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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사는 이야기

오월, 햇빛 찬란한 길을 걸어 나가며,

길 따라, 길을 걸어 가며,,





월리엄 블레이크*와 그의 시대와 시를 생각하며,
나는 걷는다.
법망이 뒤얽힌 거리를 빠져 나가며
마주치는 모든 눈동자 속에서
공포에 질린 피의자를 만난다.
신경을 감춘 모든 건물과
담 밑에서 만난 사람들이 웬일로
말없이 눈시울을 붉히고
등뒤에서 번득이는 보안등,
불빛이 이룬 가장 깊은 그늘을 본다.
사람들이 황망히 어둠 속으로 사라지면
문마다 빗장을 거는 소리,
집집마다 문틈에서 새어나오는
어둡고 비탄에 잠긴 한숨과
모든 침묵 속에서
나는 한시대가 이룩한
가장 두렵고 아픈 소리를 듣는다
월리엄 블레이크와 그의 시대와
세계의 다른 도시들을 생각하며
보고
듣고
그리고
나는 걷는다.


-정희성시 '길을 걸으며'전문




* William Blake: 삽화의 발전에 기여한 18~19세기 영국의 시인, 화가, 판화가로 주요 작품은 <무덤 속 예수 위에 떠 있는 천사들>과 <고대의 날들>. 10살 때부터 미술학교에 다니면서 르네상스 시대 대가들의 그림을 판화로 새기면서 독학했다. 왕립 아카데미에서 판화로 삽화를 그려 생활비를 벌었고, 독자적인 수채화 기법을 개발했는데, 이는 이후 그의 독창적인 삽화 시집을 제작하는 중요한 기술의 원형이 되었다. 그의 시집은 오랫동안 동료 미술가들과 시인들에게서만 인정을 받았는데, 예이츠와 엘리엇이 블레이크의 평론을 쓰면서 비로소 대중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가 만든 삽화 시집은 후일 문학적 가치로나 판화의 예술성에서나 진귀한 예술품으로 인정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