을 내미는 대신 일생에 단 한 번
여름이 올 것이라고 했다
그 여름이 오면 대륙 깊숙이 이 뿌리를 심어달라 했다
그 뿌리 속에 최선이 들어 있다고 했다

치밀한 여름이 왔다
여름의 조각들이 대륙을 붙들지 못해서
사랑은 뿌리가 드러났다

한사코 표식을 드러내겠다고
겹겹의 세계 바깥으로 나오고 만
사랑의 뿌리를 파낸다
사랑은 뿌리여서 퍼내야 한다

뿌리가 번지고 번져서 파낼 수 없게 되어서
다시 되묻는다
온몸에 열이 펄펄 끓기 시작한다

사랑이 끝나면 산 하나 사라진다
그리고 그 자리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퍼다 나른 크기의 산 하나 생겨난다

산 하나를 다 파내거나
산 하나를 쓰다 버리는 것
사랑이라 한다


- 이 병률 시 ’사랑의 출처 ‘



우리가 살아 있는 세계는
우리가 살아가야 할 세계와 다를 테니
그때는 사랑이 많은 사람이 되어 만나자

무심함을
단순함을
오래 바라보는 사람이 되어 만나자

저녁빛이 마음의 내벽
사방에 펼쳐지는 사이
가득 도착할 것을 기다리자

과연 우리는 점 하나로 온 것이 맞는지
그러면 산 것인지 버틴 것인지
그 의문마저 쓸쓸해 문득 멈추는 일이 많았으니
서로를 부둥켜안고 지내지 않으면 안 되게 살자

닳고 해져서 더 이상 걸을 수 없다고
발이 발이 뒤틀어버리는 순간까지
우리는 그것으로 살자

밤새도록 몸에서 운이 다 빠져나가도록
자는 일에 육체를 잠시 맡겨두더라도
우리 매일 꽃이 필 때처럼 호된 아침을 맞자


- 이 병률 시 ‘이 넉넉한 쓸쓸함‘



있지

가만히 서랍에서 꺼내는 말
벗어 던진 옷 같은 말

있지

문득 던지는 말
던지는 곳이 어디인지 모르므로 도착하지도 않는 말

있지

더없이 있자 하고 싶은데
말할 수 없음이 그렇고 그런 말

있지

전기 설비를 마친 새 집에 등을 켤 때
있지, 라는 소리와 함께 켜지는 것 같아
소스라치게도 되는
하지만 들어도 들어도 저울에 올릴 수 없는 말

있지

그러다가도 그러다가도 혼자가 아닌 말
침묵 사이에 있다가도
말 사이에 있다가도
덩그마니 혼자이기만 한 말

있지

수상하고 수상하도록
무엇이 있다는 것인지
무엇으로 청천벽력을 가능하게 하겠다는 것인지
포개고 자꾸 포개지는
순박한 그 말에는 참 모두가 있지


- 이 병률 시 ‘있지 ‘
[바다는 잘 있습니다],문학과지성사, 2017.



이 말이 그 말로 들릴 때 있지요 그 말도 이 말로 들리지요 그게 마음이지요 왜 아니겠어요 몸피는 하나인데 결이 여럿인 것처럼 이 사람을 귀신이라 믿어 세월을 이겨야 할 때도 있는 거지요 사람 참 마음대로지요 사람 맘 참 쉽지요 궤짝 속 없어지지 않는 비린내여서 가늠이 불가하지요 두 개의 달걀을 섞어놓고 섞어놓고 이게 내 마음이요 저것이 내 맘이요 두 세계가 구르며 다투는 형국이지요 길이가 맞지 않는 두 개의 자(木+子)이기도, 새벽 두 시와 네 시 사이이기도 하지요 써먹을 데 없어 심연에도 못 데리고 가지요 가두고 단속해봤자 팽팽히 와글대는 흉부의 소란들이어서 마음은 그 무엇하고도 무촌(無寸)이지요

- 이 병률 시 ‘마음의 내과’
[찬란], 문학과지성사, 2010.



