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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숲에 들다

*화양연화(花樣年華).., 덧 붙여.

이미지만,, 남아있다.



화양연화 2
이미산


그 여름, 그 가로등,
내가 불빛 아래 서성일 때 너는 어둠 쪽에 서 있었다
내가 다가간 만큼 꼭 그만큼 너는 물러났다 그러니까,
전등갓 속의 불빛이 바닥 쪽으로 곤두박질치는 거리와 그 빛에 의해 드리워진 공간,
우리의 허락된 영토는 꼭 그만큼이었을까

빛과 어둠,
경계는 완강했다
한 걸음만 내디뎌도 천 길 낭떠러지,
가장자리에 마주선 그림자 적시며 더듬이를 키웠다
새벽이면 지워질 관계로 기꺼이 한 방향을 보았다

무엇을 보았을까

어둠을 삼킬수록 더듬이는 환하다
그가 들숨을 쉬면 나는 그의 구석구석을 더듬는다
그의 모퉁이에 서있는 내 그림자를 만난다, 다시 나의 들숨에 차곡차곡 그가 새겨지고
먼 거리에서 환하게 피어나는 우리의 그림자 꽃들

끝끝내 살아남을 슬픔을 위해
우리는 일부러 소나기를 맞고 급속히 늙어갔다

그 여름을 기억하는 가로등,
그 방향 그대로 오늘도 웅웅거린다
낮과 밤이 인사 없이 어깨를 스친다
빛과 어둠이 타인처럼 흘러간다




화양연화(花樣年華)*
기세은


언제부턴가
사내가 쫒아 다녔다
어디서나 보였다
간혹 새벽에
옆에 누워있는 사내를 보고 기겁했다
언제나 표정이 없었다
한 번도 대화를 나눈 적이 없었다
그의 존재가 익숙해졌다
먼저 말을 건넸다
그 후 사내가 보이지 않았다
목이 쉬어라 불러댔다
대답은 없었다
여기저기 찾아 다녔다
그의 존재가 의심스러워졌다
다른 여자를 쫓아다는 사내를 발견했다
나는 사내를 쫓아다녔다
어떤 표정도 읽어 낼 수 있었다
다정한 말을 건네며
늘 행복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사내는 간혹 그런 날 보며
신기해했다



*왕가위 감독의 영화제목






화양연화(花樣年華)
김나영



남편은 가끔 반편이 된다
술내 쉰내 프어 프어 풍겨가며
난발에 눈곱 낀 채 내 발을 주무른다
발가락과 발가락 사이 꼬린내까지 놓치지 않고 주무르다가
킬킬킬 세상에 나만큼 얼빠진 놈도 없을 걸,킥킥
이만큼 나사 빠진 놈도 없을 걸 클클클
남편의 손바닥과 내 발바닥이
바닥과 바닥이
손이 발이 되어 만나서
나도 반편이 되어 만나서
저릿저릿 피가 도는
팔 푼의 아침.



화양연화(花樣年華) [김사인]


모든 좋은 날들은 흘러가는 것 잃어버린 주홍 머리핀처
럼 물러서는 저녁 바다처럼. 좋은 날들은 손가락 사이로 모
래알처럼 새나가지 덧없다는 말처럼 덧없이, 속절없다는
말처럼이나 속절없이. 수염은 희끗해지고 짓궂은 시간은
눈가에 내려앉아 잡아당기지. 어느덧 모든 유리창엔 먼지
가 앉지 흐릿해지지. 어디서 끈을 놓친 것일까. 아무도 우리
를 맞당겨주지 않지 어느날부터. 누구도 빛나는 눈으로 바
라봐주지 않지. 눈멀고 귀먹은 시간이 곧 오리니 겨울숲 더는 아무
것도 애닯지 않은 시간이 다가오리니 잘 가렴 눈물겨운 날들아.
작은 우산 속 어깨를 겯고 꽃장화 탕탕 물장난 치며
슬픔 없는 나라로 너희는 가서
철모르는 오누인 듯 살아가거라.
아무도 모르게 살아가거라.







화양(花樣) [성선경]


아름다운 영화 화양연화(花樣年華)를 정일근 시인은 화냥년
아, 라고 읽었다. 저, 아름다운 봄날이 화냥이라니? 그렇다.
나는 웃었다.

아, 아름다운 화양이여, 우리는 언제 저렇게 아름다운 화
양에 가닿나? 화양연화, 화양연화 노래하면 화냥년아, 화
냥년아 그렇게 들리지만, 이 좋은 봄날이 화양이면 어떻고
화냥이면 어떠랴.

무지개는 늘 가닿을 수 없는 곳에서 피고, 무릉도원은 늘
남모를 곳에 있다네. 가야 할 길을 버리고 가지 못할 길을
가는 사람아. 우리 웃자.

화양연화, 화양연화 노래하면 화냥년아, 화냥년아 그렇
게도 들리지만, 화양연화, 내 인생에 그렇게 아름다운 날
이 있었던가? 저기 내가 꾼 봄꿈 같을 화냥년아, 화냥년아,







화양 [박지영]








그 화양이 이 화양인가

서너 살 많은 고모는
느그 엄마 화양 장터에 있다며 놀렸다
정말 엄마가 거기 있기나 한 듯
울다 울다 지쳐 잠들면
한 없이 낯선 골목 헤매는 꿈꿨다
그런 날은 꿈도 몹시 고단했는지
이불에 오줌 지리고
엄마의 매운 눈초리에 바가지 들고
키 쓰고 대문 밖에 쪼그리고 앉아
남쪽 어딘가에 있다는 화양을 떠올렸다
혼자 몰래 빨아먹는 박하사탕처럼
화하고 달콤했던 화양

