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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숲에 들다

메타세쿼이아나무

담양 메타쉐퀴이야 나무길.







메타세쿼이아나무 아래서 [ 박라연]




메타세쿼이아 그대는
누구의 혼인가
내 몸의 뼈들도 그대처럼
곧게곧게 자라서
뼈대 있는 아이를 낳고 싶다

헤어질 때마다 우리는
서로의 빈 가지를 흔든다
주고 싶은 무엇을 찾아내기 위해서
슬픔을 흔들어 털어버리기 위해서

못다한 사랑은 함부로
아무에게나 툭툭 잎이 되어 푸르고
누구든 썩은 삭정이로 울다가
혼자서 영혼의 솔기를 깁는다

내가 내 눈물로
한 그루 메타세쿼이아가 되었을 때
쓸쓸히 돌아서는 뒷모습
빗물처럼 떨어지는 슬픔을 보았지만

달려가 그대의 잎이 되고 싶지만
나누지 않아도 함께 흐르는 피
따뜻한 피가 되어 흐른다


              - 서울에 사는 평강공주, 문학과지성사,1993




아깝다 [나태주]




교회 앞 비좁은 길에
높다라히 서 있던 나무
한 그루 메타세쿼이아
처음 교회를 지은 목사님이 심은 나무

40년도 넘은 어느 날
새로 부임한 젊은 목사님 그 나무
싹둑 잘라버렸다
이유는 교회 건물이 안 보이고
교회 십자가를 가린다는 것

어찌 젊은 목사님
그 나무가 바로 교회이고
해마다 키를 더하는 또 다른
십자가인 걸 몰랐을까.


              - 한들한들, 밥북 , 2015




아직도, 때때로 그리고 자주 [김택희]




쓰촨성 원시림을 걷고 있어요 사방이
나무 냄새에 젖어 안개 같기도 하고 음성 같기도 한 것들
찰박하게 차오르네요 나는 지금도 생각하죠
내 안에 가두고 꺼내지 못하는 말
분명 할 말이 있는데 아무리 더듬어도 눈동자 끝에서만 가물댈 뿐
터지지 않던 기억, 당신은 없나요
들려오는 새소리처럼 생생하게 간절한데 그릴 수조차 없어요
좁은 마도계곡을 다 내려와 멀지 않은 곳에 불시착한
헬리콥터의 잔해를 보아요
날개를 보면 날고 싶던 생각에 나는
흩어져 있는 날개를 맞추다가 바람이 전해주는
희망의 메시지 새겨 넣어요
더듬거리는 말처럼 큰 나무 옆구리로 내미는 작은 움의 손짓과
방목된 나무 아래 힘차게 뻗은 뿌리의 발짓과
먹이를 물고 둥지로 오르는 어미 새의 날갯짓

백악기를 건너온 메타세쿼이아나무 숲을 지나
물 흠뻑 머금은 물푸레나무 몸통 사이로
바람이 길을 트네요
나무 우듬지에 새 부리 같은 나뭇잎 몇 개
바람의 눈썹 콕콕 건드리고 있어요 깜박이네요
어쩌면 오늘 밤엔 가둔 말들 해독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 젊은 시 2010, 문학나무, 2010




완성되지 않은 시 [서상민]




축사가 보이는 저수지 뚝방에 앉아 담밸 피웠다
제비꽃 민들레꽃 함부로 제방을 넘어서고
수면에 손을 담근 버드나무 머리 결을
바람이 쓰다듬어주었다
우리는 완성하지 못했거나
완성할 수 없는 시에 대해 얘기했다
메타세쿼이아 어린 나무들이
팔려나갈 날을 기다리며
황토 위로 한철 그늘을 불리고 있었다
가끔씩 들려오는 영각소리를 들으며
어렴풋하게 사랑의 완성은 이별일거라 생각했다

카페에 제비꽃처럼 민들레꽃처럼 마주 앉아 커필 마셨다
아직 가장 아름다운 하늘을 본 적 없어서
노을 보는 걸 좋아했다
구름이 낮아진 날들을 예비하지 못한 채
저수지 표면에 떨어지는 태양의 깃털들을 사랑했다
이별은 슬픈 거지만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
마주보며 웃었다

다시 찾은 저수지 뚝방에 앉아 담밸 피웠다
돌 몇 개를 저수지에 던졌다
소 울음 같은 긴 파문은
이승에선 본 적 없는 무늬 같았다

잠 들었으나 꿈이 오지 않았다


           - 검은 모자에서 꺼낸 흰 나비처럼, 시인동네, 2022




구부러지는 것들 [박용하]




  어깨가 구부러진 청솔들에게도 한때 빛나는 유년이 있
었으리라
  보기보담 일찍 구부러진 공원의 낙엽들을 나는 좋아한다
  구부러지는 식물들 그것은 윤회를 닮아 있다
  강물은 오늘도 무서운 속도로 상류의 물들을 하류로
실어 나르고
  둔덕의 풀꽃들은 그림자 길게 휘어 달빛을 잡는다
  그리고 나는 세상을 휘휘 젓는 직선에 괴로워한다
  등이 구부러진 과일들
  등이 구부러진 노인들
  등이 구부러진 황소
  야! 아예 온몸이 구부러짐의 시작의 끝인 시작의
  둥근 공과도 같은 하루는 있는 것일까
  구부러지다 바로 서고 바로 서다 구부러지는 풀
  나는 그 풀들의 유연성을 삶이라는 이름으로 곰곰 되뇌
어본다
  구부러지는 것들은 자연의 숨통을 닮아 있다
  흘러가는 강의 휘어짐
  세상에서 세상 밖으로 이어진 길들
  한사람에게만 마음이 휘어진 여자
  하지만 구부러진다는 것이 너에게 굽실거리는 것과 같
을 때
  그것이 통념일 때 우리는 압제된 사회에 살고 있네
   겨울바람에 구부러지다가도 바로 서는 한겨울의 나무
들을 나는 좋아한다
  구부러지는 것들
  구부러지다가도 도저히 안 되겠다며 바로 서는 것들
  그와 같은 것들은 너무 적다

               - 26세를 위한 여섯 개의 묵시, 달아실,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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