어질어질 떨어지는 저 꽃잎들은 미안해서도 떨어지고
힘이 없어서도 떨어질터인데
지나가는 아이들 동백나무 그늘로 들어가 동백을 따네
어디 달아놓을 데가 있을라나
도둑처럼 아이들 동백을 따네

아이들 양 손바닥 가득 열씩 스물씩 딴 꽃들을 담아
골목 끝으로 뛰어가는 길 위에
파르랑파르랑 동백꽃잎들 떨어지고
그 꽃들 밟지 않으려 나 가만가만 동백을 줍네

동백을 머리에 가슴에 얹고 물들기를 기다리는 동안
껴안을수록 내 욕심이 아니던 지난 저녁을 생각하는 동안

동백꽃잎 타는 자리 더워지더니 차오르더니
이내 나도 팽창하여 사방에 살점들을 흩날리네
햇빛이 기우는 냄새가 이리 진할라나
손으로 탄식을 후려치는 힘이 이리 매울라나
차고 허전한 마음을 살점이 덮네
동백나무 아래 나를 붉게 차려놓는 동안


- 이 병률 시 ‘동백 그늘 ‘
[바람의 사생활], 창비, 2006.



다 살고 치우고 나서야 알게 된다
찬장 뒤쪽으로 훤히 나 있는 뒷문을,
그 문 뒤로는 한여름에도 눈이 펄펄 날린다는 비밀을

한참을 열어놓고서야 알게 된다
처음의 처음까지 다 이해할 수 있음을
여진이 끝나고 나서야 알게 된다

그러고도 가끔은 자고 있는 중에 문이 열린다
열린 문이 열린다

봄날이 갈 것이다
그 사실을 보내는 동안 여름날도 갈 것이다
양손으로 상자를 받았는데 상자를 내려놓지 못하고
상자를 열게 되더라도
무엇이 뼈고 무엇이 옷이며 지도인지를 알지 못하고
우리가 죽은 다음에야 다 볼수 있으리

뒤늦게 더듬어서라도 다 볼수 있다면
아무것 없어도 아름다우리라고
대륙의 끝으로 자신을 끌고 가
한없이 데리고 울다 지친 이

그가 들썩일 때마다 뒷문이 울린다
조금은 알게 될 것이라고
그가 끄덕일 때마다 뒷문이 따라 열린다
비릿한 뒷일들도 문지방을 넘게 될 것이라고

갈라진 마음 끝에 빛이 들듯
그렇게 가을날도 갈 것이다


- 이 병률 시 ‘ 여진(餘震)‘
[눈사람 여관], 문학과지성사, 2013.



1
처음엔  지워버리려고도 처음처럼 살리려고도 하였지요
이렇게라도 조금은 알게 되겠네요
신발을 뒤집어 놓는 것으로
내가 사라지려는 것 고백하겠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일로 해주세요
참을 수 없어서 피었다 꽃도 그리 얼른 접는다지요
찾을 수는 없지만 갚을 수는 있어요
내일이 마중 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어서요
낯선 길이라면 누가 마중을 나오느냐에 따라
그 이후의 모든 길은 달라지지요
사라지는 그 길에 마중을 나오는 사람은 없겠지요


2
당신 사라지고 당신 주변사람들은
당신의 기물 앞에 앉아
당신의 비밀번호를 조합해나가기 시작합니다
노트북의 비밀번호를 찾는 사람들은 당신 생일부터 떠올립니다
휴대폰의 비밀번호를 도출해야 하는 동료들은
당신의 배후를 관심 있어 합니다
통장과 카드의 비밀번호를 더듬는 가족들은
당신이 했던 말들의 내력을 곱씹습니다
어쩌면 비밀번호에 바퀴를 달았다고도 생각합니다
미래는 잠겨 있습니까 라고 묻기도  합니다
한 사람이 사라지자 지구 전체가 조각을 맞추기 시작합니다


