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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그 쓸쓸한 영혼

먹고 일하고, 마시고 자는 일상의 생활 - 김 경미 시.

문득,, 생각해 본다.










1
누군가 '사하라 작약' 얘기를 했다

19세기 여배우 '사라 베르나르'의 이름을 딴
'사라 베르나르 작약'
우리나라 화훼 수입상이 '사하라 작약'으로 바꿨다

마음대로 줄이거나 늘린 말들이 모여

사하라가 되고
사라 사하라 베르베르 베르나드가 되고
버나드 사라가 되고
사라 작약이 되고
사하라 버나드 사라 카라 3세가 되어

'사라 베르나르 작약'을 퍼뜨리거나
'사라 베르나르 작약'을 바꾸거나
떨어뜨리거나 멀어지는 법

말이 없이는
'사라 베르나르 작약'도 애초에 없었다



2

'벨 에포크'를 연 여배우 '사라 베르나르'는
살아 있을 때 늘
관(棺)에서
잠을 잤다고 한다

사막이 되고
작약이 되고 사라가 된 말들이 모여

관(棺)을 짜는 법

매일매일
살아서 거기로 들어가는 아름다움 없이는
어떤 삶도 살아남지 못하는 것이다



- 김 경미 시 ‘ 사막에 작약이 피는 법‘
* 당신의 세계는 아직도 바다와 빗소리와 작약을 취급하는지, 민음사, 2023





아무리 말을 뒤채도 소용없는 일이
삶에는 많은 것이겠지요

늦도록 잘 어울리다가 그만 쓸쓸해져
혼자 도망 나옵니다

돌아와 꽃병의 물이 줄어든 것을 보고 깜짝 놀랍니다
꽃이 살았으니 당연한데도요

바퀴벌레를 잡으려다 멈춥니다
그냥, 왠지 불교적이 되어갑니다
삶의 보복이 두려워지는 나이일까요

소리 없는 물만 먹는 꽃처럼
그것도 안 먹는 벽 위의 박수근처럼
아득히 가난해지길 기다려봅니다

사는 게 다 힘든 거야
그런 충고의 낡은 나무계단 같은 삐걱거림
아닙니다

내게만, 내게만입니다
그리하여 진실된 삶이며 사랑도 내게만 주어지는 것이리라
아주 이기적으로 좀 밝아지는 것이지요


- 김 경미 시 ‘ 이기적인 슬픔을 위하여 ‘
* 이기적인 슬픔들을 위하여, 창비, 1995





서랍 뒤쪽에서 불쑥 주황색 구두끈이 나타났다.

나타났다는 말이
갑자기 마음에 들어서
주황끈에 어울리는 구두와 정장을 사서
찻집에 나타나고 싶었다

최대한 길게 대화의 선을 잇는 사람들
서랍같이 열렸다가
서랍같이 닫히며
서로를 보관하려는 사람들

나도 양말에 어울리는 스카프를 사고
스카프 같은 초승달을 보며

갑자기 나타날 사람과 걷고 싶다
잘 어울리고 싶다


- 김 경미 시 ‘ 구두끈’
* 당신의 세계는 아직도 바다와 빗소리와 작약을 취급하는지, 민음사, 2023






갑자기 다리를 저는 일
순식간에 눈이 머는 일
심장 부서지기 직전의 일
너무 큰 옷 속에서 몸이 어쩔 줄 모르는 일

누군가가 목의 반쪽을 새빨갛게 물었다

단풍잎이었다

유월에만 붉은 줄 알았는데
아직까지 살아남은 장미의 빨강

넘어진 무릎 색깔을 가졌다니

날아가네 날아가네 날아가네
기러기 같은 손목과 발목
유족의 심장을 하고

이름을 바꾸고 싶은 일

갈대처럼 첫눈 내리고

계절은 다섯 개,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11월

다섯 계절 내내 하도 몰래 드나들어서
11월 날씨만 제일 낡았다

무엇을 진정
누구를 진정 사랑했는지
미안해지는 일
미안하다  말 안 하려 입을 꾹 다문 채


- 김 경미 시 ‘ 11월이란 ‘
* 당신의 세계는 아직도 바다와 빗소리와 작약을 취급하는지, 민음사, 2023





잡아도 잡아도 멸하지 않는다 하여 멸치라 했다 한다

그렇다면
연보랏빛 오월의 라일락나무들도 멸치다
유월, 담벼락에 온통 줄도장 찍는 덩굴장미들도 멸치다
그때마다 자궁 속 다시  나오고 싶은 여자도 멸치다
그 밤마다 치마 속 다시 들어가고 싶은 남자들도 멸치다

저 파닥이는 흰구름도 빗물도 빗물 적시는 먼지도
무엇이든 다 매만진다는 세월도 추억도
다들 단도처럼 반짝대는 멸치다

당신이라는 세상, 그 수상한 것만 빼면


- 김 경미 시 ’ 멸치 ‘
* 고통을 달래는 순서, 창비, 2008





새 도마를 샀다, 토끼무늬들이 피크닉을 가고 있다
도마일 뿐이지만 내 음식 밑에서 언제고
그들의 신발과 피크닉 가방이 나뒹군다
라일락무늬 나무받침에 뜨거운 냄비를 얹다가
라일락꽃들 비명에 냄비를 놓친 적도 있다
문 열린 것들과 닫힌 것들이 뒤죽박죽이 되어간다

자운영꽃잎의 물방울들 나에게 더 잘 전해지듯이
나 그대에게 더 잘 전해지지 않듯이


  - 김 경미 시 ‘ 화상 ‘






마음에 절대로 없는 사람들과 밥을 먹고
당연한 듯 밥값을 내고 나오면

언제나 백만 원이 나온다
항상 백만 년이 나온다

차라리 기차를 백만 원어치 탈걸
천천히 양말을 백만 원어치 고를걸
수상택시를 타고 백만 원어치 바다를 달려 제주도에 눌러앉을걸

백만 원 후에는 언제나 소나기가 내리는 법
차라리 삼백 개의 비닐우산을 살걸

일회용 칫솔과 비누 천 개,
혹은 김밥 50인분과 소주를 사서
기차역 앞에서 나눠 줄걸

언제나 기부와 적선이 되는 법

마음에 없으면 언제나 백만 원이 나온다
4만 166일 114년 백만 년이 든다

그러므로 양말을 뒤집어
날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들이 나 때문에
백만 단위를 쓰지 않도록
114년이나 우산도 없이 소나기 맞지 않도록

극도로 조심하는 나는
언제나 소수점 이하 다섯 자리 같은 나는
언제나 점심값 백만 원을 대비하며
백만 년을 사는 나는


- 김 경미 시 ‘ 나의 백만 원 계산법 ―2021년‘
[당신의 세계는 아직도 바다와 빗소리와 작약을 취급하는지], 민음사, 2023.,




― C시인께

아파트 옆의 옆 동으로 이사 온 선배 시인이
문자를 보냈다

"언제고 놀러 와 달걀이든 빵이든
아무 때고 꾸러 와 무엇이든.
나 외로움"

다들 좀 차갑다고 생각하는 시인

갈게요 언제고 그 옆으로
짚에 싸인 달걀 한 알

칫솔이나 껌이 떨어진 날
생선 반 토막이나 슬리퍼 한 짝도 부리나케 꾸러 갈게요

헛발질로 절벽에서 떨어진 날
귀에서 심한 추억이 쏟아질 때
맨발이나 귀를 꾸러 갈게요

어깨나 코가 떨어진 날

쥐도 새도 모르게
짝사랑이 시작되거나 끝난
쥐와 새의 시간,
새벽도 불사하고 정신없이 꾸러 갈게요

화요일에는 벌써 이해심이 떨어지고
금요일에는 벌써 일 년이 비고 말 때

무릎이나 팔꿈치처럼
자꾸만 떨어지고 사라지는 것들

자꾸만 더 기억나는 것들

울면서 꾸러 갈게요

잔뜩 약속하고 나는 항상
달려가지 않죠

달걀 같은 창밖만 하염없이 내다보죠
나 외로워, 하면서요
숙명이다 하면서요


- 김 경미 시 ‘ 달걀 빌리러 가기‘






나는 나를 잘 모른다
나를 아는 건 나의 결심들

가령 하루를 스물네 개로 치밀하게 조각내서 먹는
사과가 되겠다든지
밤 껍질 대신 뼈를
혹은 뼈 대신 고개를 깎겠다는 것

사람의 얼굴 양쪽에는 국자가 달렸으니
무엇이든 많이 담아 올리리라

국자가 아니라 손잡이라든가
그렇다면 뭐든 뜨겁게 들어 올리리라

여하튼 입을 벌리고 살지 말자

나를 나보다 잘 아는 건 내 결심들

한밤의 기차에 올라
옥수수를 너무 많이 먹어
입안이 감당 안 되는 느낌처럼

무엇보다 창피스러운 건

떠나면 후회할까 봐 후회를 떠나지 못하는

신선한 베이커리 빵집처럼
언제나 당일 아침에 만들어서
당일 밤에 폐기하는

결심들만큼

영원히 나를 잘 모르는 것도 없다


- 김 정미 시 ‘ 결심은 베이커리처럼 ‘
* 당신의 세계는 아직도 바다와 빗소리와 작약을 취급하는지, 민음사, 2023




죽은 사람 취급을 받아도 괜찮습니다

살아 있는 게 너무 재밌어서
아직도 빗속을 걷고 작약꽃을 바라봅니다

몇 년 만에 미장원엘 가서
머리 좀 다듬어 주세요, 말한다는 게
머리 좀 쓰다듬어 주세요, 말해 버렸는데

왜 나 대신 미용사가 울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잡지를 펼치니 행복 취급하는 사람들만 가득합니다
그 위험물 없이도 나는
여전히 나를 살아 있다고 간주하지만

당신의 세계는
어떤 빗소리와 작약을 취급하는지
오래도록 바라보는 바다를 취급하는지
여부를 물었으나

소포는 오지 않고

내 마음속 치욕과 앙금이 많은 것도 재밌어서
나는 오늘도
아무리 희미해도 상관없습니다

나는 여전히 바다 같은 작약을 빗소리를
오래오래 보고 있습니다


- 김 경미 시 ‘ 취급이라면 ‘





아프리카 오지 마을에서
소년의 편지가 왔다

초록빛 편지지엔 단체에서 마련한
소년이 대답해야 할
오지선다의 질문이 있었다

"나는 우리 마을에서 이런 냄새를 맡을 수 있어요"*

① 꽃향기
② 비 올 때 나는 냄새
③ 비누 냄새
④ 음식 냄새
⑤ 그 외

아프리카 소년은 '꽃향기'와
'비 올 때 나는 냄새를 골랐다

충격이었다

소년 시인

마을에서 음식 냄새를 맡을 수 없다 해서

* 《월드비전》편지에서······


- 심 경미 시 ‘오지선다 ’







그녀를 설명하자면

자주 인적 끊기고
혹은 끊죠

때때로 발광체같이 발광(發狂)

앉거나 먹는 습관 나쁘고

뭐든 별로 안 좋아하면서 좋은 척도 해보지만

어설프거나
들키고
들키니까 더 어설프고

빽빽한 악순환

선제공격보다
선방(先防)이란 말을 좋아하지만

고물별자리
달구지풀이란 말을 좋아하지만
잘 쉬지 않지만

뭐든 안 좋아하니
절대 선하지 않고
친하지도 않고
부드러운 바퀴도 없고

목은 있지만
면목도 없고

체면은 있지만
착각과 실수가 잦으니

가령 테이블이나 요리를 만나면

접시 바닥의 데코레이션용 돌부스러기를
잡곡밥으로 알고 떠먹다가
혀를 다치는 식

혀를 다쳐 말을 못 하고 보니
모든 걸 너무 지나치게
사랑했던 게 아니었을까

고개를 못 들겠는


- 김 경미 시 ‘ 설명 ‘





햇빛에 지친  해바라기가 가는 목을 담장에 기대고 잠
시 쉴 즈음. 깨어 보니 스물네 살이었다. 신(神)은, 꼭꼭 머
리카락까지 조리며 숨어 있어도 끝내 찾아주려 노력하지
않는 거만한 술래여서 늘 재미가 덜했고 타인은 고스란
히 이유 없는 눈물 같은 것이었으므로,

    스물네 해째 가을은 더듬거리는 말소리로 찾아왔다.
꿈밖에서는 날마다 누군가 서성이는 것 같아 달려 나가
문 열어보면 아무 일 아닌 듯 코스모스가 어깨에 묻은 이
슬발을 툭툭 털어내며 인사했다. 코스모스 그 가는 허리
를 안고 들어와 아이를 낳고 싶었다. 석류 속처럼 붉은 잇
몸을 가진 아이.

    끝내 아무 일도 없었던 스물네 살엔 좀 더 행복해져도
괜찮았으련만. 굵은 입술을 가진 산두목 같은 사내와 좀
더 오래 거짓을 겨루었어도 즐거웠으련만. 이리 많이 남은
행복과 거짓에 이젠 눈발 같은 이를 가진 아이나 웃어줄
는 지. 아무 일 아닌 듯해도,

     절벽엔들 꽃을 못 피우랴. 강물 위인들 걷지 못하랴.
문득 깨어나 스물다섯이면 쓰다 만 편지인들 다시 못쓸
라. 오래 소식 전하지 못해 죄송했습니다. 실낱처럼 가볍
게 살고 싶어서였습니다. 아무것에도 무게 지우지 않도록.


- 김 경미 시 ‘ 비망록 ‘
[쓰다만 편지인들 다시 못 쓰랴], 실천문학사, 1989.






