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화빵은 모른대 [이규옥]
국화빵은 모른대
알록달록한 국화꽃을 모른대
알큰달큼한 국화 냄새를 모른대
불 위에서 철틀 속에서
엎어지고 젖혀지는
국화빵은 모른대
누릇한 냄새밖에 모른대
살 익는 냄새밖엔 모른대
내장마저 훤히 비치도록
바싹 살을 지져
전신에 국화 문신 새기는
국화빵은 모른대
거뭇거뭇 살을 태워
구수한 국화 냄새 풍기는
국화빵은 모른대
저만치 비켜선 채
화분 속에서 방실거리는
국화꽃은 모른대
가을볕 받아 살랑살랑 풍기는
국화 냄새를 모른대
덥석, 내장째 물려
찢기고 씹혀
감감한 미로 속으로 삼켜질
제 살 익은 냄새밖에
국화빵은 모른대
-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세계사, 2008
귀가 서럽다 [이대흠]
강물은 이미 지나온 곳으로 가지 않나니
또 한 해가 갈 것 같은 시월쯤이면
문득 나는 눈시울이 붉어지네
사랑했던가 아팠던가
목숨을 걸고 고백했던 시절도 지나고
지금은 다만
세상으로 내가 아픈 시절
저녁은 빨리 오고
슬픔을 아는 자는 황혼을 보네
울혈 든 데 많은 하늘에서
가는 실 같은 바람이 불어오느니
국화꽃 그림자가 창에 어리고
향기는 번져 노을이 스네
꽃 같은 잎 같은 뿌리 같은
인연들을 생각하거니
귀가 서럽네
- 귀가 서럽다, 창비, 2010
국화꽃 그늘을 빌려 [장석남]
국화꽃 그늘을 빌려
살다 갔구나 가을은
젖은 눈으로 며칠을 살다가
갔구나
국화꽃 무늬로 언
첫 살얼음
또한 그러한 삶들
있거늘
눈썹달이거나 혹은
그 뒤에 숨긴 내
어여쁜 애인들이거나
모든
너나 나나의
마음 그늘을 빌려서 잠시
살다가 가는 것들
있거늘
일기 [안도현]
오전에 깡마른 국화꽃 웃자란 눈썹을 가위로 잘랐다
오후에는 지난 여름 마루 끝에 다녀간 사슴벌레에게 엽서를 써서 보내고
고장 난 감나무를 고쳐주러 온 의원에게 감나무 그늘의 수리도 부탁하였다
추녀 끝으로 줄지어 스며드는 기러기 일흔세 마리까지 세다가 그만두었다
저녁이 부엌으로 사무치게 왔으나 불빛 죽이고 두어 가지 찬에다 밥을 먹었다
그렇다고 해도 이것 말고 무엇이 더 중요하다는 말인가
야채사(野菜史) [김경미]
고구마, 가지 같은 야채들도 애초에는
꽃이었다 한다
잎이나 줄기가 유독 인간의 입에 단 바람에
꽃에서 야채가 되었다 한다
맛없었으면 오늘날 호박이며 양파꽃들도
장미꽃처럼 꽃가게를 채우고 세레나데가 되고
검은 영정 앞 국화꽃 대신 감자꽃 수북했겠다
사막도 애초에는 오아시스였다고 한다
아니 오아이스가 원래 사막이었다던가
그게 아니라 낙타는 원래 사람이었다고 한다
사람이 원래 낙타였는데 팔다리가 워낙 맛있다 보니
사람이 되었다는 학설도 있다
하여튼 당신도 애초에는 나였다
내가 원래 당신에게서 갈라져 나왔든가
국화/ 안상학
올해는 국화 순을 지르지 않기로 한다.
제 목숨껏 살다가 죽음 앞에 이르러
몇 송이 꽃 달고 서리도 이슬인 양 머금다 가게
지난 가을처럼
꽃 욕심 앞세우지 않기로 한다.
가지 잘린 상처만큼 꽃송이를 더 달고
이슬도 무거워 땅에 머리를 조아리던
제 상처 제 죽음 스스로 조문하던
그 모습 다시 보기는 아무래도 쓸쓸할 것만 같아
올해는 나도 마음의 가지를 치지 않기로 한다.
