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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그 쓸쓸한 영혼

‘자아‘에 대한 부재적 ‘실존’ - 그 ‘이미지’에 대한 이해 - 최 승자 시.

스스로 하늘을 바라본다.







한 아이의 미소가 잠시
풀꽃처럼 흔들리다 머무는 곳.
꿈으로 그늘진 그러나 환한 두 뺨.

사랑해 사랑해 나는 네 입술로 빨고
내 등뒤로, 일시에, 휘황하게
칸나들이 피어나는 소리.
멀리서 파도치는 또 한 대양과
또 한 대륙이 태어나는 소리.

오늘밤 깊고 그윽한 한밤중에
꽃씨들이 너울너울 허공을 타고 내려와
온 땅에 가득 뿌려지리라.
소리 이전, 빛깔 이전, 형태 이전의
어둠의 씨앗 같은 미립자들이
내일 아침 온 대지에 맨 먼저
새순 같은 아이들의 손가락을 싹 틔우리라.

그리하여 이제 소리의 가장 먼 끝에서
강물은 시작되고
지금 흔들리는 이파리는
영원히 흔들린다.


- 최 승자 시 ‘ 시작’




겨울에 바다에 갔었다.
갈매기들이 끼룩거리며 휜 똥을 갈기고
죽어 삼일간을 떠돌던 한 여자의 시체가
해양 경비대 경비정에 걸렸다.
여자의 자궁은 바다를 향해 열려 있었다.
(오염된 바다)
열려진 자궁으로부터 병약하고 창백한 아이들이
바다의 햇빛이 눈이 부셔 비틀거리며 쏟아져 나왔다.
그들은 파도의 포말을 타고
오대주 육대양으로 흩어져 갔다.
죽은 여자는 흐물흐물한 빈 껍데기로 남아
비닐처럼 떠돌고 있었다.
세계 각처로 뿔뿔이 흩어져 간 아이들은
남아연방의 피터마릿츠버그나 오덴달루스트에서
질긴 거미집을 치고, 비율빈의 정글에서
땅 속에다 알을 까놓고 독일의 베를린이나
파리의 오르샹가나 오스망가에서
야밤을 틈타 매독을 퍼뜨리고 사생아를 낳으면서,
간혹 너무도 길고 지루한 밤에는 혁명을 일으킬 것이다.
언제나 불발의 혁명을.
겨울에 바다에 갔었다.
(오염된 바다)


- 최 승자 시 ‘겨울에 바다에 갔었다‘
* 기억의 집, 문학과 지성사, 1989





겨울 동안 너는 다정했었다.
눈(雪)의 흰 손이 우리의 잠을 어루만지고
우리가 꽃잎처럼 포개져
따뜻한 땅 속을 떠돌 동안엔

봄이 오고 너는 갔다.
라일락꽃이 귀신처럼 피어나고
먼곳에서도 너는 웃지 않았다.
자주 너의 눈빛이 셀로판지 구겨지는 소리를 냈고
너의 목소리가 쇠꼬챙이처럼 나를 찔렀고
그래, 나는 소리 없이 오래 찔렸다.

찔린 몸으로 지렁이처럼 기어서라도,
가고 싶다 네가 있는 곳으로.
너의 따뜻한 불빛 안으로 숨어들어가
다시 한번 최후로 찔리면서
한없이 오래 죽고 싶다.

그리고 지금, 주인 없는 헤진 신발마냥
내가 빈 들판을 헤맬 때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우리가 꽃잎처럼 포개져
눈 덮인 꿈 속을 떠돌던
몇 세기 전의 겨울을.


- 최 승자 시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얼마나 오랫동안
세상과 떨어져 살아왔나
"보고 싶다"라는 말이 있다는 것을
오늘 처음 깨달았다
(아으 비려라
이 날것들의 生)

구름이 우르르 서쪽으로 몰려간다


- 최 승자 시 ‘얼마나 오랫동안‘
* [빈 배처럼 텅 비어], 문학과지성사, 2016.




기억하는가
우리가 처음 만났던 그날
환희처럼 슬픔처럼
오래 큰물 내리던 그날.

네가 전화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네가 다시는 전화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평생을 뒤척였다.


- 최 승자 시 ‘기억하는가‘
[기억의 집],문학과지성사, 1989.




한 숟갈의 밥, 한 방울의 눈물로
무엇을 채울 것인가,
밥을 눈물에 말아먹는다 한들.

그대가 아무리 나를 사랑한다 해도
혹은 내가 아무리 그대를 사랑한다 해도
나는 오늘의 닭고기를 씹어야 하고
나는 오늘의 눈물을 삼켜야 한다.
그러므로 이젠 비유로써 말하지 말자.
모든 것은 콘크리트처럼 구체적이고
모든 것은 콘크리트 벽이다.
비유가 아니라 주먹이며,
주먹의 바스라짐이 있을 뿐,

이제 이룰 수 없는 것들 또한 이루려 하지 말며
헛되고 헛됨을 다 이루었다고도 말하지 말며
가거라, 사랑인지 사람인지,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죽는 게 아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살아,
기다리는 것이다,
다만 무참히 꺾여지기 위하여.

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
내 몸을 분질러다오.
내 팔과 다리를 꺾어













- 최 승자 시 ‘그리하여 어느날, 사랑이여‘
     * 즐거운 일기, 문학과지성사, 1984




붐비는 토요일 오후, 종로통 가을 속을
늙은 더듬이로 더듬더듬 기어나가는
이 몸은 왕년의 누구시더라.
사방팔방에서 눈부신 물고기들이 헤엄쳐 오가고
그 속에서 풋감 같았던
내 청춘의 튀통수도 하나 보이는데,
그 풋감 이제 잘 익은 노란 감 되어
멀잖아 홍시로 떨어지리니,
종로통 가을은 리어카에 실려가며 홀로 노래부르네
……사랑은 한물간 유행가, 사랑은 낡은 청바지
……사랑은 녹슬어 삐걱이는 침대, 사랑은 돌아오지 않는 다리.

(이 무슨 유령이 살아 아직도 추억의 종로길을 걷고 있나.)


- 최 승자 시 ‘종로통 가을‘
[내 무덤, 푸르고 ], 문학과지성사, 2003(1993).




검은 활시위
검은 화살

깊고 고요하다

내가 닫아버렸던 고통의 門을
누가 다시 열어놓았을까

가만히 스쳐만 가시라
잠의 꿈결에서인 듯
꿈의 잠결에서인 듯


- 최 승자 시 ‘깊고 고요하다‘
[쓸쓸해서 머나먼], 문학과지성사, 2010.




이런 詩는 이런 데 좋고 저런 詩는 저런 데 좋고
그냥 한 하늘이 걸려 있을 뿐
詩좋고 바람 하나니
사람들의 온갖 마음들은
그저 구름처럼 스쳐 지나가시라
해 밝을 때 부는 바람처럼
가난한 집 처마 밑에 또닥거리는 빗줄기처럼
과거와 현재를 풀어주고
그리하여 미래를 풀어주기 위하여


- 최 승자 시 ‘이런 詩는‘
[빈 배처럼 텅 비어], 문학과지성사, 2016.




아득히 먼 과거인지
아득히 먼 미래인지
내 始源痛은 어디에
매달려 있는지 몰라
하루 울고 이틀 울고
사흘 울어도 그것을
난 몰라 가이없게도
더욱더 깊이 침몰해가는
배 한 척이 있을 뿐

- 최 승자 시‘ 아득히’
  * (빈배처럼 텅비어) 2016, 문학과 지성사




나 여기 있으면
어느 그림자가
거기 어디서
술을 마시고 있겠지

내가 여기서
책을 읽고 있으면
까부러져 잠들어야만 하는
어느 그림자가
내 대신 술을 마시고 있겠지
한 열흘 마시고 있겠지


- 최 승자 시 ‘나 여기 있으면‘
[빈 배처럼 텅 비어], 문학과지성사, 2016.