무량사 가자시네 이제 스물몇 살의 기타 소리 같은 남자
무엇이든 약속할 수 있어 무엇이든 깨도 좋을 나이
겨자같이 싱싱한 처녀들의 봄에
십 년도 더 산 늙은 여자에게 무량사 가자시네
거기 가면 비로소 헤아릴 수 있는 게 있다며

늙은 여자 소녀처럼 벚꽃나무를 헤아리네
흰 벚꽃들 지지 마라, 차라리 얼른 져버려라, 아니
아니 두 발목 다 가볍고 길게 넘어져라
금세 어둡고 추워질 봄밤의 약속을 내 모르랴

무량사 끝내 혼자 가네 좀 짧게 자른 머리를 차창에
기울이며 봄마다 피고 넘어지는 벚꽃과 발목들의 무량
거기 벌써 여러 번 다녀온 늙은 여자 혼자 가네

스물몇 살의 처녀, 오십도 넘은 남자에게 무량사 가자
가면 헤아릴 수 있는 게 있다 재촉하던 날처럼


- 김 경미 시 ‘ 봄, 무량사 ‘
[고통을 달래는 순서], 창비, 2008.







그해 여름,
꽃무늬 비닐장판 같은 게 인생에 마구 쏟아져 들어왔다
밤 열두 시 십 분의 택시기사는 차를 마시자며
이대로 헤어지면 다시 만날 확률이 7만 5천 분의
1, 이라고
어디 근거인지 모르겠으나,

75만 분의 1인 사랑도 매일 그냥
스쳐간답니다
(정육점 빛깔의 6월 장미들 면장갑 낀 손으로 매일 가
슴부위를 손질하고 나도 더러 누군가를 손질하지만 통
증의 근거 또한 아직 알 수 없답니다)

태양과 나와 장미와 택시와 면장갑들이
매일 서로 다른 확률의 근거를 호소하던 날들
달팽이무늬의 낙엽들 몇 번쯤 지나면 비닐꽃무늬도
잦아들겠으나
택시가 또 다른 여자에게 건너갈 확률은 99 퍼센트
어떤 여자가 그에게 응할 확률은

모르겠으되,

7천5백만 분의 1로 마주쳐도
스치고 마는 눈빛도 있답니다
(우리가 만난 건 어쩌면 0 퍼센트의 확률 덕분!)
어디에도 무엇에도 아직 아무 근거도
모른다 합니다 늘 지독한 비닐꽃무늬의 여름들이라 합
니다


- 김 경미 시 ‘ 사랑의 근거 ‘
[고통을 달래는 순서], 창비, 2008.





부르주아 가을. 문패에 나프탈렌 내건다. 지난
여름 해충처럼 괴롭던 관계들
얼씬도 마라

저 다리미 바닥으로부터 오는 자주벨벳의 가을
따스함이 스쳐내는 접신의 경지
맑은 어깨며 가슴을 되살려내는 대단한 의술 좀 봐
스러진 꽃들 생생히 돼 돋우는
저런 사랑
모든 변덕과 상처들 한약처럼 잘 다려내
마침내 온화함의 지복을 누리는

가을 세탁소 앞을 서성인다 구김 많은 한 벌의
옷처럼


- 김 경미 시 ‘ 가을 세탁소 ‘
  * 쉬잇, 나의 세컨드, 문학동네




아무래도 아닐 거야. 나는. 친엄마가.
네 여린 잎 한 장에 줄 햇빛. 고르다가
문득 울먹인단다
네 나이 때부터였나 봐, 그래
저 인도같이 퀭한 눈동자로
문득, 그래, 오렌지빛 가사를 혼자 입어보는 게,
그게, 문득, 나쁠 거야, 갠지스강 노을에 혼자 붉어 우는 게.

기어코 친자식인 네가, 엄마를 좀 키워주렴.
부엌을 책임지는 습관과
사람은 나무처럼 제가끔 외로워서는 안 됨을
아무 사회에도 어울리는 옷이 없으니
늙은 거울 보며 어떤 장면인들 만들 수 있겠느냐고
기어코 친자식인 네가
시정잡배
엄마를 좀 줏어다 길러야 하지 않겠니


- 김 경미 시 ‘ 계모 전 ‘
[이기적인 슬픔들을 위하여], 창작과 비평사, 2004(1995).




1

집에 없니?…… 그래…… 여긴 어제는 가을비 오더니…… 오늘은 가을볕 눈 시린 게 …… 너무 좋기에……그냥 …… 생각이 나서…… 그래…… 그럼…… 잘 있어…… 그냥 갑자기……그래……잘……근데 이렇게…… 일찍부터 어딜 갔니…… 없으니…… 얘기도 못하겠구나…… 그래 그럼…… 그래…… 그럼 잘 지내고……
…… 이 가을햇살……너 다 가져라!……아냐…… 나 우는 거 아냐……

2

나 지금 어떤 전화에도 대답할 수 없음은
가을 단풍잎들 내 입을 봉하고 있어서다

한 노스님은 한밤중 대웅전에 불붙은 것 봤지만
한마디 비명도 지르지 않았다 한다
묵언수행 중이었으므로
불이 먼저인지 부처가 먼저인지
다만 불길들
인간의 담 타 넘도록 듣기만 했다 한다

나 또한 입을 타 넘어 담을 타 넘기를 바래
당분간 단풍잎들 입에서 뗄 수 없음이다


- 김 경미 시 ‘ 자동응답기 ‘
[고통을 달래는 순서], 창비, 2008.




비가 자운영꽃을 알아보게 한 날이다 젖은 머리칼이 뜨거운 이마를 알아보게 한 날이다 지나가던 유치원 꼬마가 엄마한테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냐 엄마, 그런다 염소처럼 풀쩍 놀라서 나는 늘 이러고 있는데 이게 아닌데 하는 밤마다 흰 소금염전처럼 잠이 오지 않는데 날마다 무릎에서 딱딱 겁에 질린 이빨 부딪는 소리가 나는데 낙엽이 그리움을 알아보게 한 날이다 가슴이 못질을 알아본 날이다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일생에 처음 청보라색 자운영을 알아보았는데

내일은 정녕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 김 경미 시. ‘이러고 있는’







그녀가 떠났다
그가 떠났다

독사진 속으로 구급차가 들어간다
눈동자가 벽에 가 부딪친다
방석이 목을 틀어막는다
안개가 촛불에 제 옷자락을 갖다 댄다
우편배달부가 가방을 찢어버린다
가로수가 일제히 자동차 위로 쓰러진다

숨을 멈춰도 끊어지지 않는다

누가 누구와 헤어지는 건
언제나

전대미문의 일정이다


- 김 경미 시 ‘ 전대미문 (前代未聞)‘
[밤의 입국 심사], 문학과 지성사, 2014.




아침이면 그녀, 순례를 나서네, 복덕방 아저씨 어디 없나요, 가시 없는 잎사귀들의 마을.
봄의 초록 은행잎처럼 눈에 띄지 않는,
서양 물감빛들 한 켜씩 세룰로오스를 떨구는 방,
절친한 가족도, 낙지 같은 가재도구도,
정부도 찾지 못할, 나무 꼭대기나 11월의 바닷속인들,
늦가을 포도잎이나 신문지로 벽지를 댄들,
물그릇처럼 고여, 고여 유화 그림처럼 짙어지는,
하루 몇 시간쯤 수증기처럼 아무도 모르게
홀로 나 비짓 하는,

누구와도 섞이고 싶지 않은 시간, 그런 방이요, 창호지같이 제 마음에 은은해지다가
빈둥대다가 울다가
수녀들 기도 소리에 몰래 마음을 달래다가
삿된 사랑에 마음 서성이다가 그 아무도 모르는 독백같이
혼인 속 독방은 왜 자꾸 필요한지요, 아침마다
지상에 없는 주소 들고 그녀, 평생의
반려자인 듯 복덕방 아저씨와 세상의
모든 방문들을 그녀, 자꾸만
열고 또 열어보네


- 김 경미 시 ‘ 기혼의 독방 ’
[쉬잇, 나의 세컨드는], 문학동네, 2003




천천히 심장 속을 들여다보니요
끊어질 듯 이어지는 단풍길과
거기, 리아스식 해안과 아픈 톱니들 사이에 다도해 어둠들
제풀에 섬이 되어
주먹밥 크기들로 놓여 있는 눈물도 보여요
너무나 헛되고 외로웠으며
어찌 다스릴 수 없었던 몇 채의 무너짐,
그리움들은 많이도 줄 끊어져 나부끼고

사랑
아파서 아름답다니요

자꾸 무릎을 다치면서 깊이 돌아보니
행복은 왜 꼭 그렇게 나와 멀리 앉아 서먹했던 것일까요


- 김 경미 시 ‘ 내 마음의 지도 ‘
<이기적인 슬픔들을 위하여> 김경미 창작과 비평사 2013 04 13




전화 주셔서 고맙습니다
저랑 살고 싶거든 일주일에 한 번의 방문만을.
잦은 숙식은 곡예에 해롭죠
혹시 남기실 말씀이 있으시면, 부디 횡설수설의 미덕을
바른말일랑 하늘나라에나 하세요
삐 소리가 난 후, 가을을 잡아 술병 속에 넣어놓았으니
먹든지 말든지 뱉든지 삼키든지 맘대로
혹 메모를 남겨주시면, 삶의 어느 쪽 유인물마다
왠지 내 취향은 없는가 봐요
잠긴 문 앞, 쌓인 새 신문지들 위에 잔뜩 올라누 운 며칠치 새 우유들 놀라지 마세요
걔네들은 내가 오래도록 안 보여도 끄떡도 안 해요
다녀와서 연락,
못 드리면 새로운 연인을 찾으셔야겠죠 물론


- 김 경미 시 ‘ 도회 여인들에의 초대 ‘
[이기적인 슬픔들을 위하여], 창작과 비평사, 1995




삼천만 년 만에 태어나 삼천대천세상에 가을은 처음이다


             1
전생의 가을에는 여고생이었다 가을만 되면
성적이 서리 속 기러기떼처럼 날아가고 검정비닐봉지
같은 날들 견딜 수 없어 봉지 밖으로 영영
떠나버릴까 자퇴하고 채석장에서 돌이나 깨다
햇빛이나 따라가 버릴까 영영 방과 후마다 버스 뒷자리
종점까지 가고 또 가다 못내 살아 돌아오면
그러거나 말거나 그들은 또
유리창을 깨고 있었다
  나쁜! 나쁜!


          2
그전전생의 가을에는 이십오륙칠 세였는데
첫 자취방, 오직 나만의 저녁불빛을 갖다니
마침내 가족들 마른 낙엽처럼 다 버려버렸다니
누군가 축하의 국화꽃도 가져다주었다
난생처음 기뻐 생의 첫 김치도 담갔었다
간장으로......
그 생의 어머니, 맨날 책만 들여다봤자다, 하시더니, 어머니, 결국 간장으로 김치를......
어차피 이 생도 온통 간장빛인걸요


           3
그전전생의 전생에는 삼십 번의 장밋빛 생일이었는데
생일엔 왜 촛불을 끌까 온통 켜두지 세상 다
불 지르도록 소방차 물벼락 다 뒤집어쓰도록
케이크 녹아내려 금강석 되도록 파-티하지 파란의
만장의 파-티하지 세상사람 다 먹어치우고 싶은 허기와
목욕탕만 한 슬픔 틈만 나면 하루 삼십 번씩이라도 중얼댔다 미친년, 미친년, 미친년,
가슴 다 후련했지만 그 생의 가을은 오지 않았다 영영


         4
그 전생의 모든 전생들에는 차마 발설키 두렵지만 사십 세였는데
한 번은 제 목숨값 손수 치르고 싶어서 어떻게든
다시 잉태되고 싶어서 처음으로 동그랗게 발가락을
입에 말아 물고 고개 숙이니
태아처럼 비로소 자세가 나올 것 같은 생이여
영영 떠날 수 없던 그 붉은 단풍잎 가을이여


- 김 경미 시 ‘ 가을의 전력 ‘
[쉬잇, 나의 세컨드는], 문학동네, 2003.