가창 지나 이서 지나다 본 화양
엄마 몰래 알사탕 훔쳐 먹다 들킨 것처럼
목메고 화들짝 브레이크에 발이 가던
엄마가 거기 있기나 한 듯
자꾸 뒤돌아보게 하던 화양









화양연화 [이선영]







가장 불행한 얼굴로
지금이 가장 행복한 때이노라고
리첸 부인은 말했다

"정말 많이 보고 싶지만, 먼 후일을 기약하기로 해요"
편지를 써야만 했던 날

살아갈 날보다
살아온 날들이 더 많고
게임은 거의 끝나가는데
남은 판은 더욱 절박한

사십세

행복은
불행이라는 돌틈에 숨은 작은 샘구멍
불행은
행복의 부서지기 쉬운 살을 감싼 갑각

알겠구나,
평생이
이 뗄 수 없는 연인들과의
부질없는 삼각관계임을!

불행의 적요한 한낮을
화(花)-아-양(樣)-연(年)-ㄴ-화(華) 라디오에서 노랫소리가 흘러나올 때

불행은 자기가 빠져나갈 틈을 알고 있다








화양연화(花樣年華)[이병률]







줄자와 연필이 놓여 있는 거리
그 거리에 바람이 오면 경계가 서고
묵직한 잡지 귀퉁이와 주전자 뚜껑 사이
그 사이에 먼지가 앉으면 소식이 되는데
뭐 하러 집기를 다 들어내고 마음을 닫는가 전파사와 미장원을 나누는 붉은 벽
그 새로 담쟁이 넝쿨이 오르면 알몸의 고양이가 울고
디스켓과 리모컨의 한 자 안 되는
그 길에 선을 그으면 아이들이 뛰어노는데
뭣 때문에 빛도 들어오지 않는 마음에다
돌을 져 나르는가 빈집과 새로 이사한 집 가운데 난 길
그 길목에 눈을 뿌리면 발자국이 사라지고
전봇대와 옥탑방 나란한 키를 따라
비행기가 날면 새들이 내려와 둥지를 돌보건만
무엇 하러 일 나갔다 일찌감치 되돌아와
어둔 방 불도 켜지 않고
퉁퉁 눈이 붓도록 울어쌌는가









장만옥 [박정대]









멀리 가는 길 위에 네가 있다
바람 불어 창문들 우연의 음악을 연주하는 그 골목길에
꽃잎 진 복숭아나무 푸른 잎처럼 너는 있다
어느 날은 잠에서 깨어나 오래도록 네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사랑은 나뭇잎에 적은 글처럼 바람 속에 오고 가는 것
때로 생의 서랍 속에 켜켜이 묻혀 있다가
구랍의 달처럼 참 많은 기억을 데불고 떠오르기도 하는 것
멀리 가려다 쉬고 싶은 길 위에 문득 너는 있다
꽃잎 진 복숭아나무들이 긴 목책을 이루어
푸른 잎들이 오래도록 너를 읽고 있는 곳에
꽃잎 진 내 청춘의 감옥,









장만옥이라는 이름에 대하여 [천수호]








화양연화 속의 그녀
남자들은 잘록한 허리에 빠지지만
나는 '장만옥'이라는 이름에 홀린다

'장'이 품은 장도의 비장함과
'만'에 묻은 중국식 야끼만두 냄새
'옥'이라는 한국식 촌스러움에 대해 생각한다

내가 그녀의 이름에 혹하는 건
그 적절한 '만'과 '옥'의 이미지에 있다

가령 '옥'이 강화된 '옥분'이나 '옥순'이가이거나
'옥'의 이미지가 뻗어나간 '순옥'이나 '분옥'이가 아닌

단단한 차이나식 칼라의 '만'에 대해
그 滿 수위를 눈앞에 찰랑거리게 하는

화양연화 속의 그녀 뒷모습
오래 훔쳐보는 것은
장만옥이라는 그 적절한 결함에 있다









비 온 뒤 [이성복]








1

누가 먹다 버린 복숭아 속살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구둣발 갖다 대니 금세 기울어졌다
비 온 뒤 아카시아 군락
우듬지 아래 희고 붉은 버섯,
머리 하나 간신히 지탱하고 있던 줄기가
힘없이 부러지고 만 것이다
하필이면 물기 많은 복숭아 속살을 닮아
내 구둣발은 너를 건드렸으니,
언젠가 花樣年華화양연화의 장만옥을 닮은 사람
오늘 젖은 아카시아 나무 아래 또 너를 만났구나



2

일 년 가고 이 년이 가고
십 년도 더 지난 어느 날
그녀에게선 전화가 오지 않는다
지금 그들 사이의 시간은
섬세한 신경망처럼 이어져 있고,
보이지 않는 양 끝에는
꺼먼 핏자국이 말라붙어 있다
이제 그는 두부를 건져낸
양철통의 멀건 국물처럼
그녀를 기억해야 한다
오는 봄에도 바람은
갓 피어난 보리 모종처럼
유순할 테지만, 장작개비
빠져나간 휑한 부엌처럼
한여름을 견뎌야 한다
비 온 다음 날의 하늘처럼
그녀에게선 전화가 오지 않는다

복숭아나무 그 긴 목책 속에





* 화양연화(花樣年華) :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시간


** 누구나 화양연화(花樣年華)의 시절이 존재한다. 사람은 추억을 떠나서 살 수 있을까? 그 ‘환하던 세상‘ 그녀의 미소와 비에 젓은 레인코트,, 우산 속에서 나누던 첫키스.., 뚜렷한 형체도 떠오르지 않지만, 마음은 기억한다. 그녀의 젓은 눈가에 맺힌 눈물, 아련하게 아리던 가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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