살았능가 살았능가
벽을 두드리는 소리
대답하라는 소리
살았능가 죽었능가
죽지도 않고 살아 있지도 않고
벽을 두드리는 소리만
대답하라는 소리만
살았능가 살았능가

삶은 무지근한 잠
오늘도 하늘의 시계는
흘러가지 않고 있네


- 최 승자 시 ‘살았능가 살았능가‘
[빈 배처럼 텅 비어], 문학과지성사, 2016.





비가 와-
삼천포에 비가 와-
(사과나무에서 사과 한 알 떨어질 때
바람은 왜 살짝 멈추는 걸까?)

비가 와-
삼천포에 비가 와-
삼천포에서 구룡포까지는 아주 먼 시간
(없는 코스모스들이 왜 늘 마음 속에서
흔들리고 있는 것일까?)

비가 와-
삼천포에 비가 와-
삼천포에서 모슬포까지는 아주 먼 시간
(그 무슨 메아리들이 왜
아주 아주 멀리서 들릴는 걸까?)

비가 와-
삼천포에 비가 와-
카페 창가를 다 적시고 있네
넋없이 많은 인생들을 다 적시고 있네


- 최 승자 시 ‘비가 와- ‘
[물 위에 씌어진], 천년의시작, 2011.




자 이제는 놓아 버리자
우리의 메마른 신경을.
바람 저물고
풀꽃 눈을 감듯.

지난 여름 수액처럼 솟던 꿈
아직 남아도는 푸른 피와 함께
땅 속으로 땅 속으로
오래 전에 죽은 용암의 중심으로
부끄러움 더러움 모두 데리고
터지지 않는 그 울음 속
한 점 무늬로 사라져야겠네.


- 최 승자 시 ‘가을의 끝‘
[이 時代의 사랑],文學과知性社,1981.




은지의 엄마 아빠에게,
이 시를 은지의 태몽꿈으로
읽기 바라며

깊은 밤 강물은 바다로 흘러들고
우리의 손은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찾는다.
우리 몸 속에서 오래 잠자던 물살이
문득 깨어나 흐르고

비가 오너라
바다 건너서
그대의 땅을 적시며.

산사의 계곡
하늘의 빈 술잔엔
서푸른 취기의 바람이 일렁이고
지금 어느 산맥 뒤에서
두 연인의 손이 만난다.


- 최 승자 시 ‘해남 대흥사에서‘
[이 時代의 사랑], 문학과지성사, 1981.




평평한 밋밋한
어눌한 느슨한
납작한 헐거운
엷은 얇은
오그라든 찌그러진
찌들어버린 빵꾸 난
천편일률적인 똑같은 리듬의
김빠진 맥 빠진
기진맥진한 기고만장을 잊어버린
이런 시!

언젠가 나는 한 시에서
“얘들아, 이게 시냐, 막걸리냐?”라고 쓴 적이 있었다.
지금 이 시 속에, 이 시의 풍경 속에 주저앉아서,
이런 시나 쓰는 마음의 풍경 속에 주저앉아서
나는 다시 그 구절을 써본다.

애들아, 이게 시냐, 막걸리냐!



- 최 승자 시 ‘이런 시‘




나는 평범한 詩人인지라
아직도 풍덩풍덩 잘 빠집니다
이 세계는 너무도 여실한 꿈이어서
그 꿈에 풍덩풍덩 빠져 헤부적거립니다

아늑한 현재는 어째서 언제나
아늑한 과거를 깔고 앉아 있으려 하는지
과거가 그렇게도 아늑한 똥진창인 줄도 모르고

한겨울 눈밭 위
굶어 얼어 죽는 까마귀가
그리울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평범한  詩人인지라
아직도 풍덩풍덩 잘 빠집니다
그 속에서 헤부적 헤부적거립니다

(겨우살이
바람살이
울다 갑니다
그래도 속상할 것은 하나도 없어서

겨우살이
바람살이
울다 갑니다

나는 평범한 詩人인지라)


- 최 승자 시 ‘나는 평범한 詩人인지라‘
[물 위에 씌어진], 천년의시작, 2011.




어떤 아침에는, 이 세계가
치유할 수 없이 깊이 병들어 있다는 생각.

또 어떤 아침에는, 내가 이 세계와
화해할 수 없을 만큼 깊이 병들어 있다는 생각.

내가 나를 버리고
손 발, 다리 팔, 모두 버리고
그리하여 마지막으로 숨죽일 때
속절없이 다가오는 한 풍경.

속절없이 한 여자가 보리를 찧고
해가 뜨고 해가 질 때까지
보리를 찧고, 그 힘으로 지구가 돌고 …….

시간의 사막 한 가운데서
죽음이 홀로 나를 꿈꾸고 있다.
(내가 나를 모독한 것일까,
이십 세기가 나를 모독한 것일까.)


- 최 승자 시 ‘어떤 아침에는‘




모두가 바람을 등지고 사는 곳
하늘의 작기장 하늘의 공책 위에
오늘도 구름만 그리며 사는 곳

자정 그 너머 별천지,
별유천지 비인간이 될 때까지
北海 南海로 미투리를 삼는 곳

하늘의 푸른과 바다의 푸른이 합쳐져
事物들의 새파란 시선이 움트는 곳
시간 속의 물방울 같은
작은 이슬 제국
거기에 詩人들도 아스라이 끼어듭니다

(모든 새들은
이 세상 주소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 최 승자 시 ‘새들은 모두가‘





고독은 끄려 하면 낱낱이 흩어져 보이지 않는다
고독은 먼지처럼 편재한다
그것은 58세, 내 고독의 구도.
부르봉 왕가 태생도 어쩔 수가 없다

이 풍경의 구도 속으로 누가 흠칫 발을 들여놓는다
그림자도 없는 누군가가 발을 들여놓는다
그리고 칠판 위에 써놓는다
See things as they really are
그러나 나는 안성맞춤의 정반대로 읽을 수 있는 시인이다

그리하여 虛허한 시간들이 밀려온다
삶도 죽음도 없는, 有無유무를 넘어선,
虛虛가 밀려온다, 有有無無의 총체를 넘어선

道可道도가도 非常道비상도* 노래했던 사나이는
저 초월의 虛에도 불구하고
질펀하게 쏟아지는 현실의 虛를
어떻게 바라만 보고 있었을까
그것은 그가 虛를 道로 대체시켰기 때문은 아닐까

그러나 그래도 58세, 내 고독의 구도
부르봉 왕가 태생도 어쩔 수가 없다
(폐허로 오시라 나의 아씨들이여,
더욱 슬퍼하기 위하여 오시라 내 시의 아씨들이여
虛도 道도 한 슬픔의 뿌리에서 나온 것을)


*노자,[도덕경]의 첫 두 구절.

- 최 승자 시 ‘58세, 내 고독의 구도(構圖)‘
<문학과 사회>,2010년,여름호




많은 사람들이 흘러갔다.
욕망과 욕망의 찌꺼기인 슬픔을 등에 얹고
그들은 나의 창가를 스쳐 흘러갔다.
나는 흘러가지 않았다.

나는 흘러가지 않았다.
열망과 허무를 버무려
나는 하루를 생산했고
일 년을 생산했고
죽음의 월부금을 꼬박꼬박 지불했다

그래, 끊임없이 나를 호출하는 전화벨이 울리고
나는 피해가고 싶지 않았다.
그 구덩이에 내가 함몰된다 하더라도
나는 만져보고 싶었다,
운명이여.