상처만큼 더 웃으려드는 몰골 스스로도 쓸쓸하여
다만 한 가지 끝에 달빛 닮은 꽃 몇 달고
이 세상에 처음 태어나는 슬픔을 위문하며
서리라도 마중하러 새벽 길 가려한다.
그 도시의 일곱시 문동만]
전철역 의자에 앉아 젖을 먹이는 여인이 있고
잠깐 놀랍기도 흐뭇하기도 한 표정의
사내들이 애써 눈길을 돌리던 일곱시
역전에서 만개한 어미꽃이 봉오리진
아기꽃을 지긋이 내려다보는 노란 국화분을
살 수 있었고 하루의 가장 지친 시간이었으나
무언가 가져갈 것 있던 그 도시의 일곱시
맞춤하게 배가 고프면 어묵 한 꼬치를
사먹고 그 기운으로 오르던 얕은 오르막길
비슷한 인상의 사람들이 좁은 보도블록에서
어깨를 부딪치며 걷던 일곱시
골목에는 낮익은 아이들
작년 겨울 나와 눈싸움을 하던 아이들
아는 체도 모르는 체도 못하던 순한 골목 사람들
외상술을 주는 호프집을 지날 땐
친구로 튼 주인여자가 있는지 곁눈질을 부리기도 했던
- 그네, 창비, 2009
패밀리 [정일근]
조심해! 자연에도 패밀리*가 있다 이탈리아 마피아나 러시아
마피아 같은 패밀리가 있다. 자연의 패밀리에는 사람의 족보로
치자면 같은 항렬자 쓰는 형제나 사촌쯤 되는, 그러나 사람의 족
보와는 다른 자연의 인드라망이 있다.
동물의 왕인 호랑이와 밀림의 왕인 사자는 고양이의 패밀리다.
고양이가 형이고 호랑이와 사자는 아우다. 은현리에 와서 도둑고
양이에게 야단을 쳐보라. 달아나기는커녕 느릿느릿 왕의 걸음걸
이로 걸어가며 네 이놈! 하는 눈빛으로 빤히 노려보기까지 하는,
당신을 우습게 여기는 배경에는 도둑고양이에게 제 아우가 둘이
나 왕인 패밀리의 "빽"이 있기 때문이다.
길거리에서 흘레붙는 개에게 뜨거운 물 뿌리며 방해해서는 안
된다. 늑대, 은빛여우, 너구리가 개의 패밀리다. 가끔씩 개가 하
이톤의 고독한 늑대 울음소릴 내는 것은 자신의 패밀리가 누구인
지 목청 높여 알리는 것이다. 그건 또 자신들의 종족번식 방식을
사람 패밀리가 존중해달라는 경고방송이다.
독야청청해서 외로울 것 같은 소나무에게는 전나무,솔송나무,
가문비나무, 잎갈나무 같은 따뜻한 패밀리가 있다. 키 작은 벼들
이 목에 힘주고 서 있는 것은 죽창이 되는 키 큰 대나무가 자신의
패밀리이기 때문이다.
국화는 코스모스, 과꽃, 해바라기, 민들레, 쑥부쟁이, 도깨비바
늘이 제 패밀리다. 놀라지 마라. 국화는 국내에 400에 가까운 패
밀리가 살고 1,000에 가까운 패밀리가 세계에 흩어져 살고 있다.
쉿! 더 무서운 건 그 패밀리 밑으로 20.000이 넘는 국제적인 사조
직이 지금 이 순간에도 가동 중이라는 것이다. 그럴 리야 없겠지
만, 국화 패밀리가 파업을 한다면 지구촌에서 꽃구경하기 힘들
것이다.
향기롭고 우아한 백합에게는 냄새가 고약한 마늘, 양파 패밀리
가 있다. 백합은 결코 그 관계를 부정하지 않는다. 사람 패밀리
같으면 창피해서 외면해버리지만 자연의 패밀리는 영원한 패밀
리다. 남극의 펭귄 부모는 영하 50도의 혹한 속에서 새끼를 살리
기 위해 제 몸을 아낌없이 먹이로 내주고 까마귀는 자신을 낳아 기
른 어미 까마귀가 늙으면 먹이를 물어다주며 봉양한다.