얇고 긴 입술 하나로
온 밤하늘 다 물고 가는
물고기 한 마리

외뿔 하나에
온몸 다 끌려가는 검은코뿔소 한 마리

가다가 잠시 멈춰 서는 검정고양이
입에 물린
타악기처럼 파닥이는,

검정 그물

나도 당신이란 세계를
그렇게 다 물어 가고 싶다


- 김 경미 시 ‘ 초승달 ‘






네 개의 벽에 일곱 개의 탁자를 이어놓고
열네 가지의 일을 하라는 것

자동차 앞유리창에 스무 개의 일정을 붙이고
바람이 날리는 순서대로 해치우라는 것

피곤을 못 이긴 벽이 통째로 주저앉거나
때때로 밤공기를 붙들고 흐느끼면

여덟 번째 탁자를 기다리는 몇 초씩
두 팔을 잠깐씩
휴지통에 넣고 식히라는 것

모든 게 밋밋한 진행과 납작한 비중보다는
열렬하다며

단숨에 이름을 삭제해 버리는 것


- 김 경미 시 ‘ 속도의 전략 ‘
  * 밤의 입국 심사





라일락이나 은행나무보다 높은 곳에 살지 않겠다
초저녁 별빛보다 많은 등을 켜지 않겠다
여행용 트렁크는 나의 서재
지구 끝까지 들고 가겠다
썩은 치아 같은 실망
오후에는 꼭 치과엘 가겠다

밤하늘에 노랗게 불 켜진 보름달을
신호등으로 알고 급히 횡단보도를  건넜으되
다치지 않았다

생각하면 티끌 같은 월요일에
생각할수록 티끌 같은 금요일까지
창틀 먼지에 다치거나
내 어금니에 혀 물린 날 더 많았으되

함부로 상처받지 않겠다
목차들 재미없어도
크게 서운해하지 않겠다
너무 재미있어도 고단하다
잦은 서운함도 고단하다

한계를 알지만
제 발목보다 가는 담벼락 위를 걷는
갈색의 고양이처럼

비관 없는 애정의 습관도 길러보겠다


- 김 경미 시 ‘ 오늘의 결심 ‘



자몽 들어보셨는지요
쓰면 시지나 말지라는 뜻이죠
시지나 말면 쓸모가 있을까요
뜻대로 되는 일이 많으신가요
태어나기를 그렇게 태어나셨나요
벌레가 입술에 잔뜩 물었네요 불길하네요
수박 같은 무덤도 하나 사시죠
크면 쪼개도 팔아요
내 가요? 내가 정말 그렇게 말했어요?
무덤을 판다고요?
무던을 잘못 들으셨겠죠
제발 눈과 귀의 각도 좀 낮춰 조정하세요
은행잎이나 바나나나 레몬같이 얼굴 두꺼워지는 게
꼭 세월 탓일까요


과일이라니, 꼭 누구 등치는 일 같잖아요
다음엔 지구는 과일이 아니라는 내 학설도 꼭
맛 좀 보시길요


- 김 경미 시 ‘ 과일이라니 ‘
*밤의 입국 심사(문지, 2014)




그 나라 입국할 때는 기록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밤의 횟수를

가령 검은 눈물 자국
베개를 지나
침대 밑으로 죽은 팔처럼 길게 흘러내린 밤

그렇게 죽음의 태도를 지녔던 첫 결별의 밤
스물한 살의 봄이었는지
열일곱 살의 책가방 든 가을 고궁이었는지

서른다섯 살까지는 몇 번의 태도가 있었는지

가장 최근에는 누구였는지

온 생에 단 한 번의 태도도 없었던

불행한 자를 제외한 누구나

실연의 피격(被擊)과 가격(加擊)의 횟수를
실명과 주소까지 낱낱이 기입해야

골목의 모양과 부피가 다른
지도를 허락하는

밤의 입국심사서를 써야 하는 나라가 있습니다


- 김 경미 시 ‘ 연애의 횟수 ‘




등(燈) 축제라는데 나는
어둠을 구경하러 간다

어둠은 무거운 걸 많이 들어
팔이 근육질이다
잡힌 사람들은 발버둥을 친다
내려놓으면 서로 재밌었다고 한다

천변에는 구경꾼들보다 김밥 장수가 더 많다
어둠 속에서 김밥을 먹은 적이 있다
두 번이었다
한 번은 방문 밖 마당의 축제 때문이었다
초대받지 못했으므로 없는 척 불을 꺼놓고 먹었다
한 번은 옆방의 파티에 초대받아서였다
초대가 싫어 없는 척 불 꺼놓고 먹었다

두 번 다 김밥은 식었고
하필 물 한 모금도 없었다
초대는 잔인한 데가 있다

없는 척하는 것보다 힘든 쪽은
정말로 없는 취급을 당할 때다
물론 누구나 아는 얘기다
거리엔 김밥 장수가 넘치고

등에서 나오는 빛들이 조악하다
서둘러 다시 어둠의 팔짱을 낀다


- 김 미경시 ‘ 거리의 초대 ‘
[밤의 입국 심사], 문학과 지성사, 2014



낯선 읍내를 찾아간다 청춘이 시키는 일이다
포플러나무가 떠밀고
시외버스가 부추기는 일이다

읍내 우체국 옆 철물점 싸리비와
고무호스를 사고 싶다
청춘의 그 방과 마당을 다시 청소하고 싶다
리어카 위 잔뜩 쌓인 붉은 생고기들
그 피가 옆집 화원의 장미꽃을 피운다고
청춘에 배웠던 관계들
언제나 들어오지 마시오 써 있던 풀밭들
늘 지나치던 보석상 주인은 두 다리가 없었다
머리 위 구름에서는 언제나 푸성귀 냄새가 코를 찔렀다
손목부터 어깨까지 시계를 차도 시간이 가지 않던
시간이 오지 않던
하늘에 1년 내내 뜯어먹고도 남을 만큼 많은 건
좌절과 실패라는 것도 청춘의 짓이었다

구름이 시키는 대로 하다가 고개가 부러졌던 스물셋
설욕도 못한 스물여섯 살의 9월
새벽 기차에서 내리면 늘 바닷속이었던
하루에 소매치기를 세 번도 당했던
일주일 전 함께 갔던 교외 찻집에 각각
새로운 연인과 동행했던 것도
어색하게 인사하거나 외면했던 것도 언제나
청춘이 시킨 짓이었다

서른한 살에도 서른여섯 살에도
계속 청춘이라고 청춘이 계속 시키며
여기까지 오게 한 것도 다 청춘의 짓이다
어느덧 불 꺼진 낯선 읍내
밤의 양품점 앞에서
불 꺼진 진열장 속 어둠 속 마네킹을 구경하다가
검은 마네킹들에게 도리어 구경당하는 것도
낯선 읍내 심야 터미널 시외버스도
술 취해 옆 건물 계단에 앉아 우는 남학생도
떨어져 흔들리는 공중전화 수화기도
다 청춘이 불러낸 짓이다

그 수화기 떨어지며 내 청춘 끝났다 절규하던 목소리도
그 전화 아직 끊기지 않았다는 것도
지금이라도 얼른 받아보라고
지금도 시키는 것도 청춘이 시키는 일이다
아직도 시킨다고 따라나서는 것도
아직도 청춘이 시키는 일이라고 믿는 청춘이
있다는 것도 다 청춘이 시키는 일이다


- 김 미경 시 ‘ 청춘이 시키는 일이다 ‘
*밤의 입국심사(문지, 2014)



꽃은 누가 제일 많이 생각해 주나

줄무늬 티셔츠의 꿀벌인가
물 주러 오는 비의 발소리인가
해마다 다시 손 내미는 잎들인가

너무 큰 식욕이 고민인 흙과
파라솔 색깔의 햇빛들
우박과 천둥과 벼락도 있지

그들도 다 생각해서 그 큰 몸집을 끌고
기어이 찾아오겠지만

노심초사 언제고 손바닥을 받쳐 들고
여린 귓밥 파줄 듯 무릎에서
접시에서 의자 디딤돌까지
하인까지 다 떠맡는
내내 한결같이 곁에 붙어 있는

제때, 혹은 늦은, 식의 이름들
일인다역의

꽃받침들!


- 김 경미 시 ‘ 누가 꽃을 ‘
[밤의 입국 심사], 문학과 지성사, 2014




비가 자운영꽃을 알아보게 한 날이다 젖은 머리칼이 뜨거운 이마를 알아보게 한 날이다 지나가던 유치원 꼬마가 엄마한테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냐 엄마, 그런다 염소처럼 풀쩍 놀라서 나는 늘 이러고 있는데 이게 아닌데 하는 밤마다 흰 소금염전처럼 잠이 오지 않는데 날마다 무릎에서 딱딱  겁에 질린 이빨 부딪는 소리가 나는데 낙엽이 그리움을 알아보게 한 날이다 가슴이 못질을 알아본 날이다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일생에 처음 청보라색 자운영꽃을 알아보았는데

내일은 정녕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 김 경미 시 ‘ 이러고 있는 ‘
[세상의 기척들 다시 쓰다], bookin, 2009.




야야야야
네 살짜리 한 아이여자가 오월의 라일락꽃 느티나무 밑을
성냥개비 같은 두 팔 활짝 바람에 꽂은 채
사과조각처럼 뛰어간다
그 속 원시의 주술사가 세차게 북을 두드린다
라일락빛 뺨 위로 얼마든지 무한한 날들이
여자의 입술을 귀로 귀로 복숭아처럼 끌어올린다
생에 그리고 사랑에
아직 더럽혀지지 않은 흰 치아 몇 톨이 보인다
질투와 연민으로 가슴이 에인다
훼손이여
나 생을 얼마나 편지 뜯어보지도 않고 탕!
문 닫아버렸는지
꽃 속의 뜻들 두려워 서성였는지 알지
알아도 멈출 수 없는 낭비 덕에 나 살아냈는가
느티나무 같은 네 살짜리 여자가 펼쳐 보이는 시간이
기울인 양초에서 떨어지는 촛농처럼

라일락 꽃잎에서 어깨로 얼굴로 똑, 똑, 너무 뜨겁다


- 김 경미 시 ‘ 네 살의 여자 ‘
[제5회 노작문학상수상작품집], 동학사, 2005




앙코르와트엔 아직 가지 못 했습니다
주황색 가사袈裟 입은 촛불들 간절할수록 꺼지기 일쑵니다

빗자루와 양탄자를 타고 석류가, 석유처럼 익는 페르시아 시장
에는 skf마다 갑니다 캐스터네츠처럼 이빨을 딱딱대며 전쟁이
언제나 꽁무니를 쫓아다니죠

물통을 두 팔 높이 받쳐 들고 구름 녹기를 기다려야
세수할 수 있는 밀림에도 오후 늦게 가봤습니다
항복과 경배의 높이를 구경만 하고 왔죠
밀주처럼 진흙 묻은 구두를 만들어 파는 사막에서는
입 벌린 저녁 석양 속에 피조개들이 꼭 장미꽃 같아
상처도 때론 화병이나 액자에 걸 만하다 적어두었습니다
그 나라 이름이 무엇이었던지

중국,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만들어내고 다 고장 내는
중국집에는 한두 달에 한 번도 가고 두 번도 갑니다
청춘일 때는 더 잦았을까요

비행기는 어린 백합꽃을 닮아서 갈증을 자꾸 내죠 물을
자꾸 찾죠 그래선지 저 밑으론 물이 끝없어서 세상은
물 위의 수상 가옥 몇 채, 물 드나듦의 골목자국들,
언제고 발밑을 찰랑이는 물의 기척과
팔에 서린 노 자국
다만 수면을 스치는 햇빛의 굴절뿐임을 알게 되죠

아직 흙 위의 국경들 끝없는 듯해도요


- 김 경미 시 ‘ 세상의 기척들 다시 쓰다 ‘
* 시힘 25주년 기념 동인지[세상의 기척들 다시 쓰다], bookin, 2009




1
약속시간 삼십 분을 지나서 연락된 모두가 모였다
우리는 국화꽃잎처럼 둥그렇게 둘러앉아서 웃었다
불참한 이도, 더 와야 할 이도 없었다
식사와 담소가 달그락대고 마음들 더욱
당겨 앉는데

문득 고개가 들린다 아무래도 누가 안 온 것 같다
잠깐씩 말 끊길 때마다 꼭 와야 할 사람 안 온 듯
출입문을 본다 나만이 아니다 다들 한 번씩 아무래도
누가 덜 온 것 같아, 다 모인 친형제들 같은데, 왜
자꾸 누군가가 빠진 것 같지? 한 번씩들 말하며

두 시간쯤이 지났다 여전히 제비꽃들처럼 즐거운데
웃다가 또 문득 입들을 다문다, 아무래도 누가 먼저
일어나 간 것 같아 꼭 있어야 할 누가 서운하게도 먼저
가버려 맥이 조금씩 빠진다

   2
누굴까 누가 사는 것일까 늘 안 오거나 있다가 먼저 간
빈자리 사람과 사람들 사이의 그 기척은 기척일 뿐
아무리 해도 볼 수 없는 그들에겐 또 기척일 뿐일까
아무리 다 모여도 언제나 접시의 빠진 이처럼

상실의 기척, 뒤척이는 그들은


- 김 경미 시 ‘ 누가 사는 것일까 ‘




1
저녁 무렵 때론 전생의 사랑이 묽게 떠오르고
지금의 내게 수련꽃 주소를 옮겨놓은 누군가가 자꾸
울먹이고

내가 들어갈 때 나가는 당신 뒷모습이 보이고
여름 내내 소식 없던 당신, 창 없는 내 방에서 날마다
기다렸다고 하고

2
위 페이지만 오려내려 했는데 아래 페이지까지 함께 베이고

나뭇잎과 뱀그물, 뱀그물과 거미줄, 거미줄과 눈동자, 혹은 구름과 모래들, 서로 무늬를 빚지거나 기대듯
지독한 배신밖에는 때로 사랑 지킬 방법이 없고

3
그러므로 당신을 버린 나와
나를 버린 당신이 세상에서 가장 청순하고 가련하고

늘 죽어 있는 세상을 흔드는 인기척에 놀라 저만치
달아나는 백일홍의 저녁과
아주 많이 다시 태어나도 죽은 척 내게로 와 겹치는
당신의 무릎이 또한 그러하고


- 김 경미 시 ‘ 겹 ‘



한여름, 선풍기에서 나오는 약풍 혹은 미풍이란 글자
처음 사랑의 편지 받았던 촉감일 때 있다

크게 속상하고 지친 울음 거두고 마악 여는 문
경첩에서 흰 바다 갈매기들 바닷물 닿을 듯 낮게
마중 나올 때가 있다

극도로 줄이거나 높인 음악 소리 속
가본 기억 없는 모로코사막의 터번 두른 낙타
눈 아픈 모래바람 앞서 가려줄 때가 있다

유리창 너머 시원한 액자 속 흰 양떼구름
살아 움직이는 활동사진처럼
갈래머리 계집아이의 어린 설레임 되감아줄 때 있다

어떤 여름 저녁,
그 모든 것들 한꺼번에 밀려 나와
더위보다 큰 녹색 수박의 무수한 조각배들
잊을 수 없는

석양의 출항을 시작할 때가 있다.


