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해항로 4
- 낮에 보일러수리공이 다녀갔다
겨울이 들이닥치면
북풍 아래서 집들은 웅크리고
문들은 죄다 굳게 닫힌다.
그게 옳은 일이다.
낮은 밤보다 짧아지고
세상의 저울들이 한쪽으로 기운다.
밤공기는 식초보다 따갑다.
마당에 놀러왔던 유혈목들은
동면에 들었을 게다.
개똥지바퀴들은 떠나고
하천을 넘어와 부엌을 들여다보던 너구리들도
며칠째 보이지 않는다.
나는 누굴까, 네게 외롭다고 말하고
서리 위에 발자국을 남긴 어린 인류를 생각하는
나는 누굴까.
나는 누굴까.
낮에 보일러수리공이 다녀갔다.
산림욕장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아무도 만나지 못했다.
속옷의 솔기들 마냥 잠시 먼 곳을 생각했다.
어디에도 뿌리 내려 잎 피우지 마라!
씨앗으로 견뎌라!
폭풍에 숲은 한쪽으로 쏠리고
흑해는 거칠게 일렁인다.
구릉들 위로 구름이 지나가고
불들은 꺼지고 차디찬 재를 남긴다.
빙점의 밤들이 몰려오고
물이 언다고
물이 언다고
저 아래 가창오리들이 구륵구국 구륵구국 운다.
금광호수의 물이 응결하는 밤,
기름보일러가 식은 방바닥을 덥힐 때
나는 누굴까.
나는 누굴까.
---------------------------------------------------------------------------------------------------
몽해항로 5
- 설산 너머
작약꽃 피었다 지고 네가 떠난 뒤
물 만 밥을 오이지에 한술 뜨고
종일 흰 빨래가 펄럭이는 길 바라본다.
바람은 창가에 매단 편종을 흔들고
제 몸을 쇠로 쳐서 노래하는 추들,
나도 몸을 쳐서 노래했다면
지금보다 훨씬 덜 불행했으리라.
노래가 아니라면 구업을 짓는
입은 닫는 게 낫다.
어제는 문상을 다녀오고,
오늘은 돌잔치에 다녀왔다.
내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더 이상 묻지 않기로 했다.
작약꽃과 눈[雪] 사이에 다림질 잘하는 여자가
잠시 살다 갔음을 기억할 일이다.
떠도는 몇 마디 적막한 말과
여래와 같이 빛나는 네 허리를 생각하며
오체투지하는 일만 남았다.
땀 밴 옷이 마르면
마른 소금이 우수수 떨어진다.
해저보다 깊고 어두운 밤이 오면
매리설산(梅利雪山)을 넘는 야크 무리들과
양쯔강 너머 금닭이 우는 마을들을 떠올린다.
누런 해가 뜨고 흰 달이 뜨지만
왜 한번 흘러간 것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가.
바람 불면 바람과 함께 엎드리고
비가 오면 비와 함께 젖으며
곡밥 먹은 지가 쉰 해를 넘었으니,
동쪽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가는 일만
남았다. 저 설산 너머 고원에
금빛 절이 있다 하니
곧 바람이 와서 나를 데려가리라
-------------------------------------------------------------------------------------------------
몽해항로 6
- 탁란
가장 좋은 일은 아직 오지 않았을 거야.
아마 그럴 거야.
아마 그럴 거야.
감자의 실뿌리마다
젖꼭지만 한 알들이 매달려 옹알이를 할 뿐
흙에는 물 마른자리뿐이니까.
생후 두 달 새끼 고래는 어미 고래와 함께
찬 바다를 가르며 나가고 있으니까.
아마 그럴 거야.
물 뜨러 나간 아버지 돌아오시지 않고
나귀 타고 나간 아버지 돌아오시지 않고
집은 텅 비어 있으니까.
아마 그럴 거야.
지금은 탁란의 계절,
알들은 뒤섞여 있고
어느 알에 뻐꾸기가 있는 줄 몰라.
구름이 동지나해 상공을 지나고
양쯔강 물들이 황해로 흘러든다.
저 복사꽃은 내일이나 모레 필 꽃보다
꽃 자태가 곱지 않다.
가장 좋은 일은 아직 오지 않았어.
좋은 것들은
늦게 오겠지. 가장 늦게 오니까
좋은 것들이겠지.
아마 그럴 거야.
아마 그럴 거야.
-시집<몽해항로> 2010 민음사
'시 숲에 들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의 누드 / 황 지우. (0) | 2010.11.25 |
---|---|
바이올린 풀레이어. (0) | 2010.10.16 |
바다가 그리울 때.... (0) | 2010.08.07 |
위로. (0) | 2010.07.31 |
작자미상/모험이다 (2) | 2010.07.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