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루나무 [최갑수]
나를 키운 건
다름 아닌 기다림이었습니다
나의 안부를 궁금해하지 마세요
당신이 떠나가던 길
나는 당신의 아름다운 배경이 되어
흔들려주었으니
당신이 떠나간 후
일말의 바람만으로도 나는
온몸을 당신쪽으로 기울여주었으니
그러면 된 것이지요, 그러니 부디
나의 안부를
궁금해하지 마세요
내 기다림은 그렇게
언제나 위태롭기만 한 것이었습니다
- 단 한 번의 사랑, 문학동네, 2021
욜랑거리다 [최서림]
말에 붙잡혀 사는 자,
꽃들에게 나무들에게 새 이름을 붙여주고 있다
그에게도 미루나무 담록색 이파리 같은 시절이 있었다
내일은 언제나 새로운 기차처럼 다가왔다
라스콜리니코프처럼
말에 붙들려 들떠 있는 자,
언제나 낡은 정거장에 홀로 중얼거리며 서 있는 기분이다
이 기차를 놓치면 다음 기차가 오겠지 그러나
내일은 더 이상 이름 그대로의 햇것이 아닌
꼬질꼬질 때 묻은 것, 이미 구겨진 것
말을 부리려다 말에 부림을 당하는 자,
기껏 사물에다 때 낀 이름이나 붙여주고 있다
붙여주는 것이 아니라 새삼 확인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울증 환자처럼 도박꾼처럼 늘 정거장에 멍하니 서 있어야 하는 것
구겨진 이름이나마 붙이며 존재이유를 찾아내야 하는 것
때로는 구겨진 말이 칙칙한 나뭇잎 속으로
욜랑욜랑 파고들기도 한다는 것
- 버들치, 문학동네, 2014
미류를 부를 때 [박신규]
모든 것은 너의 입술에서 흘러나와
흘러가는 두 음절에서 시작되었네
숯의 무늬로 잠든 겨울나무에 입술을 대고
미류―하고 나지막이 몸속 현(絃)을 퉁길 때
새싹 불씨 번져서 걷잡을 수 없는 선율로 타올랐네
겨우내 벌거벗은 은신처는 비로소 무성하게 묻히고
얼어붙은 공중의 길은 다시 둥지로 흘렀네
새소리 넘쳐내려 여름의심장을 적시고
너의 입술이 둥그랗게 다시 미류―라고 연주할 때
온몸으로 활활 나무는 흘렀네 밤하늘 너머 강변까지
은하의 수원지, 미류에선
무엇이든 시작하지 않고는 죽는게 나아서
나무의 불길에 방을 들였네
재가 될때까지라고 무작정하고
더없이 뜨거워졌네 우리는
물속과 불속을 뛰어다니고 울고 할퀴었네
허기를 지나 코피가 터질 때까지
알몸으로 노래하기를 하염없이 반복하다가
하염이 없다가 문득 죽을 만큼 지루해졌는데
그때는 참으로 무섭고 서늘했네
미류강에 쏟아붓고 떠내려보내도
짧은 청춘이 겁처럼 머나멀기만 했네
끝내는 죽는 게 나을 만큼 까마득했는가
어느날 네가 우두커니 창밖을 향해
저것은 미류가 아니라 미루. 라며
악기를 부수고 호흡을 버리는 순간
캄캄하게 창이 깨지고 은하수는 꺼지네
흐르던 나무는 흐느끼네
불 위로 부패한 음들이 둥둥 떠오르고
나는 목이 메어 울음도 없네
잦아드는 불길에 너를 뿌리면
목을 매단 음악이 가루로 흩어지네
이 또한 너의 입술에서 비롯되었으나
흐르는 흐르고 있는 것은
미루가 아니라네 잿더미에 버려져도
미류, 미류―라네
- 그늘진 말들에 꽃이 핀다, 창비, 2017
흑백사진 [정일근]
내 유년의 7월에는 냇가 잘 자란 미루나무 한 그루 솟아오르고 또 그 위 파란 하늘에 뭉게구름 내려와 어린 눈동자 속 터져나갈 듯 가득차고 찬물들은 반짝이는 햇살 수면에 담아 쉼없이 흘러갔다. 냇물아 흘러흘러 어디로 가니, 착한 노래들도 물고기들과 함께 큰 강으로 헤엄쳐가버리면 과수원을 지나온 달콤한 바람은 미루나무 손들을 흔들어 차르르차르르 내 겨드랑이에도 간지러운 새잎이 돋고 물아래까지 헤엄쳐가 누워 바라보는 하늘 위로 삐뚤삐뚤 헤엄쳐 달아나던 미루나무 한 그루. 달아나지 마 달아나지 마 미루나무야, 귀에 들어간 물을 뽑으려 햇살에 데워진 둥근 돌을 골라 귀에 가져다대면 허기보다 먼저 온몸으로 퍼져오던 따뜻한 오수, 점점 무거워져오는 눈꺼풀 위로 멀리 누나가 다니는 분교의 풍금소리 쌓이고 미루나무 그늘 아래에서 7월은 더위를 잊은 채 깜박 잠이 들었다.
