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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그 쓸쓸한 영혼

‘커피는 검다‘’수프와 숲‘’대못‘ 외 몇편 - 한 재범 시 .

씁쓸한 에스프레소, 그 인생.







생활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지하철부터 탔군요
미워하기 적합한 곳이네요
매일 지옥을 찾는 사람들처럼
창밖에 시신을 둬야겠군요
지옥은 어디에나 있지만
어디에는 없고
지옥은 너무나 간편하군요
창밖을 보면 창 안의 내가 보이고
창밖은 모르는 얼굴뿐
지하로 내려가는 일이 익숙해서
큰일이군요 기껏 태어났는데
일생의 절반이 지하라서
내일부터는 좀 걸어야겠네요
건강하기 위해선 걷기가 필요하고
걷기 위해선 걷는 몸이 필요하군요
지옥에선 불필요하지만
내일은 모르겠어요
어제의 내가 나간 출구가
생기고 없어지길 반복하는데
없어진 출구가 벽이 되고
거기 등 기대는 몸도 있군요
미워하기 위해
미워할 몸부터 찾는 사람처럼
모르는 얼굴들과 함께
욱여넣어지는 것이 익숙하군요
때로 아는 사람을 만나면
반가울 수가 없네요
그러나 다행히 나는 내일부터
내가 아니기로 했군요
낮도 없고 밤도 없는 지하
내가 빠져나갈 출구로 어깨를
비집고 들어오는 몸이 있고
오늘은 지하에서 튀어나와
아는 사람 없는 거리를 걷는데요
모르는 사람이 말을 걸 때도 있군요
그거 아세요?
지금 당신 등에 어떤
할아버지가 업혀 계세요
아 네 그럼요
저희 할아버지인걸요
할아버지가 저보다 저를
참 아끼셨답니다



- 한 재범 시 ‘ 나는 내일부터‘
-『국민일보/시가 있는 휴일』2024.03.21.






저수지에 개 하나 놓여 있다
트루먼이 연기하는 것이다

어두운 관객석 사람들 웅성거린다 너는 지루한 득 턱을 괸다 우리는 지정석에 앉았고 우리를 기다리는 개가 있고 이 모든 건 가까스로 완벽하다


흰 가루가 된 외할머니를 가로수 아래 묻었지 사대강 사업으로 거대하게 꾸면진 영산강 공원에서 공원인데 아무도 지나다니지 않았다
딱히 숨기려던 건 아니었어요
외삼촌이 맞담배를 피우자 했지 아직 미성년자인데 자꾸만 괜찮다고 다 그런 거라고 다 그런 게 뭘까 외삼촌의 불을 받으며 생각했다
가로수는 더 크게 자라겠지 한겨울의 바람이 불고 사라진 잎사귀 대신 나뭇가지가 흔들렸다 외할머니가 죽을 힘을 다해 우리를 비웃는 거야, 형이 말하고 돌아가는 장례 버스에서 외가 사람들은 잠깐 슬퍼해줬다 돈을 세던 손가락으로 얼굴을 긁는다 왜 슬픈 얼굴들은 다 배가 고파 보이는 걸까
자꾸 침이 고여 괜히 바닥에 침을 뱉었다
내일 부턴 학교에 가야 하는데 형은 다시 군대에 가야 하고 친구들에게 뭐라고 말할까 벌써 기대가 됐다
버스의 창문에 나란히 강이 비친다 저건 강이 아니라 저수지다, 아버지가 말하자 외가 사람들이 화를 내며 반박하고

