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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숲에 들다

시 속의 시인 - ‘김수영'

결코,, 꺽이지 않아,













뇌 [서동욱]
―또는 김수영의 마지막 날

대지여, 영예로운 손님을 맞으시라
―오든


1
술 취한 시인은 이번에도 이길 것 같았다
" 너는 왜 이런,
신문 기사만큼도 못한 것을 시라고 쓰고 갔다지? "
인격에 싸가지라고는 조금도 없어서
그는 죽은 이에게도 뒤에서 욕을 한다
아니면 빈말 한마디 하는 데도 수전노 같다
"거짓말이라도 칭찬을 쓸 걸 그랬다"
시인은 이번엔 자기 자신을 이길 것 같았다
자신을 칭찬하고 싶지 않은 나머지 이제,
비틀거리며 차도 위로 내려오는구나
( " 당신한테도 이겨야 하겠다 " )
이 못된 성질

2
심야 버스가 멈춰 서고
계란찜을 만들려고 사기그릇에 탁
껍데기를 치는 충격
같은 것이 머리를 지나갔으며
남극에 떠 있는 얼음처럼 두 눈 뒤에 둥둥 떠 있던 뇌는
이제야 당황하며
자신이 견고한 조직을 자랑하는
얼음 덩어리처럼 차가운 관념이 아니라
뼈도 근육도 없는, 콧물처럼 흐르는
미지근한 지방질임을 깨닫는다
그의 금 간 계란 껍데기가
버스 헤드라이트가 쏟아 내는
맥주 한 잔처럼 길고 노란 빛줄기 속에서
붉은색을 섞어 가며
향유고래의 뱃속에 들어 있던 기름 같은 짙은 액체,
그보다는 세포조직이 좀 복잡한, 오히려 정액에 가까운
비호감의 국물을 질질 흘리기 시작한다

3
아스팔트 바닥에서 미끌거리는
돌이킬 수 없는 요플레
이상하지?
고작 알코올에 녹는 일에만 좋아라 나서던
이 중독된 기름 덩어리도
눈에 예쁜 여자가 들어오고 때로 혁명이 일어나면
멋진 화학반응을 만들어 내지
나는 오입쟁이요, 여편네를 수시로 팼고
미도파백화점에서 장사하는 여자와 바람피웠으며
주제넘게 애들에겐 엄했고
친구도 (사실) 없다 억지로 쓰는 평문은 사심투성이요
번역은 순전히 돈 때문이다
아침엔 보란 듯 구두끈을 묶는데
노모에게 출근하는 시늉을 하기 위해서다
"신문사 일을 보게 되었읍니다......
번역두 하구, 머어 별 것 다아 하지요
내가 못하는 일이 있나요!"
( " 참패의 극치다 " )

4
곱창의 외관을 부조(浮彫)했기에
구불거리는 무름이 잔뜩 낀 이 못생긴 기름 덩어리가,
이상하지?
금지 약물을 복용한 놀라운 높이뛰기 선수처럼
때로 문법의 法을, 그러므로 모든 법을 넘어선다
말은 의미를 위해 봉사하지 않고
쓸모없는 것을 자처하며
말은 그대로 중력의 중심 같은 돌멩이
말은
무의미하고 껄끄러운
빛을 내기 시작한다 뇌가
수백 벌의 스웨터를 통과하듯
돌이킬 수 없이
정전기를 일으키는 그 한때
우주를 지배하는 정치와 대면하는 순간
뇌는 그저
태양계를 지나가는 천상의 욕설이
대기권과 부딪치는 잠깐 동안
욕망과 실패가 구제 불능으로 뒤엉킨 지구의 한 망가진 도시에서
그 소음을 영접하는 이에 불과했으니
시인이
흰 런닝구 하나 입고서
거실에  멍하니 앉아 있는 어느 오후에
삐뚜루 바라보는 그의 눈에선
번쩍거리는 뇌의 정전기가 잠깐잠깐 새어 나오며



* 이 시의 인용 구문은 모두 김수영의 글에서 왔음.


