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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숲에 들다

반성.(2022)

반성의… 미(美).






깊이깊이 후회해
너를 사랑했던 것
너를 친구라고 생각했던 것
너에게 내 시를 보여주었던 것
너랑 영화관에 갔던 것
너에게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사주었던 것
네 품에서 알몸이 되었던 것
아무렇게나 던져진 텅 빈 우주에 너를 초대했던 것
너와 함께 비엔나의 숲속에서 치즈버거를 먹었던 것
너에게 가장 친한 내 친구를 소개했던 것
너 때문에 비 내리는 센강에서 울었던 것
너 때문에 불같이 타오르는 꽃잎 하나가 내게로 떨어졌던 것
너의 모든 말이 거짓인 줄 알면서도 환하게 웃었던 것
네가 한 모든 약속을 모래로 가득 채워 흘러버렸던 것
너를 떠나보내기 위해 나보코프를 읽으며 모나코 나비를 찾아 헤맸던 것
그러고도 네 꿈을 자주 꾸었던 것
그러고도 너와 함께 잘 먹던 꼬투리 완두콩을 아직도 좋아하는 것
그러고도 이런 시를 쓰고 있는 나
그 모든 것을 후회해
깊이깊이 후회해

- 김 상미 시 ‘반성’
[갈수록 자연이 되어가는 여자],문학동네, 2022.



반성 [김기형]


작은 새를 안아요
내 눈으로 들어오는 새를 안아요
조용히 나뭇가지 같은 발로 걸어가,
잠든 곳을 찾는
가장 어린 새

불빛을 따라서 부리를 찧는
어린 새가 감춘 동그란 뼈
어디를 찌르면 이곳을 중심이라고
말할 수 있나요
날개는 가만히 몸 옆에 두고

작은 것을 안아요
오래 안고 있으면 녹아서
피를 타고 돌아갈까요

거기 어디서 가만히 고개를 수그린 새가
나왔던 알보다 더 작게
몸을 접어 머무나요

나는 갑자기 툭하고 한마디
작은 것들의 목소리를 대신해서
부서질 몸통도 없는 것들을 대신해서
적막에 가까운 말

그 말은  밤을 새우며
천천히 천천히 한 점으로 남는
작은 모래알이 됩니다

이것 보세요
들리지 않는 소리를 내가 들었어요


[저녁은 넓고 조용해 왜 노래를 부르지 않니], 문학동네, 2021.





반성 21 [김영승]


친구들이 나한테 모두 한마디씩 했다. 너는 이제 폐인이라고
규영이가 말했다. 너는 바보가 되었다고
준행이가 말했다. 네 얘기를 누가 믿을 수
있느냐고 현이가 말했다. 넌 다시
할 수 있다고 승기가 말했다.
모두들 한 일 년 술을 끊으면 혹시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술 먹자,
눈 온다, 삼용이가 말했다.

[반성], 민음사, 1987.




다시 반성하며 [김사이]


며칠째 폭설이 멈추지 않는 날
얼어붙은 옥탑방에서 내려와
오랜만에 몸을 담그자 후근해지며 땀이 난다
찰랑거리는 물속으로 묵은 때가 층층이 쌓이는데
수북한 지우개똥
늘어가는 여자의 몸은 생각만큼 아름답지 않지만
온몸이 얼룩덜룩해도 향기 있게 늙어갈 수는 없을까
푸석거리고 늘어진 몸
지나간 그리움도 불안한 내일도 버텨야 할 몸
키득거리다가 쓰윽 훑어보다가
문득 언제든 죽겠으나
멧돼지가 먹을 것을 찾아 자꾸 농작물을 덮치는데
가축들이 병 걸렸다고 산 채로 매장당하는데
더불어 살자는 말이 세치 혀에서 놀아나
너에게로 가는 길을 찾지 못한다
자연에 이르는 자연스러운 죽음이 있을까
한밤중에 나는 살고 싶어 회개하듯 몸을 빡빡 씻는다
더불어 살자를 죽이면서 너도 죽이면서 숨을 쉰다
차갑게 식어가는 물이 붉게 물든다
온몸 벌게지도록 치열함은 없고 신파만 밀려나와
늙어가는 감각과 낡아가는 몸뚱이를 끌고
살아야 하는 시간이
무구한 원혼들 위에 있다
사람으로 태어났으나 사람으로 살아가는 일이 비극일 줄은
그래서 더 사람으로 죽어야겠는


[나는 아무것도 안하고 있다고 한다], 창비, 2018.




반성108 [김영승]


나는 또 왜 이럴까
나는 또 어릴 적에 텔레비전에서 본 만화영화를 생각한다.
벰, 베라, 베로 그 요괴인간을 생각한다.
빨리 사람이 되고 싶다.
그렇게 외친 그 주제가를 생각한다.
정의를 위해서 싸움을 한 그 흉칙한 얼굴들을 생각한다.
하필이면 왜 정의를 위해 싸웠을까
하필이면 왜 사람이 되고 싶었을까.
빨리 요괴인간이 되고 싶다 아무래도
그렇게 외치고 있는 것 같은
저 예절 바른 사람들을 생각한다.

