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움과 틈새의 시간 [곽효환]
푸르게 일렁이던 청보리 거둔 빈 들에
하얀 소금 덩이 같은 메밀꽃을 기다리는
비움과 틈새의 시간
배꽃과 복사꽃 만발했던 자리에
코스모스와 키 큰 해바라기 몸 흔들고
배롱나무 더 붉게 물드는
세상의 풀과 나무와 산과 강이
제각각의 빛깔을 머금고 뒤섞이는 시간
징검다리 여남은 개면
눈에 띄게 수척해진 물살을 건너
다음 계절에 닿을 듯하다
크게 물굽이를 이루며 사행하는 물살에
수없이 부딪히며 어질고 순해진 돌들에게서
거친 시대를 쓿는 소리가 들린다
흐르는 것이 어디 강뿐이겠냐마는
초록이 다 지기 전에
물길 따라 난 길이 문득 끊어진
강변 마을 어느 허술한 찻집에 들어
아직 고여 있는 것들
미처 보내지 못한 것들
함께 흘려보내야겠다
빠르게 질러가느라 놓친 것들
그래서 잃어버린 것들
찬찬이 새김질해봐야겠다
- 너는, 문학과지성사, 2023
절.1 [이영광]
늙은 몸은 절하기 위해 절에 온다
절 가지고 될 일도 안 될 일도 있고
절 없이도 일은 되기도 안 되기도 하는 것인데,
그저 모든 걸 다 들어 바치는 절은
내가 받는 듯, 난감하다
온몸으로 사지를 구부리고
두 손에 그 힘을 받쳐 올렸다가
다시 통째로 내려놓는 절
성한 데 없는 늙은 뼈가 웅웅
또 저만 빼고, 일문의 안녕을 엎드려 비는데
나는 그만 절을 피해
배롱나무 그늘로 들어간다
늙은 나무가 가득히 피워놓은 붉은 꽃들
또한 절하는 자세여서,
절 안에서 내다보면
그늘 밖에는 햇볕에 타는 어지러운 한세상이
꽃잎에 싸여 엎드린 아름다운 몸이, 있다
결정적인 일은 다 절 가지고는 안 되었는데
몸은 아직 결정적인 일이 남아 있다는 거다
몸은 무너졌다가는 다시 일어나고
무너졌는데도 결코 무너지는 법이 없다
아, 꽃잎은 그런 당신을 끝없이 적신다
어머니 뼈는 저 자세에서 가장 단단하고 구멍 없다
저 자세는 몸만큼이나 오래된 것이다
수없이 많은 절 이미 받고
이 몸 헤롱헤롱 두 발로 잘 걸어왔으니,
결정적인 것들을 잠시 미결로 두라 하고
한번 시들면 다시 못 볼 것 같은 꽃그늘 아래서
나는 당신 몸에 오래 절하고 싶다
- 그늘과 사귀다. 랜덤하우스, 2007
병산서원 복례문 배롱나무 [안상학]
남들 꽃 피울 때 홀로 푸를 일 아니다
푸름을 배워 나날이 새로워지면
안으로 차오르는 사랑
꽃처럼 마음 내며 살 일이다
벌 나비 오갈 때 간혹 쉴 자리 내주고
목 축일 이슬 한 방울 건넬 일이다
남들 꽃 피울 때 함께 피어
사만 팔만 시간 벌 나비와 함께 울 일이다
함께 춤 출 일이다
세상 꽃 다 안 피운다 해도
저 홀로라도 꽃 피우며 살 일이다
때가 되면 푸르름을 여미고 꽃으로 돌아갈 일이다
- 그 사람은 돌아오고 나는 거기 없었네, 실천문학사, 2014
근본 없다는 말 [김명기]
마당가 배롱나무 두 그루에 꽃이 한창이다
한 그루는 장날 뿌리째 사다 심었고
한 뼘쯤 더 자란 나무는 가지를 베어 꺾꽂이했다
뿌리째 심은 나무는 사방 고르게 가지를 뻗어 꽃 피우고
베어 심은 것은 뿌리내리며 가지를 뻗느라 멋대로 웃자랐다
그중 제일 먼저 뻗은 가지는 땅을 향해 자란다
죽을 수도 있었는데 죽을 힘 다해 살았겠지
기댈 데가 없다는 건 외롭고 위태롭다
죽을 수가 없어 죽을 힘 다하는 생
뿌리가 얼마나 궁금했으면 아직도 땅을 향해 자라날까
무심코 내뱉는 근본 없다는 말에는 있는 힘 다해 뿌리내리며
허공을 밀어 올리는 수없는 꺾꽂이 같은 삶이 깊숙이 배어 있다
- 돌아갈 곳 없는 사람처럼 서 있었다, 걷는사람, 2021
그 해 여름 배롱꽃을 [오정국]
1
이 마음을 고스란히 수면에 옮겨 놓은
저 붉은 꽃잎을 어찌할 수 없네
떨기떨기 어룽지는 배롱꽃아, 너희는
괜찮니? 몸 아프지 않니?
