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
오직 한가닥 있어
타는 가슴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아직 동트지 않은 뒤골목의 어딘가
발자국소리 호르락소리 문 두드리는 소리
외마디 길고 긴 누군가의 비명소리
신음소리 통곡소리 탄식소리 그 속에 내 가슴팍 속에
깊이깊이 새겨지는 네 이름 위에
네 이름의 외로운 눈부심 위에
살아오는 저 푸르른 자유의 추억
되살아오는 끌려가던 벗들의 피 묻은 얼굴
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
떨리는 치떨리는 노여움으로 나무판자에
백묵으로 서툰 솜씨로
쓴다.
숨죽여 흐느끼며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 김 지하 시 ‘타는 목마름으로’모두
황톳길에 선연한
핏자욱 핏자욱 따라
나는 간다 애비야
네가 죽었고
지금은 검고 해만 타는 곳
두 손엔 철삿줄
뜨거운 해가
땀과 눈물과 모밀밭을 태우는
총부리 칼날 아래 더위 속으로
나는 간다 애비야
네가 죽은 곳으로
부줏머리 갯가에 숭어가 뛸 때
가마니 속에서 네가 죽은 곳
밤마다 오포산에 불이 오를때
울타리 탱자도 서슬 푸른 송이파리
뻗시디뻗신 성장처럼 억세인
황토에 대낮 빛나던 그날
그날의 만세라도 부르랴
노래라도 부르랴
대샆에 대가 성긴 동그만 화당골
우물마다 십년마다 피가 솟아도
아아 척박한 식민지에 태어나
총칼 아래 쓰러져 간 나의 애비야
어이 죽순에 괴는 물방울
수정처럼 맑은 오월을 모르리 모르리마는
작은 꼬막마저 아사하는
길고 잔인한 여름
하늘도 없는 폭정의 뜨거운 여름이었다
끝끝내
조국의 모든 세월은 황톳길은
우리들의 희망은
낡은 짝배들 햇볕에 바스라진
뻘길을 지나면 다시 모밀밭
희디흰 고랑 너머
청천 드높은 하늘에 갈리던
아아 그날의 만세는 십년을 지나
철삿줄 파고드는 살결에 숨결 속에
너의 목소리를 느끼면 흐느끼며
나는 간다 애비야
네가 죽은 곳
부줏머리 갯가에 숭어가 뛸 때
가마니 속에서 네가 죽은 곳.
- 김 지하 시 ‘황톳길’모두
줄 위에
외줄 위에
서른 살을 거네 산다면 그 뒤마저
죽음 후에도 산다면 영겁까지도
칼날에 더한 가파로움
잠보다 더한 이 홀로 가는 허공의 아픔
매호씨
또드락 딱딱
웃겨야 하네 아무렴
우린 광대이니까
애비로부터 또 할애비로부터
花開로 부터 영원으로 南倉으로부터
어둑한 逆旅 구석 피 토하는 마지막 소멸까지
아무렴 우리는 광대이니까 아무렴
죽음은 좋은 것
단 한 번뿐일 테니까
외줄을 거네
왼쪽도 오른쪽도 허공도 땅도 모두
지옥이라서 거네 딴 길이 없어
제길할 딴 길이 없어 어름에 거네
목숨을 발에 걸어 한중간에 걸어 이미 태어날 적에
이봐
매호씨
정기정기 정쩌꿍
구경꾼이 되도록
많은 쪽이 좋네 아무렴
우린 광대이니까 구경꾼은 되도록
야멸찬 것이 좋네
죽임을 죽어
박살나 피 토해도 웃겨야 하네 아무렴
죽음은 좋은 것
단 한 번뿐일 테니까.
- 김 지하 시 ‘*어름‘ 모두
김지하 시접집1(1963~ 1985) ,솔, 1993.
* 어름: 1, 얼음'의 비표준어 2,두 사물의 끝이 맞닿는 자리 3, 남사당놀이의 네 번째 놀이
목련은 피어
흰빛만 하늘로 외롭게 오르고
바람에 찟겨 한 잎씩
꽃은 돌아
흙으로 가데
가데
젊은 날
빛을 뿜던 친구들 모두
짧은 눈부심 뒤에 남기고
이리로 혹은 저리로
아메리카 혹은 유럽으로
하나 둘씩 혹은 감옥으로
혹은 저승으로
가데
검은 등걸 속
애틋했던 그리움 움트던
겨울날 그리움만 남기고
무성한 잎새 시절
기인 긴 기다림만 남기고
봄날은 가데
목련은 피어
흰빛만 하늘로 외롭게 오르고
바람에 찟겨 한 잎씩
꽃은 돌아
흙으로 가데
가데
젊은 날
빛을 뿜던
아 저 모든 꽃들이 가데
-김지하 시 ‘회귀'모두
일산의
오피스텔 빌딩
11층 고공 꼭대기에 앉아 한낮에
빈
들녘
자그마한 흙집 하나를 생각한다.