3
우리가 좋았던 날은 말입니다
다 말하기로 한 그날의 어제였습니다
그날은 그래 그런지 얼음도 녹아내리고
그런 틈을 타 하나둘 물결을 타넘었드랬습니다
어찌 그렇게 울퉁불퉁 쏟아지는 햇빛도 없이
어떤 보장도 없이 밀착되었는지요
자리를 비울 때도 전화기 비밀번호를 슬쩍 어림으로 눌러보면서
비밀이 깊숙이 가리키는 쪽은 어디 바다일까 생각했습니다
서로의 집 비밀번호를 나눠가지면서 우리는 상해갔습니다
우리에게 그래도 좋았던 날은 말입니다
절정의 기미 조금도 없는
비밀하고도 덧문 하나쯤 걸어두었던 다음 날의 감정이었습니다.


- 이 병률 시 ‘우리가 모른 척해야 할 몇 가지 ‘



한번 녹으면 영원히 얼지 못하는 얼음처럼
한번 아픈 것이 영원히 낫지 않는다
낫지 않으니 축적이다
독을 내몰고 새 독을 품으려니 갱신이다

이 몸이 불길을 지킬 것이니
몸아, 몸을 귀찮게 마라

피와 식사에 애틋하게 관여하고
영혼의 물을 흘리며
우리는 조금 더 늙겠지만

어쩌면 이토록 한 사람 생각으로
이 밤이 이다지 팽팽할 수 있느냐

저리도 곡선으로 떼를 지어 할 말이 많은 것은
우리가 어쩔 수 없는 곳으로 이끌리더라도
어쩔 수 없음을 알게 되는 것이냐
어제는 단어가
오늘은 전부가 생각나지 않는다

그리고 무슨 암시가 있으려나
사랑이 끝나는 자리에 한 번쯤 미리 다녀오라고
새가 자꾸 울어대더라도
살(煞)은 절[寺]이어서 명치가 깊다

몸살아, 다 그만두고
어떤 연애처럼
비밀 하나 입에 넣고 열지 말았으면
마음에 눈금을 표시해 거리를 기록해두었으면 한다
몸살아, 술잔 놓고 농담하러 가자

그러다 그러다 안 되면 허물어버린 것들이 쌓이고
묻어버린 것들은 돋아나기 시작하려나


- 이 병률 시 ‘ 몸살 ‘



나는 여럿이 아니라 하나
나무 이파리처럼 한 몸에 돋은 수백 수천이 아니라 하나
파도처럼 하루에도 몇 백년을 출렁이는
울컥임이 아니라 단 하나
하나여서 뭐가 많이 잡힐 것도 같은 한밤중에
그 많은 하나여서
여전히 한 몸 가누지 못하는 하나

한 그릇보다 많은 밥그릇을 비우고 싶어 하고
한 사람보다 많은 사람에 관련하고 싶은
하나가 하나를 짊어진 하나

얼얼하게 버려진, 깊은 밤엔
누구나 완전히 하나
가볍고 여리어
할 말로 몸을 이루는 하나
오래 혼자일 것이므로
비로소 영원히 스며드는 하나

스스로를 닫아걸고 스스로를 마시는
그리하여 만년설 덮인 산맥으로 융기하여
이내 녹아내리는 하나


- 이 병률 시 ‘혼자‘




받을 돈이 있다는 친구를 따라 기차를 탔다 눈이 내려 철길은 지워지고 없었다

  친구가 순댓국집으로 들어간 사이 나는 밖에서 눈을 맞았다 무슨 돈이기에 문산까지 받으러 와야 했냐고 묻는 것도 잊었다

  친구는 돈이 없다는 사람에게 큰소리를 치는 것 같았다 소주나 한잔하고 가자며 친구는 안으로 들어오라 했다

  몸이 불편한 사내와 몸이 더 불편한 아내가 차려준 밥상을 받으며 불쑥 친구는 그들에게 행복하냐고 물었다 그들은 행복하다고 대답하는 것 같았고 친구는 그러니 다행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믿을 수 없다는 듯 언 반찬그릇이 스르르 미끄러졌다

