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내 꿈은
선생님이 되는 거였어요.
나뭇잎 냄새나는 계집애들과
먹머루빛 눈 가진 초롱초롱
사내 녀석들에게
시도 가르치고
살아가는 이야기도 들려주며
창밖의 햇살이 언제나
교실 안에도 가득한
그런 학교의 선생님이 되는 거였어요.
플라타너스 아래 앉아
시들지 않는 아이들의 얘기도 들으며
하모니카 소리에
봉숭아꽃 한 잎씩 열리는
그런 시골 학교 선생님이 되는 거였어요.
나는 자라서 내 꿈대로
선생님이 되었어요.
그러나 하루 종일 아이들에게
침묵과 순종을 강요하는
그런 선생님이 되고 싶지는 않았어요.
밤늦게까지 아이들을 묶어 놓고
험한 얼굴로 소리치며
재미없는 시험문제만 풀어주는
선생이 되려던 것은 아니었어요.
옳지 않은 줄 알면서도
그럴듯하게 아이들을 속여넘기는
그런 선생이 되고자 했던 것은
정말 아니었어요.
아이들이 저렇게
목숨을 끊으며 거부하는데
때묻지 않은 아이들의 편이 되지 못하고
억압하고 짓누르는 자의 편에 선
선생님이 되리라곤 생각지 못했어요.
아직도 내 꿈은
아이들의 좋은 선생님 되는 거예요
물을 건너지 못하는 아이들
징검다리 되고 싶어요.
길을 묻는 아이들
지팡이 되고 싶어요.
헐벗은 아이들 언 살을 싸안는
옷 한 자락 되고 싶어요.
푸른 보리처럼
아이들이 쑥쑥 자라는 동안
가슴에 거름을 얹고
따듯하게 섞어가는
봄흙이 되고 싶어요.
- 도종환 시 ‘어릴때 내 꿈은’모두
어제 우리가 함께 사랑하던 자리에
오늘 가을비가 내립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동안
함께 서서 바라보던 숲에
잎들이 지고 있읍니다
어제 우리 사랑하고
오늘 낙엽지는 자리에 남아 그리워하다
내일 이 자리를 뜨고 나면
바람만이 불겠지요
바람이 부는 동안
또 많은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고 헤어져 그리워하며
한 세상을 살다가 가겠지요.
- 도종환 시 ‘가을비’모두
견우직녀도 이날만은 만나게 하는 칠석날
나는 당신을 땅에 묻고 돌아오네
안개꽃 몇 송이 함께 묻고 돌아오네
살아 평생 당신께 옷 한 벌 못 해주고
당신 죽어 처음으로 베옷 한 벌 해 입혔네
당신 손수 베틀로 짠 옷가지 몇 벌 이웃께 나눠주고
옥수수밭 옆에 당신을 묻고 돌아오네
은하 건너 구름 건너 한 해 한 번 만나게 하는 이 밤
은핫물 동쪽 서쪽 그 멀고 먼 거리가
하늘과 땅의 거리인 걸 알게 하네
당신 나중 흙이 되고 내가 훗날 바람 되어
다시 만나지는 길임을 알게 하네
내 남아 밭갈고 씨뿌리고 땀흘리며 살아야
한 해 한 번 당신 만나는 길임을 알게 하네.
