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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숲에 들다

Lover 1,

그녀의 머리칼이 바람에 날린다.








어떤 연인들
도종환




동량역까지 오는 동안 굴은 길었다
남자는 하나 남은 자리에 여자를 앉히고
의자 팔걸이에 몸을 꼬느어 앉아 있었다
여자는 책갈피를 한 장 한 장 넘기고
남자는 어깨를 기울여 그것들을 읽고 있었다
스물 여섯 일곱쯤 되었을까
남자의 뽀얀 의수가 느리게 흔들리고
손가락 몇 개가 달아나고 없는 다른 손등으로
불꽃 자국 별처럼 깔린 얼굴 위
안경테를 추스리고 있었다
뭉그러진 남자의 가운데 손가락에 오래도록 꽂히는
낯선 내 시선을 끊으며
여자의 고운 손이 남자의 손을 말없이 감싸 덮었다
굴을 벗어난 차창 밖으로 풀리는 강물이 소리치며 쫓아오고
열차는 목행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여자의 머리칼을 쓰다듬는 남자의 손가락 두 개
여자는 남자의 허리에 머리를 기대어 있었고
남자의 푸른 심줄이 강물처럼 살아서 흘러내리고 있었다










연인
김언




우리는 보통 밤에 얘기하고 낮에 뜨거워집니다. 우리는 우리 둘 중에서 어느
한 사람이 연인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우리는 경향에 가깝습니다. 우리는 보통 밤에 얘기하고 낮에는 짐을 옮기면서
물끄러미 우리의 얼굴을 쳐다보고 이런 얘기를 나눕니다. 마치 자신의 얼굴처럼
부끄럽습니다.
우리는 경향이니까요. 할 수 있는 대로 멀리 뻗어가는 두 사람의 팔다리를 바로
등뒤에서 느끼고 만져봅니다. 우리는 정말 굳어갑니다. 달아나기 위하여 가장
높은 곳에서 옥상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직전의 포즈는 모두 사실입니다. 내일부터는 우리가 내다보는 창밖에서 이상하게
울음이 큰 사나이와 여자의 옷자락이 펄럭입니다. 떨어지기 위하여 우리는 어디서
부터 입을 맞출까요? 커피숍에서 아니면 가로등 아래 공원에서 그도 아니면 혼자서
걸어보는 공중전화 부스 안에서 은밀하게 오늘과 내일의 거리를 상영합니다.
내일은 각자 움직이고 있습니다. 우리는 난폭하게 화해하는 양편의 팔을 등뒤에서
느끼고 정말 만져봅니다. 조용히 입을 감추고 있습니다. 스르르 눈이 내려옵니다.
키스는 이 영화의 전부입니다.








고등어 연인
강정




   같이 고등어살을 발라먹던 여자가 살짝 웃던 날이었다
   입술에 묻은 고등어기름이 낡은 암자의 처마처럼 햇빛을 받고 있었다
   사진기를 들이밀며
   자꾸 웃어 보이라던 여자가 이내 눈물을 흘렸다
   뱃속에 삼킨 고등어가 알이라도 까는지
   물컹물컹 낯선 감정들이 몸 안에 물길을 내고 있었다
   여자는 입술을 핥던 혀로 내 얼굴을 핥았다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물기가 심장에 넘쳐흘렀다
   여자는 일그러진 내 얼굴을 향해 연신 셔터를 눌렀다
   시간이라는 평상에 톡톡 금이 가고 있었다
   발라낸 고등어 뼈를 냄새 맡던 고양이와
   고등어 냄새를 물씬 풍기는 내가 한 프레임 안에서
   여자의 밥이 되었다
   갈라진 평상 위에서 여자가 파랗게 웃고 있었다
   내 심장을 꺼내 햇볕 아래 펼쳐놓고 있었다
   먼 나라에서 돌아오는 대한항공 여객기의 비행운이
   지구 밖의 시간을 떨어뜨렸다
   배부른 고양이가 화들짝 놀라 잠을 깨던
   지상의 마지막 오후,
   여자가 찍은 풍경들이 새로운 魚族의 표본으로 떠올랐다
   하늘을 나는 고등어를 우리는 사랑이라 부르기로 하며 긴 슬픔을 우렸
  다
   처음 마주한 밥상에서 서로에게 영원한 未知로 남은 것이다