- 그리운 곳으로 돌아보라, 푸른숲,1994
만행 [김수우]
우산을 버스에 두고 왔습니다 우산은 저혼자 길 떠났습니다 비에 젖지 않아야 할, 한 사람이 있나 봅니다 다박솔 닮은 이를 만나 함께 가는 길, 빗소리 푸를 겝니다 아마 그인 내가 잘 알던 사람이 분명합니다 대신 찾아가는 우산은 오늘 꼭 내가 갚아야 할 빚이거나 받았다 돌려주지 못한 사랑일 겁니다
혼잣길 가는 우산처럼 나도 혼자 덜컹거립니다 갑천에 떠오른 한 마리 청자라처럼, 달동네 변소 옆에 핀 산수유처럼, 미루나무로 만들어졌다는 성냥개비처럼 누군가에게 잠시 반갑고, 환한 소식이고 싶습니다 머물러 그곳 옹이가 되어도 상관없겠고 다시 길 떠나 낡은 우산 하나 만날 수 있어도 고맙겠습니다
- 붉은 사하라, 애지, 2005
종이컵에 대한 기억 [송종규]
왔다가 사라진 손 다시 돌아올 것만 같은 손
영원히 오지 않을 손 적나라한 손
이렇게 따뜻한 손 이렇게 정직한 손
우주 밖으로 사라진 손 한 치의 적의도 없는 손
너는 안개처럼 다녀갔다
네 푸른 등 뒤로 나는 손을 흔들었지만 너는
아마 보지 못했을 것이다 네가 가고 나서 나는 흐느껴 울었지만
너는 아마 듣지 못했을 것이다
낡은 공중전화 앞에서 수북한 미루나무 그늘 아래에서
구체적인 손 기막힌 손
이렇게 신파적인 손 이렇게 도도한 손
내 손바닥 안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 손 이제는 가고
영원히 없는 손
너를 기다리는 것은
저녁의 악기가 탄성을 지르는 일
너를 기다린다는 것은 슬픔을 어깨에 떠메고 가는 일, 그러나
나는 너를 보내지 않았고 한순간
썰물 같은 세월이 흘러갔을 뿐이다
반짝이는 손 슬픈 손 사파이어 같은 손
늘 목마른 손
내 손바닥 안에는 너라는 우물이 살고 있다
- 문예바다 16' 봄호
늦가을 [송수권]
늦가을엔 떠도는 이 나라의
시인들 너무 많다.
천 이랑 만 이랑
술빛으로 익어가는 저녁 바다
누에머리 흔들흔들 李白이백과 함께
채석강에 내려와
참 가당찮은 세월
海印해인이란 말뜻을 아느냐고
머릿도장을 찍더니
오늘은 來蘇寺내소사에 들러
우두커니 혼자 저무는 돌장승이 민망했던지
죄 없는 머리통을 쥐어박으며
여기 손도장 하나 찍고 간다고
호들갑을 떤다.
오백 년 묵은 키 큰 미루나무 잎새들
`쟤가 왜 저러나'
덩달아 웃다가
와르르르 무너진다.