- 김 경미 시 ‘ 어떤 여름 저녁에 ‘




천천히 심장 속을 들여다보니요
끊어질 듯 이어지는 단풍길과
거기, 리아스식 해안과 아픈 톱니들 사이에 다도해 어둠들
제풀에 섬이 되어
주먹밥 크기들로 놓여 있는 눈물도 보여요
너무나 헛되고 외로웠으며
어찌 다스릴 수 없었던 몇 채의 무너짐,
그리움들은 많이도 줄 끊어져 나부끼고
사랑
아파서 아름답다니요

자꾸 무릎을 다치면서 깊이 돌아보니
행복은 왜 꼭 그렇게 나와 멀리 앉아 서먹했던 것일까요


- 김 경미 시 ‘ 내 마음에 지도전문 ‘




고구마, 가지 같은 야채들도 애초에는
꽃이었다 한다
잎이나 줄기가 유독 인간의 입에 단 바람에
꽃에서 야채가 되었다 한다
맛없었으면 오늘날 호박이며 양파꽃들도
장미꽃처럼 꽃가게를 채우고 세레나데가 되고
검은 영정 앞 국화꽃 대신 감자꽃 수북 했겠다

사막도 애초에는 오아시스였다고 한다
아니 오아이스가 원래 사막이었다던가
그게 아니라 낙타는 원래 사람이었다고 한다
사람이 원래 낙타였는데 팔다리가 워낙 맛있다 보니
사람이 되었다는 학설도 있다

하여튼 당신도 애초에는 나였다
내가 원래 당신에게서 갈라져 나왔든가


- 김 경미 시 ‘ 야채사(野菜史)‘




콩나물처럼 끝까지 익힌 마음일 것
쌀알빛 고요 한 톨도 흘리지 말 것
인내 속 아무 설탕의 경지 없어도 묵묵히 다 먹을 것
고통, 식빵처럼 가장자리 떼어버리지 말 것
성실의 딱 한 가지 반찬만일 것
새삼 괜한 짓을 하는 건 아닌지
제 명에나 못 죽는 건 아닌지
두려움과 후회의 돌들이 우두둑 깨물리곤 해도
그깟 것 마저 다 낭비해 버리고픈 멸치똥 같은 날들이어도
야채처럼 유순한 눈빛을 보다 많이 섭취할 것
생의 규칙적인 좌절에도 생선처럼 미끈하게 빠져나와
한 벌의 수저처럼 몸과 마음을 가지런히 할 것

한 모금 식후 물처럼 또 한 번의 삶, 을
잘 넘길 것


- 김 경미 시 ‘ 식사법 ‘




이제 보니
그런 약속은 받으려고도 안 할게요
하지도 마세요
나 외에 다른 여자를 두지 않겠다
또 다른 사랑의 광풍에 휩싸이지 않겠다,는 약속.
도대체 그렇게 부도덕한 약속이 어디 있겠어요
아무리 조심하고 약속하고 맹세해도
누군가 중앙선을 마주 넘어와 나를 박살내고
당신만을 살려둔들, 사고, 사고인 것을요
모두 물에 빠져 당신이 나도 살리고 싶었으나
심장을 채우는 물 때문에 몽롱했던들, 의지, 의지대로 안 되는 것을요
싫으면 땅 속 봉분 밑에나 가만히 앉아 있어야 하지만
부관참시니 홍수니, 거기까지도 사고는 들이닥치는 것을요
혹은 그런 이들은 살아있는데 끼워주지도 않는 것을요
작정 없이 홀로 몰래 그리워져서 아프고
자꾸만 만나져서 쓰라리고 행복할 때면
나를 위해 괴로워도 말고, 동정도 말고,
혹은 분노나 용서나 기다림이나 징벌 따위도
기대하지 마세요
아무것도 우린 약속한 바 없으니까요
삶에 대해서 어떠한 일도,
이것 말고 다른 행복이나 다른 불행도 절대 만나지 말라고
얻지도 버리지도 말라고
그런 몰지각한 약속을 이제 보니 결코 할 수 없는 것인 것을요


- 김 경미 시 ‘ 약속 ‘




라일락이나 은행나무보다 높은 데서 살지 않겠다
이른 저녁에 나온 별빛보다 많은 등을 켜지 않겠다
두 개의 귀와 구두와 여행가방을 언제고 열어두겠다

밤하늘에 노랗게 불 켜진 상현달을
신호등으로 알고 급히 횡단보도를 건넜으되
다치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티끌 같은 월요일들에
창틀 먼지에 다치거나
내 어금니에 내 혀 물리는 일이 더 많았다

함부로 상처받지 않겠다

내 목에 적힌 목차들
재미없다 해도 크게 서운해하지 않겠다

한계가 있겠지만 담벼락 위를 걷다 멈춰서는
갈색 고양이와 친하듯이

비관 없는 애정의 습관을 닮아보겠다


- 김 경미 시 ‘ 오늘의 결심 ‘




1
약속시간 삼십 분을 지나서 연락된 모두가 모였다
다들 국화꽃잎처럼 둥그렇게 둘러앉아서 웃었다
불참한 이도, 더 와야 할 이도 없었다
식사와 담소가 달그락대고 마음들 더욱
당겨 앉은데

문득 고개가 들린다 아무래도 누가 안 온 것 같다
잠깐씩 말 끊길 때마다 꼭 와야 할 사람 안 옷 듯
출입문을 본다 나만이 아니다 다들 한 번씩 아무래도
누가 덜 온 것 같아, 다 모인 친형제들 같은데, 왜
자꾸 누군가가 빠진 것 같지? 한 번씩들 말하며

두 시간쯤이 지났다 여전히 제비꽃들처럼 즐거운데
웃다가 또 문득 입들을 다문다, 아무래도 누가 먼저
일어나 간 것 같아 꼭 있어야 할 누가 서운하게도 먼저
가버려 맥이 조금씩 빠진다

2
누굴까 누가 사는 것일까 늘 안 오거나 있다가 먼저 간
빈자리 사람과 사람들 사이의 그 기척은 기척일 뿐
아무리 해도 볼 수 없는 그들에겐 우리도 기척일 뿐 일가
아무리 다 모여도 언제나 접시의 빠진 이처럼

상실의 기척, 뒤척이는 그들은


- 김 경미 시 ‘ 누가 사는 것일까 ‘
* 고통을 달래는 순서, 창비(2008)




의사의 처방은 항상 속을 따뜻이 하라는 것이다

전기담요를 먹을까요
달걀 비린내 나는 뜨건 백열등이라도 먹을까요
장미무늬 양초와 끓어 넘치는 주전자를 함께 먹거나
홧홧한 박하나 겨자를 얹으면 좀 더 빠를까요
손 닿지 않는 그 안을 어찌 뜨겁게 달굴까요

차라리 개미를 믿지, 개미 지나간 길의 온기를 믿지
사람이건 꽃이건 비단견직물처럼 매끄러워
미덥지 않았다

책상이나 서랍만이 더러 눈물 보여주었다

저녁 불빛들로 들판의 겨울 한낮들 덥혀질 때마다

실은 얼마나 따뜻하고 싶었는지
끝내 말할 수 없었다


- 김 경미 시 ‘ 해명 ‘
* 고통을 달래는 순서, 창비(2008)




때로 마음대로 꽃소리 내는 나무들
언제 와서 언제 졌던가
절간의 새우젓 같은 안부들
이 세상 아직 내 탓에 쓸쓸해하는 이 있을까

있다며 곁에 와 눕고는 하는 불빛, 무엇인가
어느 나무에선가
멀리 있는 자격  가까이 입으며
아무나 나라를 생각할 수 있음을 알았지만
게처럼 앞으로 가는데 옆으로 멀어지네
이제는
가을 더듬이에 국운보다 단풍잎 한 채가 아픈 날들

적막에 닿았다
인생에 부산스러움이 있다고 믿지 못하는 자는
실패한 자겠지
실패가 편하면 벌써 비겁한 것일까
그럴수록 혼자 외로워 아름다우리라고
눈물, 눈물 나도
끝내 기다려주고 있는 언덕 위
참으로 안아볼 만한 몸이여 마음이여
마지막 불빛은


- 김 경미 시 ‘ 열애들 ‘
[이기적인 슬픔들을 위하여], 창작과 비평사, 2004.




한여름, 선풍기에서 나오는 약풍 혹은 미풍이란 글자
처음 사랑의 편지 받았던 촉감일 때 있다

크게 속상하고 지친 울음 거두고 마약 여는 문
경첩에서 흰 바다 갈매기들 바닷물 닿을 듯 낮게
마중 나올 때 있다

극도로 줄이거나 높인 음악 소리 속
가본 기억 없는 모로코사막의 터번 두른 낙타
눈 아픈 모래바람 앞서 가려줄 때 있다

유리창 너머 시원한 액자 속 양떼구름들
살아 움직이는 활동사진처럼
갈래머리 계집아이의 어린 설레임 되감아줄 때 있다

어떤 여름 저녁,
그 모든 것들 한꺼번에 밀려 나와
더위보다 큰 녹색 수박의 무수한 조각배들
잊을 수 없는
석양의 출항을 시작할 때가 있다


- 김 경미 시 ‘ 어떤 여름 저녁에 ‘




적막하구나 강산
겨울 네 노래를 듣노라면
너무나 평범하던  여대생
뽕짝 들고 나온 가수에 우린 웃었지
노래보다 더 슬픈 건 정이라고
겨울밤 네 목소리는 밀주구나
목이 아프다
가슴이 시큰거려 오늘 밤도 잠자기는
글렀는데 겨울 눈 널 따라 천지를 뒤숭숭 흐린
이 강산 가수로 태어나
여성억압사 남한 현대사
호주머니 속 꼬깃꼬깃 잊고 빨아버린 지폐처럼
값 잃은 한, 뭉뚱그려
나는 행복한 널 왜 떠돈다고
맺힌다고


- 김 경미 시 ‘ 심수봉 ‘
[쓰다만 편지인들 다시 못 쓰랴] , 실천문학사, 1989.




누가 다정하면 죽을 것 같았다

장미꽃나무 너무 다정할 때 그러하듯이
저녁 일몰 유독 다정할 때
유독 그러하듯이

뭘 잘못했는지

다정이 나를 죽일 것만 같았다


- 김 경미 시 ‘ 다정이 나를 ‘
[고통을 달래는 순서], 창비, 2008.




토란잎과 연잎은 종이 한 장 차이다 토련(土蓮)이라고도 한다

종이 한 장에 갈매기와 기러기를 그린다 역시
거기서 거기이다

누워서 구름의 면전에 유리창을 닦듯 침을 뱉어도 보고
닦아도 본다

약국과 제과점에 가서 각각 포도잼과 붉은 요오드딩크를
사서 반씩 섞어 바른다

저녁 해에 갓 구워진 갈색의  머리에 직접 가위를 대거나
한 송이 꽃을 꽂는다 실성의

가로등 스위치를 찾아 죄다 한 줌씩 불빛을 낮춘다

바다에 가서 강 얘기 하고 강에 가서 기차 얘기 한다

뒤져보면 모래 끼얹은 날 더 많았다

견딘다


- 김 경미 시 ’ 고통을 달래는 순서 ‘
* ‘2008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시』 중에서




누구를 만나든
"나는 그들의 세컨드다"
라고 생각하고자 한다

부모든 남편이든 친구든
봄날 드라이브 나가자던 여자든
그러니까 나는 저들의 세컨드야 라고 다짐한다

아니,
강변의 모텔의 주차장 같은
숨겨놓은 우윳빛 살결의 세컨드가 아니라
그냥 영어로 두 번째,
첫 번째가 아닌,
순수하게 수학적인 세컨드,

그러니까
이번이 아니라 늘 다음인
언제나 나중인
홍길동 같은 서자인
변방인
부적합인

그러니까 결국 꼴찌,

그러니까
세컨드의 법칙을 아시는지

삶이 본처인양 목 졸라도
결코 목숨 놓지 말 것
일상더러 자고 가라고 애원하지 말 것
적자생존을 믿지 말 것

세컨드 속에서라야
정직함 비로소 처절하니

진실의 아름다움,
그리움의 흡반,
생의 뇌관은,
거기 가 있게 마련이다
더욱 그곳에

그러므로 자주 새끼손가락을
슬쩍슬쩍 올리며
조용히 웃곤 할 것
밀교인 듯
나는 야
세상의 이거야 이거

세컨드!  


- 김 경미 시 ‘ 나는야 세컨드 ‘




어린 봄비들 훈풍처럼 흩날리는 봄날
갓 핀 벚꽃 잎들 떨어진 긴 얼룩점박이 길 위를
걸으며
낡은 신발처럼 걸으며
난 아무것도 아니다
난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이 미물은 맹세코 아무것도 아니어서 생이여
이제라도 그 과분함에 충성하겠다
묵묵한 모든 것들에게마다 진심으로 패전하여
한 발짝마다 바닥. 바닥. 바닥..... 그 저린 관등 성명으로
고개 숙이니
얼굴 가득 초록색 나뭇잎 그림자 칠하고
나무들 속에 섞이니
이등병 같은 눈물이 앞을 흐린다


- 김 경미 시 ‘ 봄, 군인처럼 ‘




여느 때처럼 글을 쓰는데, 갑자기 눈물이 핑, 돈다.
수놓은 천의 뒤쪽처럼, 무늬 없이 지저분하기만 한, 실밥들,
터진 스웨터 올 끝없이 풀어 감은, 두툼한 실패(失敗),
꽃을 담았다, 꽃 잘 오므려 보냈는데, 종이 위에 가서는
지렁이들로 화다닥, 드러나버리는 꽃잎들,

그토록 미워했는데

문득, 손끝, 이 밥솥의 김 같은 것들이,
몇십 년, 저녁 해거름이면 밥 지어놓고, 밥 먹어라 불렀구나
검은 쌀알 같은 눈물이, 종이 위에 울컥,
얼룩지는 것이었다.


