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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그 쓸쓸한 영혼

여인의 슬픈 ‘목’ / 노천명 시인.

모딜리아니, 〈두상〉, 석회암 / 높이 64cm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冠이 향그러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물 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고는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 데 산을 쳐다 본다.


- 노천명 시 ‘사슴' 모두



                  

대자 한치 오푼 키에 두치가 모자라는
불만이 있다. 부얼부얼한 맛은 전혀
잊어버린 얼굴이다
몹시 차 보여서 좀체로 가까이 하기를
어려워 한다.

그린 듯 숱한 눈썹도
큼직한 눈에는 어울리는 듯도 싶다마는…
전시대 같으면 환영을 받았을 삼단
같은 머리는 클럼지한 손에
예술품 답지 않게 얹혀져 가냘픈 몸에
무게를 준다. 조그마한 거리낌에도
밤잠을 못자고 괴로와하는 성미는
살이 머물지 못하게 학대를 했다

꼭 다문 입은 괴로움을 내뿜기보다
흔히는 혼자 삼켜 버리는 서글픈
버릇이 있다. 세 온스의 살만
더 있어도 무척 생색나게 내 얼굴에
쓸데가 있는 것을 잘 알지만 무디지
못한 성격과는 타협하기가 어렵다

처신을 하는 데는 산도야지처럼
대담하지 못하고
조그만 유언 비어에도 비겁하게 삼가한다
대처럼 꺾어는 질지언정

구리처럼 휘어지며 꾸부러지기가 어려운
성격은 가끔 자신을 괴롭힌다.


- 노천명 시 ‘自畵像(자화상)’모두







언제든 가리
마지막엔 돌아가리
목화꽃이 고운 내 고향으로
조밥이 맛있는 내 고향으로
아이들 하늘타리 따는 길 머리엔
학림사 (鶴林寺)가는 달구지가 조을며 지나가고
대낮에 여우가 우는 산골
등잔 밑에서
딸에게 편지를 쓰는 어머니도 있었다.
등글레산에 올라 무릇을 캐고
접중화 싱아 장구채 범부채
마주채 기륙이 도라지 체니곰방대
곰취 참두룹 개두룹 혼닢나물을
뜯는 소녀들은
말 끝마다 꽉 소리를 찾고
개암쌀을 까며 소녀들은
금방맹이 놓고 간
도깨비 얘기를 즐겼다.

목사가 없는 교회당
회당직이 전도사가 강도상을 치며
설교하던 산골이 문득 그리워
아프리카에서 온 반마 (斑馬)처럼
향수에 잠기는 날이 있다.
언제든 가리
나중엔 고향 가 살다 죽으리
모밀꽃이 하아얗게 피는 곳

나뭇짐에 함박꽃을 꺽어 오던 총각들 서울 구경
원이더니차를 타보지 못한 채 마을을 지키겠네.
꿈이면 보는 낯익은 동리
우거진 덤불에서
찔레순을 꺽다 나면 꿈이었다


- 노천명 시 ‘고향’모두




대추 밤을 돈사야 추석을 차렸다.

이십 리를 걸어 열하룻장을 보러 떠나는 새벽

막내딸 이쁜이는 대추를 안 준다고 울었다.

송편 같은 반달이 싸릿문 위에 돋고,

건너편 성황당 사시나무 그림자가 무시무시한 저녁,

나귀 방울에 지껄이는 소리가 고개를 넘어 가까워지면

이쁜이보다 삽살개가 먼저 마중을 나갔다.


- 노청명 시 ‘장날’모두



나는 얼굴에 분칠을 하고
삼단같이 머리를 땋아 내린 사나이.

초립에 쾌자를 걸친 조라치들이
날나리를 부는 저녁이면
다홍치마를 두르고 나는 향단이가 된다.

이리하여 장터 어느 넓은 마당을 빌어
람프 불을 돋운 포장 속에선
내 남성이 십분 굴욕되다.

산 넘어 지나온 저 동리엔
은반지를 사주고 싶은
고운 처녀도 있었건만
다음 날이면 떠남을 짓는

처녀야
나는 집씨의 피였다.
내일은 또 어느 동리로 들어간다냐.

우리들의 도구를 실은
노새의 뒤를 따라
산딸기의 이슬을 털며
길에 오르는 새벽은
구경꾼을 모으는 날나리 소리처럼
슬픔과 기쁨이 섞여 핀다.


- 노천명 시 ‘남사당’모두




임 오시던 날-노천명



임이 오시던 날
버선발로 달려가 맞았으련만
굳이 문 닫고 죽죽 울었습니다

기다리다 지쳤음이오리까
늦으셨다 노여움이오리까
그도 저도 아니오이다

그저 자꾸만 눈물이 나
문 닫고 죽죽 울었습니다



유월의 언덕-노천명



아카시아꽃 핀 유월의 하늘은
사뭇 곱기만 한데
파라솔을 접듯이
마음을 접고 안으로 안으로만 들다

이 인파 속에서 고독이
곧 얼음모양 꼿꼿이 얼어들어옴은
어쩐 까닭이뇨

보리밭엔 양귀비꽃이 으스러지게 고운데
이른 아침부터 밤이 이슥토록
이야기해 볼 사람은 없어
파라솔을 접듯이
마음을 접어가지고 안으로만 들다

장미가 말을 배우지 않은 이유를
알겠다
사슴이 말을 하지 않는 연유도
알아듣겠다


아카시아꽃 핀 유월의 언덕은
곱기만 한데




당신을 위해-노천명



장미모양
으스러지게 곱게 되는 사랑이 있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시죠?