- 20002년 소월시문학상 작품집, 문학사상사, 2001
서시(序詩) [이성복]
간이 식당에서 저녁을 사 먹었습니다
늦고 헐한 저녁이 옵니다
낯선 바람이 부는 거리는 미끄럽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여, 당신이 맞은편 골목에서
문득 나를 알아볼 때까지
나는 정처 없습니다
당신이 문득 나를 알아볼 때까지
나는 정처 없습니다
사방에서 새소리 번쩍이며 흘러내리고
어두워가며 몸 뒤트는 풀밭,
당신을 부르는 내 목소리
키 큰 미루나무 사이로 잎잎이 춤춥니다
- 남해 금산, 문학과지성사, 1986
담장을 허물다 [공광규]
고향에 돌아와 오래된 담장을 허물었다
기울어진 담을 무너뜨리고 삐걱거리는 대문을 떼어냈다
담장 없는 집이 되었다
눈이 시원해졌다
우선 텃밭 육백평이 정원으로 들어오고
텃밭 아래 사는 백살 된 느티나무가 아래 둥치째 들어왔다
느티나무가 그늘 수십평과 까치집 세채를 가지고 들어왔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벌레와 새 소리가 들어오고
잎사귀들이 사귀는 소리가 어머니 무릎 위에서 듣던 마른 귀지 소리를 내며 들어왔다
하루 낮에는 노루가
이틀 저녁엔 연이어 멧돼지가 마당을 가로질러 갔다
겨울에는 토끼가 먹이를 구하러 내려와 방콩 같은 똥을 싸고 갈 것이다
풍년초 꽃이 하얗게 덮인 언덕의 과수원과 연못도 들어왔는데
연못에 담긴 연꽃과 구름과 해와 별들이 내 소유라는 생각에 뿌듯하였다
미루나무 수십그루가 줄지어 서 있는 금강으로 흘러가는 냇물과
냇물이 좌우로 거느린 논 수십만마지기와
들판을 가로지르는 외산면 무량사로 가는 국도와
국도를 기어다니는 하루 수백대의 자동차가 들어왔다
사방 푸른빛이 흘러내리는 월산과 청태산까지 나의 소유가 되었다
마루에 올라서면 보령 땅에서 솟아오른 오서산 봉우리가 가물가물 보이는데
나중에 보령의 영주와 막걸리 마시며 소유권을 다투어볼 참이다
오서산을 내놓기 싫으면 딸이라도 내놓으라고 협박할 생각이다
그것도 안 들어주면 하늘에 울타리를 쳐서
보령 쪽으로 흘러가는 구름과 해와 달과 별과 은하수를 멈추게 할 것이다
공시가격 구백만원짜리 기울어가는 시골 흙집 담장을 허물고 나서
나는 큰 고을의 영주가 되었다
- 담장을 허물다, 창비, 2013
미루나무 [김점용]
바람 불어 길게 휘어지는 미루나무,
허리 아래까지 흔들리며
허공의 화선지 눌러 써대는 저 필력(筆力)
아무리 휘갈겨 써본들
아무리 파지를 낸들
하늘엔 기러기 떼 지나간 흔적도 남지 않는다
태풍이 와 허리가 꺾이고
사철 붓을 쥔 흙의 손아귀 힘이 빠질 때
초록에 단풍을 묻힌 것도 한 필법인가
죽은 미루나무 붓을 씻는 늦가을 저녁비.
초록의 붓털에서
쓰르라미 소리 쏟아지는 여름날이
삭정이 붓털로 빠져 근심하던
까치는 다시 제 집에 꽂아 쓰자고 물어 올리고
마른 우듬지 위에 흰 눈이 묻어온다
허공에선 죽은 나무의 운필이 너무 고요하다
모지라진 미루나무 독필(禿筆)은 불쏘시개로 쪼개진 뒤
아궁이 속 불길로 휘갈겨지는 초서체(草書體)들
지붕에 꽂힌 굴뚝 필봉(筆鋒)에 연기의 필체가 흐리다
- 교우록, 문학과지성사,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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