- 김 경미 시 ‘ 글자들 ‘
[제5회 노작문학상 수상작품집] 동학사




봄 저녁강에 진달래밭들 온통 쓸어 모아다 불 질렀다

흰 백지천지 끝없이 말아쥔 구백구십 칸 저녁 구름들에까지

천 그루 그 산불 다 옮겨 붙었다


거기 적홍빛 문서창고 아래, 심정은 또 쑥밭이다

코끼리처럼 펄럭대는 내상에의 치정

저 붉은 페인트통, 함부로 몸에 옮겨 불붙는 진흙불바다 건너

가장 멀리 도망적멸할 수 있을까

세상에 정 주고 저물녘, 마음 허물어지지 않은 날
하루도 없었으니


- 김 경미 시 ‘ 해 질 녘 ‘
[노작문학상 수상작품집 5], 동학사, 2005







내가 어리석을 때 어리석은 세상 불러들인다는 것을 이제 알겠습니다
누추하지 않으려 자꾸 꽃 본다 꽃 본다 우겼었습니다
그대는 쇠무늬 지워진 맨 동전으로 벌써 닳아 없어지고
라일락 지나가는 소음들 반원의 무덤 같던 아침,
감빛 구름들 리어카째 굴러 떨어지던 위험한 해 질 녘에,
가을 낙엽들, 노란 형광의 봄개나리 떼 같던 착오,
고장 난 검정우산같이
눈동자 종일 젖어 접히지 않던 날도 있었습니다

그중 가장 큰 안간힘,
물 흔들지 않고 아침낯과 저녁발을 씻는 일이었습니다


- 김 경미 시 ‘ 고요에 바치네 ‘




한 달이 넘어도 냉장고 속의 빵
썩을 생각을 않는다
두고 본다
성형한 중년 여자의 잡아당긴
뺨처럼 튼튼한 방부제
빵은 사라지고
빵의 윤곽을 가진, 그러니까 독이다


평생 변치 않겠다는 사랑의 다짐
속에 든, 사랑의 윤곽을 한 방부제
그 독은
인체에 얼마나 치명적일까


생생히 썩어 사라지는 사랑을
그런 사랑을



- 김 경미 시 ‘ 방부제 ‘
[이기적인 슬픔들을 위하여 / 창작과 비평사]




1

걷지 못하는 민들레가
바람을 만나니 걷잖아 탁! 터져서
간음 없는 마음이 흔하랴

그런 거야 욕하지 마
바람둥이들
한번 누운 곳 정 못 들이는
지상에서 영원히 단잠 못 이루는



2

욕하지 마
먼지처럼 어디에나 몸을 묻히는 마음
아세톤처럼 어디에서나 쉽게 마음 휘발되는
몸의
사랑
고단하게
귀한 거야


- 김 경미 시 ‘ 바람둥이를 위하여 ‘
[이기적인 슬픔을 위하여 / 창작과 비평사]




아침부터 거친 푸성귀로 일어나는 슬픔들
벌써 할 말 아무것도 없는 하루 어제가
가지 않고 섰는 듯 왜 나는 상처에 더 많이 할애되는 것만
같은가 아침부터 골목 끝에 이른 듯 개들 돌아 나오고


광화문 식당의 점심약속 어색함 지우려 서둘러
낮술들을 마시다 한 남자가 슬프다 했다 흰 치자꽃 대접에
가득한 햇빛이 목을 뜨겁게 하고 견딜 수 없음으로
견디자느니 등 뒤의 그리움이 눈앞의 들소떼 되는 선명함
슬픔 들리지 않은 사람은 결코 믿지 않으니
인류는 이미 절멸하고 없다고 넌 누구냐
맹렬히 환한 한낮, 마침내 발 없는 약속들 마음을 떠나고
기차가 마당으로 해바라기며 금잔화 몰아오고
잠시 나부끼는 사이 세상이 기차를 태우고 가고
한순간 빈 마당의 이치가 등빛처럼 환해도
무어라 한마디인들 천기누설할 수 없는 한낮
손목 끊어지도록 몇 천년 전의 하루가 가지 않고
오늘을 바꿔 치는 듯 없는 손목 끊어지도록
슬픔을 붙들고



- 김 경미 시 ‘ 한낮, 대취하다 ‘
[노작문학상 제5회 수상작품집 /동학사]




옛사람들은
치자꽃 열매에서  배어 나오는 노란색이며
관목과 바위 밑 푸른 이끼에서 꺼낸
천연의 식물들을 가져다 썼다지
그렇게 흰 광목천도 자목련빛이며 남청색으로
본디 바탕마저 바꾸었다지

내 안에도 혹 치자 소리 나는 꽃잎들이며
그늘에서만 오래 묵은 녹색 이끼 같은
타고난 색염료 있어
그대 바탕 물감 들여 영영 빠지지 않았으면


- 김 경미 시 ‘ 그렇게 사랑을 ‘
<쉬잇, 나의 세컨드는>




부르주아 가을, 문패에 나프탈렌 내건다. 지난여름 해충처럼 괴롭던 관계들
얼씬도 마라

저 다리미 바닥으로부터 오는 자주벨벳의 가을
따뜻함이 스쳐내는 접신의 경지
맑은 어깨며 가슴을 되살려내는 저 대단한 의술 좀 봐
스러진 꽃들 생생히 돼 돋우는
저런 사랑

모든 변덕과 상처들 한약처럼 잘 다려내
마침내 온화함의 지복을 누리는

가을 세탁소 앞을 구김 많은 한 벌의
옷처럼


- 김 경미 시 ‘ 가을 세탁소 ‘




목욕을 하고 가을마당으로 내려선다
햇빛에서 잘 말린 수건 냄새가 난다

마음 무성한 것만이 능사가 아니니
낙엽들 큰 손바닥으로 꽃을 다시 말하고

젖으니 부드러운 발톱
마음도 눈물에 자주 젖어 식빵처럼 연해졌을까
겨울이면 저 나무들
뜨거운 껍질 속에서 연둣빛 배냇짓을 키우리라
그 헐벗은 외모가 긍지인 줄 이제야 알겠으니

욕망들
어디든 마음대로 가서
무엇을 누린 들
이제 비로소 겸손이 되리라
목욕 뒤의 연한 손톱처럼



- 김 경미 시 ‘ 발톱 깎는 여자‘
* 쉬잇, 나의 세컨드는




세상은 단지 두 집안으로 나뉜다
메이저리그와 마이너리그
박찬호ㅡ마이너리그 때는 외로웠어요 혼자라는 생각에
(마이너리그에는 사람수도 훨씬 많은데......)
마이너리그 사람들은 사고한 모욕엘수록 목숨껏 화를 낸다
요즘 시 안 쓰나 봐요, 안부를 물으면 , 속으로
경멸한다. 천한 것들. 밥 먹는 것 못 봤다고 요즘 통 식사
안 하시나 봐요 하다니 청탁이 없다고 시인이......
...... 열등감만 한 무기가 어디 있으랴
일 다녀보면 메이저리그의 수위 아저씨는
마이너리그의 사장님보다 더 무섭고 당당하다
미국인 선생을 위해 영어학원에서는 이름을 간다
아이 엠 톰 유 아 린다
꽃일수록 서양풍으로 처신해야 한다 그래도
마이너리그의 의자 수는 소파
메이저리그의 의자 수는 못임을 위안하지만
나라가 토끼 형상이라
우리는 유난히 눈들이 빨갈까 지구는
어디나 그럴까 우리가 아무래도 유난할까

덤으로 마음도 늘 메이저와 머 이너로 나뉜다
거기서는 항상 먼지가 붕새를 쪼아 죽이곤 하지만


- 김 경미 시 ‘ 나는야 세컨드 5‘
<쉬잇, 나의 세컨드는>




무언가 잊을 수없는 일을 하고 싶지요
ㅡ개나리꽃 환합니다 사랑하는 그대 봄볕처럼
겨웁던 눈빛은 여전한지요 혹은 죽었는지요

아주 긴 총을 들고 나비처럼 사뿐 세상의 옥상에
올라가고 싶지요 ㅡ 당신이 준 연보랏빛 스웨트를 찻집에
잊고 나왔었죠 창 밖이 온통 벚꽃의 일생 같기예요.

올라가서 그대 머리에 총구를 조준하고
싶지요 정확히 ㅡ 사람에게 그 무엇 있어 그토록 열렬히
서로 넝쿨 오르고 그 무엇 있어 고양이발처럼 돌아서고
대체 사람들에게 그 무엇 있어 생에게 대체 그 무엇 있어

찻집 유리창 너머로 그대 얼굴이 마악 부서지는군요
사람들이 웅성대네요 무언가 잊을 수 없는 일을
하고 싶었지요 ㅡ 싱싱하고 맑은
벚꽃색 손톱같이 자라리라던, 벚꽃같이
짧게 깎아내 버린 사랑 봉숭아물인지 핏물인지 알 수 없는

가만, 피 흘린 채 들것에 눕혀지는 저건
나 아닌지요 저 옥상 위 저건 당신이 아닌지요
대체 무슨 잊을 수 없는 짓을 한 것인가요 어제도
나, 누군가의 총을 맞고 죽었었는데 ㅡ 꽃이 피려고
스스로 애를 쓰는지 바람이 불려고
스스로 애를 쓰는지 사랑도 스스로 사랑을 애쓰는지

연보랏빛 스웨터가 툭툭 목숨을 털고 일어나
봄날에 다시 사랑을 하고 총을 들고 옥상을
오르고 우리 탁자 낭자히 보랏빛 스웨터가 흩어지고,
다들 뭔가 잊을 수 없는 생을 갖고 싶은  게지요
ㅡ 돌아와 다시 연애편지를 쓰지요 생이여 여전한지요
나비처럼 가볍게 우리를 들어 올리곤 하면서 아름다운
날들이에요 용서해 볼까요 우리 어디 한번 나는
바퀴벌레도 죽일 수 없어요 말하죠 가라 안 보이는 데 가서
살아라 너도 나의 전생일지 모르니



- 김 경미 시 ‘ 나는야 세컨드 4 ㅡ 연애편지를 위하여 ‘
<쉬잇, 나의 세컨드는 >




그 집이 돌연 잠적하지나 않을까
비 오는 날이면 후드득 마음 거둬 차에 오른다

제1한강교 건너자마자 거기 남색 누추를
사고팔아 또 누추를 이익 남기던 긴 파 같은
시장길과
더 쇠잔할 데 없으나 없어지지도 않는 여인숙의
늙은 내의 걸린 분꽃 마당


저녁 슬픔 못 이겨
사육신묘, 무덤 곁을 거닐면 살아 있음의 복락 없는
가슴에서 장마진흙냄새 눅눅하던 시간들

불. 화. 불. 화. 온통 불길만 주고받는
신문지 같던 집, 부모처럼 영원히 그대로 있을까
두려워(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낯선 두 남녀가
제멋대로 내 생의 시작이라니!)
그 그 집 지우러 빗속을 간다
젖은 옷처럼 자꾸 마음에 달라붙는 상처
떼내려 애쓰며
어떤 이유가 나의 생명이었는지
삶의 몫인지 세상의 그 한 집에 물어보려
묻기도 전 그 집 사라져 버릴까 두려워
자꾸 되돌아가본다


- 김 경미 시 ‘ 본동 258‘
* 쉬잇, 나의 세컨드는




나는 왜 극장처럼 어두워서야
삶이 상영되는 느낌일까

극장 매점의
팝콘처럼 하얗고 가벼운
나비 같은 생은 어떤 감촉일지

가끔씩 나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병아리 깃털이나 잎일 수 있는지
후, 불어보고 싶어진다


- 김 경미 시 ‘ 방명록 2‘
* 쉬잇, 나의 세컨드는



마음에 성에가 끼어 건너편이 다 흐리다
나아갈 수가 없다 짐작 안 가는 희미함이
아름답던 시기는 다 지나갔는가 모든 시기가
다 지나갔는가 그리고 그것은 모두 다 내 잘못이라는 생각......


소녀 시절 여름 저녁 무렵 저녁분꽃 앞에 앉아
울먹이던 날들 갓 딴 핏방울처럼 선연한들......


- 김 경미 시 ‘ 나는 지나간다 ‘




`` 아침에 일어나면

어떻게 하면
어제보다 좀 덜 슬플 수 있을까
생각해요......``


오래전 은동전 같던 어느 가을날의 전화.
너무 좋아서 전화기째 아삭아삭 가을 사과처럼 베어 먹고
싶던. 그 설운 한마디. 어깨 위로 황금빛 은행잎들
돋아 오르고. 그 저무는 잎들에 어깨 집혀 생이라는
밀교. 밤의 어디든 보이지 않게 날아다니던. 돌아와
찬 이슬 털며 가을밤. 나도 자주 잠이 오지
않았었다


- 김 경미 시 ‘ 가을 통화 ‘




강한 팀에겐 당연히 지고
약한 팀에게는 방심하다 지고
맞수에게는 심판 때문에 지고
어쩌다 간신히 이기
스포츠신문이 쉬는 날이라 보도가 안된다*


인생을 겨누어 용케 먼저 방아쇠를 당긴 날은
총구를 빨대처럼 제 입에 문, 혹은
지푸라기가 장전된 총
그러한 유머 어린 불운과 박복이
없는 라일락 냄새가
입덧처럼 그리운 겨
흰 눈이나 노을이 되지 못한 먼지들
이마 위 저녁 어스름의 흔적을 가진 이들
부끄럼을 잘 타는 내성적인 남자들이
입덧처럼 그리운
겨울, 없는 라일락 냄새가 그리운


- 김 경미 시 ‘ 참패시대 ‘
* `카피라이트` 정철




봄, 연둣빛 따라 어룽대다 계단을 헛디뎠다
X-레이가 카네이션 꽃잎처럼 발 속을 훑고
금 가니 비로소 제 뼛속을 보게 되는구나 사랑처럼

엄지발가락 실금 하나로 발에 석고가 씌워졌다
온몸을 받치고 살아온 그 작은 못 덕분에
대단히 살아도다 생의 첫 휴식이라도 맞은 듯
날마다 석고발 높이 쳐든 채 빈둥대거나
목발도 샀다---목발에도 사이즈가 있었다 당연히
그 한쪽을 턱, 짚고 나서니
뭔가 완벽해진 기분이었다 불길한 세상에
그 상처 옥시풀처럼 후련하기도 했다
더러는 부모같이 생긴 등에 잔뜩 업힌 채
내친김에 애기같이 칭얼도 댔다
나 가볍지? 내 인생 솜털 같지?