지구에 함께 살고 있는 패밀리 중에서 부모가 자식을 쓰레기처
럼 내다버리고 자식이 부모를 동네북처럼 두들겨 패는 패밀리는
사람 패밀리뿐이다. 패밀리끼리 싸우고 고소 고발하고 총질하며
전쟁을 하는 패밀리는, 이름도 고상한 호모사피엔스, 스스로 생
각하는 사람이라는 그 패밀리뿐이다. 문자를 가지고 시를 쓰고
읽는다는.
* 동식물을 분류할 때 쓰는 과科를 영어로 패밀리family라 한다.
꽃 [이규리]
돌확에 띄웠다가 시든 국화 건져 낸다
꽃이 꽃을 버릴 때는 한 치 가차도 없어서
그 독한 냄새란
입양 보내는 어미 정 떼는 눈길만큼 매섭다
시커멓게 상한 꽃잎은
돌아서는 어미 눈가처럼 짓물러 있지만
꽃이 떠난 돌확의 퀭한 눈도 그만큼 젖거나 어둡다
보내고 떠나는 자리는
맹장 수술한 흔적처럼 없는 듯 남아
하릴없이 옆구리가 결리기도 한다
마음을 준 건 모두 꽃 아니던가
꽃!
눈에 밟히지 마라
끝없다
- 현대시학, 2006. 4월호
국화 화분 [고영민]
현관 옆에 국화 화분 하나를 사다가 놓으니
가을이 왔다 계절은
이렇게 누군가 가져다 놓아야 오는 것인가
저 작은 그릇에 담겨진 가을,
노란 가을을 들여다보며
한 계절 내가 건너가 가져오지 못한 시간들을 본다
돌보지 못한 시간 속에도 뿌리는
있다, 모두 살아 있다 흙 속 깊이
하얀 실뿌리를 숨기고 어둔 흙 헤집어
둥근 터널 그 속으로, 먼 내 속으로 오고 있다
아주 오래전부터 쭈그리고 앉아 바라본
국화의 근본이여, 모든 계절의 초입이
나 몰래 튼튼한 뿌리를 내리고 있어
손을 내밀어 그냥 가져다 놓기만 하면 분명
한 계절의 꽃 필 법도 한 것이다
국화는 현관 앞 계절의 환한 등을 밝히고 있다
사람들이 지나가다 국화를 보며 아! 노란 국화,
하며 가을을 말하기 시작한다
내가 가져다 놓은 한 계절, 저 국화 화분은
한 바가지의 물을 건네주길,
해를 향해 화분의 방향을 가끔씩
누구도 아닌 내가 손수 돌려주길 기다리는 것이다
- 악어, 실천문학사, 2005
菊花옆에서 [서정주]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곷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에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보다
- 서정주 시선, 지만지, 2013
안 되는 일이 많아 행복하다 [이기철]
깨진 유리잔은 소리친다, 다시 올 수 없다고
찢긴 페이지는 소리친다
잃어진 제 말의 짝을 찾아 달라고
나는 이 상실을 사랑한다
달리아를 국화꽃으로 만들 순 없다
새의 날개를 빌려 하늘을 날 순 없다
구름을 끌고 와 흰 운동화를 만들 순 없다
씨앗을 묻어 놓았다고 겨울이 안 오는 건 아니다
수심 일만 미터, 마리아나 해구를 장미원으로 만들 순 없다
사과나무가 안 보인다고 밤을 걷어낼 순 없다
포도덩굴에게 오두막 지붕을 덮지 말라고 부탁할 순 없다
나는 끝내 이 집과 처마와 마당과 울타리와
울타리 아래 핀 물봉숭아를 미워할 순 없다
칫솔을 물고 쳐다본 하늘, 그 푸름을 베어
내 호주머니에 넣을 순 없다
아무리 수리해도 덧나는 들판을 내 손으로 고칠 순 없다
지은 지 십팔 년 된 집, 처음엔 그토록 경탄이던 집이
기둥과 대들보, 천장과 보일러가 자주 고장 난다
새뜻하던 타일과 서까래가 금이 가도 내 힘으론 안 된다
이렇게 쓰려고 한 것이 아닌데 하고 다시 고치지 않는다
안 되는 일이 많아 행복한 일이 나의 동행이므로
- 영원 아래서 잠시, 민음사, 2021
단풍의 진단서 [김은정]
가을을 기다려온 리트머스,
진단이 나왔어요
현이 없는 첼로는 뒤집어서 식탁으로 쓰세요
건반 없는 피아노는 화장대로 사용하시고요
바람의 분절음마다 국화꽃을 꽂아요
