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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숲에 들다

이팝나무. 묘목원 [권승섭] 버스를 기다린다 신호가 바뀌고 사람이 오가고 그동안 그를 만난다 어디를 가냐고 그가 묻는다 나무를 사러 간다고 대답한다 우리 집 마당의 이팝나무에 대해 그가 묻는다 잘 자란다고 나는 대답한다 그런데 또 나무를 심냐고 그가 묻는다 물음이 있는 동안 나는 어딘가 없었다 없음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 같다 무슨 나무를 살 것이냐고 그가 묻는다 내가 대답이 없자 나무는 어떻게 들고 올 것이냐고 묻는다 나는 여전히 말이 없다 먼 사람이 된다 초점이 향하는 곳에 나무가 있었다 잎사귀로는 헤아릴 수 없어서 기둥으로 그루를 세야 할 것들이 무수했다 다음에 나무를 함께 사러 가자고 그가 말한다 아마도 그 일은 없을 것이다 언젠가 그를 나무라 부른 적이 있었는데 다시금 지나가는 비슷한 얼굴의 나무는 - 20.. 더보기
초록 세상. 초록을 말하다  조 용 미초록이 검은색과 본질적으로 같은 색이라는 걸 알게 된 것이 언제였을까검은색의 유현함에 사로잡혀 이리저리 검은색 지명을 찾아 떠돌았던 한때 초록은그저 내게 밝음 쪽으로 기울어진 어스름이거나 환희의 다른 이름일 뿐이었는데한 그루 나무가 일구어내는 그림자와 빛의 동선과 보름 주기로 달라지는 나뭇잎의 섬세한 음영을 통해초록에 천착하게 된 것은 검은색의 탐구 뒤에 온, 어쩌면 검은색을 통해 들어간 또 다른 방그 방에서 초록 물이 들지 않고도 여러 초록을 분별할 수 있었던 건 통증이 조금씩 줄어들었기 때문초록의 여러 층위를 발견하게 되면서 몸은 느리게 회복되었고 탐구가 게을러지면 다시 아팠다러시아 인형 마트료시카처럼 꺼내어도 꺼내어도 새로운 다른 초록이 나오는,결국은 더 갈데없는 미세한 초.. 더보기
가문비 나무, 잔설처럼 쌓여 있는 당신,그래도 드문드문 마른  땅 있어나는 이렇게 발 디디고 삽니다폭설이 잦아드는 이 둔덕 어딘가에무사한 게 있을 것 같아그 이름들을 하나씩 불러보면서굴참나무, 사람주나무, 층층나무, 가문비나무......나무 몇은 아직 눈 속에 발이 묶여 오지 못하고땅이 마르는 동안벗은 몸들이 새로운 빛을 채우는 동안그래도 이렇게 발을 디디고 삽니다잔설이 그려내는 응달과 양달 사이에서 - 나 희덕 시 ‘殘雪잔설‘[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창작과비평사, 2005(1994).치키치키, 빗방울이 16비트 리듬으로살아나는 광릉수목원에 가본 적 있나요수십 만의 히피나무들이 부동자세로입석 매진된 한밤의 우드스탁 말이예요레게머리 촘촘한 수다쟁이 가문비나무와짚내복을 사철 입고 사는 늙은 측백나무 사이우르르쾅, .. 더보기
미선나무 - 한국에만 있는 하얀 개나리. 푸른미선나무의 시 [고형렬] 저 충북 어디 가면 미선나무들이 많이 산다지 그녀들 이름은 상아미선나무 분홍미선나무 혹은 둥근미선나무라지 그중 푸른미선나무도 있다지 영원히 봄에도 푸른미선나무 여름에도 푸른미선나무라지겨울 눈이 좋지 않은 요즘도 푸른미선나무는자신의 미선나무지 나의 미선나무는 되지 않는다지 교목처럼 높지도 않고 위태롭지도 않아 키는 고작 일 미터향기도 짙지 않은 푸른미선나무는항상 기슭에 살아도 자신이 왜 푸른미선나무인진 모른다지 그 자리에서 거치 없는 잎사귀와 관다발만 수없이 만들었지만그 끝없는 사계의 반복만이 그의 산에 사는 즐거움이라지 처녀 같은 푸른미선나무들 자줏빛 반질한 가지 꽃봉오리는이듬해나 꽃 먼저 터트리는 푸른미선나무그 푸른미선나무는 충북 어디 산기슭에만 산다지        .. 더보기