아프지도 죽지도 않는 상냥한 병에
위로의 꽃과 과일만 쌓이는 이 귀여운 생을
나도 좀 자주 살아보았으면 좋겠다


- 김 경미 시 ‘ 가볍게, 가볍게 ‘
* 쉬잇, 나의 세컨드는





그저께 저녁에는 눈 내리는 골목길을 마악 돌아섰지요
일주일 후쯤에는 밤 버스 차창을 내다보다가 눈물이 핑 돌았지요
오늘은, 오늘도, 어김없이 그대 사랑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잘못 걸려온.


내년에는 사람 없는 곳을 찾아가
삶들을 생각하는데 봄이 꽃 피어 가슴이 아팠습니다
삼사 년 후쯤엔 처음으로 세상을 사랑하려 애썼지요
그저께 밤에는 거울 앞, 화장을 지우고 보니
푸른 시신인데 많이도 살아 돌아다녔더군요
무엇을 더 갖고 가고 싶었을까
바위들 치마에 스쳐서 다 닳아 없어지는
반석 겁의 시간쯤엔 내 눈빛도 맑아졌습니다.


그러고 보니 눈물 잘 흘리던 전생에는 사랑이
참 많이 힘들고 미안했었습니다 부디 용서하시길


- 김 경미 시 ‘ 마음의 근황‘




우체국은 어디쯤인가

편지를 들고 빌딩 옥상에 올라간다
퇴근하는 자동차들 불빛마다 젖은 눈물 같고
바다로 난 길을 잊은 시든 물고기들
정거장에 선 채
번복과 반복의 마른 물방울을 서로에게 내뿜는다
플라스틱 꽃처럼 아무도 마음까지는 젖지 않고
연근해 부두에선 날마다 태풍이 숙박계를 쓴다
무슨 일이 일어나긴 하려는가
우체국은 어디에 있는가
편지 받을 나무 맑은 땅은 어디에

하늘에 떠오는 저 별빛들은
별빛들 아니라 총구들인가


- 김 경미 시 ‘ 우체국을 찾아서 ‘
<쉬잇, 나의 세컨드는 >




누가 또 어디서 날 저버리는가 보다
저녁 산책 수박향인지 자두향인지 싱그러웠는데
돌연 또 가슴이 저리다

웅크려 앉으니 초록나뭇잎들 폭설처럼 떨어지고
등이 아프다 바다 한가운데인 듯 지나가는 행인도
하나 없고
다행이다 많이 슬프거나 외로울 때에는
날 발견치 말아 다오 오직 신 외에는
간절함은 우리를 사랑하다 증오케 하곤 했으니
미안하다 미안하다 몇백 번이라도 미안하다고
나를 만나 내 모든 생에 용서 구하면
떨어진 초록잎들 다시 나뭇가지 가 붙고
바닷물 아무리 덮쳐와도 물속 물고기처럼
다시 또 아무 일 없는 아늑함으로
끝내는 이 저녁마저 산책케 해 주리라고
나는 신자가 되었다



- 김 경미 시 ‘ 회귀 - 비망록 ‘




서로 편지나 보내자 삶이여
실물은 전부 헛된 것
만나지 않는 동안만 우리는 비단 감촉처럼 사랑한다 사랑한다 죽도록
만날수록 동백꽃처럼 쉽게 져버리는 길들
실물은 없다 아무 곳에도
가끔 편지나 보내어라

선천적으로 수줍고 서늘한 가을인 듯

오직 그것만이 생의 한결같은 그리움이고
서역이리니


- 김 경미 시 ‘ 나의 서역 -비망록 ‘




그대 쓸쓸함은 그대 강변에 가서 꽃잎 띄워라
내 쓸쓸함은 내 강변에 가서 꽃잎 띄우마
그 꽃잎 얹은 물살들 어디쯤에선가 만나
주황빛 저녁 강변을 날마다 손잡고 걷겠으나
생은 또 다른 강변과 서걱이는 갈대를
키워
끝내 사람으로는 다 하지 못하는 것 있으리라

그리하여 쓸쓸함은 사람보다 더 깊고 오랜 무엇
햇빛이나 바위며 물안개의
세월, 인간을 넘는 풍경
그러자 그 변치 않음에 기대어 무슨 일이든 닥쳐도 좋았다


- 김 경미 시 ‘ 쓸쓸함에 대하여 ‘




서로가 첫 번째인 혼인하고 아이 낳고
부부라 불리지만 왠지 항상 당신의
첩인 것만 같지요
당신도 항상 나의 그것인 것만 같지요


당신이 태어나자마자 죽은 본부인이
이 하늘 밑 어딘가에 아직 살아 있어
당신 마음의 제일 좋은 곳을 발라먹고

나 태어나자마자 죽은 내 본남편 있어
귓속에 집을 짓고 끝없이 훌훌 떠날 것을
속삭이는 듯하지요

그러나 모두들 한여름 흰 치잣빛 낮잠처럼
어쩌면 그렇게 태연한 연분의 표정들인지
가을 따라 눈썹 몇 번쯤 깜박이면 시야도 창호지
너머처럼 뿌옇게 스러져

스러지다 촛불 탁 엎어지면, 그제야 본댁으로 들
각각 돌아가, 삶, 이라는 불륜, 에 대해 무슨 용서와
고통을 치를지, 보지 못한 태생 저편의 본가가 살수록
그립고 궁금치 않은지요



- 김 경미 시 ‘ 나는야 세컨드 3 ‘
<쉬잇, 나의 세컨드는 >




넓고 따뜻한 식빵에게 안겨봤으면 좋겠어
분꽃 그 작은 대롱 속에 들어가 종일 꽃의 내부를 살아봤으면 좋겠어


진실을 눈썹처럼 곰곰이 만져봤으면 좋겠어
한 장의 풍경과 침묵과 나, 셋이서 나직이 약혼했으면 좋겠어
추억이 돌아서서 타조처럼 다시 뛰어와
용서의 밤을 얘기하고
오늘도 생각하고
내일도 생각하면 좋겠어
당신
나쁘지 않았으면 좋겠어
슬프지 않았으면 좋겠어


- 김 경미 시 ‘ 방명록 ‘




나뭇잎 한 바구니나 화장품 같은 게 먹고 싶다


그리고...... 말들은 무엇하러 했던가
유리창처럼 멈춰 서는 자책의 자객들......
한낮의 어둠 속에 웅크리고 누워 꽃나무들에게 사과한다
지난 저녁부터의 발소리와 입술을,
그 얕은 신분을
외로움에 성실하지 못했던,
미안해 그게 실은 내 본심인가 봐


아무래도
책상 밑이나 신발장 속 같은
좀 더 깊은 데 들어가 자야겠다
그러한 동안 그대여 나를 버려다오 아무래도 그게
그나마 아름답겠으니


- 김 경미 시 ‘ 술을 많이 마신 다음날은 ‘




또한 생의 물릴 수 없는 단 하나의 정혼자,

그리하여 언제나 생을 세컨드, 그
기약 없는 지위, 기어이 이별해 버리게 될,
설레임과 체념이 다리를 섞는, 아무리 속여도
끝내 넘볼 수 없는 조강지처, 그 천생연분 버티는,
넘보는 순간 끝장인,

그리하여 언제나 나날을 두 집 살림으로 남몰래
서럽고 파릇파릇 격렬케 하는, 빈 집처럼 외롭고
헛헛케 하는, 들키면 머리채 뽑히게 하는, 그리하여
그날까지, 이곳에서의 모든 생,
세컨드, 그
첩질 이게 하는, 생의 본처,
그 유일무이한, 단 하나의 영원한 언약, 배신 없는
사랑, 그 영광의
퍼스트레이디,는
죽음, 인 것을......



- 김 경미 시 ‘ 나는야 세컨드 2 ’
*쉬잇, 나의 세컨드는





함박눈 못 된 진눈깨비와
목련꽃 못 된 밥풀꽃과
오지 않는 전화와 깨진 적금,
나를 지나쳐 다른 주소로 가는
그대 편지

나는 좌절하는 자세가 좋다
바닥에 이마를 대고
유리창처럼 투명하게
뿌리의 세계를 들여다본 것들
마치 하늘에 엎드려 굽어내려 보는 신 같은



- 김 경미 시 ‘ 나는 좌절하는 것들이 좋다 ‘
* 쉬잇, 나의 세컨드는




나, 아무래도 지뢰인가 봐 늘 인적 드문 곳에
몸을 숨기지 숨겨 기다리지 흙처럼 오직
사람 발자국만 모른 척 모른 척

마침내 누군가 다가오지 멋모르고 닿아오지
그 순간 그 환희 너무 두려워
폭발하고 말지 산산조각 폭발하고 말지

깨어보면, 그 사랑들 형체도 없다

내가 다 죽였단 말인가!



- 김 경미 시 ‘ 고백 ‘
* 쉬잇, 나의 세컨드는




누구를 만나든 나는 그들의 세컨드다
,라고 생각하고자 한다
부모든 남편이든 친구든
봄날 드라이브 나가자던 여자든
그러니까 나는 저들의 세컨드야, 다짐한다
아니, 강변의 모텔의 주차장 같은
숨겨놓은 우윳빛 살결의
세컨드, 가 아니라 그냥 영어로 두 번째,
첫 번째가 아닌, 순수하게 수학적인
세컨드, 그러니까 이번, 이 아니라 늘 다음, 인
언제나 나중, 인 홍길동 같은 서자, 인 변방, 인
부적합, 인 그러니까 결국 꼴찌,

그러니까 세컨드의 법칙을 아시는지
삶이 본처인양 목 졸라도 결코 목숨 놓지 말 것
일상더러 자고 가라고 애원하지 말 것
적자생존을 믿지 말 것 세컨드, 속에서라야
정직함 비로소 처절하니
진실의 아름다움, 그리움의 흡반, 생의 뇌관은,
가 있게 마련이다 더욱 그곳에
그러므로 자주 새끼손가락을 슬쩍슬쩍 올리며
조용히 웃곤 할 것 밀교인 듯
나는야 세상의 이거야 이거



- 김 경미 시 ‘ 나는야 세컨드 1 ‘
* 쉬잇, 나의 세컨드는





휘어진 영혼은 아프다. 아니 아프다 못해 처음 와닿는
새벽빛처럼 시큼 시큼 가슴이 저리다.
스쳐지나가는 버스 차창에서, 건물에 반사되는 어스름 저녁,
역광 속에서 문득문득 생각나는 상처받은 영혼들,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니고 현재도 아닌 몇 겹의
어두운 회전 유리문 같은 곳에 갇혀 방황하는 영혼들,
그들이 사랑에 빠졌을 때 그것도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라
그들의 휘어진 영혼이 굴절되어 사랑에 빠졌을 때,
우리는 상처받은 그들 영혼이 위안받는 사랑법을
그것을 과연 위로해 줄 수 있을까, 연하의 사랑 같은 것
대각선으로 마주치는 눈빛 같은 것.
들켜서는 안 될 만남 같은 것.
사람이 그리워서니 용서해 다오.
술만 마시면 혀 뒤로 발바닥이 튀어나오도록 토하고
또 엉긴다. 용서해 다오 그대들
내 아는 사랑법이 괴로움 붙들고 늘어지는 비루(悲淚)뿐이니
왜 나는 이 세상 짐에 알맞은
어깨를 갖지 못할까?
진 짐도 없이 걸으면서 휘청대기는 잘할까
그래도 끝내 날 모욕 않는 사랑아


- 김 경미 시 ‘ 열애의 나날 ‘




어머니는, 옷은 떨어진 걸 입어도 구두
만큼은 비싼 걸 신어야 한다 아버지는, 소고기는
몰라도 돼지고기만큼은 최고 비싼 질을 먹어야 한다
그렇다 화장하다 만 듯 사는 친구는, 생리대만은 최고
급이다
먹는 입 싸도 칫솔에 만큼은 돈을 아끼지 않는,
누구는 귀를 잘라 팔지언정 음악만은 기어이 좋은 걸 쓴다.
다들 세상의 단 하나쯤은 질을 헤아리니
그렇다 라일락꽃들의 불립문자 탁발의 봄밤 혹은 청색
다도해의 저녁일몰이야말로 아니다 연애야말로 삼각
관계야말로 진정 질이 전부이다 고난이야말로 매혹의
우단 벨벳 검은 미망인 기품으로
잘 지어 입혀야 한다 몸이야말로 시계를 꺼낼 수 없는 곳
영혼이든가? 기도야말로
그렇다! 품종이 좋은 하늘을 써야 한다 관건은,
가장 비싼 것 하나쯤엔 서슴없이 값을 치르니 귀함이
가장
싼 셈, 숨만큼은 정말 제대로 비싼 값을 치르는 것
다 쓴 이쑤시개처럼 봄햇빛들 쏟아지는
오후
싸구려 플라스틱용품들 한없이 늘어놓아진 봄길에
값이여 말 자꾸 많이 하지 말아라



- 김 경마 시 ‘ 질-改作 ‘
* 제5회 노작문학상 수상작품집 / 노작문학상 제5회 수상자 수상작 중에서, 동학사.