유품이 폐품이 아니면 좋겠어요
단 몇 그램의 시간만 저울에 달았다가 포장해 가시는 손
전화기 배터리가 방전되듯 모두 그렇게 시한인 것 알지만
당신의 혈관 속에는 아직도 맑은 음색을 지닌 햇볕이 제법 붙어 있습니다
그리움은 미생물
이별하는 영혼은 깊은 발효를 계속하는 산성
구토 때는 오렌지 빛 노을을 섞은 녹차로 잔잔히 속을 헹궈보세요
저 1그램의 햇살 너머에는 샤갈의 눈 내리는 마을이 있다지요
그렇게 간절히 자기만의 색을 찾더니만
드디어 해냈군요, 죽음 직전
정체를 아는 데도
정체를 만드는 데도
평생이 걸리죠
- 너를 어떻게 읽어야 할까, 천년의시작, 2006
꽃을 찾다가 [홍영철]
국화 사진 살펴볼 일이 있어서
인터넷 카페를 뒤적여 국화 사진을 넘겨보다가
꽃보다 고운 말들을 엿보았다.
―예쁘네요.
―감사합니다.
―사진 하나 쓸게요.
―ㅎㅎ 네, 다 쓰셔도 됩니다. 얼마든지.
―이뻐요. >_<
―감사합니다. 님도 이뻐여.
―담아 갑니다.
―떨어뜨리지 않도록 조심해서 담아 가세여.
―님, 멋지십니다! 홧팅 ! 한 표!
―아궁, 감사하여라. 와우!
―정말 참 예쁘네요. 한아름 안고 갑니다.
―많이많이 가져가세요.
―중학교 2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 생각나네요.
국화 아빠라고 불리셨는데······
―그분도 님 기억하실 거예요.
―아침에 엄니 산소에 다녀왔습니다.
그냥 생각이 나서요.^)^*
―어머님이 많이 보고 싶으셨나 봅니다.
―울 동생 수녀원 갈 때 길가에 흐드러져 있던 꽃.
그때 왜 그리 눈물이 나던지.
―늘 행복하셨으면 합니다, 님.
- 여기 수선화가 있었어요, 문학과지성사, 2012
한밭수목원 [이수]
가을이 나무의 뼈로 완성되고 있습니다
보랏빛 국화가 비밀을 누설하는 한낮
상수리나무가 도토리를 뱉어내도
도토리는 바닥으로 구르며 의문을 던집니다
물고기에게 연못은 밀실일까요 감옥일까요
길이 돋아났다 사라집니다
꽃이 필 때 당신의 숨은 생각은
가파른 음지로 떨어지고 있나요
어제의 물결과 오늘의 안개가 섞이고 있습니다
흔들리는 것은 구름의 안부입니까 바람의 냄새입니까
그들이 제자리를 잡는다는 것은
의자의 무거운 그늘 때문입니까
그네는 구르고 굴러도 분수를 모릅니다
분수가 무지개를 낳으면 무지개는 새를 생각합니까
나무가 숲의 일원이므로
오늘의 햇살이 어제의 심장을 녹이던 온도입니까
두 갈래로 이어지는 마지막 길에서 당신은 서성입니다
- 오늘의 표정이 구름이라는 것은 거짓말이야, 천년의시작, 2021
저것은 국화 이것은? [이근화]
노란색이 이거다 싶게
국화는 국화
만개하여 뒤집힌 꽃
내가 늙으면 저렇게 될까 싶게
차가운 할머니가
아파트 뒤편에 몰래 심은 꽃
몰래 심었지만 가릴 수 없이 큰 꽃
저것은 국화
아름답다 국화
몇 달째 잘 가꿔진 꽃
오래가는 죽음
국화가 피어 있는 동안
먼 친척이 결혼을 하고
삼촌이 돌아가시고
딸아이가 돌을 맞고
이번 주에도 다음 달에도
그렇다 그렇다 그렇다
어쩐지 좀 추운 것 같아
국화는 어쩌나
남의 식구 걱정하듯
내려가봤는데
저것은 국화
힘센 국화
너나 걱정하시지
하는 표정으로 고고하다
그래 그래
내가 걱정이다
너무 성의 없이 사는 거
아름답지 못한 거
그게 걱정이다
보기 싫다고
보고 싶다고
입술을 아끼는 것이 걱정이다
개미가 우글우글한 것이 걱정이다
아무도 시는 안 읽어
나도 안 읽어
오후 내내 빵을 뜯어 먹었다
나는 프랑스 아이로 다시 태어나고 싶다
아니면 한 송이 국화는 어떤가
이거 왜 이렇게 부드러운지
국화는 왜 하필 거기 피어
이게 노란색이다 이게 국화다
가나다라마바사 선생처럼
아이에게 국화나 가르치고
너나 배워 너나 배워
국화가 귓속말을 하네
참참참
너 건방지면
할머니한테 이른다
제 별명 국화였던 거 모르시죠?