 - 우주전쟁 중에 첫사랑,민음사, 2009








섬망 [육근상]




  난닝구 바람으로 쉬고 계시는 김수영 선생님 찾아뵙고 닭모이라도 한 주먹 집어주고 와야 하고, 막걸리 한 사발로 연명하시는 천상병 선생님 업고 동학사 벚꽃 놀이도 다녀와야 하고, 새벽부터 울고 계시는 박용래 선생님 달래어 강경장 젓맛도 보러가야 하고, 대흥동 두루치기 골목 건축 설계사무소 내신 이상 선생님 개업식도 가봐야 하고, 빽바지에 마도로스파이프 물고 항구 서성이는 박인환 선생님이랑 홍도에도 가봐야 하고, 울음 터뜨린 어린애 삼킨 용당포 수심 재러 들어갔다 아직 나오지 않는 김종삼 선생님 신발도 갔다 드려야 하고, 내 사랑 자야 손 잡고 마가리로 들어가 응앙응앙 소식 없는 백석 선생님께 영어사전도 사다드려야 하고, 선운사 앞 선술집 주모가 부르는 육자배기 가락에 침 흘리고 계시는 서정주 선생님 모시고 대동아전쟁터에도 다녀와야 하는데 봄비는 내 발목 잡고 놓아주지를 않는구나


* 섬망(譫妄) : 의식이 또렷하지 못해 헛소리를 하는 증상


   - 滿開만개,솔, 2016









문학 [손음]




  창고에 비가 새고 책들이 비에 젖었다 오규원 현대시
작법, 이성복 남해금산, 97 신춘문예 당선시집 들이 손
수레로 리어카로 어딘가로 실려 나갔다 이번에는 이번
에는 한때는 한때는, 했던 욕망들이 쓸모없는 냄비처럼
밥그릇처럼 슬퍼져 버렸다 릴케도 이상도 김수영도 박
인환도 지금쯤 동네 고물상에서 만나 악수를 하며 그
시절의 무거움을 나누고 있으리라
     정체된 청춘이었던 어두운 창문이었던 불안이었던
불안이지만 않았던 창고의 시절


"젖은 책들은 책의 몫이 아니었다 자신도 모르게 점
차 무거워졌던 것이다 책등을 타고 거미 한 마리가 기어
나왔다"* 어느 슬픈 문장 위를 기어다니고 있었다

  나는 이제 괜찮다
  나는 이제 괜찮지 않다

창고는 다시 어둡고 창문이 흰 달처럼 걸려 있다 창고
가 온몸에 불을 켜고 어디론가 가고 있다 창고가 움직인
다 한 척의 창고가 어디론가 가려는 걸까


     * 어느 인터넷 블로그에서 읽은 기억이 있음      


- 누가 밤의 머릿결을 빗질하고 있나,걷는사람, 2021









면벽 80-과음 [강세환]




언제 과음 한번 하자!
상계역 골목집에서 술잔만 주고받으면서
김수영이나 김종삼도 꺼내지 말고
시집 어디서 내야 하나
그런 근심도 하지 말고
한국문학 남북 관계 걱정하지 말고
강원도 글 쓰는 후배들도 꺼내지 말고
7080 노래도 부르지 말고
팔십 년대 시인들도 그만하고
벚꽃 피는 시기
벚꽃 지는 얘기도 하지 말고
대선 논평도 하지 말고
그냥 술잔만 주고받으면서
그냥 술잔만 든 채
시가 오더라도 오늘은 좀 조급해하지 말고
스마트폰이 울려도 울게 하고
당고개행 4호선도 지나가게 하고
그냥 과음 한번 하자!
그럼 한잔 더 마시자!


  - 면벽, 천년의시작, 2019








저녁 일곱시 해안선 [권현형]




서러워하는 사람이 있다
군 초소가 있고
어시장이 있다 늙은 이발사가 있다
선의 끝에는 무엇이 있나

객지에서 흘러온 게가 고향을
삐뚜름하게 걷고 있다
해안선 끝까지 가보기로 했다

독문과를 다녔고 잉게보르크 바하만의 시집을
옆구리에 끼고 다녔던 골초 혜임은
오래전의 끝처럼 앉아 선을 자꾸 그었다

자신은 비겁해서 가고 싶은 길을
가지 못한 사람 나는 가고 싶은 길을
갔으므로 비겁한 사람

날마다 물고기들의 관을 짜고 김수영과 이백을 아직
좋아하고 먹고 입고 자는 것을 걱정하고
소주 한잔하는 게 서른 아홉의 일상이라고 했다

해안선의 끝에는 태초의 비린 어스름이 있다
시(詩)는 때로 썩은 가리비처럼 무용하다
지금 서러워하는 사람에게는 금기다


 - 포옹의 방식, 문예중앙, 2013








김수영 문학관 [임동확]




