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깎는 법 [김점용]
수평선을 잡고 걷는다
똑바로 걸으려 애쓴다
안 보이던 섬들이 문득 일어나 절뚝절뚝 줄을 잘라 먹는다
눈을 감으면 안 되는데
바람이 불 때마다 저절로 감긴다
왼눈은 감기지 않아 눈물이 난다
바다 저 멀리 끝에서 하얗게 메밀꽃이 핀다
수평선을 놓칠세라 꽃을 깎는다
눈물을 깎는다
대패는 장대패가 좋다 어미날에 덧날을 끼우고 손은
머리를 감싸듯 가볍게 잡되 오른손은 대패 뒤꽁무니와
구멍 중간을 단단히 잡는다 발에 무게중심을 두고 허리
를 숙인 자세로 무게중심을 오른발로 옮기며 살짝 당긴
다 눈을 크게 뜨면 눈물이 떨어질 수 있으므로 망막에
꽃잎이 비칠 듯 말 듯 눈시울의 힘 조절에 각별히 주의
한다
물새 앉은 자리처럼
누군가 다녀간 자리는 엇결리기 쉽다
눈을 다친 숭어 새끼가 뛴다
날이 튄다
눈동자의 먹선이 남아 있도록 깎는다 오른손잡이라면
왼쪽 끝에서부터 오른쪽 끝으로 순차적으로 이동하면서
깎아 나가야 눈알에 남게 되는 대패질 자국이 적다 수평선과 평행하게 이동하는 것이 원칙이며 대팻밥은 바깥쪽으로 흐르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성한 눈 안쪽은 둥근 대패로 마무리하되 재빠르게 처리한다
수평선을 들고 햇볕에 비춰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다시 걷기 시작한다
희망이 있다고도
없다고도
말해선 안 된다
사라진 왼쪽이 돌아올 때까지
눈물을 깎으며 눈 속을 걸어야 한다
- 나 혼자 남아 먼 사랑을 하였네 걷는 사람, 2020
메밀꽃 [이소율]
화려한 고뇌 없이
서로 마음 깃들어 핀 꽃
맨땅에 별들을 수놓은 꽃
외로움이 소중해
생각이 무거워 옹기종기 모여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거짓된 순정으로 웃지 않는
가녀린 고집
넉살 좋은 바람이 자주 들락날락 하지만
바람은 바람일 뿐 머물지 못한다
이어폰을 끼지 않아도
언제나 들려오는 나뭇잎 입술 오므리는 소리에
콧노래를 부르는 소녀들
아무리 바라보아도 눈멀지 않는
아무리 들어도 귀가 아프지 않아
가슴에 계속이 흐르는 깊은 산골
추억과 우정을 되감으며
차르차르 물레방아 돌리는 지지배들
도시에서 먼지처럼 떠돌기 싫어
산과 산이 맞닿은 계곡에
둥지를 튼 꽃보라
달빛 하얗게 쏟아지는 밤 흐르는 생리혈
줄기마다 빠알갛다
- 익명적 중얼거림, 현대시학사, 2018
가을 기차 [문인수]
들국 앉은 모습이 설핏 종지부 같다.
들국 가느다란 모가지 너머 저
빈 들 먼 끝머리
은빛 기차 한 가닥 천천히 가고 있다.
생각하면 엊그제
개나리 목련 피었다 서둘러 지고
라일락 진달래 아카시아 패랭이 분꽃 달리아 명아주꽃 장미
나팔꽃이 또 줄지어 겨우 겨우 따라왔다.
짧고 아름다웠던 보폭이여
어릴 적엔 그렇게 징검다리 건넜다.
아이들 여럿이 뒤뚱뒤뚱 건넜다.
아이들의 어린 동생들도 다 빠지지 않고 건너면
오, 꽃 자욱한 메밀밭
희고 자잘한 기쁨이 가슴에 들에 많았다.
그렇게 봄 가고 여름 간 것일까.
생각하면 엊그제
더 많이 어둡고 소란스러웠던 날들은
발목을 풀고 떠난 물소리 같은 것.
어느 날은 문득 뒤가 비어 있고
죄 없고 눈물 없는 것들만이 뼈처럼 이어져
이 큰 둘레의 가을을 건너가고 있다.
들국 앉은 모습이 설핏 종지부 같다.