돌아간다는 것
잊힌다는 것
숨는다는 것,
벼루와 먹과 붓과 종이
고승대덕들의 옛비석 번역본이 열권
그리고
오래 묶은 시 몇편
네시간 자고 열 시간 일한다는
동경대 출신 우파 엘리뜨들 앞에서
자기는 열 한시간 자고 네시간 일한다고 말한
쯔루미 선생의 교오또대 철학이
노을 비끼는 이 저녁에 웬일로
뚜렷 뚜렷이
허공에 새겨지는 구나
가
조용히
엎드리자
엎드려 귀를 크게 열고
바람소리 속에서 죽음을 기다리자
네시간 일하고
열시간 잠자고.
-김지하 시 ‘흙집' 모두
땅 끝에 서서
더는 갈 곳 없는 땅 끝에 서서
돌아갈 수 없는 막바지
새가 되어서 날거나
고기가 되어서 숨거나....
혼자 서서 부르는
불러
내 속에서 차츰 크게 열리어
저 바다 만큼
저 하늘 만큼 열리다
이내
작은 한덩이
검은 돌에 빛나는
한오리 햇빛
애린
나.
-김지하 시 '애린'모두
새라면 좋겠네
물이라면 혹시는 바람이라면
여윈 알몸을 가둔 옷
푸른 빛이여 바다라면
바다의 한때나마 꿈일 수나마 있다면
가슴에 꽂히어 아프게 피 흐르다
굳어버린 네모의 붉은 표지여 네가 없다면
네가 없다면
아아 죽어도 좋겠네
재 되어 흩날리는 운명이라도 나는 좋겠네
캄캄한 밤에 그토록
새벽이 오길 애가 타도록
기다리던 눈들에 흘러넘치는 맑은 눈물들에
영롱한 나팔꽃 한 번이나마 어릴 수 있다면
햇살이 빛날 수만 있다면
꿈마다 먹구름 뚫고 열리든 새푸른 하늘
쏟아지는 햇살 아래 잠시나마 서 있을 수만 있다면
좋겠네 푸른 옷에 갇힌 채 죽더라도 좋겠네
그것이 생시라면
그것이 지금이라면
그것이 끝끝내 끝끝내
가리워지지만 않는다면.
- 김 ㅈㅣ하 시 ‘푸른옷’ 모두
내가 뒤늦게
나무를 사랑하는 건
깨달아서가 아니다
외로워서다
외로움은 병
병은 병균을 보는 현미경
오해였다
내가 뒤늦게
당신을 사랑하는 건
외로워서가 아니다
깨달아서다
- 김지하 시 ‘아내에게’모두
*시집<花 開>.실천문학사.2002
하늘을 혼자서 못 가지듯이
밥은 서로 나눠 먹는 것
밥은 하늘입니다.
하늘의 별을 함게 보듯이
밥은 여럿이 같이 먹는 것
밥이 입으로 들어갈 때에
하늘을 몸 속에 모시는 것
밥은 하늘입니다.
아아 밥은 모두 서로 나눠 먹는것.
- 김 지하 ‘밥은 하늘 입니다’ 모두
** 쌀이, 밥이, 똥이 하늘이다.
1980년대 초반 감옥에서 막 나온 김지하가 후배 민중가수 김민기에게 말했다.
“밥이 하늘이다.”
김민기가 받아쳤다. “똥이 밥이다.”
그러자 김지하가 “아이고, 형님!” 하더란다.
‘밥이 하늘’이라는 말은 동학에서 나왔다.
쌀이 영그는 데는 하늘과 땅과 사람, 그 천지인 삼재(三才)가 모두 참여한다.
절의 공양간에는 이런 게송이 붙어있다.
이 음식이 어디서 왔는가
내 덕행으로 받기가 부끄럽네
마음의 온갖 욕심 버리고
육신을 지탱하는 약으로 알아
보리를 이루고자 공양을 받습니다.
- 젊은시절 김 지하 시인의 ‘밥’ 또는 ‘나는 밥 이로 소이다’ 라는 책과 함석훈 선생의 ‘생각하는 씨알이라야 산다’라는 책을 여러번 읽어 보았다. 79~80년대에 학교를 다녀 본 사람들은 교정을 둘러싼 전경들과 백골단, 그리고 끝나지 않을듯 이어지던 교내데모, 피어나던 최류탄과 지랄탄의 메퀘한 숨막힘,, 콧물 눈물 쏱아내며 우리가 왜 쫒겨야 하는가?!.., 하는 의문도 가지지 못하고 숨차게 뛰어가던 그 시절을 기억한다.
세월은 흘러도 곳곳에서 구호의 함성과 전경들의 대치, 벽을 쌓듯 길을 막고 서있는 전경차량의 벽은 여전히 차갑고 단단하다. 그제는 ‘간호사법’ 외치며 길 위에 나선 수많은 ‘나이팅게일’들을 보았다. 모든 정치적인 논란을 떠나서 ‘사람위에 사람이 군림’하는, 불법으로 자행되는 ‘관행’은 없어져야 한다고 믿는다. 김 지하 선생이 살아 계셨다면 하마디 하셨겠다.
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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