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내게로 온다
여릿여릿
머얼리서 온다.
하늘은, 머얼리서 오는 하늘은
호수처럼 푸르다.
호수처럼 푸른 하늘에
내가 안긴다. 온 몸이 안긴다.
가슴으로, 가슴으로
스미어드는 하늘
향기로운 하늘의 호흡.
따가운 볕,
초가을 햇볕으로
목을 씻고,
나는 하늘을 마신다
자꾸 목말라 마신다.
마시는 하늘에
내가 익는다.
능금처럼 마음이 익는다.
- 박 두진시 ‘하늘’모두
이는 먼
해와 달의 속삭임
비밀한 웃음
한 번만의 어느 날의
아픈 피 흘림
먼 별에서 별에로의
길섶 위에 떨꿔진
다시는 못 돌이킬
엇갈림의 핏방울
꺼질 듯
보드라운
황홀한 한 떨기의
아름다운 정적
펼치면 일렁이는
사랑의
호심(湖心)아
-박두진 시 ‘꽃’모두
산새도 날라와
우짖지 않고
구름도 떠가곤
오지 않는다.
홀로 앉은
가을 산의 어스름.
호오이 호오이
소리높여
나는
누구도 없이
불러보나.
소리는 헛되이
빈 골 골을
되돌아 올 뿐.
산그늘 길게 늘이며
붉게 해는 넘어가고
황혼과 함께
이어 별과 밤은 오리니.
인생은 갈수록 쓸쓸하고
사랑은 한갖 괴로울 뿐.
그대 위하여 나는 이제도
이 긴 밤과 슬픔을 갖거니와
이 밤을 그대는 나도 모르는
어느 마을에서 쉬느뇨.
- 박두진 시 ‘도봉’모두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 야 솟아라. 산 넘어 산 넘어서 어둠을 살라먹고 산 넘 어서 밤새도록 어둠을 살라먹고 이글이글 애뙨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달밤이 싫여, 달밤이 싫여, 눈물 같은 골짜기에 달밤 이 싫여. 아무도 없는 뜰에 달밤이 나는 싫여…,
해야 고운 해야 늬가 오면 늬가사 오면 나는 나는 청산이 좋아라. 훨훨훨 깃을 치는 청산이 좋아라 청산 이 있으면 홀로래도 좋아라.
사슴을 따라 사슴을 따라, 양지로 양지로 사슴을 따라, 사슴을 만나면 사슴과 놀고.
칡범을 따라 칡범을 따라, 칡범을 만나면 칡범과 놀고…,
해야 고운 해야 해야 솟아라. 꿈이 아니래도 너를 만나면 꽃도 새도 짐승도 한자리 앉아, 워어이 워어이 모두 불러 한자리 앉아, 애뙤고 고운 날을 누려 보리라.
- 박두진 시 ‘해’모두
산아. 우뚝 솟은 푸른 산아. 철철철 흐르듯 짙푸른산아. 숱한 나무들. 무성히 무성히 우거진 산마루에. 금빛 기름진 햇살은 내려오고. 둥 둥 산을 넘어. 흰 구름 건넌 자리 씻기는 하늘. 사슴도 안 오고 바람도 안 불고. 넘엇 골 골자기서 울어오는 뻐꾸기.....
산아. 푸른 산아. 네 가슴 향기로운 풀밭에 엎드리면. 나는 가슴이 울어라. 흐르는 골짜기 스며드는 물소리에. 내사 줄줄줄 가슴이 울어라. 아득히 가버린 것 잊어버린 하늘과. 아른아른 오지않는 보고 싶은 하늘에, 어찌면 만나도 질 볼이 고운 사람이, 난 혼자 그리워라. 가슴으로 그리워라.
티글 부는 세상에도 벌레같은 세상에도 눈 맑은, 가슴 맑은, 보고지운 나의 사람. 달밤이나 새벽녘, 홀로 서서 눈물 어릴 볼이 고운 나의 사람. 달 가고, 밤 가고, 눈물도 가고, 틔어올 밝은 하늘 빛난 아침 이르면, 향기로운 이슬밭 푸른 언덕을, 총총총 달려도 와줄 볼이 고운 나의 사람.
푸른 산 한나절 구름은 가고, 골 넘어, 골 넘어, 뻐꾸기는 우는데,눈에 어려 흘러가는 물결같은 사람 속, 아우성쳐 흘러가는 물결같은 사람 속에, 난 그리노라. 너만 그리노라. 혼자서 철도 없이 난 너만 그리노라.
- 박두진 시 ‘청산도(靑山道)‘모두
<시가 내게로 왔다 - 김용택이 사랑하는 시/마음산책>
내게서 당신의 눈길을 돌리시지 마셔요.
내게서 당신의 음성을 끊으시지 마셔요.
내게서 당신의 입김을 때시지 마셔요.
내게서 당신의 포옹을 풀으시지 마셔요.
그러시면 나는 천지가 온통 깜깜해 버려져요.
그러시면 나는 두귀가 절벽으로 귀가 멀어요.
그러시면 나는 전신이 꽝꽝차게 얼음 얼어요.
그러시면 나는 낭떠러지 저 낭떠러지로 절벽으로 떨어져요.
- 박두진 시 ‘고백(告白)‘모두
* 1939년 정지용의 추천으로 문장에 시 <향현(香峴)>, <묘지송(墓地頌)> 등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등단했다. 8.15 광복 이듬해인 1946년에는 조지훈, 박목월과 함께 청록파(靑鹿派)를 결성하고 청록집(靑鹿集)이라는 시집을 발간했다. 이후 이화여자대학교, 연세대학교 등에서 국어국문학과 교수를 역임했으며 1998년에 83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프랑스 도시인 '베종 라 로멘'에는 이 시인의 시비(詩碑)가 있으며 한국지방자치단체 국제화재단 파리사무소 주관으로 본인의 고향인 안성시와 <베종 라 로멘> 시가 협력해서 설립했고 시비에는 대표작 <해>가 앞면에 한글로, 뒷면에 프랑스어로 번역되어 새겨졌다. 4.19 당시에는 대학 교수들의 데모 대열에 앞장서서 총탄이 오가는 와중에도 꼿꼿하게 시위를 주도했다고 한다.
생전에 산과 난을 좋아 했으며, 수석에도 조예가 깊어 60년대 말에 돌 하나만을 주제로 ’수석열정‘ 시리즈를 <현대문학>지에 연재 했으며, “작은 한 개의 돌에는 어떤 조각품에도 견줄 수 없는 묘악한 조형미가 갖춰져 있다. 난이 부드러우며 의연하다면 수석은 웅혼섬세하고 성자롭다.” 라고 썼다.
자유로운 영혼이고자 했던 그의 삶과 염원이, 그의 읽는 시마다 짙게 배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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