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하다 4 [이희중]
―어린 주목(朱木)에게
내 마음이 어떻게 너에게 건너갔을까
나는 그저 네가 사는 자리가 비좁아 보여서,
너와 네 이웃이 아직 어렸던 시절
사람들이 너희를 여기 처음 심을 때보다
너희가 많이 자라서
나는 그저 가운데 끼인 너를
근처 다른, 너른 데 옮겨 심으면
네 이웃과 너, 모두 넉넉하게 살아갈 것 같아서
한 여섯 달 동안, 한 열흘에 한 번 네 곁을 지날 때마다
저 나무를 옮겨 심어야겠네, 라고
생각만 했는데
네가 내 마음을 읽고 그렇게 힘들어하는 줄 몰랐다
네가 스스로 자라기를, 살기를 포기할 줄 몰랐다
박혀 사는 너희들은
나돌며 일을 꾸미는 사람들이 성가시겠지
손에 도끼를 들지나 않았는지
마음에 톱을 품지나 않았는지
다른 까닭이 더 있는지, 사람인 내가 짐작하기 어렵지만
미안하다, 내 마음에
작으나마 모난 돌, 쇠붙이가 엿보였다면
이미 더는 푸르지 않은 잎 색,
안에 예민한 네가 아직 머무는지 알 길 없으나
다시 봄 네 옆을 지날 때는 네 푸른 앞날만 생각할게
- 나는 나를 간질일 수 없다, 문학동네, 2017
태어나지 않은 말들 의 세계 [조용미]
말을 하고 싶었다
부드러운 것들이 딱딱해지기 전에
결코하지 않으려던 그 말을 하고 싶었다
색이 바래기 전에
망설임 끝에 말을 하려고 보니 손이 쭈글쭈글해져 있었다
입을 열었더니 얼굴이 부수어졌다
망설이는 동안 백 년이 지나가버렸다
안간힘이 시간을 헤아리지 못하게 했다
입안엔 어느새 옥이 물려져 있었다
5천만 년 전의 박쥐 화석처럼
공허하고 아름다웠지만 살아 있지 않았다
백 년후에는 너무 끔찍한 말이 되었다
바오바브나무처럼 주목처럼 은행처럼
시간을 살아내는 말이 있다는 가설도
문자를 이겨내는 말이 있다는 풍문도
갸륵하고 향기로웠지만 그 색이 참담하였다
그 뜻이 공허하였다
말을 하고 싶었던 자는 누구일까
태어나지 않은 말들은 모두 어디에 웅크리고 있을까
젖지 않고 썩지 않는 그 말들의 세계는
수수만년 어떤 영토를 확장하고 있을까
- 당신의 아름다움, 문학과지성사, 2020
태백산 주목 [최두석]
예로부터 화랑부터 의병장까지 왕부터 무당까지
기도하러 오르는 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태백산 장군봉 천제단 주변에는
살아 천 년 죽어 천 년 전설의 주목이 흩어져 있다
그중에는 껍질을 벗기 전 젊은 나무도 있고
이미 뼈대만 남은 고사목도 있지만
삶의 충동과 죽음의 인력 사이의 팽팽한 줄다리기를 견디느라
온몸이 심하게 뒤틀린 나무가 많다
나의 전생의 어미가 겨울잠 자고 나왔을 듯한 몸통에
죽은 가지가 산 가지보다 훨씬 많은 기이한 몰골들이
마치 온몸으로 기도하는 모습처럼 보이는데
이토록 절실하게 기도하는 모습은
어떤 조각가도 도저히 새길 수 없다고 보이는데
이제 삶의 충동과 죽음의 인력 사이의 줄다리기를
몸으로 느껴야 하는 내가 천제단에 올라
기도의 제목은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각자 살아온 생애처럼 기이한 모습의 주목들을 어루만지며
기도하는 자세만 흉내 내고 있다.
- 숨살이꽃, 문학과지성사, 2018
누가 가리왕산을 안고 운다 [최승호]
가리왕산의 큰 슬픔에 대해서
나는 말할 자격이 없다
슬프다
누가 가리왕산을 안고 운다
왕사스레나무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다
고작 17일간의 겨울올림픽을 위해서
천년 주목들이 넘어져 있다
기계톱들이
가리왕산의 허리를 베면서 전진한다
아름드리 들메나무가 넘어진다
눈측백나무가 넘어진다
만년석송들이 쓰러진다
슬프다
누가 가리왕산을 안고 운다
- 누군가의 시 한 편-시는 오래도록 펄럭이는 깃발이다, 달아실, 2018
휘둥그래진 눈 [천양희]
장수거북이의 주둥이가 새의 부리처럼 뽀족하다구요?
잠수새의 눈이 물 속에서도 사람을 볼 수 있다구요?
엉겅퀴꽃의 날개가 씨앗에 매달려 있다구요?
서로나무의 술이 나무 등걸에서 나온다구요?
풀잎새가 꽃자리를 차지한다구요?
주목나무는 고목이 되어서도 썩지 않는다구요?
박쥐는 새가 아닌데도 새처럼 날아다닌다구요?
솔새들은 별자리를 바라보며 날아간다구요?
물닭들은 바람쪽으로 머리를 두고 산다구요?
제비들은 남쪽을 향해 줄을 선다구요?
그렇다면
그래서
나는 가끔 우두커니가 되구요.
- 나는 가끔 우두커니가 된다, 창비, 2011
하늘을 볼 때마다 [천양희]
하늘을 바라보는 마음은 늘 같은데
하늘은 볼 때마다 다르다 하겠는지요
서울살이 삼십 년 동안 나는 늘 같은데
서울은 볼 때마다 다르다 하겠는지요
길에는 건널목이 있고
나무에는 마디가 있다지요?
산천어는 산록 맑은 계곡에 살고
눈먼 새는 죽을 때 한 번 눈뜨고 죽는다지요?
동박새는 동백꽃에만 살고
주목나무는 고목이 되어도 썩지 않는다지요?
귀한 진주는 보잘것없는 조개에서 나오고
아름다운 구슬은 거친 옥돌에서 나온다지요?
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고
모든 문제는 반드시 답이 있다지요?
사는 것이 왠지 슬픈 생각이 든다고 하겠는지요
슬픔을 가질 수 있어 내가 기쁘다고 하겠는지요.
태백산행 [정희성]
눈이 내린다 기차 타고
태백에 가야겠다
배낭 둘러메고 나서는데
등 뒤에서 아내가 궁시렁댄다
지가 열일곱 살이야 열아홉 살이야
구시렁구시렁 눈이 내리는
산등성 숨차게 올라가는데
칠십고개 넘어선 노인네들이
여보 젊은이 함께 가지
앞지르는 나를 불러 세워
올해 몇이냐고
쉰일곱이라고
그중 한 사람이 말하기를
조오흘 때다
살아 천년 죽어 천년 한다는
태백산 주목이 평생을 그 모양으로
허옇게 눈을 뒤집어쓰고 서서
좋을 때다 좋을 때다
말을 받는다
당골집 귀때기 새파란 그 계집만
괜스레 나를 보고
늙었다 한다
- 돌아다 보면 문득, 창비, 2008
시 숲에 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