할머니는 어디 가고
국화만
301동 302동 303동 304동 305동 지키는지
별이 우수수 떨어져 깨질 것 같은
겨울밤인데
시들 줄 모르고
비닐하우스를 만들어준 할머니
고고한 할머니
안경 쓴 할머니
배운 할머니
인사도 받아주지 않는 할머니
303동 할머니
안녕하세요
저것은 국화 이것은 요?
- 차가운 잠, 문학과지성사, 2012
그는 참 좋은 토스트였습니다 [배수연]
그는 참 좋은 토스트였습니다
짐짓 엄숙한 표정으로 못난이 핫도그가 추도문을 읽었습니다
그는 아름다웠지만 뽐내지 않았고
그는 가진 것이 적었지만 인색하지 않았고
그는 경직된 순간에도 유머를 잃지 않았으며……
아, 솜사탕은 이 대목이 너무 슬픈 나머지
눈물을 흘리며 아랫도리를 적셔 버렸습니다
토스트의 두 귀는 얼마나 적당한 갈색이었는지
아침 햇살에 윤이 나는 정수리는 얼마나 단정했는지
그의 가슴은 얼마나 바삭하고 부드러웠는지
토스트기에서 튀어 오르던 그의 명랑한 까꿍
모두가 눈을 감고 그의 아름다웠던 모습을 떠올렸습니다
그가 모는 버스는 그를 닮은 진실된 사각형이었습니다
버스 안은 고소한 냄새로 가득했고
우리는 따뜻한 배를 두드리며 아기 엉덩이 같은 일출을 함께 본 친구였습니다
아, 누가 그의 버스를 호수로 몰게 했습니까?
그날따라 호수의 우유는 왜 그리 불어났던 건가요?
그의 성긴 속살이 뿌옇게 풀어지는 것을
포악한 오리와 잉어들이 달려드는 것을
우리는 막지 못했습니다
성가가 울려 퍼지고
딸기 잼과 땅콩 버터는 이마를 맞대고 흐느꼈습니다
가로세로 4X6, 호두나무로 짠 관 위로 무수한 국화꽃이 떨어졌습니다
이제
토스트가 없는 아침을 맞아야 합니다
차가운 시리얼을 삼켜야 할 것입니다
- 조이와의 키스, 민음사, 2018
마음이 출렁일 때마다 [이기철]
나무의 체취를 아는 새들은
저녁이면 제 나무로 돌아온다
그땐 시보다 아름다웠던
지난여름 장항선 기차 시각표를 다 잊어버린다
군불 땐 방처럼 따뜻한 가슴의 사람한텐
옛날 읽은 크리스티나 로세티의 시 한 줄 읽어 주고 싶다
그런 햇빛 그런 공기 그런 풍경 속에 들어가
한 해의 옷을 다 벗어 놓는다
마음이 출렁일 때는
나도 못 만난 내 마음이 옷을 찢고 번져 나온다
하루는 저무는데 가을 국화처럼 혼자
싱싱한 것도 죄송한 날이 있다
- 흰 꽃 만지는 시간, 민음사, 2017
수유리에서 [정호승]
국화 한 송이
그대 무덤 앞에 놓고 간다
양심의 꽃이 되라고
자유의 꽃이 되라고
가슴에 꽃 한 송이 품고 자라고
황톳길 따라 쓸쓸히 흩어져 간
멧새의 길을 따라
그대 무덤 앞에 놓인
나를 두고 간다
언제 다시 올지 모를
혁명의 길을
도봉을 바라보며 쓸쓸히 간다