- 도종환 시 ‘옥수수밭 옆에 당신을 묻고‘모두
하루 일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
스펀지가 물을 빨아 들이듯이
먼 산이 어둠을 천천히 빨아들이는 것이 보일 때
저녁하늘이 어둠의 빛깔을 몸 가득 머금는 것이 보일 때
늘 가던 길에서 내려 샛길로 들고 싶다
어디 종일 저 혼자 있던 빈 방이 나를 좀 들어오도록
허락해주면 좋겠다
적막함이 낯설음을 말없이 받아주는 방
적막의 서늘한 무릎을 베고
잠시 누워 있게 해주면 좋겠다
그 동안 살면서 너무 많은 말을 하였으므로
말없이 입을 닫고 있어도 불편해하지 않고
먼저 지쳐 쓰려진 적이 있던 그가
오늘 지친 모습으로 돌아온 하루치의 목숨을 위해
물 끓이는 소리를 들려주면 좋겠다
처음엔 모두들 이렇게 어색한 얼굴로
주뼛거리기도 하다가 사랑을 알아가는 것이므로
문 밖으로 천천히 내려오던 어둠이
멋쩍어하는 우리의얼굴을 잠깐씩 가려주기도 하고
우리가 늘 타향을 전전하며 살고 있으므로
고향을 너머 멀리 떠나왔으므로
고향이 어딘지 묻는 것만으로도 말문 트이고
비슷한 어린 시절의 이야기 하나 추억처럼
꺼내놓아도 서로를 즐겁게 긍정하고
내 몸을 꽁꽁 묶으며 나를 긴장시키는 게 일이면
끈들을 느슨하게 풀고
비슷한 사투리만으로도 익숙한 입맛을 만나는 저녁시간
몇 잔의 편안함이 술향기로 번져오는
순간순간을 나누어 마시며
웃음이 번져가는 사람 하나
곁에 있어주면 좋겠다
어둠 속에서 만나는 객창감이좋고
낯선 시간들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오른팔로 팔베개를 하고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스르르 잠이 들면
잠시 사라수나무 그림자 몸에 일렁이고
내 겉옷을 들어 잠든 나를 덮어주는
이름 모르는 사람 하나 곁에 있으면 좋겠다
- 도종환 시 ‘빈방’모두
[해인으로 가는 길], 문학동네, 2008.
창 반쯤 가린 책꽂이를 치우니 방안이 환하다
눈 앞에 막고 서 있는 지식들을 치우고 나니 마음이 환하다
어둔 길 헤쳐 간다고 천만 근 등불을 지고 가는 어리석음이여
창 하나 제대로 열어놓아도 하늘 전부 쏟아져오는 것을
- 도종환 시 ‘책꽂이를 치우며‘모두
* ’사람의 마을에 꽃이 진다』(문학동네, 2011)
나는 바람이 좋다고 했고 너는 에디뜨 삐아프가 좋다고 했다. 나는 억새가 부들부들 떨고 있는 늦가을 강가로 가자고 했고 너는 바이올린 소리 옆에 있자고 했다. 비루하고 저주받은 내 운명 때문에 밤은 깊어가고 너는 그 어둠을 목도리처럼 칭칭 감고 내 그림자 옆에 붙어 서 있었다.
너는 카바이드 불빛 아래 불행한 가계를 내려놓고 싶어했고 나는 독한 술을 마셨다. 너는 올해도 또 낙엽이 진다고 했고 나는 밤하늘의 별을 발로 걷어찼다. 이렇게 될 줄 알면서 너는 왜 나를 만났던 것일까 이렇게 될 줄 알면서 우리는 왜 헤어지지 않았던 것일까
사랑보다 더 지독한 형벌은 없어서 낡은 소파에서 너는 새우잠을 자고 나는 딱딱하게 굳은 붓끝을 물에 적시며 울었다. 내가 너를 버리려 해도 가난처럼 너는 나를 떠나지 않았고 네가 절망의 영토를 떠났다고 해서 절망이 너를 떠나지 않는 것인 줄 그때는 몰랐다. 서른을 넘기고도 어떻게 얼굴을 들고 살 수 있을지 막막한 겨울이었다.