단 두 번쯤이었던가,
그것도 다른 사람들과 함께였지요
그것도 그저 밥을 먹었을 뿐
그것도 벌써 일 년 혹은 이 년 전일까요?
내 이름이나 알까,
그게 다였으니 모르는 사람이나 진배없지요


그러나 가끔 쓸쓸해서 아무도 없는 때
왠지 저절로 꺼내지곤 하죠
가령 이런 이국 하늘 밑에서
좋은 그림엽서를 보았을 때
우표만큼의 관심도 내게 없을 사람을
이렇게 편안히 멀리 있다는 이유로
더더욱 상처의 불안도 없이
마치 애인인 양 그립다고 받아들여진 양 쓰지요


당신,
끝내 자신이 그렇게 사랑받고 있음을
영영 모르겠지요
몇 자 적다 이 사랑 내 마음대로 찢어
처음 본 저 강에 버릴 테니까요
불쌍한 당신,
버림받은 것도 모르고 밥을 우물대고 있겠죠
나도 혼자 밥을 먹다 외로워지면 생각해요
나 몰래 나를 꺼내 보고는 하는 사람도 혹 있을까
내가 나도 모르게
그렇게 행복할 리도 혹 있을까 말에요...


- 김 경미 시 ‘ 엽서, 엽서’




마음의 길들이 다 아프다 덜어내고 싶은
마음 흐려지는 시야‥‥‥


세상에서 상처받은 날이면
밤의 정류장 속옷가게 앞에 서서
내의만 입고 선 마네킹들을 오래도록 지켜본다
그들 몸속으로부터 솟아 나오는 나비빛들,
유리 건너 눈부시게 날아들 때마다
견뎌다오 나요, 한 번만 더 견뎌다오,
무엇이 그리 대단히 슬프고 아플 것인가
혹은 짐작지 못한 고통도
혹은 있지 않았으면 하는 어둠도
몸빛을 돋우려는 저 검정 슬립 같은 것
그 가슴 한가운데 놓이는 작은 꽃 장식 같은 것
밖은 아무래도 괜찮다
몸속 거기, 아름다운 것들 거기 다 모여
불빛 켜들고 몸 밖까지 나가는 나비색 불빛 켜들고
가슴 안에 다, 거기, 모여 있으면
무엇인들 아플 것인가
밤 속옷가게 앞에서 문득 눈물 고이니

그렇게 세상을 또 한 번 건너가려고
신호등도 비로소 푸른빛이다



- 김 경미 시 ‘ 밤, 속옷가게 앞에서 ‘
*쉬잇, 나의 세컨드는




개나리 작은 손목들
내 손목 같지? 잡아봐
무엇이 꼭 되어야 했던 날들
어두운 청춘을 업고 저리로 가고
햇빛들마다 손목 하나씩 내어
간장종지만 한 개나리
맘에 드는 한 잎씩 꼭 집어내
저마다 사랑하러 가면 다인

올해 봄은 그렇게 오는가



- 김 경미 시 ‘ 작은 사랑 ‘
[시집 이기적인 슬픔들을 위하여]




검은 문상복들 사이로
샛노란 원색 프릴을 입고 왜 이렇게 야단스러운가
앞가슴도 젖꼭지까지 훤하다, 매니큐어 칠한 빨간
구두
부끄러워 쩔쩔맨다, 꿈이라지만 이건 너무하지 않은가
얼른 깨려고
검은 상주에게 공손히 조아리는데
바꿔 입을 새 없는 말이 입에서


축하합니다, 라니!


못 맞추고
세상과 또 이런 식이야!




- 김 경미 시 ‘ 실의‘
* [이기적인 슬픔들 위하여]







죽었다니요 무슨 말씀을
하도 물어 가라앉은 잇몸 속
어금니도 좀 돋우고
시들하게 말라버린 몸속의 솜들도
빨갛게 갈아 채우고 있을 뿐
저주는 고맙지만 어쩌나, 아직도 죽지 않았으니
지하도로만 다니더라고요
누가요 아무리 괴로워도
펄펄 분하다고 저절로 복수가 피던가요 어디
그렇게 성질내지 말아요
아직 기회는 만잖아요 쉽지는 않겠지만



- 김 경미 시 ‘ 봄 안부 ‘
* [이기적인 슬픔들을 위하여]




나는 왜 극장처럼 어두워서야
삶이 상영되는 느낌일까


극장 매점의
팝콘처럼 하얗고 가벼운
나비 같은 생은 어떤 감촉일지


가끔씩 나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병아리 깃털이나 잎일 수 있는지
후, 불어보고 싶어진다



- 김 경미 시 ‘ 방명록 2‘
* 쉬잇, 나의 세컨드 중에는





꿈의 배경이 또 어둡다. 먹지 씌워
베껴낸 저녁 어스름
삶의 한 마음은 언제나 거기에 가 있으니


왜 행복이 두려웠는지를 생각해 보면
거기 쓸쓸함이 없어서였음을
라일락 꽃잎 같은 쓸쓸함에 들에 좀 더 성실했어야
라일락나무 되었으리라
그 작은 꽃들에서 너무 많이 걸어 나와버린 길들


그 걸음에 대해 쓸쓸해하는 게 이젠
욕되지도 성급하지도 않은
또 저녁이다



- 김 경미 시 ‘저녁 ’





때로는 마음대로 꽃소리 내는 나무들
언제 와서 언제 졌던가
절간의 새우젓 같은 안부들
이 세상 아직 내 탓에 쓸쓸해하는 이 있을까


있다며 곁에 와 눕고는 하는 무엇인가
어느 나무에선가
멀리 있는 자격 가까이 입으며
아무나 나라를 생각할 수 있음을 알았지만
게처럼 앞으로 가는데 옆으로 멀어지네
이제는
가을 더듬이에 국운보다 단풍잎 한 채가 더 아픈 날들

적막에 닿았다
인생에 부산스러움이 있다고 믿지 못하는 자는
실패한 자겠지
실패가 편하면 벌써 비겁한 것일까

그럴수록 혼자 외로워 아름다우리라고
눈물, 눈물 나도
끝내 기다려주고 있는 언덕 위
참으로 안아볼 만한 몸이며 마음이며
마지막 불빛은


- 김 경미 시 ‘ 열애들‘
* 이기적인 슬픔을 위하여




몸과 마음이 자주 등 돌리네
동명이인,
그 얌전한 사람에 들어가면
행간 없이 한 벌
다정할 수 있을까


몸이 마음에 아무 연락 안 하고
어디에 갈 수 있나
검정 맹인 같은 색안경 끼고,
물소리 내는 세월에 닿아
지워지지 않을 몸 없으니
살았을 때 마음껏 몸일 수 있어야 하나
생각도 데려가지 않아야 하나


신문지 같이 면 많은 마음
밤새도록 안 자고 밤참 라면보다 더욱 꼬부라진
아픔들
사색에 더 까맣게 질려야 하나
혼자 마구 가면 몸은 육신이 있으므로
못 따라오나


도대체 어디에서 한번 후련할까
삶이 둘 다 못 보고 지나가면
어둔 강 밤새 걷다
어깨 끌어안고 함께 울까



- 김 경미 시 ‘ 삼십 대 ‘
* 이기적인 슬픔들을 위하여




태양과 달이 여전히 약혼반지처럼 날 맴도는지
별빛들 한낮에도 줄곧 내게 눈길 주는지
한겨울의 나무들 차마 날아가버리지 못하고 못하고
흰 눈 내리는 강물 위를 걸어 걸어
우편배달부가 매일 나를 향해 똑바로 걸어오는지
새벽 배달 우유 같은 편지 들고


하릴없는 망상으로 꽃에 취해보네 마음을 키워보네
아이스크림 스푼이 되고 싶다
어둠을 떠낸 자리마다 흰 달걀빛 희망을 낳고
그 유리알들
주로 손놓쳐 깨곤 한다마는
손바닥 오래 쥐고 있으면
병아리 깃털들 노랗게 날아오르리라고
이젠 나도 생에 잔뜩 설레어보고 싶으니



- 김 경미 시 ‘희망 ’
* 쉬잇, 나의 세컨드는




우리는 매일 표절시비를 벌인다
네 하루가 왜 나와 비슷하냐
내 인생이
네 사랑은
그렇고 그런 얘기들


밤 전철에서 열 사람이 연이어 옆 사람
하품을
표절한다



- 김 경미 시 ‘ 표절 ‘




하루 종일 사진 필름처럼 세상 어둡고
몸 몹시 아프다
마음 아픈 것보다는 과분하지만
겨드랑이 체온계가 초콜릿처럼 녹아내리고
온몸 혀처럼 붉어져
가는 봄비 따라 눈빛 자꾸 멀어진다 지금은
아침인가 저녁인가 나 죽은 것인가 산 것인가


빈 옷처럼 겨우 일어나 창 밖을 내다본다
개나리 진달래 목련
온갖 꽃들이 다 제 몸을 뚫고 나와 눈부시다
나무들은 그렇게 제 흉터로 꽃을
내지 제 이름을 만들지
내 안의 무엇 꽃이 되고파 온몸을 가득
이렇게 못질해대는가
쏟아지는 빗속에 선
초록 잎들이며 단층집 붉은 지붕들이며
비 맞을수록 한층 눈부신 그들에
불쑥 눈물이 솟는다 나 아직 멀었다
아직 멀었다


- 김 경미 시 ‘ 흉터‘





고구마, 가지 같은 야채들도 애초에는
꽃이었다 한다
잎이나 줄기가 유독 인간의 입에 단 바람에
꽃에서 야채가 되었다 한다
맛없었으면 오늘날 호박이며 양파꽃들도
장미꽃처럼 꽃가게를 채우고 세레나데가 되고
검은 영정 앞 국화꽃 대신 감자꽃 수북 했겠다


사막도 애초에는 오아시스였다고 한다
아니 오아시스가 원래 사막이었다든가
그게 아니라 낙타가 원래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사람이 원래 낙타였는데 팔다리가 워낙 맛있다 보니
사람이 되었다는 학설도 있다

여하튼 당신도 애초에는 나였다
내가 원래 당신에게서 갈라져 나왔든가



- 김 경미 시 ‘ 野菜史 ‘
* 현대시학 (2003, 3)




이곳에서는 늘 소금을 뿌리며 놀아라, 사랑할 때도
꽃이 피면 한 송이 두 숟갈씩
참기름에도 찍어서

상스럽게 말할까? 재수가 없어!

자신이 그리고 없지

전화번호 수첩은 서울역 쓰레기통에 주네
신발 털다 세월아 다 갈라
인간은 기차를 만들었구나
소금 옮기려고
안녕, 소금들.



- 김 경미 시 ‘ 소금론 1 ‘
시집 [이기적인 슬픔들을 위하여] -창작과 비평사-




소금과 설탕이 만나
섞이는 척하다가
토하고
쏟고
침 뱉고
서로 집에 가버렸다


- 김 경미 시 ‘ 소금론 2 ‘




가을 햇빛에 깨끗이 말려진 하늘
그 빛에 눌려 나뭇잎들 납작하게 내려앉으면
다 내려앉은 다음

겨울 비단뱀이 된다면
석 달 치 식량
계란 껍질째 깨지도 않고 삼켜
삭고 삭아 계란껍데기가 우유처럼
묽어져
몸 안에서 아무 사금파리 상처도 찌르지 않을 때쯤
일어나
그새 돋은 발
거뜬히 새 신발 사러 뛰어다녔으면


- 김 경미 시 ‘ 겨울잠‘




보름달 안은 쟁반만 한 약,
식후 삼십 분마다 하루 세 번씩
시간 지켜 삼킨다

그래도 안 낫는다
그래도 안 죽는다

아 듣기 싫어라
어디서 권태가 내 목소리로 징징대는 소리

콩깍지만 한 무책임도 없이
참신한 불행도 없이
김치같이
수박껍질같이 둔, 탁, 한 행복들이 집집마다 모여 있는 것도
상쾌하지 않다


- 김 경미 시 ‘ 일상 ‘




어떤 날에는

수저같이
아귀같이
푸른 잎들 새로 돋는 봄날에
하루 종일
우두커니
부엌 창 앞에 서서
쏟아지는 물 잠그지도 못한 채 서서
두 손 떨군 채 낮고 작은 창 내다보다
핑 눈물이 도네
노란 봄 스웨터 환한 색깔옷들 아무리 가져다 입어도
낡은 겨울 검정 외투처럼
스스로 무겁고 초라해서


살아와 지금껏
단 한 번도 누군가 잘.있.는.지. 물어봐주지 않은 듯

어떤 날에는
자꾸 눈물이 나서
잘.있.는.지......자꾸 눈물이 나서.....



- 김 경미 시 ‘ 어떤 날에는‘




못 나눠줘 절대
이 슬픔 나 혼자 다 차지할 거야
애인처럼 연인처럼 다가오지 마
이런 전시에 나눠 먹다니
내 목숨에 슬픔 외의 빈자리 없음을
그런 슬픔
온전한 내 것이 있다는
이 가득함

사랑도 오늘은 혼자서 해!