  흘끔흘끔 부부를 훔쳐볼수록 한기가 물려와 나는 몸을 돌려 눈 내리는 삼거리 쪽을 바라보았다 눈을 맞은 사람들은 까칠해 보였으며 헐어 보였다

  받지 않겠다는 돈을 한사코 식탁 위에 올려놓고 친구와 그 집을 나섰다 눈 내리는 한적한 길에 서서 나란히 오줌을 누며 애써 먼 곳을 보려 했지만 먼 곳은 보이지 않았다

  요란한 눈발 속에서 홍시만한 붉은 무게가 그의 가슴에도 맺혔는지 묻고 싶었다


- 이 병률 시 ‘외면 ’
* (바람의 사생활) 창비시집 270/2006



인사동에서
모임 장소를 찾고 있는데
어느 젊은이가
"꼬옥 안아드려요 Free Hug"
라고 쓰인 피켓을 들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안아주고 있었다
그는 전생에 풀밭에 사는 소였고
지나가는 사람들은
풀섶에 피어 있는 들꽃이었을지 몰라
꽃들은 제아무리 예뻐도
서로 포옹을 할 수 없기에
소가 긴 혓바닥으로
들꽃을 감싸 안아주었듯이

가슴을 내주지도 않고
두 팔로 끌어안지도 못하는 나는
소의 발에 밟혀 시들어버린 들꽃이었거나
쇠똥벌레의 입에 물려가는 들풀이었으리라

모임을 마치고 헤어질 무렵
누군가 포옹을 해주길 바랐는데
사람들은 막차를 잡으려 어디론가 달려갔고
등 시린 소 한 마리 혼자서
텅 빈 골목을 터벅터벅 걸어 나오고 있었다


- 이 병률 시 ‘포옹 ‘
[내가 뽑은 나의 시], 책 만드는 집, 2012



흰색이라 합시다
동네에 마을에 흰 장막이 드리워져 있다고 합시다

최초의 나무 한 그루가 우리 손발짓과
가리키는 곳을 관장한다고 합시다
손끝을 모은 한가로운 모든 것들을 흰색으로 칩시다

등대를 갖고 싶어하는 나와
번번이 망치로 머리를 맞는 기분이 드는 당신
모두 흰색에 가담되어 있다고 하자구요

삼켜도 미어지는 가슴뼈와
생을 세 번 거친 것과
후생을 한 번 다녀온 것
이 다행인 것 모두를 흰색이라 합시다

마음을 정돈시킨 사람들의 내력을
죽을 만큼 혼자인 것과
그리하여 둘을 만들고 마는 난장을

밥을 욱여넣는 것처럼 사랑할 때나
생각의 절반을 갈아치우게 하는 달력의 일들
모두가 흰색이었다 합시다

큰일이 아니었습니다
광장에 칼이 지나가는 것
흐르는 것을 어쩌지 못하고 흐르는 것
그 방향으로 모질게 허리가 굽는 것

흰색입니다


- 이 병률 시 ‘슬픈 전류 ‘



모든 열쇠의 방향은 오른쪽
열리지 않으면 반대쪽

우리가 인생을 조금 더 받아먹어야 한다면
차라리 불가능한 것을 믿자
우리는 절망에 사과한 적 없다

내가 나로 망하는 것
모두로 인해서가 아닌 오로지 나 하나로 침몰하는 것
그리하여 죽은 것도 아니고 살아가는 것 아닌 중간인 것
왔던 길 말고 돌아왔던 길 그 속에 인생인 것

그리하여 불가능한 것들을 읽고 쓴다
두 개의 다른 열쇠로 하나의 문이 열릴 것이지만
그 문 하나로
무엇을 무엇에게 넘겨줄 것이며
누가 누구에게 들어갈 수 있단 말인가

모든 열쇠는 주사위들 위에 앉아 있다
모든 예약은 불가능하다
맞추어야 할 뼈가 맞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다

모든 세계는 열리는 쪽
모든 열쇠의 할 일은 입을 막는 쪽


- 이 병률 시 ‘불가능한 것들 ‘
  * 격월간 《유심》2011년 5/6월호



난 삶은 달걀흰자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어요
어느 포장마차에서 달걀을 까는 나에게 그가 말했다
그건 힘으로 하는 일이 아니니까요