이제 너는 없고 나만 남아 견디는 욕된 날들 가을은 해마다 찾아와 나를 후려치고 그럴 때면 첫눈이 오기 전에 죽고 싶었다. 나는 노을이 좋다고 했고 너는 목탄화가 좋다고 했다. 나는 울음으로 피리를 불고 싶다고 했고 너는 따뜻한 살 속에 시린 손을 넣고 싶다고 했다. 오늘도 어김없이 밤은 찾아오고 오늘도 운명처럼 바람은 부는데 왜 어디에도 없는가, 너는
- 도종환 시‘스물 몇 살의 겨울‘모두
산벚나무 잎 한쪽이 고추잠자리보다 더 빨갛게 물들고 있다 지금 우주의 계절은 가을을 지나가고 있고, 내 인생의 시간은 오후 세시에서 다섯시 사이에 와 있다 내 생의 열두시에서 한시 사이는 치열하였으나 그 뒤편은 벌레 먹은 자국이 많았다
이미 나는 중심의 시간에서 멀어져 있지만 어두워지기 전까지 아직 몇시간이 남아 있다는 것이 고맙고, 해가 다 저물기 전 구름을 물들이는 찬란한 노을과 황홀을 허락하시리라는 생각만으로도 기쁘다
머지 않아 겨울이 올 것이다 그때는 지구 북쪽 끝의 얼음이 녹아 가까운 바닷가 마을까지 얼음조각을 흘려보내는 날이 오리라 한다 그때도 숲은 내 저문 육신과 그림자를 내치지 않을 것을 믿는다 지난봄과 여름 내가 굴참나무와 다람쥐와 아이들과 제비꽃을 얼마나 좋아하였는지, 그것들을 지키기 위해 보낸 시간이 얼마나 험했는지 꽃과 나무들이 알고 있으므로 대지가 고요한 손을 들어 증거해줄 것이다
아직도 내게는 몇시간이 남아 있다
지금은 세시에서 다섯시 사이
- 도종환 시 ‘세시에서 다섯시 사이‘모두
* 세시에서 다섯시 사이 / 창비, 2011. 7. 18
그대여 흘러흘러 부디 잘 가라
소리없이 그러나 오래오래 흐르는 강물 따라
그댈 보내며
이제는 그대가 내 곁에서가 아니라
그대 자리에 있을 때 더욱 아름답다는 걸 안다
어둠 속에서 키 큰 나무들이
그림자를 물에 뉘이고
나도 내 그림자를 물에 담가 흔들며
가늠할 수 없는 하늘 너머 불타며 사라지는
별들의 긴 눈물
잠깐씩 강물 위에 떴다가 사라지는 동안
밤도 가장 깊은 시간을 넘어서고
밤하늘보다 더 짙게 가라앉는 고요가 내게 내린다
이승에서 갖는 그대와 나의 이 거리
좁혀질 수 없어
그대가 살아 움직이고 미소짓는 것이
아름다워 보이는
그대의 자리로 그대를 보내며
나 혼자 뼈아프게 가는 이 고요한 강물 곁에서
적막하게 불러 보는 그대
잘 가라
- 도종환 시 ‘그대 잘가라‘모두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잎 하나는 담쟁이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 도종환 시 ‘담쟁이’모두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며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었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있으랴
- 도종환 ‘흔들리며 피는 꽃‘
옥수수잎에 빗방울이 나립니다.
