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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숲에 들다

가문비 나무,

소프트 원목에 속하는,, 악기로도 크리스마스 트리로도 쓰인다.





잔설처럼 쌓여 있는 당신,
그래도 드문드문 마른  땅 있어
나는 이렇게 발 디디고 삽니다
폭설이 잦아드는 이 둔덕 어딘가에
무사한 게 있을 것 같아
그 이름들을 하나씩 불러보면서
굴참나무, 사람주나무, 층층나무, 가문비나무......
나무 몇은 아직 눈 속에 발이 묶여 오지 못하고
땅이 마르는 동안
벗은 몸들이 새로운 빛을 채우는 동안
그래도 이렇게 발을 디디고 삽니다
잔설이 그려내는 응달과 양달 사이에서



- 나 희덕 시 ‘殘雪잔설‘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창작과비평사, 2005(1994).




치키치키, 빗방울이 16비트 리듬으로
살아나는 광릉수목원에 가본 적 있나요
수십 만의 히피나무들이 부동자세로
입석 매진된 한밤의 우드스탁 말이예요
레게머리 촘촘한 수다쟁이 가문비나무와
짚내복을 사철 입고 사는 늙은 측백나무 사이
우르르쾅, 천둥 싸이키가 번쩍거리고
다국적 수목원 안에 쏟아지는 박수 소리
고막을 찢으며 축제는 시작되지요
굵어진 빗방울이 시름시름 앓고 있던
뽕나무 그루터기를 흠씬 두들기고 가는 밤
비자도 없이 말레이시아에서 입국한
고무나무도 언제 새끼를 쳤는지 말랑말랑한
혀를 내밀고 빗방울을 받아먹고 있네요
때론 아무것도 흔들지 못한 빗방울들도 있어요
맨땅에 헤딩을 하고 어디에도 스미지 못하고
웅덩이에 모여 울고 있는 음악들을 나무들은
뿌리를 뻗어 싹싹 혀로 핥아주기도 해요
지상의 모든 음악들이 생생불식 꿈틀거리는
수십만의 히피나무들이 밤새 기립박수를 치는
광릉수목원 즐거운 우드스탁으로 놀러 오실래요
지난 가을부터 자작나무 가지 위에 걸터앉아
나, 당신만을 기다리는 올 나간 테디베어예요


- 김 산 시 ‘광릉, 우드스탁’
* 2007년 [시인세계] 시인상 당선작,




너를 생각하는 내 혀끝에서 늘 침엽이 돋고
그 푸른 바늘로 너를, 네 몸 빈 구석 구석을
끝내는 견고한 네 심장벽의 중심을 찔러
솟는 한 방울 붉은 피를 혀끝으로 맛보고 싶다
아니다 내가 침엽의 마음을 가진 것은
혀투로 드러난 내 마음의 부피를 한껏 줄여
비수 같은 네 사랑에 찔리지 않기 위해서다
가시 박힌 짐승처럼 울부짖지 않기 위해서다
사철 푸른 내 몸빛깔이 무섭다
네 붉은 피로 내 마음이 단풍들까 두렵다
바람에 흔들리다 제 심장을 찌르는, 나는,

  
- 홍 은택 시 ‘가문비나무는 침엽을 가졌다‘
* 통점에서 꽃이핀다/황금알




가문비나무에 비가 내리고
풀뿌리 밑으로 물이 흐른다.
무성한 입김의 시간이 온다.
고요하고 견딜 수 없는 시간이 온다.
한낮의 깊은 방이 흐르는 물결에 씻겨
하얗게 마르고,
날마다 씨뿌리고 간 빛나는 산 발끝에
물의 비늘을 일으키는 바람이 분다.

비 내리는 창밖으로 여자들은 지나가고
우산을 접은 채 물묻은 손으로 문을 연다.
신념을 위한 시간이 온다.
무성한 입김으로 살 수 있는 시간이다.

지금은 우리의 행복.
아직 일이 끝나지 않았어도 우리는 행복해...
젖은 풀잎이 수면 위에 떠오르고,
더 많은 절실함을 위하여
우리가 우리 몫으로 채운 길.
창밖으로 물소리가 귓속 깊이 씻어 올 때
희망은 굳센 상처.
기다린 자의 가슴에 만발할
희망은 굳센 상처.