달걀흰자에 증오를 싣고
나머지 모든 것을 다 실어요
그 사람이 죽을 수 있을 정도로,
그러면 그 사람은 죽는 거예요

못이나 칼 같은
어떤 날카로운 거라면 이해할 수 있지만, 내가 말했다

부드러움으로 사람을 기절시킬 수 있어요
정반대의 것으로 사람을 정반대할 수 있다고요

노른자를 먹다 죽은 사람도 있다는데
흰자라고 사람을 살리지 못할까, 나는 생각을 삼켰다

쩡하니 달이 빛나는 골목길에 쪼그려 앉아 중얼거린다
아, 무엇으로든 무엇을 할 수 있다니
그자는 나를 태어나게 할 수도 있겠군요

오늘밤 비린내 나는 영혼을 만났으되
큰 날카로움을 피했다

한 치의 부서질 염려 없이 완전히 둥근 달
이 무례한 달빛만으로
죽을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이 고인다
그래도 툭툭
그자는 우주의 바깥은 견고하다는
농담 같은 전갈을 보내온다.


- 이 병률 시 ‘ 그자 ‘
* (시인세계)2011년 가을호



올 수 없다 한다
태백산맥 고갯길,눈발이 거칠어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답신만 되돌아온다
분분한 어둠속,저리도 눈은 내리고 차는 마비돼 꼼짝도 않는데 재차 견인해 줄 수 없다고 한다

산 것들을 모조리 끌어다 죽일 것처럼 쏟아붇는 눈과
눈발보다 더 무섭게 내려앉는 저 불길한 예감들을 끌어다 덮으며
당신도 두려운 건 아닌지 옆얼굴 바라볼 수 없다

눈보라를 헤치고 새벽이 되어서야 만항재에 도착한 늙수그레한 견인차 기사
안 그래도 이 자리가 아니었던가 싶었다고 한다
기억으로는 삼십년 전 바로 이 자리,
이 고개에 큰길 내면서 수북한 눈더미를 허물어보니
차 안에 남자 여자 끌어안고 죽어 있었다 한다

세상 맨 마지막 고갯길,폭설처럼 먹먹하던 사랑도 견인되었을 것이다

진종일 잦은 기침을 하던 옆자리의 당신
그 쪽으로 내 마음을 다 쏟아버리고
나도 당신 품을 따뜻해하며 나란히 식어갈 수 있는지


- 이 병률 시 ‘견인 ’
* (바람의 사생활/2006.11월) 중



줄자와 연필이 놓여 있는 거리
그 거리에 바람이 오면 경계가 서고
묵직한 잡지 귀퉁이와 주전자 뚜껑 사이
그 사이에 먼지가 앉으면 소식이 되는데
뭐 하러 집기를 다 들어내고 마음을 닫는가

전파사와 미장원을 나누는 붉은 벽
그 새로 담쟁이 넝쿨이 오르면 알몸의 고양이가 울고
디스켓과 리모컨의 한 자 안 되는
그 길에 선을 그으면 아이들이 뛰어노는데
뭣 때문에 빛도 들어오지 않는 마음에다
돌을 져 나르는가

빈집과 새로 이사한 집 가운데 난 길
그 길목에 눈을 뿌리면 발자국이 사라지고
전봇대와 옥탑방 나란한 키를 따라
비행기가 날면 새들이 내려와 둥지를 돌보건만
무엇 하러 일 나갔다 일찌감치 되돌아와
어둔 방 불도 켜지 않고
퉁퉁 눈이 붓도록 울어쌌는가


- 이 병률 시 ‘ 화양연화(花樣年華)*‘
*영화감독 왕가위의 작품 제목.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이 병률: 1967, 충북 제천시 출생
서울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 졸업
199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좋은사람들' 등단
MBC라디오 이소라의FM음악도시 작가

수상-
2021.12. 제8회 박재삼문학상
2018.09. 제6회 발견문학상
2006. 제11회 현대시학 작품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