긴터널을 지나왔다


일년에 한번
극장에 갔었지
먼 친척의 부고가
해마다 한번은
들려오던 것처럼
정한 적 없는 약속

누군가의 생일이었고
형과 내 이름을 자주
헷갈려 하던 사람과 함께
연극이 끝나면 극장을 나와
옆에 있는 호수를 보며 걸었지

형은 강이라 했고
나는 호수라 했는데
둘 다 아니었지
깊고 어두웠지
지금 당신이 밟고
서 있는 그것처럼

그런다고 누가 알아 줄 것 같아요?
죽어봤자 다 까먹는다고요


트루먼이 연기를 하다 말고 우리를 본다
연기가 아니라 분명 우리를 보고 있다

사람들 웅성거리기 시작한다
저수지를 바라보는 연기라고
너는 생각할 수 있겠지만

관객석의 어둠은 지나치게 깊다
이것을 저수지라 말하기에는

개는 개를 무서워하지 않지만 나는 가끔 네가 무서워, 집에 돌아와 네가 아무말 없이 방문을 닫는 일을 나는 자주 앓는다

저 트루먼이라는 사람
어딘가에 익숙하다,
너는 말할 수도 있을 텐데

빛이 눈을 껌벅인다
무서운 빛이다

트루먼은 알고 있겠지
트루먼만이 우리를 볼 수 있으니까
저수지를 바라보는 트루먼이
점차 우리를 바라보게 될 때

암전
총소리
개의 신음

무대 위에 트루먼
트루먼을 관통한 트루먼
사라진 어둠을 끌어안은 채
쓰러지는 것


아직 박수가 끝나지 않았는데
너는 등 뒤에 구겨둔 외투를 꺼내 입는다

너를 이곳에 데려오고 싶었는데 너는 알았다고 다음엔 더 좋은 곳을 가지고 말한다

극장을 빠져나와 우린
밝은 무대 위를 걷는다



- 한 재범 시 ’저수지의 목록‘
* 제 19회 창비신인시인상 시 당선작.
* 창비 2019년 가을호






베란다에서 거실로 화분을 옮기던 여자를 나는 여름의 숲에서 잃어버렸다

남겨진 식탁 위에 매일 숲이 자랐다 머리맡에 나무를 옮겨 심는 꿈을 궜다 숲을 향해 뛰어가는 아이의 뒷모습을 쫓다 잠에서 깨면 늘 혼자였다

몰래 훔쳐본 여자의 성격 속 메모를 떠올리면
두려움이 무성해지는 여름

"어떤 믿음은 너무나 울창해서 나를 찾을 수 없다"

죽은 나무들로 지어진 성당에 다녔지 도기를 움켜쥐듯 두 손을 모으고 기도를 배웠어 어린 내가 고목을 찍어내릴 상상을 할 때마다 여자는 수프를 끓였다

오래도록 휘저으며 바라본다
팔팔 끓는 수프 위를 떠다니는 표정과
말없이 그 표정을 흔드는 하얀 손

나는 매일 일기장을 찢었다

식탁 위에서 식어가는 수프 겁이 번진 얼굴을 지워주던 하얀 손에 박힌 못들의 세례명은 손잡이였지 깊숙이 흐르는 마음을 움켜쥔 채 매달리는 것들

굳게 잠긴 울창함 속에서 구멍을 세는 아이
아이의 낡은 벽지 같은 등을 본다
이곳은 분명 숲이다 숲은 멀어지니까
맨발을 가졌으니까

멀어지던 아이가 구멍 속에 발을 담근 채 둥글게 몸을 말 때면 궁금해진다 방 안 가득 무너지는 것은 왜 혼자가 아닐까

숲에서 홀로 수프를 긇이다가
곰팡이처럼 떠다니는 표정들을 뒤섞는다

몸 안에 고인 빛을 쏟아내는 전등 아래

그림자와 그늘을 구별할 수 없어질 때까지 그것들이 뒤섞여 흉측하게 뭉쳐질 때까지 어디선가 종은 울리고

책장이 넘어가는 소리를 내며
숲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 한 재범 시 ’수프와 숲‘
  * 창비 2019년 가을호






하굣길에는 갈대밭에 들러 혼자 울었지 아이들은 끈질기게 따라와 시체장사하는 애비자식이라고 놀렸다 나도 한명 쯤은 자신이 있어서

주머니 속 대못을 움켜쥐었지 교복바지 속에서 그것은 점차 커지는 것 같았다

그해 여름은 홍수가 잦아서 매일 밤 아이 하나 정도는 쉽게 떠내려갔다 급히 거리를 떠도는 아버지를 볼 때마다 사람들의 얼굴이 꿈틀거렸고

마을의 하나뿐인 뒷산 위 골동품처럼 쌓여 있는 무덤들 사이 아버지는 매일 대못을 박는다고 했다
교회도 없는데 마을에는 한동안 종소리가 났지

아버진 내게 보여준 적 있다 미리 파놓은 누군가의 묫자리, 비가 고여 큰 못이 된 그것이 찰랑거리던 모습
장의사는 마을에 하나면 족하다고 그 일을 너도 맡게 될 거라고 언젠가 벽에 걸린 작업복을 보는 아버지는 그렇게 말하려는 것 같았는데