오늘도 또 하루를 살았습니다
낙엽이 지고 찬바람이 부는 때까지
우리에게 남아 있는 날들은
참으로 짧습니다
아침이면 머리맡에 흔적없이 빠진 머리칼이 쌓이듯
생명은 당신의 몸을 우수수 빠져나갑니다
씨앗들도 열매로 크기엔
아직 많은 날을 기다려야 하고
당신과 내가 갈아엎어야 할
저 많은 묵정밭은 그대로 남았는데
논두렁을 덮는 망촛대와 잡풀 가에
넋을 놓고 한참을 앉았다 일어섭니다
마음 놓고 큰 약 한 번 써보기를 주저하며
남루한 살림의 한구석을 같이 꾸려오는 동안
당신은 벌레 한 마리 함부로 죽일 줄 모르고
악한 얼굴 한 번 짓지 않으며 살려 했습니다
그러나 당신과 내가 함께 받아들여야 할
남은 하루하루 하늘은
끝없이 밀려오는 가득한 먹장구름입니다
처음엔 접시꽃 같은 당신을 생각하며
무너지는 담벼락을 껴안은 듯
주체할 수 없는 신열로 떨려왔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에게 최선의 삶을
살아온 날처럼, 부끄럼없이 살아가야 한다는
마지막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함을 압니다
우리가 버리지 못했던
보잘 것 없는 눈높음과 영육까지도
이제는 스스럼없이 버리고
내 마음의 모두를 더욱 아리고 슬픈 사람에게
줄 수 있는 날들이 짧아진 것을 아파해야 합니다
남은 날은 참으로 짧지만
남겨진 하루하루를 마지막 날인 듯 살 수 있는 길은
우리가 곪고 썩은 상처의 가운데에
있는 힘을 다해 맞서는 길입니다
보다 큰 아픔을 껴안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엔 언제나 많은데
나 하나 육신의 절망과 질병으로 쓰러져야 하는 것이
가슴 아픈 일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콩댐한 장판같이 바래어 가는 노랑꽃 핀 얼굴 보며
이것이 차마 입에 떠올릴 수 있는 말은 아니지만
마지막 성한 몸뚱아리 어느 곳 있다면
그것조차 끼워넣어야 살아갈 수 있는 사람에게
뿌듯이 주고 갑시다
기꺼이 살의 어느 부분도 떼어주고 가는 삶을
나도 살다가 가고 싶습니다
옥수수잎을 때리는 빗소리가 굵어집니다
이제 또 한 번의 저무는 밤을 어둠 속에서 지우지만
이 어둠이 다하고 새로운 새벽이 오는 순간까지
나는 당신의 손을 잡고 당신 곁에 영원히 있습니다
- 도종환 시 ‘접시꽃 당신’모두
희망의 바깥은 없다
새로운 것은 언제나 낡은 것들 속에서
싹튼다 얼고 시들어서 흙빛이 된 겨울 이파리
속에서 씀바퀴 새 잎은 자란다
희망도 그렇게 쓰디쓴 향으로
제 속에서 자라는 것이다 지금
인간의 얼굴을 한 희망은 온다
가장 많이 고뇌하고 가장 많이 싸운
곪은 상처 그 밑에서 새 살이 돋는 것처럼
희망은 스스로 균열하는 절망의
그 안에서 절망을 끌어안고 뒹굴어라
희망의 바깥은 없다
- 도종환 ‘희망의 바깥은 없다‘모두
당신을 사랑할 때의 내 마음은
가을 햇살을 사랑할 때와 같습니다.
당신을 사랑하였기 때문에
나의 마음은 바람부는 저녁숲이었으나
이제 나는
은은한 억새 하나로 있을 수 있습니다.
당신을 사랑할 때의 내 마음은
눈부시지 않은 갈꽃 한 송이를
편안히 바라볼 때와 같습니다.
당신을 사랑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내가 끝없이 무너지는 어둠 속에 있었지만
이제는 조용히 다시 만나게 될
아침을 생각하며 저물 수 있습니다.
지금 당신을 사랑하는 내 마음은
가을 햇살을 사랑하는 잔잔한 넉넉함입니다.
- 도종환 시 ‘가을 사랑‘
말 한마디 하기가 두렵습니다
글 한줄 쓰기가 두렵습니다
겨울나무 가지 끝에 팔랑팔랑 소리날 듯
별들이 걸렸는데
어찌나 겨울하늘 아름다운지
걸음을 내딛기가 무섭습니다
아름다운 사람들 만나 그들과 함께 여기까지 왔습니다
이 길이 바르게 가는 길이라 믿어
뒤돌아보지 않고 오랜 날을 왔습니다
강물도 언살을 서로 섞은 채
어두운 곳을 저희끼리 몰려갑니다
저녁때는 물오리떼 작은 발도 씻어주고
손 흔드는 갈대풀과 소리치며 떠들기도 하더니
아무도 없는 곳을 묵묵히 감돌아 갑니다
외롭다 말 안하고 오래오래 젖어서 갑니다
우리도 작은 불 켜들고 자갈길 가다가
앞서간 사람들이 남긴 흔적 보며 분노합니다
여기저기 어두운 곳에 버려진 말들을 주워들고 흥분합니다
그러다 별밭을 올려다보며 두려워집니다
나도 또한 바르게 사는지 두려워집니다
우리가 가는 발자국 위에 길을 내며 따라오는
언제나 우리보다 더 올곧을 사람들을 생각합니다
손끝이 시린 강바람 헤치며
뒤돌아보지 않고 이 길을 가지만
아름다운 세상에 티끌 같은 나 하나 두렵습니다.