- 뿔, 민음사, 2007
기억을 걷는 시간 [진란]
경복궁 서편 담장 근처의 은행나무들은
몽땅, 이브 몽땅의 가을이다
둥근 뜨락의 우람한 노목은 언제쯤
황금 동전을 짤랑거릴지,
은행나무 아래에서 기다리는 사람들
느리고 지루하게 즐기고 있는 것이다
황금의 은행이 되기를 기다리는 동안
오후 3시는 그리도 단풍을 희롱했던지
가을, 짙은 뜨락에 시나브로 낙엽은 쌓이고
성급한 누군가에 치워져서는
모퉁이의 자루에 담겨 흐느끼는데
가을 뜨락에 쓰러져 우는 게 나만은 아니었지
쑥부쟁이들 화라락 피었을 때도 한참 이뻤는데
시들어가는 꽃잎도 고풍스러워지는 시간, 그렇게
가을향 한잔을 마시다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
메밀꽃 필 무렵이라는 식당에는 아직도
메밀꽃이 피어있다 듬성듬성, 웅성웅성
내 집으로 가는 길인데 어디 가십니까?
사복경찰의 질문에 척척하던 나의 두 귀는
마른 꽃처럼 오래오래 버스럭거렸다
- 혼자 노는 숲, 나무아래서, 2011
메밀꽃이 인다는 말 [조용미]
메밀꽃이 인다는 말 아는지요
바닷가 사람들의 오랜 말로 하얗게 부서지는 포말을 어부들은 메밀꽃이라 부릅니다
흰 거품을 일으키는 물보라를 메밀꽃이 인다 하는데
그 꽃은 피는 게 아니라 이는 거예요
피는 꽃이 스러지는 꽃을 알 수 있을까요 지는 꽃이 일어나는 꽃을 숨 쉴 수 있을까요
먼 파도에서 일어나는 물거품을 나도 이 순간부터 메밀꽃이라 부르기로 합니다
잠에서 일어나고 연기가 일어나는,
먼지가 일어나고 두통이 일어나는,
아지랑이가 일어나고 혁명이 일어나는,
산불이 일어나고 지진이 일어나는,
불꽃이 일어나고 모래바람이 일어나는
일어나고 일어나 스러지고 또 스러져 다시 일어나는
그 꽃을 당신은 벌써 알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마음이 일어난다는 말은 어떤가요
메밀꽃처럼 흰 거품을 일으키며 솟구쳤다 스러지고 또 스러지는 이 마음 참 오래되었지요
메밀꽃이 또 인다고 당신께 소식 전하지는 못합니다
그저 메밀꽃이 피고 졌다 말할밖에요
북쪽으로, 매서운 메밀꽃이 이는 한겨울의 바다로 가만히 당신을 보러 갑니다
- 기억의 행성, 문학과지성사, 2011
마음 허공에 창을 달다 [이기철]
창을 달자 첫 내방객은 햇빛이다
내 시의 첫 글자는 햇빛
그 아래서 바람은 생을 건축한다
하루는 태양의 분말이라고 쓰고
그 뒷 구절은 침묵
작년 겨울 묵호에 가서 배웠다
모든 독자는 형안(炯眼)이라는 걸
스무 개의 어휘밖에 몰랐던 날의 글쓰기는 차라리 순수였다
지금의 이 난필들은 허위일까 그러나
그렇다고 답하기에는 내 믿음을 못 질했던 진실이 아프다
사색의 둘레에 핀 꽃을 말하는 방법을 알기 위해
모세의 혈관을 일으켜 시를 썼던 날들
독자여 그대는 왜
시인의 기쁨을 읽지 않고 비애만 읽는가
금계랍* 같은 세월 속을 걸으면서도
메밀꽃 같은 생각들을 피웠던 길 위의 시간들을
나는 내려놓지 못한다
정거장은 쉽사리 나를 버리고 새 사람을 갈아 태우지만
나는 지나온 정거장들에 흩어진 넝마와 같은 추억을 잊지 못한다
내 서른 해를 머물렀던 학교를 정거장이라 하기엔
그 계단과 칠판 앞에 버린 발자국의 앙탈이 눈물겹다
그러나 다시금, 그곳도 내 안주처가 아니었다는 사실이 나를 아프게 한다
잠들지 말라고, 생이 길지 않다고
산 것들의 정수리에 퍼붓는 햇빛 폭포
그것으로 생을 찬양하기에는 내 언어가 빈약하다
수심을 길들이는 날이 가장 소중한 날임을
내 섬모의 언어로 말할 수 있다면
나는 이제 붓을 놓아도 된다
기쁨의 절반, 슬픔의 절반을 못 질해
오늘도 나는 마음 허공에 창을 단다
창을 다는 것은 희망을 다는 것
그러나 내 가장 큰 희망은
독자의 가슴에 햇빛 금박 한 올 입혀 주는 일
* 해열 진통제로 쓰이는 바늘 모양의 흰 가루.