감히 손에 손을 잡을 수도 없고
속삭이기에는 좋은 나이에 열없고
그래서 눈은 하늘만을 쳐다보면
얘기는 우정 딴 데로 빗나가고
차디찬 몸짓으로 뜨거운 맘을 감추는
이런 일이 있다면 어떻게 하시죠

행여 이런 마음 알지 않을까 하면
얼굴이 화끈 달아올라
그가 모르기를 바라며 말없이
지나가려는 여인이 있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시죠



구름 같이-노천명



큰 바다의 한 방울 물만도 못한
내 영혼의 지극히 적음을 깨닫고
모래언덕에서 하염없이
갈매기처럼 오래오래 울어보았소.
어느 날 아침이슬에 젖은
푸른밤을 거니는 내 존재가
하도 귀여운 것 같아 들국화 꺾어들고
아침다운 아침을 종다리처럼 노래하였소

허나 쓴웃음 치는 마음
삶과 죽음 이 세상 모든 것이
길이 못풀 수수께끼어니
내 생의 비밀인들 어이 아오

바닷가에서 눈물짓고
이슬언덕에서 노래불렀소
그러나 뜻 모를 이 생
구름같이 왔다가나보오



수필: 설야 산책(雪夜散策)-노천명



저녁을 먹고 나니 퍼뜩퍼뜩 눈발이 날린다

나는 갑자기 나가고 싶은 유혹에 눌린다

목도리를 머리까지 푹 눌러 쓰고 기어이 나서고야 말았다

나는 이 밤에 뉘 집을 찾고 싶지는 않다

어느 친구를 만나고 싶지도 않다

그저 이 눈을 맞으며 한없이 걷는 것이 오직 내게 필요한 휴식일 것 같다

끝없이 이렇게 눈을 맞으며 걸어가고 싶다. 이 무슨 저 북구 노르웨이에서 잡혀 온 처녀의 향수이랴.



눈이 내리는 밤은 내가 성찬을 받는 밤이다

눈이 이제 제법 대지를 희게 덮었고, 내 신바닥이 땅 위에 잠깐 미끄럽다

숱한 사람들이 나를 지나치고 내가 또한 그들을 지나치건만 내 어인 일로 저 시베리아의 눈 오는 벌판을 혼자 걸어가고 있는 것만 같으냐 가로등이 휘날리는 눈을 찬란하게 반사시킬 때마다 나는 목도리를 푹 쓴다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가야겠다고 느끼면서도 내 발길은 좀체 집을 향하지 않는다



기차 바퀴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린다

지금쯤 어디로 향하는 차일까. 우울한 찻간이 머리에 떠오른다

그 속에 앉았을 형형색색의 인생들 기쁨을 안고 가는 자와 슬픔을 받고 가는 자을 한자리에 태워 가지고 이 밤을 뚫고 달리는 열차. 바로 지난해 정월 어떤 날 저녁 의외의 전보를 받고 떠났던 일이 기어이 슬픈 일을 내 가슴에 새기게 한 일이 생각나며 밤차 소리가 소름이 끼치도록 무서워진다



이따금 눈송이가 뺨을 때린다

이렇게 조용히 걸어가고 있는 내 맘속에 사라지지 못할 슬픔과 무서운 고독이 몸부림쳐 거의 내가 견디어 내지 못할 지경인 것을 아무도 모를 것이다

이리하여 사람은 영원히 외로운 존재일지도 모른다

뉘 집인가 불이 환히 켜진 창 안에선 다듬이 소리가 새어 나온다

어떤 여인의 아름다운 정이 여기도 흐르고 있음을 본다

고운 정을 베풀려고 옷을 다듬는 여인이 있고 이 밤에 딱다기를 치며 순찰을 돌아 주는 이가 있는 한 나도 아름다운 마음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머리에 눈을 허옇게 쓴 채, 고단한 나그네처럼 나는 조용한 내 집 문을 두드렸다

눈이 내리는 성스러운 밤을 위해 모든 것은 깨끗하고 조용하다

꽃 한 송이 없는 방안에 내가 그림자같이 들어옴이 상장(喪章)처럼 슬프구나.



창밖에선 여전히 눈이 싸르르 내리고 있다

저 적막한 거리거리에 내가 버리고 온 발자국들이 흰 눈으로 덮여 없어질 것을 생각하며 나는 가만히 누웠다

회색과 분홍빛으로 된 천장을 격해 놓고 이 밤에 쥐는 나무를 깎고 나는 가슴을 깎는다.