- 도종환 시 ‘아름다운 세상에 티끌같은 나 하나‘모두
*시집/당신은 누구십니까
영원히 사랑한다는 것은
조용히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조용히 사랑한다는 것은
자연의 하나처럼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서둘러 고독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고
기다림으로 채워 간다는 것입니다
비어 있어야 비로소 가득해지는 사랑
영원히 사랑한다는 것은
평온한 마음으로 아픔을 맞는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것은
몸 한쪽이 허물어지는 것과 같아
골짝을 빠지는 산 울음소리로
평생을 떠돌고도 싶습니다
그러나 사랑을 흙에 묻고
돌아보는 이 땅 위에
그림자 하나 남지 않고 말았을 때
바람 한 줄기로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이 세상사는 동안 모두 크고 작은 사랑의 아픔으로
절망하고 뉘우치고 원망하고 돌아서지만
사랑은 다시 믿음 다시 참음 다시 기다림
다시 비워두는 마음으로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찢긴 가슴은
사랑이 아니고는 아물지 않지만
사랑으로 잃는 것들은
사랑이 아니고는 찾아지지 않지만
사랑으로 떠나간 것들은
사랑이 아니고는 다시 돌아오지 않지만
비우지 않고 어떻게 우리가
큰 사랑의 그 속에 들 수 잇습니까
한 개의 희고 깨끗한 그릇으로 비어 잇지 않고야
어떻게 거듭거듭 가득 채울 수 잇습니까
영원히 사랑한다는 것은
평온한 마음으로 다시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 도종환 시 ‘영원히 사랑한다는 것은‘모두
높은 구름이 지나가는 쪽빛 하늘 아래
사뿐히 추켜세운 추녀를 보라 한다
뒷산의 너그러운 능선과 조화를 이룬
지붕의 부드러운 선을 보라 한다
어깨를 두드리며 그는 내게
이제 다시 부드러워지라 한다
몇발짝 물러서서 흐르듯 이어지는 처마를 보며
나도 웃음으로 답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나 저 유려한 곡선의 집 한채가
곧게 다듬은 나무들로 이루어진 것을 본다
휘어지지 않은 정신들이
있어야 할 곳마다 자리잡아
지붕을 바치고 있는 걸 본다
사철 푸른 홍송숲에 묻혀 모나지 않게
담백하게 뒷산 품에 들어 있는 절집이
굽은 나무로 지어져 있지 않음을 본다
한 생애를 곧게 산 나무의 직선이 모여
가장 부드러운 자태로 앉아 있는
- 도종환 시 ‘부드러운 직선‘모두
오백년 천년을 사는 것은
어떻게 사는 것일까
가슴께에 칠해진 어지러운 원색의 빛깔들
여름이면 바다처럼 펼쳐진 산줄기에 나누어주고
가을이면 새빨간 빛깔들 뒷산 숲에 던져주고
나머지 짙게 덧칠해진 단청빛마저 마음에 걸려
바람에 던져주고 하늘에 풀어주고
세월 속에 가장 때묻지 않은 얼굴빛으로 엷어져
본래 제가 지녔던 나무 빛깔로 돌아여며 겸허해지고
담백하게 욕심을 벗어 더욱 굳세어지고
그렇게 버리면서 육백년을 지나왔으리니
백년도 백년의 절반도 다 못 살면서
더 화려하고 더 강렬한 빛깔을 지니고자
더 큰 목소리와 더욱 단단한 기둥을 거느리고자
기를 쓰다가 허세부리다가
우리들은 사바세상 티끌과 먼지로 사라지나니
진정 오래오래 사는 길은 어떻게 사는 것인지
요란한 파격은 애당초 마음에 두지 않았던
맞배지붕은 보여주고 있나니