집에 돌아와서 나는 하루 종일 손가락이 아팠지
빈손을 자꾸만 쥐어서
밤마다 몰래 아버지의 삽을 들고 집을 뛰쳐나갔어 그날도 마찬가지였지 뒷산에 올라가 땅을 팠지 주변에는 내가 매일 파놓은 구멍들이 있었는데


갑자기 비가 쏟아졌지
무딘 칼질 같은 장대비 소리
온 마을을 뒤흔들 것처럼 컸다

구멍들마다 물이 차올랐다 못처럼 박힌 구멍들이 징그러워졌지 온몸에 소름이 돋을만큼, 삽을 버리고 도망칠수록 더 길을 잃게 되는 산속에서
더는 그곳과 멀어질 수 없다고 느낄 때까지 계속 뛰었다 숨이 찰수록 자꾸 무언가를 움켜쥐게 되었는데


주변을 돌아보니 다시 갈대밭이었다


젖은 주머니 속 무언가
서서히 나를 찌르고 있었다



- 한 재범 시 ’대못‘
  * 창비 2019년 가을호






친구는 수련회에 다녀온 후로 말수가 줄었다 뾰족한 것이 무서워졌다고 했다 주위에 아무도 없이 홀로 튀어나온 게

운동장에 야구부 아이들이 줄줄이 엎드려 있다
뭉쳐진 그림자 위로 고이 튀어오르다
빈 유리병 같은 가을 속으로 가라앉고

빛이 보서지는 소리가 운동장을 메운다 더 잘하겠습니다, 기도문을 외우듯 아이들은 간절해진다 땅을 짚은 팔목들이 나란히 휘청거리는 저녁

창문 속 어둠을 가로지는 불빛들 사이로
불에 타고 있는 집을 꿈꾸곤 했다

지난여름 우리의 캠프파이어

사각의 거대한 불 위로 튀어오른 불씨들 공중에서 흩날린다 흰 종이에 무엇을 적어서 냈냐고, 물어도 친구는 아무 말이 없고

불을 둘러싼 채 우리는 거대한 원을 그리며 춤을 췄다 밤하늘에 녹아내리는 불씨 같은 춤을, 한 방향으로 돌기 시작하며

거대한 불 속으로
서서히 멀어져가는 집
누군가의 이름이 들어가
나오지 않고 있었다

마음에 있는 말을 그대로 저지르는 사람은 없지, 그것은 모두가 아는 마음 때론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가 귀를 잠갔다 우리는 경쟁하듯 더 빠르게 원을 돌고

이 노래가 끝나고 난 후
벌어질 일을 알고 있으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

실은
모두 같은 홈을 향하고 있는 걸
그라운드 위의 아이들처럼
우리에겐 집이란 건 멀리 있으니깐

캠프파이어의 불이 꺼지고
우리는 재가 흩어지듯 사라졌다

나는 돌아가지 않았다 그럴 수 없었다 친구는 아무 말 없이 반 안에 누워 있고 나는 작은 창문으로

베이스를 잃어버린 아이가
홀로 서 있는 것을 보곤 했다
꺼져가는 전광판의 불빛 아래


- 한 재범 시 ’홈 ‘
  * 창비 2019년 가을호




커피는 검다 안이 보이지 않는다 개미가 날아다닌다 보이
지 않는다 개미는 검다 커피를 마신다 잠이 오지 않아서 창밖은 검다 잠긴 핸드폰 화면 속 '잘 자'라는 문자에 답하지 않는다 들여다보지 않는다 나는 자고 있으므로

오늘 밤은 유독 적막하다 진동이 울리고 화면이 흔들린다
'초미세먼지 경보' 안에 있어 다행이구나 깨진 유리잔처럼
엎질러진 밤 커피가 마르지 않는다 오늘 일은 오늘까지 끝
내야 한다 졸려 죽을 것 같지만