몸져누울 이부자리 비에 젖지 않았니?
상두꾼 요령 소리
장맛비에 쓸려 갔고
이제는 무덤 하나 깨워서
노래를 짓는 일, 내 몸의 살냄새를 섞어서
치마 한 폭 붉디붉게 물들여 가듯
2
홑이불 같은 저녁 햇살이
수면에 깔릴 때
발끝이 닿지 않는
물 밑 같은 사람 있네
그리 깊지는 않게
야트막하게 미소 짓네
한사코 이쪽을 내다보고 있네
모시적삼 옷고름
어둠 저쪽으로 넘어간 지 오래인데
사진 한 장으로 멈춰 선 사람
저 눈빛 지워지지 않네
되돌아보는 눈빛은 잊히지 않네
3
당신은 올해도 배롱꽃을 보고 가네
허리 굽혀 몸 앉혔던
그해 여름 꽃그늘에 머물렀다 가네
배롱나무 언덕이 환하게 저무네
- 재의 얼굴로 지나가다,민음사, 2021
시체놀이 [김선우]
배롱나무 아래 나무 벤치
내 발 소리 들었는지
딱정벌레 한 마리 죽은 척한다
나도 가만 죽은 척한다 바람 한소끔 지나가자
딱정벌레가 살살 더듬이를 움직인다
눈꺼풀에 덮인 허물을 떼어내듯 어설픈 움직임
어라, 얘 좀 봐. 잠깐 죽은 척했던 게 분명한데
정말 죽었다가 다시 태어난 것 같다
딱정벌레 앞에서
죽은 척했던 나는 어떡한담?
햇빛이 부서지며 그림자가 일렁인다
아이참, 체면 구기는 일이긴 하지만
나도 새로 태어나는 척한다
햇빛 처음 본 아기처럼 초승달 눈을 만들어 하늘을 본다
바람 한소끔 물 한 종지 햇빛 한 바구니 흙 한 줌 고요 한 서랍.....
아, 문득 누가 날 치고 간다
언젠가 내가 죽는 날, 실은 내가 죽은 척하게 되는 거란 걸!
나의 부음 후 얼마 지나 새로 돋는 올리브 잎새라든지
나팔꽃 오이 넝쿨 물새 알 산새 알 같은 게 껍질을 깰 때
내 옆에 있던 기척들이 소곤댈 거라는 걸
어라, 얘, 새로 태어나는 척하는 것 좀 봐!
- 나의 무한한 혁명에게, 창비, 2012
풍경 [김윤배]
거미 한마리 배롱나무에 거미줄 치고 포획을 시작한지
며칠 되었다 하루는 나비의 미라를 보았다 미라는 몇 겹의
거미줄로 정교하게 감싸져 있었다 미라는 하늘에 매장되었
다 하루는 잠자리의 미라를 보았다 잠자리의 날개가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바람은 잠자리의 날개를 떠나지 않고 있
었다
다음날 나는 살아있는 거미의 미라를 보았다 보이지 않
는 거미줄에 정교하게 감싸여 회색하을 밑을 느리게 가고
있는 무수한 먹구름을 보았다 거미는 스스로를 제물로 바
쳐 거미줄 위에 영원한 무덤을 만들었다 바람은 거미의 미
라에 머물지 않았다
군주가 그의 고향에 묻혔다 함께 순장되고 싶었던 백성
이 수십만명이었다 들끓던 세상이 조용해지고 묘비명 없는
묘비가 세워졌다 날개를 달 수 없었던 그의 비상은 그 자리
에서 조용히 미라가 되고 있었다 미라를 정교하게 감싸고
있는 것은 소나무숲이 지른 비명이었다
나는 사라지는 것들의 우울을 믿는다
- 바람의 등을 보았다, 창비, 2012
택배 [전영관]
주저하던 것들을 보내기 좋은 날입니다
바람은 태풍의 전초답게 근육이 견고합니다 균열 때문에 뭉게구름 세 겹으로 포장했습니다
여전, 의문을 못 버리는 일이지만
사람과 달리 풍경은 예감대로 변화해도 지루하지 않습니다
집이 비었거든 회화나무 그늘 두 번째 서랍에 넣어달라 했습니다
대문은 적막을 치통처럼 물고 있겠죠 회화나무꽃들이 양철지붕 두드리는 소리로 마당이 흥건해지기 전에 풀어보면 좋겠습니다 풀려난 뭉게구름은 제자리로 돌아가겠죠 속지로 사용한 지스러기들은 지난 겨울의 냉기로 엮은 겁니다
우무인으로 서명을 대신한 송장을 여겨본다면 소용돌이 무늬에 스며 있는 현기증도 수취하리라 안도합니다 바람이 포장지들을 한아름 실어다 놓은 염천을 보며