                     - 반성, 민음사, 2012




습관성 반성 [이은봉]


  오늘 아침도 참 죄 많이 지었다 술 탓이야, 하고 중얼거린다 중얼거려도 마음속으로 크는 죄의 나무는, 잘 자란다 거름 주지 않아도 순식간에 풀덤불 무성하다 숲 속의 나뭇가지마다 튀어오르는 잔나비떼들, 그것들 끽끽끽 우는 소리들……

   정신 바짝 차리고, 단번에 죄의 나무들
   금도끼로 찍어낸다 찍어내도
   순식간에 곁가지를 뻗는 죄의 나무들
   죄의 숲 속에선 언제나 진한 정액 냄새가 난다

  어지럽다 지난 밤에도, 남의 살 한점 젓가락으로 꼭, 찍어 먹었다 술 탓이야, 하고 중얼거린다 물 주지 않아도 옥수수 수염처럼 잘 자라는 죄의 나무들, 너무도 지저분하다 우둘우둘 옥수수 알들…… 또 잠시 옥수수밭 갈아엎는다 습관적으로.

[내 몸에는 달이 살고 있다], 창작과비평사, 2002.




반성 [류근]


하늘이 함부로 죽지 않는 것은
아직 다 자라지 않은 별들이
제 품 안에 꽃피고 있기 때문이다
죽음조차 제 품 안에서 평화롭기 때문이다
보아라, 하늘조차 제가 낳은 것들을 위해
늙은 목숨 끊지 못하고 고달픈 생애를 이어간다
하늘에게 배우자
하늘이라고 왜 아프고 서러운 일 없겠느냐
어찌 절망의 문턱이 없겠느냐
그래도 끝까지 살아보자고
살아보자고 몸을 일으키는
저 굳센 하늘아래 별이 살고 사람이 산다


[상처적 체질], 문학과지성사, 2010.




반성하다 그만 둔 날 [김사이]



처음 만난 사람들 속에서 술을 마신다
말을 새로 배우듯 조금씩 취해가며
자본가와 노동자를 얘기하다가
비정규직 부당해고에 분개하다가
여성해방과 성매매를 말하며 반짝이는 눈동자들 틈에
입으로만 달고 다닌 것 같은 시가 길을 헤매며
주섬주섬 안주만 챙긴다

엉거주춤 따라간 나이트클럽에 취해 돌아보니
얼큰히 달아오른 얼굴들이 흐물거리고
춤을 추는 무대 위엔 노동자도 자본가도 없다
신나게 흔들어대는 사람들만 있다.
찝쩍대고 쌈박질하고 홀로 비틀대는,
아주 빠르게 회전하는 형형색색의 불빛들 아래
조금씩 젖어가며 너나없이 한 덩어리가 되어 출렁거린다
낯선 이국땅에서 총 맞아 죽고 굶어 죽어도
매일 밤 일탈의 유혹처럼 찾아드는
이 자본의 꿀맛

도처에 흔들리는 일상들
등급을 매기지 않기로 했다


[반성하다가 그만둔 날]. 실천문학사, 2008.





새에 대한 반성문 [복효근]



춥고 쓸쓸함이 몽당빗자루 같은 날
운암댐 소롯길에 서서
날개소리 가득히 내리는 청둥오리떼 본다
혼자 보기는 아슴찬히 미안하여
그리운 그리운 이 그리며 본다
우리가 춥다고 버리고 싶은 세상에
내가 침 뱉고 오줌 내갈긴
그것도 살얼음 깔려드는 수면 위에
머언 먼 순은의 눈나라에서나 배웠음직한 몸짓이랑
카랑카랑 별빛 속에서 익혔음직한 목소리들을 풀어놓는
별, 별, 새, 새, 들, 들, 본다
물 속에 살며 물에 젖지 않는
얼음과 더불어 살며 얼지 않는 저 어린 날개들이
건너왔을 바다와 눈보라를 생각하며
비상을 위해 뼈 속까지 비워둔 고행과
한 점 기름기마저 깃털로 바꾼 새들의 가난을 생각하는데
물가의 진창에도 푹푹 빠지는
아, 나는 얼마나 무거운 것이냐
내 관절통은 또 얼마나 호사스러운 것이냐
그리운 이여,
네 가슴에 못 박혀 삭고 싶은 속된 내 그리움은 또 얼마나 얕은 것이냐
한 무리의 새떼는 또
초승달에 결승문자 몇 개 그리며 가뭇없는
더 먼 길 떠난다 이 밤사
나는 옷을 더 벗어야겠구나
저 운암의 겨울새들의 행로
를 보아버린 죄로
이 밤으로 돌아가
더 추워야겠다 나는
한껏 가난해져야겠다

          - 새에 대한 반성문, 시와시학사, 2000




반성72[김영승]




나는 대변을 보는 게 아니라
밀어내기 하는 것 같다.
만루 때의 훠볼처럼
밀어내는 것 같다.
죽기는 싫어서 억지로 밥을 먹고
먹으면 먹자마자
조금 있으면 곧 대변이 나온다.
안 먹으면 안 나온다.
입학도 졸업도 결혼도 출산도
히히 밀어내는 것 같다
먹고 배설해 버리는 것 같다.
사랑도 이별도
죽음도.

          - 반성, 민음사, 2012




반성 16 [김영승]




술에 취하여
나는 수첩에다가 뭐라고 써 놓았다.
술이 깨니까
나는 그 글씨를 알아볼 수가 없었다.
세 병쯤 소주를 마시니까
다시는 술 마시지 말자
고 써 있는 그 글씨가 보였다.

              - 반성, 민음사, 2012



** 사람 수 많큼, 시인의 수 만큼,, 반성은 다양하고 아름답다. 2023년 새해에는 반성의 ’가짓수‘를 줄일 수 있기를 바라며… 불행 했으면 행복 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