잠은 죽어서 자야지 어제도 이러다 잠들었던가 눈을 떴을
때 창밖의 공사장은 다시 채워져 있었다 밤새 놓인 커피가
그대로였다 깊고 비좁은 방 안 쌓는 소리 무너뜨리는 소리
구별할 수 없다 먼지가 가득해

내 안은 검다 시커먼 잠이 점점 쏟아져서 어제 마신 커피
를 마신다 오늘은 아무 것도 먹지 않았는데 개미가 늘어난다
방 안에서 아무 것도 죽이지 않았는데 나는 종일 배가 부르다 먼지를 게우기 위해 암막 커튼을 걷는다

밤이 보이지 않는다 방은 검다 바닥이 보이지 않는다 거
기 개미가 날아다닌다 커피를 휘젓듯이 검은 화면을 두드린다  '잘 자'라는 문자가 오지 않는다 내 위로 개미가 쏟아진다

창이 보이지 않는다 창밖은 검다


- 한 재범 시 ‘커피는 검다‘
* [웃긴 게 뭔지 아세요], 창비, 2024.




나의 착하고 불성실한 친구 장은 죽어서도 공방에 간다
실은 별로 안 착하고 꽤 성실한 것 같기도 하다

내가 될 수 없는 사람이 너무 많아
그래서 나무가 된 거야?

죽은 장이 비웃는다
나무가 된 나는 할 말이 없다
나무가 되어서도 여전히 숨을 쉰다
가만히 숨을 쉬다 보면 배가 부르다

빛이 나를 한 차례 지나가고
두 차례 지나가지만 나는 나무다

내 밑으로 내 모양의 그늘이 자란다 바람에 자꾸 머리가 흔들리네 다행히 나는 긍정적인 나무가 되었구나

무수히 많은 빛이 나를 밟고 지나가고
끝없이 자라는 나의 가지 내가
뻗어나갈 때 나는 나를 못 참겠구나

그러나 말할 수는
없는 나무다

적당히 살걸 그랬어 장이 말할 때마다
스산한 바람이 불고 내 머리가 저절로
끄덕인다 죽지 않으려는 마음이
너를 죽인 거구나 빛과 초록과 장이
우거져가던 여름

장이 척척 쌓여
공방을 떠나는 걸 내가 보았다

그럼에도 다시 공방 앞에 와 있는 장은
참 귀여운 친구다

공방은 여전히 분주하고
헌것을 부수고 새것을
만드는 일은 줄지 않고

사람과 사람 아닌 것이 입구를 드나든다
아는 얼굴이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나무는 그토록 익숙한 것 이곳엔 나무인
내가 있고 내가 아닌 나무들이 있고
나무는 어디에나

너무 많고
나는 흔한 풍경




- 한 재범 시 ‘너무 많은 나무‘
  * 신동아 2023년 2월호.






** “나는 흔한 풍경이다” 무수히 부서지고 다시 솟아오르는 가장 젊고 혁명적인 자아의 탄생. 끝없이 분열하는 ‘나’ 사이를 유영하는 고독한 영혼의 하루

2019년 창비신인시인상 최연소 수상자로 당선되어 “우연히 촉발된 감정이나 세계의 뒤틀린 모습에 몰입하여 그것을 과장하지 않고, 자신의 언어로 차분히, 때론 폭발적으로 밀어붙이는 힘”이 강렬하다는 평을 받으며 깊은 인상을 남겼던 한재범 시인의 첫 시집 『웃긴 게 뭔지 아세요』가 창비시선 499번으로 출간되었다. 등단 5년 만에 펴내는 이 시집에서 시인은 ‘나’의 존재의 의미와 자아의 실체를 탐색하는 깊은 사유를 펼쳐 보인다. 시인이 아주 작은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깊숙한 자신만의 내면을 단단히 다져왔음을 증명하는 이 시집은 보기 드문 개성적 화법으로 불확실하고 혼란스러운 세계를 부유하며 고뇌하는 “우리의 자아의 현주소”(이수명, 추천사)를 확인하게 한다. 이 젊은 시인이 세계와 그 속에 놓인 자아를 담는 날카로운 언어를 따라가다보면 끝없이 부서지고 합체되는 ‘나’의 조각들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