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가는 연인
이선영
-왜 그를 사랑하지?
-바람처럼 살고 싶어서요*
아름다움은 결핍이지
연초록 대나무 숲을 둘러봐
새벽 이슬이 채 베갯잇 戀情(연정)을 걷어 가지 않은
아름답지만 눈도 없고 귀도 들리지 않아
게다가 우리를 들어올려 줄 두 개의 팔 따위란 원시의
몸에서나 돋아난 것일 테니
그 동정 없는 장대나무 숲을 우리는 숨이 턱에 차도록
달리고 있지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알아채 버린 두 팔과 팔의 질기
고 질긴 얽힘이니까
구부러진 골목길로 우리를 연거푸 몰아넣는 생활과
우리의 몸을 늘 거기 문설주로 세워 두는 의무에,
서로를 못 알아보게 될 때까지 늙어가고야 말 육체에,
우리는지금 쫓기고 있는 중이지
대나무 숲은 우리를 잠시 그 무관심 속에 풀어 놓지만
언제 우리의 길을 가로막는 흉기가 되어 날아올지 몰라
아름다움은 적이 취하면 금방 무기로 변하는 야속함
이거든
내가 그를 따라 도망 중인 이유는
몸을 넘어뜨리며 바람처럼 내달리려는 그의 의지 때
문이지
그가 나를 떨구어 내지 않는 이유는
나만이 그 바람을 읽어 내는 야생화이기 때문이야
* 장이머우 감독 영화 `연인' 에서.
저녁의 연인들
황학주
침대처럼 사실은 마음이란 너무 작아서
뒤척이기만 하지 여태도 제 마음 한번 멀리 벗어나지 못했으니
나만이 당신에게 다녀오곤 하던 밤이 가장 컸습니다
이제 찾아오는 모든 저녁의 애인들이
인적 드문 길을 한동안 잡아들 수 있도록
당신이 나를 수습할 수 있도록
올리브나무 세 그루만 마당에 심었으면
진흙탕을 걷어내고
진흙탕의 뒤를 따라오는 웅덩이를 걷어낼 때까지
사랑은 발을 벗어 단풍물 들이며 걷는 것이었습니다
사랑이 아니라면 어디 사는지 나를 찾지도 않았을
매 순간 당신이 있었던 옹이 박인 허리 근처가 아득합니다
내가 가고,
나는 없지만 당신이 나와 다른 이유로 울더라도
나를 배경으로 저물다 보면
역 광장 국수 만 불빛에 서서 먹은 추운 세월들이
쏘옥 빠진 올리브나무로
쓸어둔 마당가에 꽂혀 있기도 할 것 같습니다
당신이 올리브나무로 내 생애 들러주었으니
내 영혼의 마지막 연인
김태동
슬픔이 다하는 날 나는 길모퉁이에서 내 영혼의
마지막 연인을 떠나보내며
아름답게 죽어가리라 그런 아름다운 시절이 있었다고
담벼락
굵은 글씨로 써내려가리라 빗물이 하염없이 내 마지막
숨결의 영상을 흘러갈지라도
나 그 빗물 되어 사랑했었다고 소리치리라 떠나면
돌아오지 않을 사람도
오랜 침묵 뒤 저 금빛 저무는 산 한 그루
나무가 되리니
누구보다 먼저 아름다운 시절 사랑했었다고
목이 메는 갈매기도 세월은 늘
물결 부서지는 암초더미에 걸려 가족을 잃고 사랑을 잃고
푸르게 푸르게 울고 있듯이
슬픔이 다하는 날 나 돌아보지 않으며
나,
이 아름다운 시절 사랑하며 이곳을
떠난다고 길모퉁이
지우지는 내 영혼의 마지막 연인이여
연인이여 빗물이 하염없이 내 마지막 숨결의 여상을
흘러간다.
이런 아름다운 시절이 있었다고 이런 아름다운 시절이
나의 피투성이 연인
정미경
지나고 보니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는 게 인생이고 어떤 일도 견뎌내는 게 인간이더라.뭘
못 견디겠어. 오늘 밤 돌아가 당신 파일을 열어 하나하나 딜리트 키를 누르고 가려움도 딜
리트 키를 눌러버리고, 그렇게 견뎌볼까 봐. 차갑긴 하겠지만 마지막 보았던 당신의 얼굴을
껴안고 말이야. 당신은 언제까지 나를 물어뜯으며, 나의 연인으로 남아 있어야 해. 피투성
이 연인, 잔혹한 연인, 당신이 특별히 가혹한 사람이란 생각은 안해. 모든 연인은 더 사랑
한 자에게 잔혹한 존재니까.
