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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숲에 들다

시 속의 시인 - ‘김소월'






천변에서 [ 신해욱 ]


당신은 무슨 일로 그리합니까?
홀로이 개여울에 주저앉아서

 - 김소월, 「개여울」


이쪽을 매정히 등지고
검은 머리가 천변에 쪼그려 앉아 있습니다

산발입니다

죽은 생각을 물에 개어
경단을 빚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동그랗고
작고
가자 없는 것들

차갑고
말랑말랑하고
당돌한 것들

나는 기다리고 있습니다

계핏가루 콩가루
빵가루
뇌하수체 가루
알록달록한 고물이 담긴 쟁반을 받쳐 들고 있습니다

-나눠 먹읍시다!

나눠 먹읍시다 메아리도 울리는데

검은 머리는 뒤를 돌아보지 못합니다
검은 머리만 어깨 너머로 흘러내립니다
이크, 몇 오라기가
경단에 섞였는지도 모릅니다

쟁반을 몰래 내려놓고
머리를 땋아주는 일이 먼저일 것 같습니다

검은 머리가 삼손의 백발이 될 때까지
백발마녀가 라푼젤로 환생할 때까지
그다음엔
그다음엔 꼭 나눠 먹읍시다

어제의 네가
오늘을 차지하고 있어서
오늘의 나는
이렇게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 무족영원,문학과지성사, 2019




시 읽어주는 시인 [이선영] '




먼 훗날 당신이 찾으시면
그때에 내 말이, 김소월
새로운 세계 하나를 낳아야 할 줄 깨칠 그때라야
비로소 우주에게 없지 못할 너로 알려 질 것이다 시인아, 이상화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백석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윤동주
오, 삼림은 나의 영혼의 스위트홈, 임화
고운 폐혈관이 찢어진 채로 아아, 정지용
늬는 산새처럼 날어갔구나!
이런 것은 아니었다, 나는 불행하다, 나는 일생 몫의 경험을 다했다, 기형도 진눈깨비
아, 김민부, 육신 밖으로 나가고 싶어 육신 밖으로 나가고 싶어

시대와 세기를 넘나들며 시, 정현종, 부질없는 시를 읽어주고
겨우겨우 일하면서 사는, 원재훈 처연하게 썩어 들어가야 할,
그것이 나의 일

시는 나에게
읽는 달달함이 아니라 쓰는 쓰디씀이었고
읽어 주는 평화보다
쓰는 격전이 좋았노니

입이 마르면서 코끝이 찡해지면서 가슴이 내려앉으면서 시를 읽어주다가

식히고 가셔진 밤이 오면
한낱 무명의 시인과 그 시를 위해 애도한다
언어의 주육에 빠져 시를 읽다가 나는 쓰는 습성을 잊어버렸을까

입안에 감돌지 않는 나의 시와
귓가에 읊어지지 않는 나의 시,
지금은 무명을 앓고 있는 내 시의 야생은 어느 행간에 사로 잡혔나


                 - 60조각의 비가,민음사, 2019




유성우流星雨 [박제영]



1
1929년 스물 아홉의 이장희가 죽었다.
1935년    서른 둘의 김소월이 죽었다.
1937년    스물 일곱의 이상이 죽었다.
1938년    서른 넷의 박용철이 죽었다.
1945년 스물 여덟의 윤동주가 죽었다.
1945년 스물 아홉의 김종한이 죽었다.
1956년        서른의 박인환이 죽었다.
1968년 마흔 일곱의 김수영이 죽었다.
1969년 서른 아홉의 신동엽이 죽었다.
1988년    마흔 둘의 박정만이 죽었다.
1989년 스물 아홉의 기형도가 죽었다.
1991년    마흔 셋의 고정희가 죽었다.
1992년 서른 아홉의 이연주가 죽었다.
1993년    서른 넷의 진이정이 죽었다.
1994년 마흔 여덟의 김남주가 죽었다.
2005년 스물 여섯의 신기섭이 죽었다.

(2006년) 마흔 여덟의 박영근이 죽었다.
(2012년) 마흔 여덟의 김충규가 죽었다.
(2019년) 마흔 아홉의 황병승이 죽었다.
(2020년) 스물 여섯의 김희준이 죽었다.

모두 죽었다.



2
아니다, 단지
사라졌다 저 광할한 우주 속으로

아니다, 영원히
살아있다 저 광활한 우주 속에서, 별이 되고 유성이 되고



3
시인은, 수억 년 죽어서도 빛으로 남을 것이니
지상에 잠시 유배되었던 별이었으니
서른 아홉의 내가 죽는들 어떠하리 마흔의 내가 죽는들 어떠하리

당신 먹먹한 가슴에 서른 아홉개의 유성우로 내릴 수만 있다면
마침내 소멸이라도 좋으리


                   - 소통의 월요시편지  722호




왕십리 [김종삼]



새로 도배한
삼간초옥 한칸 방에 묵고 있었다
시계가 없었다
인력거가 잘 다니지 않았다

하루는
도드라진 전차길 옆으로 챠리 챠플린씨와
나운규씨의 마라돈이 다가오고 있었다
김소월씨도 나와서 구경하고 있었다

며칠뒤
누가 찾아왔다고 했다
나가본즉 앉은 방이 좁은
굴뚝길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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