그러나 또한 나는 끊임없이 문을 닫아걸었고
귀와 눈을 닫아걸었다
나는 철저한 조건반사의 기계가 되어
아침엔 밥을 부르고
저녁엔 잠을 쑤셔넣었다.

궁창의 빈터에서 거대한 허무의 기계를 가동시키는
하늘의 키잡이 늙은 니힐리스트여,
당신인가 나인가
누가 먼저 지칠 것인가
(물론 나는 그 결과를 알고 있다.
내가 당신을 창조했다는 것까지)

끊임없이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그 전화선의 마지막 끝에 동굴같은
썩은 늪 같은 당신의 구공이 걸려 있었다.
어느날 그곳으로부터 죽음은
결정적으로 나를 호명할 것이고
나는 거기에 결정적으로 응답하리라.
타들어 가는 내 운명의 도화선이
당신의 썩은 구공 안에서 폭발하리라.
삼십 년 전부터 다만 헛되이,
헛되고 헛됨을 완성하기 위하여.

늙은 니힐리스트, 당신은 피묻은 너털웃음을 한 번 날리고
그 노후의 몸으로 또다시 고요히
허무의 기계를 돌리기 시작하리라.
몇 천 년 전부터 다만 헛되이,
헛되고 헛됨을 다 이루었다고 말하기 위하여.


- 최 승자 시 ‘끊임없이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통과해야만 할 봄날의 시간이
저 밖에서 선혈처럼 낭자하다.
베란다 앞 낮은 산을 뒤덮으며
패혈증처럼 숨가쁘게,
어질어질 피어오르는 진달래.
눈물이 나 더는 못 보고
쪽문을 소리내어 쾅 닫는다.

어떻게 견뎌야 할지,
내 앞에 펼쳐질
봄 꽃, 여름 잎
가을 단풍, 겨울 눈꽃.

닫혀버린 집안 한구석에서
인조 장미 몇 송이가
무게도 없이 깊이깊이 가라앉는다.


- 최 승자 시 ‘아득한 봄날‘
[연인들], 문학동네, 1999.




과거를 현재로 살고 있는 사람들
파먹을 정신이 없어서
과거를 오늘의 뷔페식으로
섞어 먹는 사람들
언제쯤 그 정신이라도
끝날 날이 없을까
그 정신 뷔페식을
같이 먹어야 한다고
그렇지 않으면 사람이 아니라고
우겨대는 사람들
그냥 꿈결이었다고
건너 뛸 수는 없을까
해 지고 달 떠도
정신은 아귀아귀여서
과거의 바윗덩어리라도
삶아 뜯어 먹어야 한다는 사람들
과거 때문에 현재도 미래도
다 놓치고 싶어 하는 사람들
찰칵찰칵 시간이 잘 지나갑니다


혹은 엘리엇的으로 時間입니다 時間입니다



- 최 승자 시 ‘時間입니다‘
* 쓸쓸해서 머나먼




더더욱 못 쓰겠다 하기 전에
더더욱 써보자
무엇을 위하여
아무래도 좋다


이 종달새가 더더욱이든 저 종달새가 더더욱이든


(어느 때인가는 너무 아름다워서 만져보면
모두가 造花였다
또 어느 때인가는 하염없이 흔들리는 게 이뻐서
만져보면 모두가 生花였다 造花보다 이뻤다
이제까지의 내 인생에서
'이쁘다'는 '기쁘다'의 다른 이름이었다)


- 최 승자 시 ‘더더욱 못 쓰겠다 하기 전에 ‘
* 쓸쓸해서 머나먼






하루 종일 매달리다
바람에 하늘에

알 수 없는 곳에서
어느 깊은 웅덩이에서
무서운 심연에서
조금씩 새어나오는
흘러나오는

흘러나와 작은
물줄기들, 작은 그림자들을
만들어내는......

누군가 <shadow of my life>를
이상하게 허밍으로 부르고 있다
그리고 그 주위 어디에선가
융이 "당신의 shadow" 라는 명강의록을 펼치면서
헛기침하는 소리 들린다

하루 종일 매달리다
바람에 하늘에

그리고 어느 깊은 심연으로부터
작은 물줄기들이, 작은 그림자들이......

이것들은 언제
바람타고 하늘 물속으로
회귀하려는가?

辰辰진진*이 방구들이 사는
辰辰이 cafe로나 내려가보자



- 최 승자 시 ‘하루 종일 매달리다‘
*음양오행의 12개 地支지지 중 辰을 의인화시킨 것임.
辰은 또한 별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음.




오늘은 전 아파트 군단이
비에 젖어 있다
하늘조차 젖어 있다


빈, 젖어 있는 저 하늘
나의 아침 창가에서


하늘 한 판이 허수이
무너져 내린다



- 최 승자 시‘하늘 한 판이 허수이‘
* 쓸쓸해서 머나먼




담배 한 대 피우며
한 십 년이 흘렀다
그동안 흐른 것은
대서양도 아니었고
태평양도 아니었다

다만 십 년이라는 시간 속을
담배 한 대 길이의 시간 속을
새 한 마리가 폴짝
건너뛰었을 뿐이었다

(그래도 미래의 시간들은
銀가루처럼 쏟아져 내린다)


- 최 승자 시 ‘담배 한 대 길이의 시간 속을‘




노자와 장자 사이에서
이 춤을 어떻게 추어야 할까
하나는 너무 말이 없고
다른 하나는 다변이지만
둘 다 약속한 듯 신비주의적 본론은
입 꾹 다물고 있다
노자의 춤사위는 승무이고
장자의 그것은 탈춤인데
그 사이에서 나는 어떤 춤을 추어야 할까
하나는 하나도 건드리지 않았고
다른 하나는 새끼손가락만큼
아주 쬐끔 튕겨보았다
노자의 바다와 장자의 태산 사이에서
나는 어떤 춤을 추어야 할까


(하늘나라에서 두 랍비가
스치듯 지나가며 서로
인사하는 소리 들린다)


- 최 승자 시 ‘노자와 장자 사이에서‘
* 쓸쓸해서 머나먼




그녀는 사프란으로 떠났다
무수히 해가 뜨고 해가 져도
그녀는 돌아오지 않았다

가끔씩 초인종이 울려도
거기엔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사프란으로 떠났고
그녀는 이미 돌아오지 않는다
나는 또 오늘의 요리를 만들고 있을 뿐이다

부엌 창문턱의 작은 아이비 화분,
먼 꿈 하나
댕그라니
꿈에도 비에 젖지 못할


- 최 승자 시 ‘그녀는 사프란으로 떠났다‘




한 육체였었으나
이미 한 생각이었으므로


아무 일도 없이
학이 날고 푸른 새가 지고
하염없는 바다와 바다 사이에서
(아, 나는 너무 오래 잤을까)
학이 날고 푸른 새가 지고
어떻게 된 것일까


이 다른 것들은 어디에서 오나
다른 것들로 이루어진 세상
이미 있었으나, 없었으나, 다시 있는
만지고 또 만져본 세상, 그러나
다시 있는, 언제나 천억 년이 다시 있을,
바다빛 하늘빛처럼 푸르른
다른 것들로 이루어진 세상



- 최 승자 시 ‘다른 세상‘
* 쓸쓸해서 머나먼, 문학과 지성사.