- 김 경미 시 ‘ 슬픔이 너무 큰 날은 ‘




내 주먹 쓸모없었음을
은빛 재크나이프같이 늘 한발 더 빠르게 빠를 뿐 귀염성 없던
절망들. 나는, 안다, 화장품 바른 내 얼굴 또한
팔공년의 나라가
가두겠다, 나는 한 적 없던
가슴속 잔 지푸라기 많아, 너무
숨어도 머리카락 다 들켰겠지, 남들 것까지, 안다.

그물창 대신 커튼이 예쁜 버스들
가루비누같이 부푼 승객들의 머리
안다, 나는
국공년의 나라가
커튼 속 예쁜 집들이 손님 명단, 내게는 초대 없는, 저
칫솔처럼 길게 벌거벗어 누운 길들로
저 이빨대신 신발을 닦아도 즐거운 칫솔들의
새 희망, 비눗방울들의 터질 듯한 터질 듯함, 안다

내 복잡한 슬픔의 방식 또한 쓸모없음을, 환멸 또한,
가슴속 지푸라기들이

넌, 갈 연대도 없지, 어디에서도 다 들켜, 들키니
막히니
눈치채는, 자꾸


- 김 경미 시 ‘ 틈에서 ‘
*이기적인 슬픔들을 위하여中




이즈음 나는 무척 아름다우니
가을 하늘이 내 청명을 시기하지
기러기가 밤마다 찬 서리를 뿌리고 가도
흰 서리꽃 위에서 언 발로 세상 상처의 연혁을 사랑하므로

곧잘 난투극을 벌이며 앞날을 채가던 절망아 잘 있거라
다만 마음이 이정표일 뿐
믿는 것은 무책임뿐, 새벽안개의 맨발도 두렵지 않단다


- 김 경미 시 ‘ 길 ‘



운동화가 당연할 때도 하이힐을 샀다
산에 놀러 갈 때도 뾰족한 입술처럼 내밀고
사회의 뒤통수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기 시작했을 때도
빨간 하이힐,
여전히 못 버리고 청색 유리구두 더 짙게 또 한 켤레
내 마음을 누가 볼까, 들킬까 겁났던
내 마음을 누가 알까, 외로워 섭섭했던
내 마음을 누가, 나도 믿을 수 없었던, 운동화 실은
신고 싶었네
마음을 하이힐 속에 팥쥐처럼 욱여넣고

교활하려는 뜻은 아니었어, 진심이
둘 이상이었을 뿐, 마음은 프리즘 같은 것, 기울기가
내는, 한 개로 이름 그을 수 없는 다색의
뒤섞임, 결침 같은 것
그 안 어딘가에서 단식 한번 안 하고 통과한 상처.
껍질 얇은 알전구 속, 끊어진 텅스텐처럼
흔들면 달그락, 달그락 돌아다니는데
또 진노랑 하이힐을

고백컨대
밖으로 무얼 신든 남은 것은
마음 안을, 뒤바꿔가며, 송곳처럼
압핀처럼


- 김 경미 시 ‘ 하이힐 ‘
*이기적인 슬픔들을 위하여 中




고통이 이 몸 왕비 삼으사 이 속 간택하사
도장처럼 붉은 상처만 입고 살으라 하여, 하여
그토록 어린 나이의 계집을
중국 비단인 듯 비단인 듯

기어코 마음을 깎아
평민의 채송화꽃
저녁 산책을 만들어보려 하였더니

누군가가 대신 말끔히 먹어치우네
한 끼 식사행차처럼
다시
언제고
처음부터 차려지는 붉은 비단. 비단

이 천성

요즘 누가 불행한 천성을 지닌다고


- 김 경미 시 ‘ 번뇌무진서원단(煩惱無盡誓願斷)‘
*이기적인 슬픔들을 위하여 中




요즘 시도 안 쓰지 이 날라리!
(가을 결혼식 정원, 허물없는 후배가 내 남산타워만 한 구두굽을 본다)

---쓰면 다니?
(도대체 가볍고 즐거운 치장들은 어떻게 그리 행복할까
포장지를 바꿔치기해서 뜯어보고 싶었던 뱀처럼 긴 소원이었어)

---써도 서랍 속이지
누가 청탁받아야 주나, 그냥 갖다 주면 싣는 거지
(위대한 너희 단골들!
얘, 나는 이 무거운 심장에 날라리 될 행복이 있을까, 평생......)

---그랬다가 거절당하면!
(생각해 보니 인생 내내 그게 무서웠다! 그토록 무서웠다!
날파리들은 거절당해도 맞아 죽을 때까지 찾아든다 훌륭하지 않은가!)

역사는 날파리한테서 진화할까?


- 김 경미 시 ‘ 날라리와 날파리 ‘




옛 애인 저기 있다
이쪽을 보지 않으려고 횡단보도에 선 채
파란 불이건만 건널 생각도 못한다
그토록 스펀지케이크 같던 표정
사랑을 잃은 만큼 옷핀처럼 단단히 여미고 있지만
그럴수록 영화관 맨 앞자리에 앉혀져
추억의 유리 파편들 온통 화면 밖으로 뿜겨지겠지
가는 길마다 공사 중, 한 얼굴이 길을 막겠지
오직 한 이목구비.
하지만ㅡ 그대들
그래봤자란다
길을 온통 외면하도록
그러나 한시도 눈 떼지 못하도록
가슴 저미는 실루엣 비슷한 옷색깔마다 이는 현기증
봄 햇빛 눈 시린 듯 손차양 쓰고
마주칠까 봐 마주치지 못할까 봐 두려운
어디서든 나타나는 신(神)
그토록 잊을 수 없는 옛 애인은
영원한 청산가리, 독극물의 오직 한 애인은

돌아오지 않는 나,
일회의 나, 그 삶, 그 청춘,
나, 그 시간들, 나의
지나감 들일뿐

타인은 아무도 자신보다 일생을 그립지,
치명적이지, 않는 법이다


- 김 경미 시 ‘ 저기 옛 애인들 지나간다 1 ‘




검은 솥단지 같은 흑백사진 속으로
불행이 정지해 있다

발 디딜 틈 없는 불화

그런데
저렇게까지 상관없이 겨울 별빛들 찬란해야 하는가
모든 불 민방위불처럼 끄고 아아 영원히
식고 싶었으나


- 김경미 시 ‘ 사소한, 아주 낡은 사적인 추억을 위하여 2‘
* 詩集, 이기적인 슬픔들을 위하여



아니, 저 예쁜 브래지어와 팬티 말고
브래지어와 팬티 속 마네킹, 마네킹을 입고 싶어
몸속에 환하고 둥그렇게
불빛 켠
손 넣으면 자궁처럼 따뜻하게 덥혀진
희망이 하얗게 눈부신 방을 내줄 것 같은

몸속에 형광등 빛나는 저 마네킹, 마네킹을
입고 싶어
바깥세상을 더 잘 보기 위해
늘 몸속을 꺼멓게 불 꺼야 했던
지난 연대의 크고 거친 내의 대신
몸매 찰싹 달라붙는 화려한 오늘 밤

아직 벗기에 이를까?


- 김 경미 시 ‘ 밤, 내의가게 앞에서 ‘




-선배도 이젠 고상한 음악 좀 들으세요
나이도 있는데......온 국민이 다 재즈 팬인데......



돌아와 또 메탈 볼륨을 올린다 드럼 채가 튀어 식탁을
두드리고 신발장 안의 구두들 일제히 날아오른다
미안하다 이웃들이여 나 진심으로 그대들 사랑한
적 없다 서로 사랑하지 말고 묵묵히 멀리 있자고
그것만이 진실된 사랑이고 노래이리라고
나 또 이렇게 시끄러운 볼륨을 높이니



고백 건데 국산도 말고 외제 메탈만 듣는다
멀이 있어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들
상처가 되지 않는 거리
라벤더와 제라늄 식의 명칭들
고백 건데 저녁 무렵이 되면 신데렐라처럼
소리치고 싶어진다 돌아가야 해요 난 실은
사람이 아니에요. 난 식물이란 말이에요!



매일 몇 마디씩이라도 한느 내가 때로 시끄러워
견딜 수 없는 침묵과
슬픔과 내향만이 내가 안느 메시아이므로
그러므로 누가 뭐래도 나는 무겁고 묵묵하게
그 고요하고 슬픈 음악을 들을 것이다 언제까지나
식물처럼 깊어질 때까지


- 김 경미 시 ‘ 헤비메탈을 들으며 ‘
* [쉬잇, 나의 세컨드는] 중에서 -문학동네-




뿌리에게 나는 어떻게 관여해야 하는 것일까

내 접촉의 세상은

눈썹 한올 같은 이 스트로우가지 하나일 뿐

목숨이 거기서 올라온다는 뿌리는

한번 본 적도 없는데

나이면서 나도 만나지 못한

흙밑 어둡고 고요한 뿌리에게

내 것이면서도 도무지

일면식도 없는 세상

그 광활에게,

멀고 작은 한 나뭇잎인 나는 대체 어떻게


- 김 경미 시 ‘ 나뭇잎 한 장의 생각‘
* ‘햇볕에 날개를 말리다’ 문학과 경계사. 2002



양지쪽 창가에 기다리고 있어, 삼십 분
힘이 없는 건 너무 눈부신 자리여서야
튼튼한 금붕어들이 휘젓고 간 자리에 한 시간이
설탕처럼 떨어져 끈적이고
아직 커피를 다 안 마셔서예요 커피잔을 뺏기지 않
으려고
두 시간, 가늘게 입가가 떨려


그리고 세 시간, 눈물이 쏟아질 차례지만
유리창 너머
오래도록 혼자 노는 햇빛을 보니 반쯤 알 것 같아
너 대신 나오곤 하던 팔이나 다리 한쪽
혹은 잘난 척하는 이마 한 개
끝내 보지 못한 너의 전부가
오히려 용기를 주는 지금은 네 시간, 그리고
괴기스런 다섯 시간
다 알 것 같아 이제는
한 달 전의 네 입술을 떼어 메모판에
이렇게 핀침해 놓고 보니
안녕.
진작 이렇게 네가 갇혀 버둥댈 수 있음을


- 김 경미 시 ‘ 사소한, 사적인 스무 살의 추억을 위하여 ‘
< 이기적인 슬픔들을 위하여, 1995, 창작과 비평사 >




꽃들이 하루 삼십 번씩 잇몸이 허네
구름들, 그 큰 솜뭉치 들고도
아무것도 닦지 못하고 가네
상인들은 딸기와 수박도 무서워
차들이 이른 폭염을 향해 이마를 박고
배가 산에 목을 매고
불타는 산모 안에서 아이가 기적적으로 걸어 나왔으나
증명서를 떼러 가면 늘 공휴일의
라일락 꽃잎들이 흰 이를 철철 흘리며
내 뼈는 내 뼈는
슬픔도 차마 고개를 못 드네

한 역사학도는 사실, 그때
나만의 고통 나만의 낭만 나만의 불행 나만의 눈물
나만의 사랑 나만의
나만의 상처 나만의
머리카락 타는 냄새에도 오늘도 별빛 아련히 아득한
네 나만의 별 나
만의 어둠
나만의 나만의 우주 나만의 역사
나만, 나만의

몇 년의 시간이, 기차바퀴에 눌려 양은캔처럼 부피를
잃는 한 도시
미스코리아 선발대회를 중계하고 있었다
창 밖에는 꼭 촬영용 양동이물처럼 비 쏟아지고
혼자 스무 가지도 넘는 토속반찬, 식당을 받으며

내 것 아닌 도시에서 어깨가 아팠다
힘에 부치는 사랑이 날 부수고
새로 지으려나 보았다


- 김 경미 시 ‘오래되지 않은 이야기’
* 이기적인 슬픔들을 위하여, 창작과 비평사




봄나비와 함께 날던 햇빛
마음 바꿔
풍진에 몸을 내어놓다

진흙비 뿌리다

나는 저자에 산다
귤을 까서 입에 넣고 나면
생각해 보니 조금 전에 발바닥이 가려워 긁었던 손이다.


- 김 경미 시 ‘여시아문’




나는 예수보다 고난이 많았다고 믿는다
- 니진스키


물 위를 뛰어가는 일회용 은박접시
그저 톡, 쏘고 달아나는 콜라의 침 끝
눌러도 가볍게 도로 펴지는 육체파의 엉덩이


세계의 무거운 눈꺼풀을 잘라낼 듯
도마뱀이 제 몸을 끊고도 태연하게 살아서
옆구리로 예수 같은 손구멍 드나드는 현무암은
항상 검은 기체같이
체중을 없애면 투명해지리라


멸종의 문단속 끝내고 마악 지상을 떠나는
마지막 공룡의 뒷모습


그 후련한 뻔뻔스러움으로, 열쇠처럼
춤추고 싶어
저절로 날고 싶어



- 김 경미 시 ‘ 가벼움의 춤 ‘
< 이기적인 슬픔을 위하여, 1995, 창작과 비평사 >




1. 편 지

푸른 상처의 출렁거림
청색 잉크병 한병
읽다가
사약그릇 같은 해가
발을 헛디딘다

어둠이...... 왔다.....


2. 겨울나무

네 머리 가득한 검은 실핀들
너무 아름다워 마주 볼 수 없는
상복
상복 속의 내면
(암전)
어둠이 왔다.......
...... 왔다.....



- 김 경미 시 ‘ 어둠이 왔다 ‘
< 이기적인 슬픔들을 위하여, 창작과 비평사, 1995 >




** 김 경미 : 1959년 6월 24일, 서울
한양대학교 사학과 졸업
198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비망록' 당선

수상
2010. 서정시학 작품상
2007. 한국방송작가협회 라디오작가상
2005. 노작문학상
1983.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2024. 03. 21 김 종삼 문학상.


한겨레 신문 이미지 (김 종삼 문학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