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바이올린 주자의 절망
마종하
신경성 다발증으로 그녀는 연주를 할 수 없다.
바이올린이 온몸을 파고들어 울리기 때문이다.
홀로 열린 창, 밖에는 늙어 목쉰 고물상.
___여보, 나도 이제 고물이니 사감이 어떠하오?
농담은 날로 진담이 되어서 그녀는 과감하게
고물상에게 몸을 통째로 던지고 말았다.
건드릴 적마다 몸저린 고물상의 기쁨,
해는 그때부터 눈부시고 몸부신 빛이 되었다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 -바하의 샤콘느를 들으며
유 수 연
산의 구름다리를 오를 때마다
바하의 샤콘느를 듣는다 한 발,
내딛을 때마다 구름다리의 몸을 긋고 가는
현의 무게로 휘청거린다
바람의 활이 휘청거리는 구름다리를
위에서 아래로 굵게 훓고 지나간다
줄이 끝에서 보이지 않게 떨리는 生
닿아야 할 정상은 비구름안개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두칸씩 건너 뛰어 본다 위험하다
무반주로 두 개의 현을 동시에 켜는 일은
고난도의 기술을 필요로 한다 오히려,
소음이 되어 버릴지도 모르는 두려움
소음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무게중심을 잡지 못해 구름다리가 삐꺽거렸다
지금처럼 비가 오거나 안개가 끼인 날
가끔 외길이란 것을 잊고 발을 마구 헛딛을 때
구름다리는 세차게 몸을 흔든다
구름다리 주변의 비구름 안개가 같이 뒤엉켰다
발판이 떨어져나가고 줄이 투두둑 끊기는 소리를 냈다
뒤집힐지도 모르는 아득한 절망
그럴 때 바하의 샤콘느를 듣는다 그러면
비뚤어지거나 부서진 발판들이 오선에
음표를 채우듯 반듯하게 놓여지곤 했다
길고 짧은 음표들이 부서진 발판 위를 못처럼 박힌다
잠깐씩 온쉼표나 이분쉼표가 구름다리의 줄을 이어놓고
숨을 돌리기도 한다 나도 잠깐 숨을 돌린다
스스로 외줄, 길이 되어야 하는 세상의 구름다리 위를
무반주 샤콘느의 팽팽한 음으로 단정하게 걷는다
휘청거리지 않는다
먼레이 바이얼린
김정임
할로겐 조명을 받으며 그녀가 앉아 있다
뒷모습이 바이얼린의 잘록한 몸통을 닯았다
맨살이 드러난 등허리에 火印 같이 선명하게 찍힌 f홀
바이얼린 선율이 흘러나올 것 같아 귀를 기울이자
바흐의 샤콘느가 낮은 음계로 새어나왔다
그녀의 몸 깊숙이 숨겨놓았던 가장 낮은 음표를 끄집어냈나 보다
g마이너 현의 느린 선율이 전시장 대리석 바닥에 닿아
반주도 없이 생음으로 뒹굴고 있다
고통이 다른 고통을 만나 칸나빛으로 폭발하는 샤콘느,
심장에서 붉은 피톨들이 꽃잎처럼 흔들렸다
G메이저 절정을 향해 뒹굴며 전율하던 몸이 어느새 호흡을 고르며 등뼈를 편다
花印 자국 같은 그녀의 f홀
그녀의 흰 몸이 침묵의 음계 아래로 가라앉고 있다
바이올린 켜는 여자
도종환
바이올린 켜는 여자와 살고 싶다
자꾸만 거창해지는 쪽으로
끌려가는 생을 때려 엎어
한손에 들 수 있는 작고 단출한 짐 꾸려
그 여자 얇은 아래턱과 어깨 사이에
쏙 들어가는 악기가 되고 싶다
왼팔로 들 수 있을 만큼 가벼워진
내 몸의 현들을 그녀가 천천히 긋고 가
노래 한 곡 될 수 있다면
내 나머지 생은 여기서 접고 싶다
바이올린 켜는 여자와 연애하고 싶다
그녀의 활에 내 갈비뼈를 맡기고 싶다
내 나머지 생이
가슴 저미는 노래 한 곡으로 남을 수 있다면
내 생이 여기서 거덜나도 좋겠다
바이올린 소리의 발밑에
동전바구니로 있어도 좋겠다
거기 던져주고 간 몇 잎의 지폐를 들고
뜨끈한 국물이 안경알을 뿌옇게 가리는
포장마차에 들러 후후 불어
밤의 온기를 나누어 마신 뒤
팔짱을 끼고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싶다
바이올린 켜는 여자와 살 수 있다면
내 잠 속 선인장 가시는 왜 바이올린의 고음을 따라가는가
서영처
똬리 틀던 날들이었다
아이들에게 바이올린을 가르치다 보면
파편처럼 날아와 박히는 소리
자주 마음을 긁혔다
신경초처럼 오그라들곤 했다
팽팽하게 튕겨올라 과녁을 비끼든 미분음들
내 날카로운 갈증
모래경전에 무릎 세우고
나는 순정률로 쏟아지는 햇살을
모두 받아 고슴도치가 되었다
그러나 멀찍이 떨어져
네게로 다가갈 수 없는 이 슬픔.
쥐떼가 허벅지를 파고
이따금 봉오리들이 맺혔다 지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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