사랑이 아름답고 따스하고 투명한 어떤 것이라고는 이제 생각하지 않을래. 피의 냄새와 잔혹
함, 배신과 후회가 없다면 그건 사이보그의 사랑이 아닐까 싶어. 당신, 전등사 갔던 날 기억
나? 사랑도 그런 거라는 생각이 들어. 전등사를 보지 못한 그날을 전등사 갔던 날,로 이름지
었듯 뭔가가 빠져있는 그대로 그냥 사랑이라 불러주는 거지.
물고기 연인
이민하
그는 지붕 위에 올라 녹색 루즈를 바른다
학교에 가지 않는다고 집에서 쫓겨난 남자
무슨 소용이에요 어머니
벽 속의 열대어들을 꺼내 주는 칠판은 없는걸요
그는 오늘도 내가 준 지폐에 노란 매니큐어로 편지를
쓴다
넥타이를 매다 말고 나는 연인의 지느러미를 만져 준다
바닥까지 늘어뜨린 그의 지느러미에서
불에 타다 만 풀 냄새가 난다
지붕 위의 그가 불안해
지느러미를 잡아흔들어 방바닥으로 떨어뜨린다
편지에 쓴 철자법을 검사하고
스타킹처럼 달라붙는 교복 안에 그를 집어넣고 밀봉을
한다
해질녘 돌아와 보면
연인의 끈적한 타액이 여기저기 어질러져 있다
혓바닥이 스친 벽마다 비린내가 슬고 있다
나는 그를 식탁 위에 올려 놓고 사료를 준다
그의 혀 끝에 달린 플러그를 내 입에 꽂고
그에게 이름을 붙여 준다
밤이면 잊어버리는 그의 발음을 입 안의 채찍으로 상기
시킨다
연인은 밤새 오물오물 우우거린다
잠들기 전 나는 그의 혀와 지느러미를 둥글게 말아
내 몸 안에 밀봉을 한다
마지막 지퍼인 두 눈을 잠근다
연인들 3 - 몸 속의 몸
최승자
끝 모를 고요와 가벼움을 원하는
어떤 것이 내 안에 있다.
한없이 가라앉았다
부풀어오르고,
다시 가라앉았다
부풀어오르는,
무게 없는 이것,
이름할 수 없이 환한 덩어리,
몸 속의 몸, 빛의 몸.
몸 속이 바닷속처럼 환해진다
연인들 2 -두 마리 새의 화답
지하 사무실,
나의 지하 묘지,
아직 덜 깨어난
아직 덜 부활한 내 귀를 위해
낮게 열린 창 밖으로부터
들려오는 두 마리의 화답.
보이지 않는 어디에선가
서로 통신하는 저것들,
지직, 재잭, 지직, 재재잭.
저 두 마리 새는 내 안에서 울고 있나,
내 밖에서 울고 있나,
아니 저것들은 수세기 전에 운 것인가,
아니면 수세기 뒤에 우는 것인가.
이제는 납골당만해진
시간의 이부자리를 마저
납작하게 개어놓고
나 또한 깨어나 그들에게
연인처럼 화답할 때,
갇혀 있던 다른 한 마리의 새처럼
지하 무덤, 이제는 뻥 뚫려버린
시간을 뚫고 무한을 향해
우주 중심까지 수직 상승 할 때,
연인들1 - 빛의 혼인
최승자
이 무기력한 흙빛 눈빛은 어디서 왔던가,
언제 왔던가,
누구를 기다렸던가
내가 디딘 땅,
흙속에 묻힌 내 신부여,
너는 얼마나 오래 기다렸는가,
한 천년, 혹은 한 만년?
네 몸 다 굳어져
흙인형으로 변했다가,
이제 마침내 흙으로 부서져내릴 참이었구나,
신랑들은 언제나 너무 늦게서야 오고,
오, 오래, 너무 오래 기야려야만 하는 신부들,
땅 위의 따님, 따님들.
그렇게 오래 기다려온
네 절망의, 납빛 눈빛.
몇만년의 어둠, 무력의 맹점에서
이제 비로소 몇억 광년을 날아와
내 눈빛이 너를 찾는다.
내 눈빛이 네 흙의 눈빛과 만나니,
너 비로소 하늘빛으로
살아, 날아오르는,
이 빛의 혼인, 축복의 환한 빛,
수천 길 땅속에서 끌어낸
나의 신부, 그 몸에 빛이, 생기가 돌고,
나의 잠자는 미녀,
이제 그 눈을 떠라,
나의 페르세포네, 나의 에우리디케,
오 나의 신부, 나의 누이여,
나의 말쿠트,
나의 웅녀, 나의 따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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