- 박 주택 시 ‘희망은 굳센 상처’
* 꿈의 이동건축 / 박주택 시집 / 천년의시작




플러그를 슬픔에 꽂는다
슬픔은 가문비나무가 방풍림으로 서 있는 저수지에서
몰려와 방 구셕 가득히 빛난다


슬픔이 그려 놓은 그림자를 넘나들며
아들 재림이 스탠드 스위치를 껐다가 켠다
막이 오르고 내리는 생활의 무대에서
책, 장난감, 가구들이 시간 속에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슬픔이 미인의 얼굴처럼 눈부시게 빛났다가
어둠 속에 잠긴다
기쁨도 꺼졌다가 다시 켜진다


텔레비전 광고에서 속옷을 입는 패션 모델의 등을 보며
잊었던 욕망이 고개를 내밀어 웃는다
물 준 행운목이 무성히 피워 올린
현존의 충만한 시간을 기쁨과 슬픔이 교대로 바라본다


장난에 물린 재림이가 플러그를 슬픔에서 뺀다
슬픔과 함께 사는 기쁨도 조용히 사라지고
내 마음이 어둠 속으로 캄캄한 얼굴을 묻는다.


- 김 백겸 시 ‘플러그’
* 시집 가슴에 앉힌 山 하나



별어곡 1


그대가 깃들고도 눈 맞는 가문비나무 숲처럼 오래오래 쓸쓸하다 천지엔 아득한 눈발을 몰고 길 재촉하는 바람이 언 손 부벼 길들을 부르다

깊은 산울음에 몸 숨기고 너와집 집 한채 눈보라에 떨고 있다

그리워할수록 폭설 그치지 않는 내 가만한 그대, 겨운 내가 뚜욱뚝 부러져 실한 가지 한 짐 가득 지고 어두운 눈길을 비츨거리며 그대 부를까 불러볼까 무장무장 깊은 산울음 가문비나무 나무 사이로 산은 산을 불러

추운 눈보라 속으로 사라지고 그대 부르던 내 오랜 기다림은 눈과 눈들의 저 한사코 퍼붓는 눈발로 나를 가둔다 바라보면 그대 탁탁 튀는 불꽃 너머로 사위고 어지러운 발자국 함부로 남긴 채 쓰러진 나를 가만히 들추면 아아 잉걸 속, 다시 눈 뜨는 그대

그대가 깃들고도 눈 맞는 가문비나무 숲처럼 오래오래 쓸쓸한 것은 내 기다림에 익숙한 숲길과 그 기다림 속에 어느새 지어 버린 너와집 집 한채 그대에게 내 건 등불을 그대가 모르기 때문이다 가문비나무 나무숲

오오 너와집 내 그리움에 갇힌 그대, 그리워할수록 퍼붓는 눈과 눈들의 희디흰 아우성이, 그리움이 지은 집 한 채 허물듯이 허물듯이...

내 그리움에 갇힌 슬픈 그대
내 그리움이 울어버린 눈보라
눈덮힌 깊은 산 가문비나무숲
내가 지은 너와집


- 김 일님 시 ‘별어곡 1’




밤마다 머리풀고 가문비나무 숲이 울더라

먼 강물 자욱히 물 넘는 소리

무덤마다 비가 오리라

쑥대풀은 우거지고

쓰러지고

반딧불 한 점 불려가더라

모두가 빈집이더라

다만 자정 무렵 한 남자가

절벅절벅 젖은 양말로 돌아와

램프의 심지를 죽이며 낮게 울더라



- 이 외수 시 ‘雨 秀’
* [풀꽃 술잔 나비] '87




옛다리 건너 제비꽃, 종다리 같은 마음이라면 가문비나무 삭정이 되어 스무

날이고 서른 날이고 바람이나 키우는 마음이라면 그대 창가 목덜미 고운 어

린새 둥지나 되고 싶은 마음이라면 마음의 상처라도 다할 수 없는 그런 마음

이라면 안개 속으로 다가가서 자막처럼 지우고 싶은 마음이라면 미닫이 닫고

용서하라 용서하라 혼자서 울고 싶은 마음이라면



- 유 재영 시 ‘샛강에 가자 -꿈같은 절망19’





내소사에는 모든 침묵들이 있다 내소사 입구의 가문비
나무 숲에는 가분비나무의 침묵이 숨어 있고 담장 너머
청대숲에는 청대의 침묵이 숨어 있다 고목이 되어 쓰러진
느티나무 위에, 승방 앞에 벗어놓은 흰 고무신 위에, 새로
쌓은 돌담 위에 침묵은 숨쉬고 있다 푸르른 몸이 된 침묵
들은 내소사를 물소리 속으로 끌고 가거나 작은 풍경소리
에 놀라 깨게 한다

나는 정교하게 조각된 꽃무늬 문살 위에 머물며 꽃무늬
문살 사이의 푸른 침묵 속으로 든다 침묵이 된다 이상도
하지 스님들 모두 푸른 침묵이 되어 해우소를 말없이 드
나들고 이른 시간 내소사를 찾는 사람들도 푸른 침묵에
물들어 있다 내소사를 가득 채우고 있는 저 푸른 침묵들,
청대숲이 바람에 흔들린다 푸른 침묵들이 일렁이며 무게
를 버린다 내소사가 향내 속으로 가라앉는다


- 김 윤배 시 ‘내소사의 침묵들이 가벼워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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