- 나무, 나의 모국어, 민음사, 2012
키쓰는 무장무장 나리고 [정선]
그럽디다 차말로. 어느 시인의 말맨치로, 함박눈이 오믄 우새시럽게도 이웃집 남자가 그립습디다. 아 금메, 그 남자 첫사랑을 탁해가꼬.
긍게 거시기, 그 삼월도 요러크름 눈이 내렸는디, 밤하늘은 아조아조 꺼매서 눈송이는 메밀꽃맹키 빛나등만. 다방 갈 돈도 없는 우리는 뿌담시 동에를 몇 바쿠나 돌았당께요. 그 머시메가 손목 끌고 간 어느 골목길, 배람박에 뽀짝 붙어가꼬 대뜸 이럽디다, 키쓰해 주까. 오메, 낯바닥이 뜨겁고 심장이 통개통개, 난 그만 쫌더 크먼이라고 내빼부렀제. 뽀뽀도 아이고 숭허게. 그라고 키쓰가 무신 동냥이간디, 낭만적 사랑과 사회*만 알았어도 그짝을 가만 놔두덜 않제. 나가 먼침 프렌치 키쓰를 퍼부숴줬을 거인디, 짚이짚이 들척지근허니. 그려도 그렇지. 그놈은, 바보 겉은 그놈은, 사랑도 짜잔허게 허락받아 허는가벼어. 영산강 하구언둑에서 암시랑토안허게 들어가지 말라고 붙잡던 보짱은 거시기였당가. 포도시 짱구이마에 차디찬 뽀뽀를 허고 보듬아준 그놈,주머닛돈 오백원으로 포장마차에서 홍합 멀국을 홀짝이고 홀짝이다... ,,, . 집 앞 골목거정 왔는디, 땡땡 언 내 손을 잡고 애문 눈길만 푹푹 파제낍디다. 워째야쓰까, 솔찬히 커부렀는디, 입때꺼정 지대로 된 키쓰맛을 몰르는 나는, 오늘맹키로 눈이 오는 날이믄 맬겁시 스무 살이 그리워 눈물납디다. 순전히 고놈의 눈 땜시 애간장 녹습디다.
키쓰는 폭설맹키 와야 허는 벱이지라우, 아먼.
시방 못다 헌 키쓰맨치로 눈이 나리고
무장무장 눈치 없이 나리고
*정이현의 소설 제목<낭만적 사랑과 사회> 인용
- 랭보의 오줌발이 짧았다, 천년의시작, 2010
푸른 식탁 [강영은]
여긴 너무 고요한 식탁이야 고요가 들끓어서 목젖까지 아픈 식탁이야 전골냄비처럼 모락모락 김이 오르는 수평선에 입술을 덴 하늘도 푸른 식탁이어서 냄비뚜껑의 꼭지처럼 덜컹거리는 여긴 정말, 숟가락 없이도 배부른 식탁인거야
저기 봐, 수평선 넘어 부푼 구름이 빗방울로 밥물 앉히는 중야 들어 봐, 밥물 잦아지듯 뜨겁게 끓는 파도 소리, 한 냄비 부글부글 끓는 수평선으로 살림 차린 나와 당신도 어쩌면 식탁일지 몰라 아니야, 서로의 등뼈에서 슬픔을 발라먹던 식탁인거야 생선가시에 걸린 것처럼 내 목울대가 자주 흑흑거리는 건 당신보다 내가 더 식탁이었다는 증거야
오늘은 사계바다처럼 낯선 식탁이 되어 보는 거야 차량이 드문드문 외로움을 내려놓는 해안도로, 갓길에 앉아 잠자리와 메밀꽃, 노랑나비 한 쌍과 마주앉아 식탁 차리는 거야 식탁보처럼 바다를 탁 덮어 보는 거야 푸른 고래 등 같은 수평선을 한 입에 털어 푸른 것은 푸르게 삼키고 쓸쓸한 것은 쓸쓸하게 건너보는거야
- 산수국 통신, 황금알, 2022
그 섬에 가면 [임영조]
지도에 없는 섬 하나를 안다
사람들 더러 아는척 해도
실은 가는 길도 모르고
무엇이 있는지는 더욱 모르는
외딴 섬 하나를 나는 안다
햇볕과 바람 유독 넉넉하고 정갈한
그 섬에 가면 홀로된 여자가
몇 뙈기의 외롬꽃을 가꾸며 산다
온 하루 김을 매고 속된 꿈 솎고
저물면 밤하늘에 총총한 별을 읽고
스스로 섬이 되고 별이 되는 섬 여자
나는 몰래 그녀를 사랑한다
가을볕 붉게 타는 수수밭 지나
고운 소금 뿌린듯 메밀꽃 하얀
고살길 질러 바다로 가노라면
꽃게처럼 웅크린 인가 몇 채 졸 뿐
아무도 내다 보지 않는다, 무시로