모두가 바람을 등지고 사는 곳
하늘의 작기장 하늘의 공책 위에
오늘도 구름만 그리며 사는 곳

자정 그 너머 별천지,
별유천지 비인간이 될 때까지
北海 南海로 미투리를 삼는 곳

하늘의 푸른과 바다의 푸른이 합쳐져
事物들의 새파란 시선이 움트는 곳
시간 속의 물방울 같은
작은 이슬 제국
거기에 詩人들도 아스라이 끼어듭니다

(모든 새들은
이 세상 주소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 최 승자 시 ‘새들은 모두가 ‘




내 詩는 지금 이사 가고 있는 중이다
오랫동안 내 詩밭은 황폐했었다
너무 짙은 어둠, 너무 굳어버린 어둠
이젠 좀 느리고 하늘거리는
포오란 집으로 이사 가고 싶다
그러나 이사 갈 집이
어떤 집일런지는 나도 잘 모른다
너무 시장 거리도 아니고
너무 산기슭도 아니었으면 좋겠다


아예는, 다른, 다른, 다, 다른,
꽃밭이 아닌 어떤 풀밭으로
이사 가고 싶다



- 최 승자 시 ‘내 詩는 지금 이사 가고 있는 중‘
* 쓸쓸해서 머나먼






(잠시 빛났던
어느 외재적 불빛
아스라하다)


쉬임 없이 하루하루가 흘러간다
詩도 담배도 맛이 없다
세월이 하 짧아
詩 한 편, 담배 한 대에
한 인생이 흘러간다


(공허여, 허공이여)



- 최 승자 시 ‘잠시 빛났던‘
* 쓸쓸해서 머나먼




회색 근로복을 입은
노동자 아저씨들이
토요일 오후 늦게
퇴근을 하지 않고서
볼차기 놀이를 하고 있다



(세월이 볼을 텅텅 굴리면서 지나간다)


불행했던 사나이 행복했던 예수가
아직도 행복한 꿈속에서 졸면서
세월이 볼을 텅텅 굴리면서 지나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


- 최 승자 시 ‘어느 토요일’




흔들지 마, 사랑이라면 이젠 신물이 넘어오려 한다.
내 잔가지들을 흔들지 마.
더 이상 흔들리며 부들부들 떨다 치를 떠느니,
이젠 차라리 거꾸로 뿌리뽑혀 죽는 게 나을 것 같아.

프라하에서 한 집시 여자가, 운명이야, 라고 말했었다.
운명 따윈 난 싫어, 라고 나는 속으로 말했었다.
아름다움이 빤빤하게 판치는 프라하, 그러나 그 뒤편
숨겨진 검은 마술의 뒷골목에서 자기 몸보다 더 큰
누렁개를 옆에 끼고 땅바닥에 앉아
그녀는 내 손 바닥을 읽었다.
나는 더 이상 읽히고 싶지 않다.
나는 더이상 씌어진 대로 읽히고 싶지 않다.
그러므로 운명이라 말하지 마, 흔들지 마,
네 바람의 수작을 잘 알아, 두 번 속진 않아.
새해, 한 겨울, 바깥 바람도 내 마음처럼 차갑지 않다.

내 차가운 내부보다 더 차가운 냉수 한 잔을
마시며, 나는 차갑게 다시 읊조린다.

흔들지 마, 바람 불지 마, 안 그러면
난 빙하처럼 꽝꽝 얼어붙어버리겠어.

창문 밖으로 사람들이 하나씩 오고 가면서
내게 수상한 바람 소리들을 보낸다.
그때마다 나는 접시 깨지는 소리로 대답한다.
"접근하면 발포함" 그러나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게
뭔지 나는 안다. 그것은 외부를 향한게 아닌,
내부를 향한 내 안의 폭탄이다.


- 최 승자 시 ‘흔들지 마‘
[연인들]문학동네,1999.




나의 꿈속은 바람부는 무법천지
그 누가 부르겠는가
막막 무심중에 떠 있는 나를

다가오지 마라!
내 슬픔의 장칼에
아무도 다가오지 마라
내가 버히고 싶은 것은
오직 나 자신일 뿐......

하늘의 망루 위에
내 기다림을 세워 놓고
시간이여 나를 눕혀라
바람부는 허공의 침상 위에
머리는 이승의 꿈속에 처박은 채
두 발은 저승으로 뻗은 채


- 최 승자 시 ‘허공의 여자’




그 여자의 몸 속에는 스물 다섯에
내가 버린 童貞이 흐르고 있다
오래 전에 떠나온 고향처럼
황량하게,다시 늘 그리웁게

그 여자의 두 손가락으로 쉽게 나는 열린다
무한을 향해 스스로 열리는 꽃봉오리처럼.

그 여자가 나를 만지면
스물 다섯살 적의 꿈이 깨어나
물결처럼 나를 감싼다


- 최 승자 시 ‘첫사랑의 여자‘




마음은 바람보다 쉽게 흐른다
너의 가지 끝을 어루만지다가
어느새 나는 네 심장 속으로 들어가
영원히 죽지 않는 태풍의 눈이 되고 싶다


- 최승자 시 ‘너에게'




아직은 더딘 세월을
여린 가슴으로
멀고 험난한 고지를 향해
떠나 안주해야 한다

내 아픔이
그리움으로 여울져
삶이 힘들지라도
나 혼자만이 정착해 있는 시간 속으로

언제나 그리움을 주는 당신과
오직 사랑 하나만으로 살고 싶다
설레임의 불빛은 꺼지지 않고
언제나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는 태양처럼
내 삶의 어두움을  걷어 내고
찬란함으로 떠오르는 태양을 맞으리

어제의 시간은
한장 연서로 남고
내일의 시간은
떠오르는 태양
내  삶의 고지에서
안주해야 한다          


- 최 승자 시 ‘염원’
* <시집  (무엇으로 우리 다시 만나리)에서>




외롭지 않기 위하여
밥을 많이 먹습니다
괴롭지 않기 위하여
술을 조금 마십니다
꿈꾸지 않기 위하여
수면제를 삼킵니다.
마지막으로 내 두뇌의
스위치를 끕니다

그러면 온밤내 시계 소리만이
빈 방을 걸어다니죠
그러나 잘 들어보세요
무심한 부재를 슬퍼하며
내 신발들이 쓰러져 웁니다


- 최 승자 시 ‘외롭지 않기 위하여‘







나더러 안녕하냐고요?
그러엄, 안녕하죠.
내 하루의 밥상은
언젠가 당신이 했던 말 한마디로 진수성찬이 되고요,
내 한 해의 의상은
당신이 보내주는 한 번의 미소로 충분하고요,
전 지금 부엌에서 당근을 씻고 있거든요.
세계의 모든 당근들에 대해
시를 쓸까 말까 생각하는 중이에요.
우연이 가장 훌륭한 선택이 될 때가 있잖아요?
그런데, 다시 한번 물어주시겠어요,
나더러 안녕하냐고?

그러엄, 안녕하죠.

똑딱똑딱 일사분란하게
세계의 모든 시계들이 함께 가고 있잖아요?


- 최 승자 시 ‘안부‘




거기서 알 수 없는 비가 내리지
내려서 적셔 주는 가여운 안식
사랑한다고 너의 손을 잡을 때
열 손가락에 걸리는 존재의 쓸쓸함
거기서 알 수 없는 비가 내리지
내려서 적셔 주는 가여운 평화


- 최 승자 시 ‘사랑하는 손’
* [이 時代의 사랑]



네가 왔으면 좋겠다.
나는 치명적이다.
네게 더 이상 팔 게 없다.
내 목숨밖에는.

목숨밖에 팔 게 없는 세상,
황량한 쇼 윈도 같은 나의 창 너머로
비 오고, 바람불고, 눈 내리고,
나는 치명적이다.

네게, 또 세상에게,
더 이상 팔 게 없다.
내 영혼의 집 쇼 윈도는
텅 텅 비어 있다.
텅 텅 비어,
박제된 내 모가지 하나만
죽은 왕의 초상처럼 걸려 있다.