당신을 위해-노천명



장미모양
으스러지게 곱게 되는 사랑이 있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시죠?

감히 손에 손을 잡을 수도 없고
속삭이기에는 좋은 나이에 열없고
그래서 눈은 하늘만을 쳐다보면
얘기는 우정 딴 데로 빗나가고
차디찬 몸짓으로 뜨거운 맘을 감추는
이런 일이 있다면 어떻게 하시죠

행여 이런 마음 알지 않을까 하면
얼굴이 화끈 달아올라
그가 모르기를 바라며 말없이
지나가려는 여인이 있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시죠.




별을 쳐다보며-노천명



나무가 항시 하늘로 향하듯이
발은 땅을 딛고 우리
별을 쳐다보며 걸어갑시다


친구보다
좀더 높은 자리에 있어본댓자
명예가 남보다 뛰어나 본댓자
또 미운 놈을 혼내 주어 본다는 일
그까짓 것이 다아 무엇입니까


술 한 잔만도 못한
대수롭잖은 일들입니다
발은 땅을 딛고 우리
별을 쳐다보며 걸어갑시다



이름 없는 여인이 되어-노천명



어느 조그만한 산골로 들어가
나는 이름 없는 여인이 되고 싶소
초가 지붕에 박넝쿨 올리고
삼밭엔 오이랑 호박을 놓고
들장미로 울타리를 엮어
마당엔 하늘을 욕심껏 들여놓고
밤이면 실컷 별을 안고
부엉이가 우는 밤도 내사 외롭지 않겠소


기차기 지나가 버리는 마음
놋양푼의 수수엿을 녹여 먹으며
내 좋은 삶과 밤이 늦도록
여우 나는 산골 얘기를 하면
삽살개는 달을 짓고
나는 여왕보다 더 행복하겠소



저녁별-노천명



그 누가 하늘에 보석을 뿌렸나
작은 보석 큰 보석 곱기도 하다
모닥불 놓고 옥수수 먹으며
하늘의 별을 세던 밤도 있었다

별하나 나하나 별두울 나두울
논뜰엔 당옥새 구슬피 울고
강낭수숫대 바람에 설렐 제
은하수 바라보면 잠도 멀어져

물방아소리- 들은지 오래
고향하늘 별 뜬 밤 그리운 밤
호박꽃 초롱에 반딧불 넣고
이즈음 아이들도 별을 세는지




푸른 오월-노천명


청자빛 하늘이 육모정 탑 위그에 린 듯이
곱고 연못 창포 잎에 여인네 맵시 위에
감미로운 첫 여름이 흐른다

라일락 숲에 내 젊은 꿈이 나비처럼 앉은 정오
계절의 여왕 오월의 푸른 여신 앞에
내가 웬일로 무색하고 외롭구나

미물처럼 가슴속으로 몰려드는 향수를
어찌 할 수 없어 눈은 먼 데 하늘을 본다

긴 담을 끼고 외딴 길을 걸으며
생각이 무지개처럼 핀다

풀 냄새가 물큰 향수보다 좋게 내 코를 스치고

청머루순이 벋어 나오던 길섶 어디 메선 가 한나절
꿩이 울고 나는 활나물 호납나물 젓가락 나물 참나물을
찾던 잃어버린 날이 그립지 아니 한가 나의 사람아

아름다운 노래라도 부르자 서러운 노래라도 부르자

보리밭 푸른 물결을 헤치며 종달새 모양
내 마음은 하늘 높이 솟는다

오월의 창공이여 ! 나의 태양이여



구름같이-노천명



큰 바다의 한 방울 물만도 못한
내 영혼의 지극히 적음을 깨닫고
모래언덕에서 하염없이
갈매기처럼 오래오래 울어보았소.
어느 날 아침이슬에 젖은
푸른밤을 거니는 내 존재가
하도 귀여운 것 같아 들국화 꺾어들고
아침다운 아침을 종다리처럼 노래하였소

허나 쓴웃음 치는 마음
삶과 죽음 이 세상 모든 것이
길이 못풀 수수께끼어니
내 생의 비밀인들 어이 아오

바닷가에서 눈물짓고...
이슬언덕에서 노래불렀소
그러나 뜻 모를 이 생
구름같이 왔다가나보오



* 나르시시즘: 자기애(自己愛)를 뜻한다. 그리스 신화에서 호수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사랑하다 결국 물에 빠져 죽은 나르키소스(Narcissos) 이야기에서 유래하였다.

- 어떤 면에서 선구적 여성시인의 모습을 보였지만, 다른 면으로 여성으로서의 비극을 보여준 그녀는 ‘재생 불량성 빈혈’이라는 고독한 병명으로 마감 되었다고,, “여인이 혼자서 세상을 혼자서 걸어가는 길이 진정 외롭고 구성진 사실인지 모른다“는 그녀의 말대로 힘들고 외로운 여성 문인의 길을 걸어 왔으며, 사슴처럼 고고하게 살고자 하였으나 시대의 탁류에 휩쓸려 ‘종북시인’ ‘친일시인’ 소리를 들으며 45세의 젊은 나이에 소천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