그의 문학관은 일종의 사전이다
애써 펼쳐 보지 않으면 그저 모든 게 모호하다
분분한 해석만 양계들처럼 구구할 뿐이다

그렇다고 모호한 것들이 명확해지는 건 아니다

결코 사전에 갇힐 수 없는 그의 말들은,
언제나 모반을 꿈꾸는 의미를 소환하며 출타 중이다
제각기 다른 설움과 절망을 일으키며 모여들고 있다

그러니까 그의 난해성은 서툰 한국어 구사력이나
그의 방대한 독서력 때문만이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말할 수 없는 것들을 번역하려는 필사적인 노력,
비밀을 비밀로 말할 수밖에 없는 곤혹에서 온다

아무래도 조금 모자라거나 흘러넘치는 자유에 있다
방금 열려 있는가 하면 어느새 닫혀 있고,
들켜 주는가 하면 그만 감추는 데 열성인 김수영 문학관

그는 여전히 거역하라, 거역하라고 소리 없이 절규하며
대한민국에서 그중 가장 힘센 고정관념과 싸우고 있다
어떤 사전에도, 명령에도 갇히지 않는 그의 긍지가
풀과 바람, 첨단과 정지의 경계를 넘나들며 우뚝 서 있다

끝내 미완성으로 남은 그의 사랑의 변주곡이 들려오는 토요일 오후


  - 누군가 간절히 나를 부를 때, 문학수첩, 2017







서울, 또는 잠시 [김이강]




채식주의자처럼
맨발일 때가 좋지

광화문에서 내렸고
서대문까지 걸었다
이렇게 문들 사이로 걸어도
성의 윤곽은 알 수 없는 일
한 언어를 터득하기 위해
사람들이 살다가 죽을까

당신을 위로하고 싶은 마음에
목구멍에 침묵을 걸었는데
그런 건 위로가 아니었을지도 몰라

                 *
모든 것이 순조롭게 끝나는
상한 맛이 나는 영화였다

인사동을 돌아서 천변으로 걸었다
오래전엔 여기 어디쯤에서
술에 취한 김수영이 밤거리를 건넜을까
조금 더 걸어가면
이상이 차렸다던 이상한 다방이 있을 것이다

극장에서부터 우연히 앞서 걷던 여학생 둘이서 열띤 토론을 한다
이 영화는 던져놓은 미끼를 회수하지 않았어. 정말이라니까.
급하게 판을 접었지. 응. 급하게 접었다니까. 제작비가 부족했을까.
그게 스타일일 거야. 아. 그런가. 그렇다니까. 신경증일 수도 있어. 일종의.
아, 그런가.

안녕, 아가씨들
당신들의 치아 사이로
바람이 조율되고 있구나

                     *

퇴근행렬이 길어진다
남산으로 가서 돈가스를 먹어도 좋겠다고 생각한다
언젠가는 이 세상에서
친구의 집을 향해 걸어가는 사람이 멸종해버릴 것이다

내 신발이 엄청나게 자라고 있다
돈가스를 먹지 못했다
자전거도 없는데 내 친구의 집은 너무 멀기 때문에

                                     *
걸었던 길들을 접어서

가방 속에 넣었다
가방을 어깨에 걸었다

걸었던 마음들이 한꺼번에 밀려오는 일
당신의 윤곽이란 이런 것일까
신발이 필요해
당신에겐 정말로 신발이


- 당신 집에서 잘 수 있나요?, 문학동네, 2012








김수영문학관에서의 일일  [김은경]




도피가 필요한 날씨였다

액자 속 시인의 얼굴은 무표정
“은경 씨, 나중에 꼭 김수영문학상 타요”
누군가 진지한 톤으로 농을 했다

길쭉하게 네모난 창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건물 앞 제라늄이 목숨 건 열애처럼 붉어
목이 탔다

커피와 팥빙수
뜨거운 것과 차가운 것
물과 기름이
지상의 냄비에서 한창 끓고 있었다

뜬금없이 비가 내렸다, 여름이니까
여긴 땅 위니까

그 저녁 찾아간
단골 곱창집은 문을 닫았고
순댓국집에서 소주를 부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사주는 밥인 줄도 모르고

이번 생 펼쳐 든 차림표에는
내가 외쳐 부를 이름이 없다는 걸
미처 모르고

챙겨간 우산을 기어이 식당에 두고 왔다

전철을 탔다
부들부들 몸을 떨면서도 울지 않았다
5호선에도 6호선에도
종착역이 있다는 게 다행이다 싶은
밤이었고

슬픔처럼 살며시 여름이 사라졌다*


* 에밀리 디킨슨의 시







유실물 [정재학]