네가 왔으면 좋겠다.
나는 치명적이라고 한다.


- 최 승자 시 ‘너에게’



못 살겠습니다.
(실은 이만하면 잘 살고 있습니다.)
미안합니다.
사랑합니다.
어쩔 수가 없습니다.
원한다면, 죽여주십시오.

생각해보면, 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한번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게 내 죄이며 내 업입니다.
그 죄와 업 때문에 지금 살아 있습니다.
미안합니다.
사랑합니다.

잘 살아 있습니다.



- 최 승자 시 ‘근황‘
* [내 무덤 푸르고]




여자들은 저마다의 몸 속에 하나씩의 무덤을 갖고 있다.
죽음과 탄생이 땀 흘리는 곳.
어디로인지 떠나기 위하여 모든 인간들이 몸부림치는
영원히 눈먼 항구.
알타미라 동굴처럼 거대한 사원의 폐허처럼
굳어진 죽은 바다처럼 여자들은 누워 있다.
새들의 고향은 거기.
모래바람 부는 여자들의 내부엔
새들이 최초의 알을 까고 나온 탄생의 껍질과
죽음의 잔해가 탄피처럼 가득 쌓여 있다.
모든 것들이 태어나고 또 죽기 위해선
그 폐허의 사원과 굳어진 죽은 바다를 거쳐야만 한다.


- 최 승자 시 ‘여성에 관하여‘
* 즐거운 日記



쓴다는 것이 별것은 아니라고
쓴다는 것에 아무런 희망을 갖고 있지 않다고 말했지.
그러나 이제 고백하자, 시인하자.
쓴다는 것, 써야 한다는 생각이 없었더라면
내 삶은 아주 시시한 의미밖에 갖지 못했으리라는 것,
어쩌면 내 삶이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았으리라는 것.
오 쓴다는 것, 써야 한다는 생각에
내가 얼마나 높이높이 내 희망과 절망을 매달아 놓았던가를
내가 얼마나 깊이깊이 중독되어왔던가를
이제 비로소 분명히 깨달을 수 있겠구나.
내 익숙한, 잘 나가는 달필을 버리고
원고지를 버리고 노트를 버리고
글자 처음 배우는 아이처럼 자꾸만 목이 말라
더듬 더듬 떠듬 떠듬 처음으로 워드 프로세서를 치고 있는 이 밤에


- 최 승자 시 ‘워드 프로세스‘
* [내 무덤, 푸르고]



나는 용서한다. 지나간 모든 세기들을,
다가올 모든 세기들을, 모든 환영들을.
나는 용서한다, 지구를, 태양을, 달을,
천왕성을, 명왕성을, 해왕성을, 빌어먹을 빅뱅을.
나는 용서한다. 불교와 기독교와 회교를,
단군을, 지하여장군을, 삼신할미를.
나는 용서한다. 황인종과 백인종과 흑인종을,
모든 나라들과, 모든 역사들을.
나는 용서한다. 국어와 산수와 영어와 불어를,
물리학과 생물학을, 천문학과 심리학을.
나는 용서한다. 점성술과 연금술과 타로를.
주역과 카발라와, 노자와 예수와 부처를.
나는 용서한다, 신과 악마와 천사들을,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의 모든 것들을.
나는 용서한다. 모든 신화들과, 그 속의 신들과 영웅
들을,
용과 히드라, 지네와 거미, 그리고 바퀴벌레의 전설을.
나는 용서한다. 그 모든 정치가들, 슈퍼 모델들, 올림
픽 선수들을,
영화 배우들과 교수들과 의사들을.
나는 용서한다, 네 몸, 내 몸을,
나의 눈, 나의 귀, 나의 코, 나의 입을.
나는 용서한다. 모든 형용사들, 부사들을,
모든 비교급들과 최상급들을, 모든 문장들을.
나는 용서한다. 내가 썼던 시들과, 내가 쓸 시들을,
그리고 그것들을 읽었던 혹은 읽을 모든 눈들을.


- 최 승자 시 ‘나는 용서한다‘
* 연인들




그대들이 나를 찾을 때
나는 잠들어 있을 것이다.

그대들이 살아 헤매며
이 세계의 모든 문을 두드릴 때
나는 무덤의 따뜻한 실내에 있을 것이다.

내가 카인이며
그대들이 아벨인 이 시대에
내가 아는 지상 명제는
이 해가 지기 전에
나는 잠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 최 승자 시 ‘그대들이 나를 찾을 때‘




그대 익숙한 슬픔의 외투를 걸치고
한낯의 햇빛 속을 걸어갈 때에
그대를 가로막는 부끄러움은
떨리는 그대의 잠 속에서
갈증난 꽃잎으로 타들어가고
그대와 내가 온밤내 뒹굴어도
그대 뼈 속에 비가 내리는데
그대 부끄러움의 머리칼
어둠의 발바닥을 돌아 마주치는 것은 무엇인가


- 최 승자 시 ‘부끄러움‘




살아 있는 나날의, 소금에
절여지는 취기 같은 저 갈증
누군가의 망막에 증기처럼 번져 오르는 통증.
하지만 그래도 난 아냐, 난 못 해.

전라도인지 조지아인지
어디서 또 아픈 일몰이 시작되고

봐, 봐, 저 붉은 노을 좀 봐.
죽을동 살동 온 유리창에 피칠을 하며
누군가 나 대신 죽어가고 있잖아.

심혈을 기울여 해가 지고
심혈을 기울여 한 사람이 죽고
심혈을 기울여 지구가 돈다, 돌 때,
나는 인큐베이터 안에서 세계를 내다보고

내 할 일은 그대마저 다 죽고 난 뒤

흰 장갑 끼고
싸늘하게 빛나며
그대의 죽음에 비로소 입장하는 것뿐


- 최 승자 시 ‘노을을 보며 ‘




대단위가 한 묶음으로,
가령 유사 이래가 아니라,
가령 천지 창조 이후가 아니라,
천지 창조 이전의 시간부터
내 생애 중의 어느 뜨거운 여름날 오후까지,
한 묶음으로 대단위가 몰아칠 때......

내가 하는 일은 아스피린 먹는 일,
뜨거워, 뜨거워, 숨막혀, 숨막혀,
숨막히게 대단위가 함 묶음으로 몰아쳐
이 늦은 여름날 오후마다 아스피린을 먹는다

책상 위에 놓인 아스피린에
눈길이 마주칠 때마다 나는 속으로 말한다

아, 스, 피, 린, 아 시, 퍼, 런,

아, 악, 시, 퍼, 런,



- 최 승자 시 ‘아스피린‘




(씌어져야 할)
검은 칠판의 밤,
혹은 초속 몇 노트의 타이프라이터.

그러나 나는 떠나지 않는다.
너의 닫힌 안구의 눈꺼풀이 우주를
벗기기 시작하지 않는다.

(정말로 나는 당신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정말로 그것만은 말 못 하겠습니다.
---창밖에서 까마귀가 까악거리는데......
정말로 그것만은 저도 몰라,
                                 모르고 싶습니다.
차라리 까무러치게 해주십시오.
---창밖에서 까마귀가 까악거리는데......

캄캄 허허벌판
그대와 내가 마주서지 않는다.
떨어져 잠복한 그대와 나의 귀만이
가속도적으로 커져가고
심연의 심연에서 까마귀가
이 밤의 골수를 후비고 있다.



- 최 승자 시 ‘ 밤‘
* 기억의 집




몇 개의 꽃.
몇 개의 전화.
몇 개의 타협.
몇 개의 추파.

눈, 코, 입도 없이
이어지는 나날.