연인들
문태준



바람이 건너오고 있었다
마른 벼루에 먹물이 번지고 있었다
바람들이 건너오고 있었다
무리로 돌아오고 있었다
연밭 가득 연잎들이 흥성거리고 있었다
얼마나 아름다운가,
어슷비슷한 바람들 속에서도 한 사람만을 알아보는 서글서글한 연잎들의 눈망울을
저 천수(千手) 바라는
허공 속으로 깊이 번지는 둥근 소리들은










방갈로의 연인들
이영주



공중에 떠 있는 방갈로의 바닥이 흔들렸네 누군가 지난 여름에 새겨놓은 칼자국, 길게 그어진 불길한 신음 물결에 떠밀리는 거품처럼 오랫동안 내 뱃속에서 부글거렸네 도시에 두고 오지 못한 너와 나의 방, 등을 돌린 너와 나의 방, 어긋난 방갈로 베니어합판이 밤새 삐걱거렸네 긴 출혈에 몸을 떨던 바다 머리맡에 펼쳐둔 지도를 들여다보면 수만 개의 창문을 건너 내 방을 떠나 네 방으로 가는 길 뒤척일 때마다 몸 한쪽으로 물이 열리는 길 좌표는 보이지 않았네 조금씩 떠내려가는 네 방과 내 방이 어떤 비명을 바다에 그어놓은지 포말 같은 모든 연인의 창이 부서지고 깨진 유리조각이 지도 위에서 빛나고 있었네 무너진 방갈로를 떠돌다 울부짖는 방들, 파도가 게워놓은, 바다의 눈먼 태아들









발다로의 연인들
강인한




  독화살이 심장을 파고들어 마침내 숨을 끊은
  콸콸 더운 피를 끄집어낸 곳, 여기쯤인가 부러진 뼈 한 도막
  몇 날 몇 밤의 증오를 순순히 받아들인 곳
  피는 굳고, 벌들이 찾던 꽃향기는 언제 희미해진 것일까

  부릅뜬 눈으로 빨아들인 마지막 빛은
  사랑하는 이여 당신의 눈, 햇빛보다 부신 웃음이었다
  껴안은 팔에서 부서져 내리는 허무한 흙덩이
  잘 가라, 우리들 포옹 아래로 흘러가는 시간이여
  눈보다 희고 부드러운 시간들이여

  꿀처럼 달고 보드라운 당신의 입술은
  아름다운 노래를 버리고 어디로 갔나 만토바의 하늘을 스치는
  한 덩이 구름, 한 줄기 놀빛으로 산을 넘어
  서늘한 밤의 대기가 되고
  내 온몸을 거울처럼 담아 빛나던 당신의 눈은
  벌써 여름밤 별자리로 찾아가 맑게 빛나고 있거니

  부패라는 것, 오 망각이란
  가시 많은 사람살이에 얼마나 고마운 벗일 것인지
  오랜 망설임 끝에 다가가서
  한 점 한 점 불타는 기쁨으로 땀흘리던 육체는
  기꺼이 벌레의 밥이 되고 다시 흩어져 희미한 슬픔으로
  흐르다 올리브나무 수액이 되고, 더러는 바람에
  무심한 바람에 팔랑이는 올리브나무 잎새가 되었다

  잠도 천 년, 다시 또 몇 천 년이 꿈결 같았다
  무서운 살육의 전설도 기억에서 지워지고
  수많은 파란이 지나가고 난 뒤
  문득 깨어난 아침이 웬일인가 조금도 낯설지 않았다

  침묵으로 말하노니
  손대지 마라, 우리들 기나긴 사랑의 포옹을
  비가 오고 눈이 오는 곳, 빗발치는 편견을 법으로 세우는 곳이라면
  우리 이대로 다시 몇 천 년이라도 견디고 견딜 것이니.