김수영의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풍으로

지갑을 잃어버렸다 고궁과 같은 거창한 곳도 아닌
아무런 음모도 음탕도 없는 도봉산에서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 것일까
하필 돈을 많이 넣은 날 잃어버렸다고
라이트 밀즈처럼 늘 깨어 있어야 한다고 나불대면서도 남들 속에 묻어 있기를 좋아하고
열심히 사는 것과 치열하게 사는 것도 구분 못하고
술집 주인이 술값 더 받는 건 아닌지 의심이나 하고 따지고
술집에서만 소리를 높이고
이라크전 파병도 술집에서만 반대하고
한참 비켜서 있으면서도 그것이 비겁한 것이라는 것조차 모르고

내가 지갑을 잃어버린 날
티베트에서는 많은 사람이 죽었다
그들의 부당한  죽음 대신에
고작 잃어버린 오만원이나 아까워하고
휴지통에 지갑을 버렸을 놈만 증오하고 있는가
먼지야 나는 얼마큼 작으냐
제주 프라하 아르헨띠나 광주 천안문 티베트...
피를 빨아먹고 자라는 봄의 역사는 되풀이되고 있는데

내가 십오년 동안 지갑을 지키면서 잃어버린 것들은 무엇인가
음악을 하겠다는 고등학교 때의 꿈도 잃어버리고
시만 쓸 수 있다면 밥벌이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던 그때의 초심도 잃어버리고
안정된 직장을 그리워하며 하루하루 아등바등 살고
우습지 않으냐, 그동안 지갑은 지켜내면서도
몇 번 찾아온 사랑도 지켜내지 못하고
개새끼, 지갑을 백번 잃어버려도 싼

모래야, 먼지야,
나는 얼마큼 존재하고 있느냐


- 모음들이 쏟아진다,창비, 2014






청계천 금치기 [권자미]




청계천 지나다가 시집을 샀다
백석 이상 칼지브란 김수영 황지우
한 묶음에 3,000원이다

며칠 면도를 잊은 늙수그레한
헌책방 주인 거스름돈 거슬러 주며
이건 종이값도 아녀 했다

책 속에 바짝 마른
냉이 꽃 세 송이 꽂혀있다

헌책에 압화壓化 부록으로 끼울 리도 없고
(종이 값이 아니라면)
詩값 제하고
고요하고 쓸쓸하게 드러난 꽃값
도대체 얼마란 소린가

시인의 말에
꽃 눈물 번져있다






어떤 비오는 날 [김선우]




어떤 비 오는 날
김수영의 방을 생각하는 빈방에서

1
가지고 있던 게 떠났으면
가벼워져야 할 텐데

꿈 없이 사는 일이
아주 무거워

꿈이 떠나서
몸이 무거워

2
세상의 물방울들아 쪼개진 것들아 쪼개져서도 흐르는 덜 자란 혁명의 격렬한 불면증들아 빙하에서 풀려난 물방울이 더러워진 허공의 상주(喪主)가 되는 비애를 생각한다 빈방을 마저 비운 창백한 몸들아 물방울 하나씩에 사금파리처럼 꽂힌 핏물을 보게 된 오늘의 내 시력이 무겁구나 눈 속은 뜨겁고 빈방은 무거우니 오늘의 숙박부에 나는 이렇게 쓰련다

  닥치시오. 나는 다만 물방울만한 방을 원하오.



  - 나의 무한한 혁명에게, 창비, 2012






나는 철철이 세상은 뱅글뱅글 [이선영]




나는 철철이 늙어가고
세상은 뱅글뱅글 젊어지네
낯설고도 새로운 젖살을 불쑥 내미네
지금 어린 내 아이들은 장차 그들보다 어린 새끼를 치겠지
뱅글뱅글 세상은 돌아가겠지
그러나 쇼팽을 듣고 김수영을 읽는 것처럼
세상엔 오래돼도 한사코 지워지지 않는 것들이 있다네
그래서 나는 세상이 마치 그 안에 다 들어 있는 듯 옴짝 않고
사각의 빈 종이를 붙들고 앉아 고적한 손목을 바들거리기도 한다네
펜이여 종이를 타라, 세상을 멈춰라
시여, 물살 센 표주박 안에 살짝 띄우는 한 잎 유유한 버들잎이기를


- 하우부리 쇠똥구리, 서정시학, 2011







우가 울에게 [김혜순]