늦은 밤 창가에서
담배를 집어들면
손가락은 이미 재가 되어 있고
무심한, 텅 빈 얼굴을 한 달님이
빈자의 창문을 비껴 지나간다.


- 최 승자 시 ‘나날 ‘




길이 없어 그냥
박꽃처럼 웃고 있을 뿐,

답신을 기다리지는 않아요.
오지 않을 답신 위에
흰 눈이 내려 덮이는 것을
응시하고 있는 나를 응시할 뿐.

모든 일이 참을 만해요.
세포가 늙어 가나봐요.
가난하지만
이 房방은 다정하군요.
흐르는 이 물길의 정다움,
물의 장례식이 떠나가고 있어요.

잊으시지요.
꿈꾸기 가장 편리한 나는
무덤 속의 나니까요.


- 최 승자 시 ‘길이 없어 ‘
  * [기억의 집 ]




언젠가 다시 한번
너를 만나러 가마.
언젠가 다시 한번
내 몸이 무덤에 닿기 전에.

나는 언제나 너이고 싶었고
너의 고통이고 싶었지만
우리가 지나쳐온,
아직도 어느 갈피에선가
흔들리고 있을 아득한 그 거리들.

나는 언제나 너이고 싶었고
너의 고통이고 싶었지만
그러나 나는 다만 들이키고 들이키는
흉내를 내었을 뿐이다.
그 치욕의 잔
끝없은 나날
죽음 앞에서
한 발 앞으로
한 발 뒤로
끝없는 그 삶의 舞蹈를
다만 흉내내었을 뿐이다.

그리고 지금 나는, 너를 피해
달아나고 달아나는
흉내를 내고 있다.
어디에도 없는 너를 피해.

언젠가 다시 한번
너를 만나러 가마
언젠가 다시 한번
내 몸이 무덤에 닿기 전에.

(이 세계의
어느 낯선 모퉁이에서
네가 나를 기다리고 있기에)



- 최 승자 시 ‘언젠가 다시 한번‘
* 즐거운 日記




너는 날 버렸지,
이젠 헤어지자고
너는 날 버렸지,
산 속에서 바닷가에서
나는 날 버렸지.

수술대 위에 다리를 벌리고 누웠을 때
시멘트 지붕을 뚫고 하늘이 보이고
날아가는 새들의 폐벽에 가득찬 공기도 보였어.


하나 둘 셋 넷 다섯도 못 넘기고
지붕도 하늘도 새도 보이잖고
그러나 난 죽으면서 보았어.
나와 내 아이가 이 도시의 시궁창 속으로 시궁창 속으로
세월의 자궁 속으로 한없이 흘러가던 것을.
그때부터야.
나는 지상에 한 무덤으로 누워 하늘을 바라고
나의 아이는 하늘을 날아다닌다.
올챙이꼬리 같은 지느러미를 달고.
나쁜 놈, 널 죽여 버리고 말 거야
날 내 속에서 다시 낳고야 말 거야
내 아이는 드센 바람에 불려 지상에 떨어지면
내 무덤 속에서 몇 달간 따스하게 지내다
또다시 떠나가지 저 차가운 하늘 바다로,
올챙이꼬리 같은 지느러미를 달고.
오 개새끼
못 잊어!


- 최 승자 시 ‘Y를 위하여 ‘
* 즐거운 日記일기 / 문학과지성사




눈은 오직 올바로 보지 않기 위해 만들어놓은 장막.
눈은 오직 길 잃고 헤매기 위해서 만들어놓은 스모크
스크린.
눈은 오직 허상들만을 보기 위해 찍어 만들어놓은 필름,
오직 스크린과 스크린 안의 것들만이 실재하는 것이
라고
믿기 위해 만들어놓은 유구한 낡은 필름.
그 스크린 안의 무서운 형상들에 놀란 또 어떤 눈들은,
그 필름을 행복한 필름으로 고치려 애를 쓰다 제가 죽
어버린다.
이 세계는 영원한 고쳐 쓰기의 과정, 구제불능의 패러
디이다.
그 세계에서 어떤 이들은 작자가 되길 원하고,
어떤 이들은 독자가 되길 원하지만, 그러나 그 둘은
하나이고
둘 다 그 주인 없는 테이프의 각본의 원작자가 되길
원한다.
우리는 내면에서 먼저 쓰고 그것을 바깥에서 읽을 뿐
이다.
그리고 눈이란 안을 보지 않기 위해,
오직 바깥만을 증거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 최 승자 시 ‘눈이란 무엇인가‘
* 연인들




이것이 아닌 다른 것을 갖고 싶다.
여기가 아닌 다른 곳으로 가고 싶다.
괴로움
외로움
그리움
내 청춘의 영원한 트라이앵글.


- 최 승자 ‘내청춘의 영원한‘
* 시대의 사랑 / 문학과지성사




외로운 여자들은
결코 울리지 않는 전화통이 울리길 기다린다.
그보다 더 외로운 여자들은
결코 울리지 않던 전화통이
갑자기 울릴 때 자지러질 듯 놀란다.
그보다 더 외로운 여자들은
결코 울리지 않던 전화통이 갑자기 울릴까봐,
그리고 그 순간에 자기 심장이 멈출까봐 두려워한다.
그보다 더 외로운 여자들은
지상의 모든 애인들이
한거번에 전화할 때
잠든 체하고 있거나 잠들어 있다.


- 최 승자 시 ‘외로운 여자들은‘
* 기억의 집 / 문학과지성사




나는 한없이 나락으로 떨어지고 싶었다.
아니 떨어지고 있었다.
한없이
한없이
한없이
..................
......
...
아 썅! (왜 안 떨어지지?)


- 최 승자 시 ‘꿈꿀 수 없는 날의 답답함‘




이 세계의 문법을 그는 매번 배우지만
매번 잊어 버린다
세계가 마취된 것인가
자신의 두개골이 마취된 것인가
그는 매번 판정을 내리지 못한다
그는 물질이 정신성으로,정신이 물질성으로
이동해 가는 통로를 너무나 잘알고
때로는 너무나 까마득히 모른다

주변인은 신문이 배달되는 시각과
텔레비젼이 시작되는 시각을
습관적으로 초조히 기다린다
주변인은 이따금씩 제 집안의
하나뿐인 시계가 맞는지 알아보기 위해
국번없이 116에 전화를 걸어본다
그리고 로보트 음성의 한 문장이 끝날 때까지 듣는다

주변인은 주로 전철이나 시외버스를 타고 다닌다
때로는 목숨 내놓고 총알 택시를 타기도 한다
행복의 이데올로기를 믿는
행복한 사람들을 부러워 하며
서울의 탱탱한 표면 장력을 그리워 하며,
그 속으로 이입 되기를
무수히 갈망하고 무수히 증오하면서,
표면에서 표념으로
주변에서 주변으로
가장자리에서 가장자리로
주변인은 정처없이 지도를 어지럽히며
하염없이 시간을 혼선시키며 굴러 다닌다


- 최 승자 시 ‘주변인의 초상‘
* 주변인의 초상, 미래사





하늘에서 푸른 물의 상처가 내린다.
떠도는 스물 넷의 이마 위에,
하나씩 버리며 벗어 버리며
내가 마지막으로 눕는 꿈 위에
쏟아지는 비의 푸른 채찍질.

꽃잎에서 슬픔의 수액이 돋는다.
부끄럽게 비어 버린 알몸에
죽은 꿈의 문신이 돋아난다.
시간이 황량하게 고인다.

누가 열렬한 슬픔의 눈을 뜨고
꽃의 중심에서 울고 있나
하나씩 꿈을 떠나보내며
누가 빈 몸으로 울고 있나

허리에 감기는 비의 푸른 채찍

꽃. 상처. 스물 넷.