답신을 기다리느라 막막하면서도 마음 분주해지는 날입니다
배롱나무도 까닭 없이 붉어진 건 아닐 겁니다
- 부르면 제일 먼저 돌아보는, 실천문학사, 2016
개심사 가는 길 [곽효환]
구부러진 나무 기둥이 떠받치는
개심사 범종각 보러 갔다
소나무 왕벚나무 배롱나무 줄지어
허리 굽힌 여윈 겨울 나무들 아래에서
떨쳐낼 수 없는 너를 보낸다
때로는 가파르고 때로는 좁은
호젓한 숲길에 햇살 비껴 들면
그림자가 같은 너를 보내고
그늘 깊은 가슴으로 돌계단을 오를 것이다
장방형 연못 가로지른 나무다리 건너
고졸한 대웅보전 앞을 서성이다
해 질 무렵 범종 소리 울리거든
굽고 휘고 옹이진 못난 것들의
밀어낼 수 없는 단단한 중심에
널 보낸 내 마음 홀로 들 것이다
오늘 밤늦게 빈 몸으로 터덜터덜
해탈문 밖을 나서는 이 보거든
나인 줄 알아라
- 너는, 문학과지성사, 2018
달과 배롱나무 [조용미]
書院서원의 紫薇木자미목은 그믐처럼 붉었다
햇살이 하얗게
하얗게 달구고 있는
그믐의 한낮
자미목 붉은 꽃들 위로
상현에서 하현까지의 달이
까맣게 떠올랐다
혓바닥으로
이지러지고 차오르는 여러 개의 달을
핥아대는
자미목의 뜨거운 꽃들
붉은 꽃들의 자궁에서 피어나
달은
세상을 온통 뜨겁게 물들이고 있었다
- 삼베옷을 입은 자화상, 문학과지성사, 2004
거짓말 [박수서]
분명 사천 짜장을 시켰는데 칠천 원이다
때 지난 점심, 냉장고 벽 위 매미처럼 붙어 있는
찌라시를 바라보며
신중하게 고르고 고른 것인데
맵다 여러 말할 것 없이 그냥 맵다
숯가마에 든 것처럼 땀이 흐르고
안경을 들썩거리고
머리를 벅벅 긁고
배롱나무처럼 온몸이 간질거리고
입을 닭똥집 모양으로 해서 소심하게 후루룩 먹는 것인데
그래도 자꾸만 사천 짜장이 왜 칠천 원인지 궁금한 것인데
사천이 면 값이고 삼천이 매운 값인가
사천이 매운 값이고 삼천이 면 값인가
왜 세상은 거짓말투성이인지 궁금한 것인데
- 해물짬뽕 집, 달아실 시선, 2018
명옥헌 [문인수]
잠자리 겹눈을 가진 헌 집이 있다.
네칸 두줄박이 한복판에 고뇌의 표준 너비,
작은 방 하나를 두었기 때문이다.
고개 들면 탁 트이도록 사방으로 활짝 열어두었기 때문이다.
문틀, 기둥과 기둥 사이가 꽉 짜 안고 있는 여러 허공이
또한 전부 액자다. 다각도로 내다보이는,
다방면으로 수놓여 들어오는 첩첩 바깥이
열매처럼 집약되는 방이 있기 때문이다. 이 눈물 한방울의 고요가
깨끗하게 여무는 헌 집이 있다.
누가, 요동벌판까지 나아가 여기 한바탕 울 만하다 하고
한바탕 속 시원히 목을 놓았다 하는가, 바보다.
하늘이, 뜬구름이, 뒷산 숲이,
배롱나무 무리가, 우와, 배롱나무 꽃 화염이며 풀들이, 허연 소낙비가,
청동 명경만 한 바다, 화엄 아래, 연못에, 맑게 다 몰리는
헌 집이 있다. 우주적으로 꽉 다문 입속에
오래 녹여 먹는 일생일대이자 슬픔,
깊이 들여볼 수 있는 헌 집이 있다.
- 나는 지금 이곳이 아니다, 창비, 2015
배롱나무의 안쪽 [안현미]
마음을 고쳐먹을 요량으로 찾아갔던가, 개심사, 고쳐먹을 마음을 내 눈앞에 가져와보라고 배롱
나무는 일갈했던가, 개심사, 주저앉아버린 마음을 끝끝내 주섬주섬 챙겨서 돌아와야 했던가, 하
여 벌벌벌 떨면서도 돌아와 약탕기를 씻었던가, 위독은 위독일 뿐 죽음은 아니기에 배롱나무 가
지를 달여 삶 쪽으로 기운을 뻗쳤던가, 개심사, 하여 삶은 차도를 보였던가, 바야흐로 만화방창
(萬化方暢)을 지나 천우사화(天雨四花)로 열리고 싶은 마음이여, 개심사, 얼어붙은 강을, 마음을
기어이 부여잡고 안쪽에서부터 부풀어 오르는 만삭의
- 사랑은 어느날 수리된다, 창비, 2014
시 숲에 들다