동안거 끝내고 마악 문 앞에 나와 선 듯한
무량수전 기둥은 말하고 있나니
돌축대 위에서 좌탈하고 앉아 있는
안양루로 가르쳐주고 있나니
- 도종환 시 ‘부석사에서’
어두운 하늘을 보며 저녁 버스에 몸을 싣고 돌아오는 길
생각해보니 오늘 하루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더 많았다
이것저것 짧은 지식들은 많이 접하였지만
그것으로 생각은 깊어지지 않았고
책 한권 며칠씩 손에서 놓지 않고 깊이 묻혀
읽지 못한 나날이 너무도 오래 되었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지냈지만
만나서 오래 기쁜 사람보다는 실망한 사람이 많았다
---나는 또 내가 만난 얼마나 많은 사람을 실망시켰을 것인가
미워하는 마음은 많았으나 사랑하는 마음은 갈수록 작아지고
분노하는 말들은 많았지만 이해하는 말들은 줄어들었다
소중히 여겨야 할 가까운 사람들을 오히려 미워하며
모르게 거칠어지는 내 언어만큼 거칠어져 있는 마음이
골목을 돌아설 때마다 덜컹거렸다
단 하루를 사람답게 살지 못하면서
오늘도 혁명의 미래를 꿈꾸었다.
- 도종환 시 ‘오늘 하루‘모두
시집 : 당신은 누구십니까
가장 아름다운 걸 버릴 줄 알아
꽃은 다시 핀다
제 몸 가장 빛나는 꽃을
저를 키워준 들판에 거름으로 돌려보낼 줄 알아
꽃은 봄이면 다시 살아난다
가장 소중한 걸 미련없이 버릴 줄 알아
나무는 다시 푸른 잎을 낸다
하늘 아래 가장 자랑스럽던 열매도
저를 있게 한 숲이 원하면 되돌려줄 줄 알아
나무는 봄이면 다시 생명을 얻는다
변치 않고 아름답게 있는 것은 없다
영원히 가진 것을 누릴 수는 없다
나무도 풀 한 포기도 사람도
그걸 바라는 건 욕심이다
바다까지 갔다가 제가 태어난 강으로 돌아와
제 목숨 다 던져 수천의 알을 낳고
조용히 물밑으로 돌아가는 연어를 보라
물고기 한마리도 영원히 살고자 할 때는
저를 버리고 가는 걸 보라
저를 살게 한 강물의 소리 알아듣고
물밑 가장 낮은 곳으로 말없이 돌아가는 물고기
제가 뿌리내렸던 대지의 목소리 귀담아듣고
아낌없이 가진 것을 내주는 꽃과 나무
깨끗이 버리지 않고는 영원히 살 수 없다는
- 도종환 시 ‘다시 피는 꽃‘모두
저녁 숲에 내리는 황금빛 노을이기보다는
구름 사이에 뜬 별이었음 좋겠어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버드나무 실가지 가볍게 딛으며 오르는 만월이기보다는
동짓달 스무날 빈 논길을 쓰다듬는 달빛이었음 싶어
꽃분에 가꾼 국화의 우아함보다는
해가 뜨고 지는 일에 고개를 끄덕일 줄 아는 구절초이었음 해
내 사랑하는 당신이 꽃이라면
꽃 피우는 일이 곧 살아가는 일인
콩꽃 팥꽃이었음 좋겠어
이 세상의 어느 한 계절 화사히 피었다
시들면 자취 없는 사랑 말고
저무는 들녘일수록 더욱 은은히 아름다운
어새풀처럼 늙어갈 순 없을까
바람 많은 가을 강가에 서로 어깨를 기댄 채
우리 서로 물이 되어 흐르다면
바위를 깎거나 갯벌 허무는 밀물 썰물보다는
물오리떼 쉬어 가는 저녁 강물이었음 좋겠어
이렇게 손을 잡고 한세상을 흐르는 동안
갈대가 하늘로 크고 먼 바다에 이르는 강물이었음 좋겠어
- 도종환 시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모두
눈에 보이는 것마다 시가 되는 때가 있다
가슴으로 다가오는 것마다 노래가 되는 때가 있다
이 세상 많은 시인들도 그러하였을 것이다
바람이 불 때마다 머리칼을 흔드는 시를 만나는 때가 있다