주목나무 - 살아 천년, 죽어서 천년. 미안하다 4 [이희중] ―어린 주목(朱木)에게 내 마음이 어떻게 너에게 건너갔을까 나는 그저 네가 사는 자리가 비좁아 보여서, 너와 네 이웃이 아직 어렸던 시절 사람들이 너희를 여기 처음 심을 때보다 너희가 많이 자라서 나는 그저 가운데 끼인 너를 근처 다른, 너른 데 옮겨 심으면 네 이웃과 너, 모두 넉넉하게 살아갈 것 같아서 한 여섯 달 동안, 한 열흘에 한 번 네 곁을 지날 때마다 저 나무를 옮겨 심어야겠네, 라고 생각만 했는데 네가 내 마음을 읽고 그렇게 힘들어하는 줄 몰랐다 네가 스스로 자라기를, 살기를 포기할 줄 몰랐다 박혀 사는 너희들은 나돌며 일을 꾸미는 사람들이 성가시겠지 손에 도끼를 들지나 않았는지 마음에 톱을 품지나 않았는지 다른 까닭이 더 있는지, 사람인 내가 짐작하기 어렵지만 미안.. 더보기
메타세쿼이아나무 메타세쿼이아나무 아래서 [ 박라연] 메타세쿼이아 그대는 누구의 혼인가 내 몸의 뼈들도 그대처럼 곧게곧게 자라서 뼈대 있는 아이를 낳고 싶다 헤어질 때마다 우리는 서로의 빈 가지를 흔든다 주고 싶은 무엇을 찾아내기 위해서 슬픔을 흔들어 털어버리기 위해서 못다한 사랑은 함부로 아무에게나 툭툭 잎이 되어 푸르고 누구든 썩은 삭정이로 울다가 혼자서 영혼의 솔기를 깁는다 내가 내 눈물로 한 그루 메타세쿼이아가 되었을 때 쓸쓸히 돌아서는 뒷모습 빗물처럼 떨어지는 슬픔을 보았지만 달려가 그대의 잎이 되고 싶지만 나누지 않아도 함께 흐르는 피 따뜻한 피가 되어 흐른다 - 서울에 사는 평강공주, 문학과지성사,1993 아깝다 [나태주] 교회 앞 비좁은 길에 높다라히 서 있던 나무 한 그루 메타세쿼이아 처음 교회를 지은 목.. 더보기
모과 나무. 언제나 며칠이 남아있다 [위선환] 멀리까지 걸어가거나 멀리서 걸어 돌아오는 일이 모두 혼 맑아지는 일인 것을 늦게 알았다 돌아와서 모과나무 아래를 오래 들여다본 이유다 그늘 밑바닥까지 빛 비치는 며칠이 남아 있었고 둥근 해와 둥근 달과 둥근 모과의 둥근 그림자들이 밟 히는 며칠이 또 남아 있었고 잎 지는 어느 날은 모과나무를 올려다보며 나의 사소한 걱정에 대하여 물었으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아직 남은 며칠이 지나가야 겨 우 모과나무는 내가 무엇을 물었는지 알아차릴 것이므로 그때는 모과나무 가지에 허옇게 서리꽃 피고 나는 길을 떠나 걷고 있을 것이므로 치운 바람이 쓸고 지나간 며칠 뒤에는 걱정 말끔히 잊 고 내가 혼 맑아져서 돌아온다 해도 모과꽃 피었다 지고 해와 달과 모과알들이 둥글어지는 며칠이 또 .. 더보기
배롱 나무. 비움과 틈새의 시간 [곽효환] 푸르게 일렁이던 청보리 거둔 빈 들에 하얀 소금 덩이 같은 메밀꽃을 기다리는 비움과 틈새의 시간 배꽃과 복사꽃 만발했던 자리에 코스모스와 키 큰 해바라기 몸 흔들고 배롱나무 더 붉게 물드는 세상의 풀과 나무와 산과 강이 제각각의 빛깔을 머금고 뒤섞이는 시간 징검다리 여남은 개면 눈에 띄게 수척해진 물살을 건너 다음 계절에 닿을 듯하다 크게 물굽이를 이루며 사행하는 물살에 수없이 부딪히며 어질고 순해진 돌들에게서 거친 시대를 쓿는 소리가 들린다 흐르는 것이 어디 강뿐이겠냐마는 초록이 다 지기 전에 물길 따라 난 길이 문득 끊어진 강변 마을 어느 허술한 찻집에 들어 아직 고여 있는 것들 미처 보내지 못한 것들 함께 흘려보내야겠다 빠르게 질러가느라 놓친 것들 그래서 잃어버린 것들..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