참새떼소리 왁자한 탱자울 너머
날아든 꿀벌들의 입맞춤이 진한지
참깨꽃 은방울이 섬 온 채를 흔든다
그늘 깊은 뒷산 잡목숲에는
탁목조 한마리가 산해경 읽듯
팽나무 찍는 소리로 하루해가 저물고
노을 젖은 은박지로 구겨진 바다
물빛 풍금소리 은은한 그 섬에 가면
나 혼자 엿듣는 방언이 있다
감쪽같이 나누는 사랑이 있다
아련하게 니스칠한 추억이 있다
세상과 먼 그 섬에 가면
* 山海經 : 작자 및 연대 미상인 중국 최고(最古)의 지리서(地理書)
고살길 : 마을의 좁은 골목길
탁목조 : 啄木鳥 딱따구리 *
- 임영조 시선, 지만지, 2012
고향 [노천명]
언제든 가리
마지막엔 돌아가리
목화꽃이 고운 내 고향으로
조밥이 맛 있는 내 고향으로
아이들 한울타리 따는 길머리엔
학림사 가는 달구지가 조을며 지나가고
대낮에 여우가 우는 산골
등잔 밑에서
딸에게 편지 쓰는 어머니도 있었다
둥글레 산에 올라 무릇을 캐고
접중화 싱아 뼈국새 장구채 범부채
마주재 기룩이 도자지 체니 곰방대
곰취 참두릅 훗잎나물을
뜯는 소녀들은
말끝마다 꽈 소리를 찾고
개암쌀을 까며 소녀들은
금방망이 은방망이 놓고 간
도깨비 얘기를 즐겼다.
목사가 없는 교회당
회당지기 전도사가 강도상을 치며
설교하는 산골이 문득 그리워
아프리카에서 온 반마(斑馬)처럼
향수에 잠기는 날이 있다
언젠든 가리
나중엔 고향 가 살다 죽으리
메밀꽃이 하아얗게 피는 곳
나뭇짐에 함박꽃을 꺾어오던 총각들
서울 구령이 원이더니
차를 타보지 못한 채 마을을 지키겠네
꿈이면 보는 낯익은 동리
우거진 덤불에서
찔레순 꺾다 나면 꿈이었다.
- 한국의 명시, 가람기획, 2003
메밀꽃밭 [송수권]
내 마음 지쳐 시들 때 호젓이 찾아가는 메밀꽃밭
슴슴한 눈물도 씻어내리고
달빛 요염한 정령들이 더운 피의 심장도
말갛게 씻어 준다
그냥 형체도 모양도 없이 산비탈에 엎질러져서
둥둥 떠내려 오는 소금밭
아리도록 저린 향내
먼 산 처마끝 등불도 쇠소리를 내며
흐르는 소리
한밤내 메밀꽃밭가에 가슴은 얼어 표주박이 되고
더운 피의 심장이 흰 소금을 쓰고
영하 몇 십도의 표주박을 따라가다
무슨 짐승처럼 엎드렸다
밤새도록 아리고 저린 내 가슴은
빈 물동이
시린 향내로만 찬물 가득 긷는다
찬물동이 이고 눈물도 웃음도 굳어서 돌아온다
고향의 천정 [이성선]
밭둑에서 나는 바람과 놀고
할머니는 메밀밭에서
메밀을 꺾고 계셨습니다
늦여름의 하늘빛이 메밀꽃 위에 빛나고
메밀꽃 사이사이로 할머니는 가끔
나와 바람의 장난을 살피었습니다
해마다 밭둑에서 자라고
아주 커서도 덜 자란 나는
늘 그러했습니다만
할머니는 저승으로 가버리시고
나도 벌써 몇 년인가
그 일은 까맣게 잊어버린 후
오늘 저녁 멍석을 펴고
마당에 누우니
온 하늘 가득
별로 피어 있는 어릴 적 메밀꽃
할머니는 나를 두고 메밀밭만 저승까지 가져가시어
날마다 저녁이면 메밀밭을 매시며
메밀밭 사이사이로 나를 살피고 계셨습니다
'시 숲에 들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혼의 꽃/진정성. (0) | 2023.09.14 |
---|---|
시(詩). (0) | 2023.09.14 |
내 말년의 입맛 / 고들빼기’ 김치. (0) | 2023.09.08 |
채송화. (0) | 2023.08.16 |
해바라기 / 둘, (2) | 2023.08.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