- 새벽편지, 민음사, 2012
멀리서 받아 적다 [복효근]
국화 마른 대궁을 베어버리려 낫을 들이대니
시들어 마른 꽃 무더기에서
뭉클한 향기 진동하다
서리 몇 됫박 뒤집어쓰고
잎부터 오그라들 적에
오상고절도 어쩔 수 없구나 했더니
아서라 시취(屍臭)까지 향기로 바꾸어내는 고집
그 꽃다운 오만 앞에서 낫을 거두다
안도하듯 다시 뱁새 몇 마리
그 그늘 아래 찾아들고
하, 고것들의 수작이라니
밤새 서설이 내려 꽃을 새로 피우다
애초 내가 간섭할 일이 아니었다
- 따뜻한 외면, 실천문학사, 2013
이 여름의 끝 [김이듬]
한국학 연구소 입구에 국화 화분이 놓였다
엄청나게 만발한 두 개의 화분이 사원을 지키는 사자처럼 있다
방금 소장과 직원들이 낑낑대며 사 들고 왔다
국화를 대하는 태도가 사뭇 다르다
독일인 학생들과 선생들은 한국인이 지르는 탄성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거울 앞에 선 누이 같은 꽃이건 소쩍새건
아는 게 약이든 병이든
몰라도 가을은 온다
동시에 이 순간 여름이 끝났다
독일 달력에도 여름의 끝이라고 적혀 있다
꼭 그래야 하나
열일곱 밤쯤 자고 나면 떠나야 한다
교환교수로 온 선생은 입원해 있다
하이델베르그 광장 근처에서 신호를 무시한 채 건널목을 덮친 트럭에 치어 팔을 다쳤다
불행중 다행이라면서 그의 아내는 문병 간 우리를 오히려 안심시켰다
우리는 모두 기적적으로 살아
사소하게 여름의 끝을 지나간다
연구소 앞 자그마한 연못가에 앉아
한참 물 안을 들여다본다 손가락으로
물 위에 내 이름을 새긴다
몰라도 바람이 분다
왜 오는지 몰라도 추적추적 비 내린다
이렇게 지나가리라
내가 머물렀던 흔적도
네 마음에 물결쳤던 이 여름의 노래도
- 베를린, 달렘의 노래, 서정시학, 2013
가을의 전력 [김경미]
삼천만년만에 태어나 삼천대천세상에 가을은 처음이다
1
전생의 가을에는 여고생이었다 가을만 되면
성적이 서리 속 기러기떼처럼 날아가고 검정비닐봉지
같은 날들 견딜 수 없어 봉지 밖으로 영영
떠나버릴까 자퇴하고 채석장에서 돌이나 깨다
햇빛이나 따라가버릴까 영영 방과후마다 버스 뒷자리
종점까지 가고 또 가다 못내 살아돌아오면
그러거나 말거나 그들은 또
유리창을 깨고 있었다
나쁜! 나쁜!
2
그 전전생의 가을에는 이십오륙칠세였는데
첫 자취방, 오직 나만의 저녁불빛을 갖다니
마침내 가족들 마른 낙엽처럼 다 버려버렸다니
누군가 축하의 국화꽃도 가져다주었다
난생 처음 기뻐 생의 첫 김치도 담갔었다
간장으로......
그 생의 어머니, 맨날 책만 들여다봤자다, 하시더니, 어머니, 결국 간장으로 김치를......