연인들
김산


                                                                
1. 곽재구

   제대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열흘짜리  영창을  다녀오니 부대가
바뀌어  있었다  오월에도  송이눈  흩날리는 인제  원통에서  나는
침묵하는 법을 배웠다  입술담배를  물고 매일같이 전투화를 닦았
다 나는 제대했지만 그는 상경하지  않았다  그는  끝까지  대인동
의 달맞이꽃을 노래했지만 나는 서울에  왔으므로 곧 그를 잊었다
십 년 전의 일이다




2. 김남주

   만인을 위해 내가 일할  때 나는 자유, 그의 슬로건이다  제대하
고 등록금이 없어 영광원자력  발전소에 들어갔다 일당  삼만삼천
원짜리  전기조공이었다 칠  미터  철근 돔 위에서 후들후들, 케이
블을 깔았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함민복도  이곳을  거쳐  갔다고
한다 첫 월급으로 그와  똑같은 검고 굵은 뿔테 안경을  맞췄다 나
는 비로소, 자유인이었다




3. 기형도

  등나무 아래서 짜라투스트라를 읽었다 아침 저녁으로 졸음이 쏟
아졌다 심심하면  드르릉, 기타를 쳤다 타박타박 배춧잎을 뒤뚱뒤
뚱  절룩아비로 바꿔 교내문학상을 타고 학장과 악수를 했다 부드
러운 손이  내 몸에 닿자 나는 안개처럼 잘려  나갔다 김훈은 말했
다 축생으로도  태어나지 마라 몇 년 후 그는  신기섭을  데려갔다
나는 불행하게도 무사했다




4. 김기택

나는 방향치 길치였으므로  두 발이 운전대였으므로 지하철과 버
스로 출근했다 그를 읽으며  나는 화가의  꿈을  키웠다  밑그림을
그리다 꾸벅꾸벅 지각했고  직장을  몇 번  옮겨야만 했다 그는 말
하지 않고 모든 것을 보여주었다  날아가는 새도 4B  연필로 새장
에 가두어  버리는 그는  시력 9.0  모겐족의  후예였다  나는 자주
안경을 벗고, 눈을 비비곤 했다





5. 문태준

   인천  가정동  제일만화 주인 아저씨를 닮았다 열 권 보고 세 권
보았어요, 해도 베시시 웃을  것  같다  알면서도 모른 척, 그 척으
로 따지자면 강호임에 틀림 없다 능청 떨며 조개의  발을  천천히
거두어들이는  품새가  예리하다  덕분에  연안부두  어시장과 김
천의료원이 호황을  이뤘다는  설도 있다  교배견이  창궐하는 가
운데 몇 안 되는 토종 누렁이다





6. 권혁웅

  그는 감독관이지만 수험생들과  같이 시험을  본다  말많은 삼수
생들은 학원폭력이라  떠들었지만  빙그르르, 웃으며  친절한  혁
웅氏 답지대신 만화책 한 권으로 모든 억측을 입막음했다 마징가
와  스파이더맨을 근위병으로 선데이서울을  옆구리에 끼고 비행
접시 위에 앉아 시험 감독을 했다 나는 그가 흘린 애마를 늘 호주
머니에 넣고 다녔다





7. 황병승

  미스 황, 이란 소녀가 있었다 학창시절 조그맣고 귀엽고 깜찍한
소녀가 있었는데 나는 그녀를 미스 황, 이라  불렀다 미스 황,  밥
먹을래? 미스 황, 술  먹을래? 미스 황, 은  도무지 쑥스러워 히죽,
웃고 몰라요  몰라요 신촌 오! BAR에서 처음 안았을 때 두근두근
울렁울렁 쿵쿵, 아직도 혼자 사는 미스 황, 나에게 미스 황, 은 그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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