뜨겁게 흐르는 것들이 서늘히 이마를 씻어주는 시들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한 달씩 두 달씩 시를 만날 수 없게 되었다
이 세상의 많은 시인들도 그러할 것이다
부지런히 일하고 더 바쁘게 읽고 쓰곤 하였지만
시를 만나는 날이 멀어지는 때가 있다
조금은 풀 죽은 모습으로 웃어 넘기곤 하였지만
시를 버리고라도 더 소중한 것을 찾아
가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였지만
우리가 모르고 있는 무슨 까닭이 있을 것이다
제 가슴의 가장 소중한 것 하나를 잃어가고 있기 때문이거나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우리가 저 시를 버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시가 먼저 우리를 배반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 도종환 시 ‘눈에 보이는 것마다 시가 되는 때가 있다‘
이 세상이 쓸쓸하여 들판에 꽃이 핍니다
하늘도 허전하여 허공에 새들을 날립니다
이 세상이 쓸쓸하여 사랑하는 이의
이름을 유리창에 썼다간 지우고
허전하고 허전하여 뜰에 나와 노래를 부릅니다
산다는 게 생각할수록 슬픈 일이어서
파도는 그치지 않고 제 몸을 몰아다가 바위에 던지고
천 권의 책을 읽어도 쓸쓸한 일에서 벗어날 수 없어
깊은 밤 잠들지 못하고 글 한 줄을 씁니다
사람들도 쓸쓸하고 쓸쓸하여 사랑을 하고
이 세상 가득 그대를 향해 눈이 내립니다
- 도종환 시 ‘이 세상이 쓸쓸하여‘모두
보리수나무잎이 지고 있었습니다.
아무 소리도 없이
당신도 말씀이 없으셔
사방은 적막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뒷산 숲도 맞배지붕 위에 내려와
턱을 고이곤 먼 데 하늘을 바라볼 뿐
보리수나무잎만 가끔씩 지고 있었습니다
범종소리 사라진 쪽 바라보며
말이 없으신 당신을 쳐다보다
보리수 그늘 돌아나오는 저녁
쯧쯧, 번뇌의 속옷은 그냥 둔 채
겉옷만 갈아입고 싶어하다니
그런 소리를 들었습니다
보리수 열매가 짧게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 도종환 시 ‘보리수 나무‘모두
* 나와 너의 무심한 이해와 대화가 시로 쓰여진다. 단어를 나열하고 무수히 다른 변화로 이어지지만 내 의도하는 심중의 말과 이미지가 가만히 스며들어 내 삶과 행동에 반추되는 글들은, 시들은 아름답다. 하루에 주어지는 24시간의 시간속에 ‘무수히’ 다가올 수 있는 ‘바람’같은 현실의 감정들,, 시는 현실에 뿌리를 내림으로 ‘다양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 슬프고 간절하면 꽃 한송이, 노래 한줄, 눈물 한올,,. 이런 것들이 생명을 갖고 현실화 된다. 부드럽다 라는게 연약한 것은 아니다. 때론 부드러움이 강철같은 단단함을 넘어 선다. 현대를 사는 사람들은 안다,, 우리의 삶이 가지고 있는 곧고 강한 리럴리티가 ‘생물’로 살아 존재하는 순간을,,,
삶 에서,, 순간의 바람에서 온전히 나로 존재할 수 있는 힘이 무엇인지. 시를 읽으며 시는 생활이고 삶 이여야 함을 다시 느낀다. 그 절망과 다시 일어서는 희망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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