- 최 승자 시 ‘비, 꽃, 상처‘





통과해야만 할 아득한 봄날의 시간이
저 밖에서 선혈처럼 낭자하다.
베란다 앞 낮은 산을 뒤덮으며
패혈증처럼 숨가쁘게,
어질어질 피어오르는 진달래.
눈물이 나 더는 못 보고
쪽문을 소리내어 쾅 닫는다.

어떻게 견뎌야 할지,
내 앞에 펼쳐질
봄 꽃, 여름 잎
가을 단풍, 겨울 눈꽃.

닫혀버린 집안 한구석에서
인조 장미 몇 송이가
무게도 없이 깊이깊이 가라앉는다.


- 최 승자 시 ‘아득한 봄날‘




하늘과 방 사이로
빗줄기는 슬픔의 악보를 옮긴다
외로이 울고 있는 커피잔
無爲를 마시고 있는 꽃 두 송이
누가 내 머릿속에서 오래 멈춰 있던
현을 고르고 있다.

가만히 비집고 들어갈 수 있을까.
흙 위에 괴는 빗물처럼
다시 네 속으로 스며들 수 있을까.
투명한 유리벽 너머로
너는 생생히 웃는데
지나간 시간을 나는 증명할 수 없다.
네 입맞춤 속에 녹아 있던 모든 것을
다시 만져볼 수 없다.

젖은 창 밖으로 비행기 한 대가 기울고 있다
이제 결코 닿을 수 없는 시간 속으로


- 최 승자 시 ‘비오는 날의 재회‘





오늘 나는 기쁘다.
어머니는 건강하심이 증명되었고
밀린 번역료를 받았고 낮의 어느 모임에서
수수한 남자를 소개받았으므로.

오늘도 여의도 강변에선
풍선들이 날개 돋친 듯 팔렸고
도곡동 개나리 아파트의 밤하늘에선
달님이 별님들을 둘러앉히고 맥주 한잔씩 돌리며
봉봉 크랙카를 깨물고
잠든 기린이의 망막에선 노란 튤립 꽃들이 까르르 거리고
기린이 엄마의 꿈속에선 포니 자가용이 휘발유도 없이 잘 나가고
피곤한 기린이 아빠의 겨드랑이에선 지금
남몰래 일 센티미터의 날개가 돋고...

수영이 삼촌 별아저씨 오늘도 캄사캄사합니다.
아저씨들이 우리 조카들을 많이 많이 사랑해주신 덕분에
오늘도 우리는 코리아의 유구한 푸른 하늘 아래
꿈 잘 꾸고 한판 잘 놀아났습니다.

아싸라비아

도로아미타불


- 최 승자 시 ‘즐거운 일기‘





사랑은 언제나
벼락처럼 왔다가
정전처럼 끊어지고
갑작스런 배고픔으로
찾아오는 이별

사내의 눈물 한방울
망막의 막막대해로 삼켜지고
돌아서면 그뿐
사내들은 물결처럼 흘러가지만

허연 외로움의 뇌수 흘리며
잊으려고 잊으려고 여자들은
바람을 향해 돌아서지만,

땅거미질 무렵
길고 긴 울음 끝에
공복의 술 몇 잔,
불현듯 낄낄거리며 떠오르는 사랑,
그리움의 아수라장.

흐르는 별 아래
이 도회의 더러운 지붕위에서,
여자들과 사내들은
서로의 무덤을 베고 누워
내일이면 후줄근해질 과거를
열심히 빨아 널고 있습니다.


- 최 승자 시 ‘여자들과 사내들‘




대낮에 서른 세 알 수면제를 먹는다.
희망도 무덤도 없이 윗속에 내리는
무색 투명의 시간.
온몸에서 슬픔이란 슬픔,
꿈이란 꿈은 모조리 새어나와
흐린 하늘에 가라앉는다.
보이지 않는 적막이 문을 열고
세상의 모든 방을 넘나드는 소리의 귀신.

(나는 살아 있어요 살 아 있 어 요)

소리쳐 들리지 않는 밖에서
후렴처럼 머무는 빗줄기.

죽음 근처의 깊은 그늘로 가라앉는다.
더 이상 흐르지 않는 바다에 눕는다.


- 최 승자 시 ‘수면제’





< 197X년 우리들의 사랑 >- 아무도 그 시간의 火傷을 지우지 못했다 -몇 년 전, 제기동 빈 거리엔 건조한 먼지들만 횡행했고우리는 언제나 우리가 아니었다. 우리는 언제나 잠들어 있거나 취해 있거나아니면 시궁창에 빠진 해진 신발짝처럼 더러운 물결을 따라 하염없이흘러가고 있었고. 제대하여 복학한 늙은 학생들은 아무하고나 장가가 버리고사학년 계집아이들은 아무 남자하고나 약혼해버리고 착한 아이들은알맞은 향기를 내뿜고 시들어갔다. 그 해 늦가을과 초겨울 사이,우리의 노쇠한 혈관을 타고 그리움의 피는 흘렀다.그리움의 어머니는 마른 강줄기. 술과 불이 우리를 불렀다.향유고래 울음소리 같은 밤기적이 울려퍼지고 우리는 개처럼 제기동 빈 거리를헤맸다. 눈알을 한없이 굴리면서 잠 속에서도 행진해 나갔다.때론 골목마다에서 정말로 개들이 기총소사하듯 짖어대곤 했다.그러나 197X년, 우리들 꿈의 오합지졸들이 제아무리 집중사격을 가해도현실은 요지부동이었다. 우리의 총알은 언제나 절망만으로 만들어진것이었기 때문에. 어느덧 눈이 오고 방학이 오고 깊은 눈이 왔을 때 제기동빈거리는 "미안해, 사랑해."라는 말로 진흙탕을 이루었고, 우리는 잠 속에서도"사랑해, 죽여줘."라고 잠꼬대를 했고 그때마다 마른번개 사이로 그리움의 어머니는 여윈 팔을 치켜들고 나지막히 말씀하셨다."세상의 아가야 내 손이 비었구나. 네게 줄게 아무것도 없구나."그리곤 우리는 나즈막히 엎드려 개처럼 침을 흘리며 죽어갔다.< 길이 없어 >길이 없어 그냥박꽃처럼 웃고 있을 뿐답신을 기다리지는 않아요오지 않을 답신 위에흰 눈이 내려 덮이는 것을 응시하고 있는 나를 응시할 뿐모든 일이 참을 만해요세포가 늙어가나봐요가난하지만이 房은 다정하군요흐르는 이 물길의 정다움물의 장례식이 떠나가고 있어요잊으시지요꿈꾸기 가장 편리한 나는무덤 속의 나니까요< 네게로 >흐르는 물처럼 네게로 가리. 물에 풀리는 알콜처럼 알콜에 엉기는 니코틴처럼 니코틴에 달라붙는 카페인처럼 네게로 가리. 혈관을 타고 흐르는 매독균처럼 삶을 거머잡는 죽음처럼.

- 최 승자 ‘197X년 우리들의 사랑, 길이 없어, 네게로‘




이 무기력한 흙빛 눈빛은 어디서 왔던가,
언제 왔던가,
누구를 기다렸던가


내가 디딘 땅,
흙속에 묻힌 내 신부여,
너는 얼마나 오래 기다렸는가,
한 천년, 혹은 한 만년?
네 몸 다 굳어져
흙인형으로 변했다가,
이제 마침내 흙으로 부서져내릴 참이었구나,
신랑들은 언제나 너무 늦게서야 오고,
오, 오래, 너무 오래 기야려야만 하는 신부들,
땅 위의 따님, 따님들.
그렇게 오래 기다려온
네 절망의, 납빛 눈빛.