어차피 이 생도 온통 간장빛인걸요
3
그 전전생의 전생에는 삼십 번의 장미빛 생일이었는데
생일엔 왜 촛불을 끌까 온통 켜두지 세상 다
불지르도록 소방차 물벼락 다 뒤집어쓰도록
케이크 녹아내려 금강석 되도록 파-티하지 파란의
만장의 파-티하지 세상사람 다 먹어치우고 싶은 허기와
목욕탕만한 슬픔 틈만 나면 하루 삼십 번씩이라도 중얼댔다 미친년, 미친년, 미친년,
가슴 다 후련했지만 그 생의 가을은 오지 않았다 영영
4
그 전생의 모든 전생들에는 차마 발설키 두렵지만 사십세였는데
한번은 제 목숨값 손수 치르고 싶어서 어떻게든
다시 잉태되고 싶어서 처음으로 동그랗게 발가락을
입에 말아물고 고개 숙이니
태아처럼 비로소 자세가 나올 것 같은 생이여
영영 떠날 수 없던 그 붉은 단풍잎 가을이여
- 쉬잇, 나의 세컨드는, 문학동네, 2003
몽유도원도 - 목욕탕 가는 남자 [성선경]
혼자 깨어 있는 새벽이라 생각합니다.
간혹 이 새벽은 나 혼자의 것이라 생각합니다.
몽유도원(夢遊桃園)에 든 것이라 생각합니다.
눈 감아야 닿을 수 있는 세계를
눈 뜨고도 가 닿을 수 있다고
수건 한 장의 맨몸으로 물 담궈봅니다.
몽유도원에는 저 생고무처럼 질긴 인연의
사람이 없다고 혼자 입몽(入夢)에 듭니다.
그때 그러면 너는 뭐냐고
팔뚝이 굵은 승천하지 못한 용 한 마리
슬그머니 기어듭니다. 고개를 돌리면 아직
용도 되지 못한 이무기, 또 이번엔 머리를 쳐든 뱀이
나타납니다. 그만 이 자리를 피하고자 돌아서면
전갈과 호랑이 온갖 징그러운 그림들이 물방울을 튀깁니다.
차라리 등활지옥(等活地獄)이 낫겠다고 자리를 옮기면
어허 거기엔 또 한 송이의 장미 한 송이의 국화
한증막에서 땀 흘리는 꽃을 만납니다.
누구나 꽃이 되고 싶은 모양입니다만,
나는 또 그 꽃에 자지러지고 식은땀 흘립니다.
도원(桃園)에도 참 많은 무서운 것들이 꿈틀거립니다
사람이 없는 도원(桃園)에서도 나는 참 무서워
혼자 깨어 있는 새벽에도 입몽(入夢)하지 못합니다
도원(桃園), 늘 꿈 속에서만 있습니다.
- 몽유도원도를 사다, 천년의시작, 2006
비. 풍. 초 1 [이기와]
힘껏 두들겨봐!
내 비닐 살갗에 니 비닐 살갗을 대고 후려쳐봐!
튀밥처럼 터지는 명쾌한 통곡을 들어봐!
톡, 톡, 톡, 치솟아오르는
탁, 탁, 탁, 내리꽃히는
피,
지상에 흥건이 깔린 피, 저 쌍피를
먹어봐!
내가 버린 나의 피를
피 묻은 나의 이 시간을
이 시간에 필요 없는 나의 멍든 꽃들을
매화와 난초와 국화를
치고 박고 다투어 먹어봐!
뭘 망설여?
움켜쥐어 봤자 쓸모 없는,
아껴두어 봤자 부질없는,
그 하찮은 희망 한 장 빼서 버려!
숨기고 있는 그것!
목숨을 버려!
퇴출당한 꿈속에서마저 독박 쓴 지금
니가 왕창 먹고 왕창 싸라고 내게 던져 준
이 굳은 피는,
독이야, 독 (毒)
- 바람난 세상과의 블루스, 다층, 2001
국화꽃 [천상병]
오늘만의 밤은 없었어도
달은 떴고
별은 반짝였다.
괴로움만의 날은 없어도
해는 다시 떠오르고
아침은 열렸다
무심만이 내가 아니라도
탁자 위 컵에 꽂힌
한 송이 국화꽃으로
나는 빛난다!
가을이 아침저녁으로 느껴지니
노오란 국화꽃이 생각나네요...
국화꽃 고유의 향기가 생각나는 날에...
- 천상병 전집, 평민사,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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