11월에는 잠이 오지 않았고
11월에는 천장의 별이 모두 켜졌고
11월에는 가슴이 환해 눈을 감을 수 없었고
찬 우물이 머리보다 높아 위태로웠고
우와 울은 주먹 쥐고 푸른 바케쓰 속에 누워 있었네
충치 앓는 피아노처럼 둘이 앙다물고 있었네

우는 구름을 덮고, 울은 그림자를 덮었네
우는 바람에 시달리고, 울은 바다에 매달렸네
우는 살냄새다 하고, 울은 물냄새다 했네
우는 햇빛을 싫어하고, 울은 발이 찼네
우는 먹지 않고, 울은 마시지 않았네
밥을 먹는데도 내가 없고, 물을 마시는데도 내가 없었네
우는 산산이고, 울은 조각이고
우는 풍비이고, 울은 박산이고
내 살갗은 겨우 맞춰놓은 직소퍼즐처럼 금이 갔네
우는 옛날에 하고, 울은 간날에 울었네
우는 비누를 먹고, 울은 빨래가 되었네
나는 젖은 빨래 목도리를 토성처럼 둘렀네
우는 얼음의 혀를 가졌고, 울은 얼음의 눈알을 가졌네
나는 얼음을 져 나르느라 어깨가 아팠네

왼쪽 어깨에 우를 오른쪽 어깨에 울을
물지게 가득 짊어진 여자가 나타났네
티베트 깡통을 돌리는 할머니 염불처럼 천당 지옥
천당 지옥 계속 이진법이더니
우 다음에 울을 한 바케쓰 내 살갗 밑에 부었네 갔네

김수영은 김수영영영이고
김춘수는 김춘수수수이고
김종삼은 김종삼삼삼이고
왼발 다음엔 오른발
0 다음엔 1, 2 다음엔 3이고
우 다음엔 울이라고
세상에 가득 찬 수학이 출몰하는 밤
존경하는 시인님들은 아직 죽음의 탯줄에 매달려 계시고

콜리가 멜랑에게
12월이 11월에게

우는 빗줄기를 빗질하고, 울은 빗줄기를 써레질하고
우는 하얀색 운동화를 왼쪽에 신고
울은 하얀색 운동화를 오른쪽에 신고
나는 발잔등에 줄 끊어진 흰새를 두 마리 덮고

그렇게 오도 가도 못했네


 - 슬픈치약 거울크림, 문학과지성사, 2011








물 끓이기 [정양]




한밤중에 배가 고파서
국수나 삶으려고 물을 끓인다
끓어오를 일 너무 많아서
끓어오르는 놈만 미친 놈 되는 세상에
열받은 냄비 속 맹물은
끓어도 끓어도 넘치지 않는다

血食(혈식)을 일삼는 작고 천한 모기가
호랑이보다 구렁이보다
더 기가 막히고 열받게 한다던 다산 선생
오물수거비 받으러 오는 말단에게
신경질부리며 부끄럽던 김수영 시인
그들이 남기고 간 세상은 아직도
끓어오르는 놈만 미쳐 보인다
열받는 사람만 쑥스럽다

흙탕물 튀기고 간 택시 때문에
문을 쾅쾅 여닫는 아내 때문에
'솔'을 팔지 않는 담뱃가게 때문에
모기나 미친개나 호랑이 때문에 저렇게
부글부글 끓어오를 수 있다면
끓어올라 넘치더라도 부끄럽지도
쑥스럽지도 않은 세상이라면
그런 세상은 참 얼마나 아름다우랴

배고픈 한밤중을 한참이나 잊어버리고
호랑이든 구렁이든 미친개든 말단이든
끝까지 끓어올라 당당하게
맘 놓고 넘치고 싶은 물이 끓는다


- 살아 있는 것들의 무게, 창비, 1997





** 김수영( 金洙暎 )
출생 - 사망 1921. 11. 27. ~ 1968년
출생지 국내 서울특별시
데뷔 1945. 예술부락에 시 「묘정(廟庭)의 노래」를 발표

-학력사항
효제보통학교
선린상업고등학교
1941년 ~ 일본 도쿄대학교 상과대학 - 전문부
연희대학교 - 영어영문학(중퇴)

-경력사항
제육고등학교 교사
미8군 통역
선린상업고등학교 영어교사
주간 태평양 근무
평화신문 근무

-수상내역
1958년 제1회 시협상

-작품목록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

폭포
달나라의 장난
푸른 하늘을
사랑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
현대식 교량

거대한 뿌리
시여 침을 뱉어라
퓨리턴의 초상
주머니 속의 시
달의 행로를 밟을지라도
김수영 전집 1
김수영 전집 2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사랑의 변주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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