몇만년의 어둠, 무력의 맹점에서
이제 비로소 몇억 광년을 날아와
내 눈빛이 너를 찾는다.
내 눈빛이 네 흙의 눈빛과 만나니,
너 비로소 하늘빛으로
살아, 날아오르는,
이 빛의 혼인, 축복의 환한 빛,


수천 길 땅속에서 끌어낸
나의 신부, 그 몸에 빛이, 생기가 돌고,
나의 잠자는 미녀,
이제 그 눈을 떠라,
나의 페르세포네, 나의 에우리디케,
오 나의 신부, 나의 누이여,
나의 말쿠트,
나의 웅녀, 나의 따님.


- 최 승자 시 ‘연인들1‘





詩로써 깃발을 올릴 수 있는 자는
행복하다.
그러나 내가 詩로써
무슨 깃발을 올릴 수 있으랴.
나의 삶 자체가
시종 펄럭거리는
찢어진 깃발인 것을.

──오, 바람에 끊임없이
창문들이 휘날리는군.
네 머리를 잘 걸어둬.
날아갈라. 날아가, 그나마
하수구에 처박힐라.

- 최 승자 ‘下岸發 1‘


하지만 이젠 정말 모르겠어.
honey인지 money인지,
root인지 roof인지.

하지만 이젠 정말 모르겠어.
슬픔인지 수프인지.
실체가 없어졌어.
혓바닥의 감각이 없어졌어.

(이 고통의 개밥 그릇을
내 앞에서 치워다오.
나는 개가 아니다.)

- 최 승자 ‘下岸發 2‘


나는 개종하고 싶다.

커다란 수족관 안에서
내가 살고 있다.
전기 장치로 공급되는
산소와 미네랄과 또 무엇과 무엇과
정부와 국가와 민족과 글로벌이…… 있고
그 안에 또 어떤 물고기들이
벌이는 걸프전이 있고……
이 하염없는, 미지근한 수족관에서
나를 바다로 이주시켜다오.

나는 개종하고 싶다.


- 최 승자 ‘下岸發 3‘



그는 안에서 열고
밖에서 잠근다.
혹은 밖에서 열고
안에서 잠근다.

그는 밖으로 나가며 안을 잠그고
안으로 들어가며 밖을 잠근다.

그에겐 안이 온 세상,
밖이란 온 세상 안에 널린 모래알들 중의 하나,

그는 더 안으로 들어가며 또 밖을 잠근다.
그는 더 더 안으로 들어가며 또 또 밖을 잠근다.


- 최 승자 ‘下岸發 4‘




그 많은 좌측과 우측을 돌아
나는 약속의 땅에
다다르지 못했다.

도처에서 물과 바람이 새는
허공의 방(房)에 누워, “내게 다오,
그 증오의 손길을, 복수의 꽃잎을”
노래하던 그 여자도 오래전에
재가 되어 부스러져 내렸다.

그리하여, 이것은 무엇인가.
내 운명인가, 나의 꿈인가,
운명이란 스스로 꾸는 꿈의 다른 이름인가.

기억의 집에는 늘 불안한 바람이 삐걱이고
기억의 집에는 늘 불요불급한
슬픔의 세간살이들이 넘치고,

살아 있음의 내 나날 위에 무엇을 쓸 것인가.
무엇을 더 보태고 무엇을 더 빼야 할 것인가.
자세히 보면 고요히 흔들리는 벽,
더 자세히 보면 고요히 갈라지는 벽,
그 속에서 소리 없이 살고 있는 이들의 그림자,
혹은 긴 한숨 소리.

무엇을 더 보태고 무엇을 더 빼야 할 것인가.
일찍이 나 그들 중의 하나였으며
지금도 하나이지만,
잠시 눈감으면 다시 닫히는 벽,
다시 갇히는 사람들.
갇히는 것은 나이지만,
벽의 안쪽도 벽, 벽의 바깥도 벽이지만.

내가 바라보는 이 세계
벽이 꾸는 꿈.

저무는 어디선가
굶주린 그리운 눈동자들이 피어나고
한평생의 꿈이 먼 별처럼
결빙해가는 창가에서
나는 다시 한번

아버지의 나라
그 물빛 흔들리는 강가에 다다르고 싶다.


- 최 승자 시 ‘기억의 집‘
<기억의 집, 문학과지성사, 1989>




내가 깊이 깊이 잠들었을 때
나의 문을 가만히 두드려 주렴

내가 꿈 속에서 돌아누울 때
내 가슴을 말없이 쓰다듬어 주렴

그리고서 발가락부터 하나씩
나의 잠든 세포들을 깨워 주렴

그러면 나 일어나
네게 가르쳐 줄께
어째서 사교의 절차에선 허무의 냄새가 나는지
어째서 문명의 사원 안엔 어두운 피의 회랑이 굽이치고 있는지
어째서 외곬의 금욕 속엔 쾌락이
도사리고 있는지
나의 뿌리 죽음으로부터 올라온
관능의 수액으로 너를 감싸 적시며
나 일어나
네게 가르쳐 줄께


- 최 승자 시 ‘누군지 모를 너를 위하여‘




사공이 사라진 하늘의 뱃전
구름은 북쪽으로 흘러가고
청춘도 病도 떠나간다
사랑도 詩도 데리고

모두 떠나가다오
끝끝내 해가 지지도 않는 이 땅의
꽃 피고 꽃 져도
남아도는 피의 외로움뿐
죽어서도 철천지 꿈만 남아
이 마음의 毒은 안 풀리리니

모두 데려가다오
세월이여 길고긴 함정이여


- 최승자, <이 시대의 사랑> 문학과지성사

                              


작년 어느 날
길거리에 버려진 신문지에서
내 나이가 56세라는 것을 알고
나는 깜짝 놀랐다
나는 아파서
그냥 병(病)과 놀고 있었는데
사람들은 내 나이만 세고 있었나 보다
그동안은 나는 늘 사십대였다

참 우습다
내가 57세라니
나는 아직 아이처럼 팔랑거릴 수 있고
소녀처럼 포르르포르르 할 수 있는데
진짜 할머니 맹키로 흐르르흐르르 해야 한다니



- 최 승자 시 ‘참 우습다‘
* <쓸쓸해서 머나먼> 2010. 문학과 지성사.






**최 승자: 1952년, 충남 연기군
1979년 문학과지성 '이 시대의 사랑' 등단. 고려대학교 독문과 졸업.

2017.05. 제27회 편운문학상 시 부문
2010. 제18회 대산문학상 시부문
2010. 제5회 지리산문학상


시집
《이 시대의 사랑》 (문학과지성사, 1981)
《즐거운 일기》 (문학과지성사, 1984) ISBN 8932002185
《기억의 집》 (문학과지성사, 1989) ISBN 8932003955
《내무덤, 푸르고》 (문학과지성사, 1991)
시선집 《주변인의 초상》 (미래사, 1991)
《연인들》 (문학동네, 1999) ISBN 8982811540
《쓸쓸해서 머나먼》 (문학과지성사, 2010) ISBN 9788932020303
《물 위에 씌어진》 (천년의시작, 2011)
《빈 배처럼 텅 비어》 (문학과지성사, 2016) ISBN 9788932028712


산문집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1989)
《어떤 나무들은》 (세계사, 1995) ISBN 8933840389


번역
막스 피카르트(Max Picard) 《침묵의 세계》(까치, 초판1985, 재판2001) ISBN 8972912387
메이 사튼(May Sarton) 《혼자 산다는 것》(까치, 1999) ISBN 8972912557






평안 하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